오래 전 부터 나는 한국 정치의 개혁은 '정당구조 개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정치를 정당의 활동으로 규정하는 협의의 '정당 민주주의'와는 다른 말이다. 최소한 '정당 정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또한 '정당외' 정치- 흔히 참여 또는 직접행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편에서 하는 말이다. 오히려 참여 정치나 직접 행동의 사후적 출구전략이나 조직화 동력으로 정당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 주길 바라는 편이다. 어쨋거나 현실적인 정치제도 하에서 '정당'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다.또한 정당 정치의 경계 바깥에 너무나도 많은 정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런면에서 이원적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정당구조의 내적 개혁과 정당외 정치의 일상화이다. 후자를 나는 '삶의 정치화'라고 말하고 싶다. 설령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정당인이 되거나 정당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게 아닌 상황에서는 '삶의 정치화'와 실천력이 근본적 힘이 되어야 한다. 

 

'정당구조의 개혁'이라는 것은 내게 대통령 누구로 바꾸는 문제보다 더 긴요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내 경우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종적을 감춘 한국의 진보정당이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강력한 원내 교섭단체로 자리잡는 것을 보는게 1차적 바람이었다. 그래서 과거 민주노동당이 선전했을 때 큰 박수를 보냈으며, 약간의 희망을 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심정으로 민노당 분당 과정에서 마지막 통합논의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탈당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다시 '통합진보당'이라는 이름으로 뭉쳤을 때, 떨떠름한 마음이 있긴 했지만 그 변화를 시대적 과제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는 자세로 읽었다. 이유는 여기서도 하나다. 진보정당이 제1야당이 되는 신나는 상황을 보고 싶어서다. 사실 진보정당이 원내 제 1야당이 된다는 그림에는, 현존하는 수구세력들이 모두 프랑스 극우정당처럼 취급받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사회 전체가 현재의 좌표에서 좌클릭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 어느 위치에서, 어느 목표를 가지고 싸우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모든 싸움이 같은 고지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투쟁이 같은 단위에서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소통이 만사라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모든게 해결될 거라는 낙관적 믿음도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나는 어느 정도는 '적대주의' (이건 정치학적 용어지만antagonism 적대라는 말이 가끔 배타적으로,또는 어떤 이에게 '죽창'같은 걸 떠올리게 해서 다른 번역어를 쓰고 싶다.)에 정치적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상투적인 절충어로 '어젠가는 만나겠지'라는 말로 자리를 뜨는 행위가대화를 정리하고 싶은 에티켓적인 용어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잠시 부딪힐 수는 있지만 만나야 할 곳이 다른데 같은 곳에서 만날리는 만무하다.

 

