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빛낸 10인의 피아니스트

1.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4∼1989)

20세기의 대지휘자들은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특징지어질 수 있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어떨까. 섬세, 예민, 선병질적, 신경질적, 신경과민, 까다로움, 변덕, 자존심, 만, 고집불통 등의 단어들이 유난히 쉽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보여준 특성들과 거의 고스란히 일치한다. 쇼팽과 리스트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로비츠를 보라! 마치 느긋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인 듯 보이는 말년의 사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이해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까다로웠다!

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연주가’라는 명제를 뒤집었다. ‘지휘자들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안되지?’라는 그의 순간적인 의문은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를 만들어냈다. 전속 요리사와 정수기도 연주회에 꼭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그 ‘까다로움’에 항상 감사해야 했다. 완벽한 테크닉과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주관에 입각해 빚어낸 호로비츠의 개성적인 피아니즘 역시 보통의 예민함과 보통의 감수성으로는 빚어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에프에서 탄생할 당시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고로비츠였다. 아버지는 기술자였고, 어머니와 누이는 피아니스트였으며 동생은 바이올린을 했다. 피아노도 처음에는 어머니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였던 또 하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서 배운 것이야말로 호로비츠를 러시아 피아니즘 전통의 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시작이었다.

18세의 나이에 가진 데뷔 연주회의 성공으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1925년, 21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가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28년, 뉴욕 필과 역시 차이코프스키 1번을 협연하며 이루어낸 카네기홀 데뷔 또한 그에게 성공을 안겼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성공만 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33년,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과의 베토벤 시리즈는 성공과 함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를 그의 품에 안겼다. ‘토스카니니의 사위’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36년, 불과 32세의 나이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1939년 무대에 복귀한 그는 20년이 채 흐르기 전인 53년, 다시 은퇴한다. 왜 이렇게 자주 은퇴와 복귀를 거듭한 것일까. 역시 그의 까다로운 성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1965년, 지금은 ‘역사적 귀환’이라 기억되는 연주회를 카네기 홀에서 열었다. 이후 그가 남긴 역사적 연주회는 78년 백악관에서의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 86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61년 만의 귀향 연주회’ 87년 베를린에서의 ‘최후의 연주회’ 등이다. 89년 심장발작으로 사망,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무덤 옆에 묻혔다.

15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음반을 남긴 호로비츠. 그중에서 ‘이것이 그의 명반이다’라고 꼬집어 내기 무척 힘들다. RCA 레이블의 호로비츠 전집은 그의 예술혼을 엿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역사적 귀환’ 실황녹음(소니), 최만년의 도이치 그라모폰의 소품 위주의 녹음 등도 새겨들을 만한 음반들이다.


2.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

리히테르의 연주에서도 간혹 섬세함과 신경질적인 면이 내비치기는 한다. 만년에 이르러 그의 연주가 느려지고 무뎌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면의 사유에 충실해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를 들어 까다롭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완벽한 기교와 강력한 연주력이 언뜻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작곡가와 청중들 사이의 영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음악의 구도자 같은 이미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굴드는 ‘리스트’ 타입과 ‘리히테르’ 타입의 두 부류로 연주가를 분류한 적이 있다. 단순히 말해 이는 악마적인 기교파냐 진중한 사유파냐, 또는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하는 분류였다. 다시 말해 리히테르는 중용과 절제를 통해 음악의 본질을 꿰뚫는 연주를 들려준 모범적인 연주가의 전형이라는 얘기다.