사실 오래 전 부터 많은 이들이 다음번 대선은 '박정희-노무현'의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었다. 장례식 이후 수많은 '작은 노무현'과 그의 추종자들을 볼 때 확신은 명확해졌다. 민주통합당에 속속히 다시 등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봐도 그렇다. 오랜만에 강금실도 보이더군. 제다이의 귀환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의 귀환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애석하지만, 진보정당이 결코 피해 갈 수 없다. MB가 대통령이 당선 되던 날 내가 했던 말은 " 다음 번 대선은 어느 때보다 비판적 지지가 유령이 아니라 실체가 되겠군." 이었다. 그리고 여론은 이제 '비판적지지'라는 도덕론적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방향으로 강제되고 있다. 진보 정당들이 열세에 열세를 거듭하며, 또 여론의 추이를 읽어내는데 숙의를 하며, 진보정당의 구성원들에게 '비판적 지지'라는 인지부조화 상황을 겪지 않게 끔 야당통합 후보론 쪽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최소한 진보통합당은 대선 후보를 내도 당선이 안된다는 것을 아주 오래 전 부터 알고 있었다. 오로지 정당의 명분과 정당의 지속적 정체성 문제가 대선후보를 내는 가장 큰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은 접으시요." 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 폭력적이다. 점잖은 모습을 하고 합리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를 대며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자기의 정치적 경계 안에 복속시키려는 태도다. 어쨋거나 이번 대선에서는 진보통합당이 어떤 길을 갈지는 아직 미확정인 상태지만, 최소한 단일화 흐름을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현재 분위기가 좋다가 느끼는 민주통합당이 "그까잇거 없어도" 라고 버틸 수도 있다. 최소한 민주통합당 내부에 야권단일화파가 강세를 보이곤 있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어쨋거나 대중의 흐름이 '박정희-노무현'으로 틀지워진 상황에서 진보통합당 지도부는 실리를 택하여 당의 앞길을 여는 방향으로 선택을 했다. 쉽게 말해 '줄껀 주고 받을 껀 받자' 라는 것이다. 줄것은 '대권'이다. 그리고 '받을 것'은 원내 의석이다. 이 방향은 내가 앞서 말한 진보정당의 원내 교섭력 강화를 통한 정당 구조 개편과 같은 방향이다. 현실적으로 이 실천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방향성에는 동의 한다. '주는 것'은 당장 할 문제도 아니고, 이리 저리 카드를 돌리고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해주어도 되는 문제다. 당장 '받을 것'의 문제가 있는데,4월 총선이다. 현행 선거구제도를 개편하는 것은 급선무가 된 것이다. 진보정당은 오랫동안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주장해왔다. 지역구로 반정도 뽑고, 나머지는 당에다 투표해서 그 지지율로 비례대표를 뽑는 것이다.그런데 최근에 이에 대한 한나라-민주당의 '석패율제도'가 관심을 받고 있다. 민주당이 이랫다 저랫다 갈팡질팡하면서 통합진보당과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석패율제도는 쉽게 말하면 후보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동시 등록해서 투표결과 당선자와 차이가 가장 근접했던 낙선자를 비례 후보로 구제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과 시민단체들은 강경반대 분위기다. 민주통합당 내에서는 '조건부 찬성론'등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를 따로 정리할 생각은 없다. 궁금하면 찾아보면 될 것이니까...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정치적 관심이 높기로 유명한 알라딘에서도 석패율제도란 것에 대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미안한 말이긴 한데, 10개의 정치적 글들 중에 2-3개 정도 빼고 나면 지루한 동어반복에 자기 분노의 배설이다. 내가 가장 읽지 않는 글이지만, 알라딘에서는 가장 추천을 많이 받는 글이다.(안심해도 괜찮다. 당신은 2-3개의 글을 쓴 사람이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정치적 논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도, 시간 되면 물러갈 반MB에 목청 돋구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개 이런 부류는 이런 흐름을 따른다. '친노->놈현새끼->영원한 우리의 대통령 노무현'  노란 노제에 눈물을 떨구고, 일종의 대속이 이루어진 다음부터 '노무현을 넘는다'는 문제는 급격히 어젠더에서 멀어졌다. 김어준은 그의 책에서 당당히 문재인을 지지하면서-나도 공무원 문재인을 좋아한다만, 자연인으로서 그를 좋아할 지는 의문이다. 그는 경상도 특유의 딱딱함이 있다. 최소한 자연인으로서는 노무현같이 비권위적인 사람이 친근하고 좋다- 노무현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바람이자 지지자의 바람일 뿐이다. 과연 문재인이 노무현을 넘을 수 있을까는 아무러 가치증명도 되지 않았다. 그의 원칙에 대한 딱딱함이 권력의 원심력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만, 노무현의 반복이 될 가능성 역시 크다. 그래도 만족할 지도 모른다. MB에 시달린 사람들은 이제 꿈도 작아져, 노무현의 반복이 어디냐고 말한다. 한미FTA를 반대할 때 내가 우석훈의 책리뷰의 제목으로 쓴 것이 'YA BASTA'였다. 부산말로 하면"제발 쫌"이다. 당시 나는 노무현 대통령님께 송구스럽게도(?) 그 말을 했고-아,그의 진정성을 아직도 모르는 나, 그리고 진정성이 공인인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악마의 후예인가 보다-아직도 그 말을 할 수 있으며, 날릴 곳도 있는 셈이다. MB가 이 시대에 가져다준 가장 나쁜 현상이 나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당신 수준 만 아니라면...' 이라는 것 말이다. 여기에 보수나 진보가 다 같은 이를 꼽고 있다. 다앙한 이상과 정치적 실천은 캠퍼스 안으로, 몇 몇 공동체 속에서나 이루어지고 있다. 도대체 'MB와 노무현'을 제외하고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정치적 이상과 희망의 개념들은 지금 어느 구천을 떠돌고 있을까?   