역시 리스트가 시작한 ‘암보로 연주하기’의 관행에 대해 철저히 반대했던 이가 리히테르였다. 그래서 그의 연주회에는 피아노 악보대에 항상 악보가 놓여 있었고, 그의 옆자리에는 그것을 넘기는 보조자가 있었다. 그리고 청중들이 연주가의 모습에 현혹되어 음악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대 위의 조명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피아노 바로 위에 작은 조명을 켜놓고 연주하던 리히테르였다. 이도 또한 리스트가 시작한 ‘왕자 연주가’의 전통을 거부한 것이었다. 최근의 많은 연주가들은 그의 이러한 합리적인 태도에 대해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가 겪은 가족사의 질곡도 만만찮다. 그 질곡은 그의 아버지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빈 음악원에서 공부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결투로써 법을 어기고 도망자의 몸으로 우크라이나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제자였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리히테르를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계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피살당한다. 리히테르가 불과 26세 되던 1941년의 일이었다. 리히테르는 이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연락도 끊겼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당국은 리히테르에게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망명했던 것이고,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어머니가 그에게 연락해 이들은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다. 리히테르가 철의 장막 밖으로 나온 1960년에야 20여년 만의 모자상봉이 이루어졌고, 3년 뒤 그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리히테르를 ‘대기만성형’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22세의 나이에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린시절의 그의 천재성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래도록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위대한 스승이 그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유달리 아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이가우스는 프로코피예프에게 리히테르를 소개했고, 리히테르는 1940년, 25세의 나이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6번을 초연했다. 이 어려운 소나타의 초연을 선뜻 맡긴 것은 리히테르가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가 늦게 시작했다는 시각은 첫째 서너 살만 되면 피아노 앞에 앉히는 20세기의 잘못된 음악교육관행 때문에, 둘째 그가 40이 넘도록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채 숨은 공력을 쌓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순간부터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듯한 파장을 퍼뜨린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말년에 필립스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리히테르 에디션과 최근 BMG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멜로디아의 리히테르 에디션(12CD) 등이 그의 연주예술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한다.


3.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

'그의 경이적인 신통력에 감탄하고, 시(詩)를 사는 생활인임을 실감했다.’ 루빈슈타인의 1966년의 내한 연주에 대해 이강숙이 남겼던 감탄어린 평이다. 당시 루빈슈타인은 79세였다(그의 생년이 1886년이라는 설과 1889년이라는 설, 그리고 1890년이라는 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1887년이라는 가장 유력한 설을 기준으로 잡았다). 어쨌든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9년에야 비로소 그는 연주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90세를 넘기며 장수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그를 흔히 ‘마지막 낭만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80세가 넘어서의 귀족같이 여유로운 생활에서 낭만주의의 이미지를 끌어내서는 안될 것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역시 쇼팽의 이미지로서 기억된다. 하지만 그가 지녔던 딜레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아주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20세기 초의 신동 연주가였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템포나 화려한 기교를 내세운 그는 미소년적인 수려한 용모와 세련된 무대매너로서 더욱 열광적인 청중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의 환호와 찬사가 이어졌지만 비평가들은 냉담했다. 그는 사실 불성실하게도 너무나 많은 음을 빠뜨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청중들은 겉치레만 잘하면 속아넘어갔다. 이것은 루빈슈타인 자신도 느끼는 딜레마였다.

‘불완전한 쇼팽, 불완전한 리스트’로서의 딜레마.

20대까지 이런 연주를 계속하던 그는 30대를 넘기면서 기교를 갈고 닦는 데 전념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그의 연주생활의 중기로 분류되는 1937년, 그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서이다. 이로부터 절정기를 구가하는 그는 1957년, 70세에 이를 때까지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를 중기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정한 대기만성형의 연주가는 루빈슈타인인 셈이다.

70세가 넘어서 그의 연주는 화려한 기교에 더 이상 집착할 수 없었다. 다시 낭만주의를 회상하게 된 그의 연주에서는 기름기가 빠졌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몽롱하고 환상적인 낭만주의 시대의 마법과 시정으로 돌아가 섬세한 감정의 진동을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노쇄해 표현력이 감퇴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청중들은 그가 전달하는 이미지만으로도 그러한 것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연주는 주로 RCA 레이블의 음반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역시 쇼팽이 레퍼토리의 중심을 이룬다.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그리고 라인스도르프가 지휘한 차이코프스키와 그리그의 협주곡 등도 유명한 음반.


4. 빌헬름 박하우스(1884∼1969)

박하우스가 ‘건반 위의 사자’로 통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하지만 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박하우스의 모습은 주로 만년의 높은 정신성을 담은 구축적이고 균형잡힌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라! ‘독일산 사자’라는 별명은 그의 젊은 시절을 두고 일컫기에 알맞다. 외모도 외모려니와 그는 젊은 시절, 독일 피아니스트로는 드물게 화려한 기교와 강렬한 힘으로 각광을 받았다.