 

아...요즘 관심은 '석폐율제'와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아니라요? 맞다.맞다. 요즘 이슈는 '석궁'이다. 이래 저래 관련기사들을 보고 있는데 "제발 쫌"이라고 내뱉고 싶은 사람은 미안하게도 입빨 '진중권'이 아니다. 진중권은 괜히 안해도 되는 말을 해서 구설에 오르는데, 그건 그의 성품이기 때문에 며느리도 못 말릴꺼다.  정말 웃기는 건 '진중권'이 아니라 '석궁'에 꼽혀서 '정의의 사도'가 되신 분들이다. 뭐 하나 터지면 갑자기 '정의의 십자군 투사'로 돌변하는 이들이 정말 싫다. 조금 더 열린 가능성 또는 의문과 의심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사안을 대해도 되는데, 하나 꼽히면 거기서 끝장이다.'석궁교수=법원비판" 이므로 진보적이다. 이런 프레임에 문제를 제기한다거나, 또는 하나씩 따져보자거나, 이렇게 진행되면 이건 완전히 ' 상식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이 제대로냐? 그걸 옹호하는거냐? 너는 좌파 변절자야' 라는 식의 흑백 논리로 문제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진중권이 트위터에서 그의 인격적 약점을 드러내고, 그때문에  격앙된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훅같다 훅온다. 가상적인 상황인데, 만약  K 교수가  여자 조교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하면...앞의 지지 논리따위는 다 없어지고...이 개쉬가 된다. 명백히 앞의 사건과 뒤의 사안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인데도 훅 가고 훅 온다.  극단적 가상인데 늘 사안을 대하는 태도가 이런 식이라는 걸,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안을 대하는 태도에 아주 신물이 난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 한 이야기다. 오해 없으시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여간 저작권법 알아보는 셈 치고 페이퍼를 다 비공개로 돌렸다. 된장님 이야기 들어 보니까 그래봐야 걸면 걸린다고 소용없단다.오히려 '공정이용'을 주장하는게 낫단다.맞는 말이다. 그러나 '공정이용'을 주장해도 걸면 걸리고, 번잡한 과정을 수습해야한다.사람들은 이게 싫은 거다.  재판부가 그렇게 팍팍하게 개인의 사용까지 압박할 것 같지 않다는 믿음 같은 것도 있겠지만. 일단 귀찮은 과정을 거치고 싶지 않은게 1순위다.

 

그닥 글을 많이 쓰지 않았지만 대략 6개월 동안 쓴 페이퍼를 살펴봤더니....5-6개 중 한 개 정도가 언론사 사진이나 기사 전제가 있었다. 주로 김진숙 씨 보도 내용이 몇 개 있었고, 시위 사진 몇 장이 있었다. 그리고 주로 유투브에서 가져온 음악들이다. (저작권으로 보자면, 유투브는 완전 폐쇄되어야 하는 사이트 아닌가? )

.......끝./

 

이하...앞선 분량의 2배에 가까운 저작권과 관련된 기업의 고지 의무와 가이드라인 등에 대해, 그리고 그걸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썻다.

 

그런데 지웠다.

 

이런 십장생 같은 상황. 이 공간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는 걸 다시 느끼며, 묘한 분노가 인다.

도대체 알라딘에 어떤 종류의 글을 쓸 때 드는  목구멍에 걸리는 가래침 같은 느낌은 뭐란 말인가? 

 

오늘 아침에 뭔가 개나리 같은 상황에 한 소리하려고 아름다운 시 한편을 썼다가 지웠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거였다.

 

밤길을 걷다 

뉴튼의 사과라고 착각한

벽돌이

그대 머리위에 

댕하는 소리를

남긴다면

면상보고

십원짜리 두 개 던져주고 싶은

내 마음이

다녀간지 알아라. 

 

거기에 친절하게 주까지 붙였는데...정확한 문장은 다르지만....마지막 구절은 정호승 시인의 <풍경달다.>의 패러디이며, 이 패러디가 저작권에 걸린다면, 변호사에게 전화하시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내가 나꼼수 애들처럼 욕질 내공이 있음에도, 궁정 사회에 적응하며 또 윤리적인 이유로, 가급적 그렇게 안하고 살아서다. 최소한 알라딘이라는 공간에서는 더욱 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밤,이제 우리나라이로 7살이 된 예찬이가 잠자리에서 던진 질문이다.

예찬: "아빠, 세상에서 제일 큰 건 뭐야?"
나: "음,,,그건 우주."

 


예찬: "아빠..그럼 우주 바깥에는 뭐가 있어."
나: "어? 그건....와우.그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른 매우 중요한 이야기야. 유한 우주,무한 우주 뭐 그렇게 말하는데...빅뱅 이전 뭐 그런 이야기도 하는데. 하여간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우주가 가장 크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우주 밖에 아무것도 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도 이야기하지. 아직 잘 몰라. 예찬이는 어때?"
예찬: "음 그거야 당연히, 다른 빈 공간이 있지. 그래야 우주가 그 안에 있게 되잖아.그것도 몰라"
나: "그럴지도 모르지. 점점 알게 될거야."

예찬: "근데 아빠. 할아버지는 아빠의 아빠잖아?"
나: "그렇지"
예찬: "근데 그 할아버지의 아빠도 있을 거 잖아?"
나: "그렇지"
예찬: "그리고 그 아빠의 아빠도 있고 또 또 아빠도 있고...그럼 맨 마지막에 있는 건 누구야?"
나: "우하하하....야 예찬아...너 오늘 매우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질문을 하는구나. 일단 한번 안아주자,아들 ㅎㅎㅎ"

칸트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고민한다. 신을 설정할 수 밖에 없었던 대륙 합리론과 환경의 사물인 영국 경험론을 통합한다. 그가 각각의 딜레마를 해결하면서 만들어 낸 인식론이 <순수이성비판>이다. 그는 내용/형식을 이원화 시키면서, 경험상의 실재론-이건 버클리류의 주관적 관념론과 분명다르다-과 관념상의 초월론을 상정한다. 칸트의 인식방법은 인식의 출발을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 놓은 주체 중심주의이다.(하지만 그도 신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한다.)그는 신에 기대지 않으며 주체 내에 존재하는 선험성을 강조한다. 예찬이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칸트를 생각했다. 그리고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언급했던 선사시대 밤하늘을 바라보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인지 네안데르탈인인지를 생각했다. 누워서 지금보다 수 백배나 맑았을 검은 심연의 너머를 바라보며 뭘 생각했을까? 처음에는 그날의 행동들을 반복했을 것이며 잡아야할 동물들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밤은 길고 세대는 반복 지속된다. 그 중 어느 선조는 밤 하늘의 어둠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며, 내 엄마의 엄마는 누구고 그 엄마의 엄마는 누구일까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졌고, 좀 더 큰 청소년기에도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어른이 된 우리는 이런 질문이 너무 어렵다거나, 너무 비실제적이라거나, 답을 알 수 없다거나, 돈이 안된다거너, 머리만 아프다거나, 내 알 바 아니라는 이유로 꺼내보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TV 리모컨을 든다.

 


예찬이가 던진 질문은 사실 형이상학이 계속 던져대던 질문이며, 우주론이나 진화생물학이 여전히 물고 있는 과제이다. 나는 아이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런 거대한 질문을 하는 걸 보면서, 이런 종류의 호기심이 정말 본원적 능력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인류는 아직 그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인류는 그걸 찾아가면서 발전해왔으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그 질문을 놓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출근 전에 예찬에게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에 나오는 몇 가지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편의적 도식화를 위한 그림임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본 영화<어나더 얼스>중 한 장면이다. 저예산 SF영화인데 선대스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국내 개봉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지구(편의상 지구 A) 에 어느 날 '또 다른 지구'(지구B)가 나타난다. 멀리 달 처럼 보이는게 바로 지구B이다. 발견된 놀라운 사실은, 이 곳에는 지구A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똑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평행우주다. 쉽게 말하자면, 지구B에는 지구A에 사는 드팀전과 같은 형상의 같은 경험을 가진 인물인 그대로 있는 것이고 지금 이순간 똑같이 알라딘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MIT에 합격을 앞둔 18살의 전도유망한 여학생. 그리고 파티가 있던 그 날 밤, 인생 자체를 바꾸어 버리게 될 사건을 만난다. 지구B가 하늘에 빛나고 있다. 2년의 시간이 지나고 인류는 지구B에 가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나는 또 다른 나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 둘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그 곳에서의 시간은 이 곳과 같이 흐르고 있을까? 만약 어떤 계기로 인해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면 지금 이 곳도 그 곳과 같은 경험을 겪게 되는 것일까? 시간과 우주는 일관된 하나의 현상일까? 아니면 매 결단과 사건마다 다른 우주와 다른 시간의 궤를 통과하게 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벽에 일어나서 아내의 강의 동영상 편집 해주고 나니-편집계의 빠른 손ㅎㅎ- 날이 훤해진다. 그래도 아내의 감사는 짧고 시키는 집안일의 목록은 길다. /ㅠ / 기침이 콜록 콜록 나고 어깨도 약간 욱씬한 것이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지난 달에 폐렴으로-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하곤 보기드물다던, 그 폐렴- 사흘간 입원하고 -잘 쉬었다- 이제 한달 정도 지났는데 또 살짝 감기 기운이 있는 셈이다. 일단 아픈 것도 겁나지만 쪽팔린게 더 겁난다. 이거 뭐 허우대만 멀쩡 했지 저질 체력과 약골로 볼꺼 아닌가? 운동부족인 건 확실하다. 마흔 넘으면서 건강상 노란 깜박이등이 가끔 점멸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아직 건강한데 작은 감기 하나로 병자 이미지만 커져버리게 생겼다.

 

추워서 그런가. 힘차고 따뜻한게 그립네.

 

빈 필하모닉은 신년음악회가 유명하지만 여름 철에는 쇤부른 궁에서 이런 것도 한다. 여름밤 아이들과 이런 곳에 한번 가보면 좋을텐데...

 

<여기 원래 유투브 동영상 있었는데...지웠다. 물론 링크연결방식도 있을것이다만...그거 어느세월에 다 수정하랴....지우는게 더 빠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전에 본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중 밑줄 쳐진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신호들을 읽지 못하는 한 그 잘난 <자본>을 읽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을 옮기다 보니 이 말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지지해 주는 흐뭇한 의미로 받아들이는,아전인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현재 정치적 어젠더는 선거에 집중되어 있다. 2012년이 선거의 계절이다. 지난 글로벌 호구 정권의 파행이 불러온 퇴행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선거를 통한 변화열망이 무엇보다 높다는 것도 사실이다. 최소한 제도적 정치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투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의 폭과 깊이를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은 중요한 진보적 과제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거리의 신호'를 읽는데 진보는 좀 더 예민해야 하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이 만든 프레임에 갖혀서도 결코 안되지만 개혁적 진보라고 프레임도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되새겨야 한다. '거리의 신호' 역시 거리를 두고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꼼수'현상을 긍정한다. 또한 그들이 칭송받는 것 만큼 탄압에도 노출되어 있다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비판은 현재적이어야 현재적 실천성을 갖는다. '그 땐 그런 면도 있었지'는 안타깝게도 회고적 성찰일 뿐 현재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삶의 충만성을 이루려면 무리에 이끌가면서도, 따라가면서도, 이 생각을 놓치 않아야 한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비판적 독서가이길 원했다. 따로 제대로된 학문을 못한 탓이다. '오빠' 이외에 모든 종류의 '-빠'에도 거리를 두었다. 지금도 그렇다.  '열공하는 좌파'도 못되고,'나는 좌파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지도 못하며, 그저 '좌안파'가 되어 왼쪽 강둑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다. 과거 같으면 이런 태도를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분파주의'라고 비판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애석하게도 이런 비판보다는 오히려 '그게 당연한거 아니야?' 그게 좋은거야' 라고 품어주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매우 고마운 일이고 힘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솔직히 뭔가 석연치 않다. 빗방울 같은 다원주의는 개인주의화,또는 개인의 원자화라는 경로를 통해 결국 단절을 강화한다. 마치 많은 것을 나누는 듯 하고 인정하는 듯 하지만 결코 자기를 파괴하거나 자기를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를 핍진 시키지도 않는다. 방대한 열림이 사실은 방대한 세계와의 단절이며 혁혁한 자기보호의 굴레라는 역설적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얄팍한 지식으로 말해본다면 이 공간은 여러 측면에서 '진화적 안정' 상태이다. 그리하여,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위로의 감성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정치적 이유로 사리진 사람도 있고, 흔한 말로 재미없어서 사라져 버린 사람도 있다. 인식을 뒤틀어 버리는 다크 커피같은 질문은 제공되지 않으며, 에스프레소의 거품 위로 진보라는 한 두 스푼의 설탕이 입맛을 돋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과거 소규모 마을 같은 알라딘은 이제 사라졌다. 별로 아쉽진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가는 것이다.   

 

한 해도 지났는데 몇 몇 분께 안부를 건내려 했다. 다들 여기 저기 가버려서 찾기도 쉽지 않다. 바람구두나 파란여우님도 사이트 들어가서 다시 경향 사이트로 찾아 들어가야 한다. 내가 매우 좋아했던 메아쿨파님은 아예 사라졌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려서 인사조차 남기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멀리서 인사를 건넨다. 오래 전 친구들이나 또 나를 지켜봐준 분들께 말이다. (별 상관 없겠지만, 글로 세계와 인간을 배운 듣보잡은 제외다. 올해는 꼭 마당 쓸어라.거기가 로두스다.)

 

 "모두들 건강하시구요. 지금까지 그러셨던 것 처럼, 담담하게, 의연하게,뚜벅 뚜벅 임진년 한 해를 보내세요. 소리없이 오래 가야 하는 것이 배터리만은 아닙니다."

 

 

  민들레 뿌리 (도종환)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때가 되면 햇살 가득 넘치고 빗물 넉넉해
꽃 피고 열매 맺는 일 순탄하기만 한 삶도 많지만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치 않아
어느해엔 늦도록 추위가 물러가지 않거나
가뭄이 깊어 튼실한 꽃은 커녕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다
눈치빠른 이들은 들판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들도 삶의 반경 절반으로 줄이며
떨어져나가는 제 살과 이파리들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겉보기엔 많이 빈약해지고 초췌하여 지쳐 있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곁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 곧게 아래로 내린다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깊어져간다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