19세기 이후 피아노의 비르투오소는 동유럽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독일 작곡가들이 현란한 기교의 과시보다는 음악의 구축미를 중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기교파 박하우스의 등장은 20세기 초의 독일에서는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라이프치히에서 정통 독일계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그는 7세 때인 1891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대 중반의 이른 나이로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899년부터 당시 큰 스케일과 구축력으로 유명했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오이겐 달베르트를 사사하게 되었다. 그에게서 베토벤에 대한 해석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훗날 ‘기교파 박하우스’가 아닌 ‘예술가 박하우스’로 완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0년 16세의 나이로 런던에 데뷔했고, 이듬해 아르투르 니키쉬 지휘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20세기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피아노를 포효하게 하는 연주를 선보이며 유럽 각지를 누볐다. 그는 만년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이후에는 녹음에 집착해 데카 레이블에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이는 독일음악 팬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남긴 음반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의 녹음일 것이다.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연주로 50년대에 녹음된 이 전집 중에는 역시 1959년 녹음된 5번 ‘황제’가 가장 유명하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1950년대 초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9년까지 녹음된 것이다.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위대한 명반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5. 에밀 길렐스(1916∼1985)

네이가우스 문하의 두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 길렐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은 역시 그 스승의 영광이기도 하면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영광이기도 할 것이다.

길렐스는 리히테르보다 한 해 늦게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발군의 기량을 선보여 17세 때인 1933년, 전 소비에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때까지 길렐스는 천부적인 재능과 손가락의 힘과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철저한 훈련이 합일점을 이루어 탄생한 사회주의 예능 교육의 성공작으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만일 거기에 머물렀으면 연주기계로 전락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네이가우스를 만났다. 1935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그에게 배우게 된 것이다. 게다가 구소련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강철 같은 타건과 테크닉을 지닌 청년 피아니스트의 자격으로 서방세계의 콩쿠르에도 나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구도의 형성으로 ‘철의 장막’이 쳐진 이후에도 한동안 유일하게 서방을 오가며 연주를 할 수 있는 구소련의 연주가였다.

1954년의 파리공연과 55년의 미국 데뷔 공연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길렐스에 이름에는 ‘강철 터치’라는 상표가 따라붙게 되었다. 하지만 길렐스의 예술성을 설명하는 데 이런 상표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었다. 과연 길렐스가 가진 것이 육중한 체구와 두터운 손, 막강한 손가락 힘에서 뿜어나오는 폭발과도 같은 터치와 오케스트라마저 압도해 버릴 듯한 소리의 중량감뿐일 것인가.

오히려 길렐스는 섬세한 신경과 따뜻한 인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블루멘펠트의 조카이자 고도프스키의 제자였던 스승 네이가우스의 영향으로 고전적인 정신의 계승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따라서 그의 연주에서는 정연한 질서와 견고하게 쌓아올리는 구축력이 두드러졌고, 따라서 그가 모차르트와 스카를라티를 연주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70년대에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DG)과 80년대 들어 죽음 직전까지 녹음한 베토벤의 소나타들(DG)은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한편 최근에 BMG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멜로디아 레이블의 ‘길렐스 에디션’은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개하고 있어서 좀더 다양한 측면에서 길렐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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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6년전 98년 월간 객석에 실린 기사입니다.지금이랑 조금변화는 있겠으나  큰 틀은 비슷하겠지요.^^  

 

윌간 ‘객석’은 창간 14주년을 맞이해 음악사상 ‘연주가의 세기’였던 20세기를 정리하는 연재 특집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호의 ‘10인의 지휘자’에 이어 이번 호에는 ‘10인의 피아니스트’를 선정해 발표한다. 이 기사에 소개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10인’은 지난 호와는 조금 다른 구성의 선정위원단에 의해 선정되었다. ‘피아니스트’라는 점이 고려되어 우리나라의 원로와 중견, 그리고 신예급의 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과 함께 역시 원로급과 중견급, 그리고 신예를 망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선정위원에 참여했다.

선정위원은 김주영, 유윤종, 유형종, 강충모, 이영록, 김범수, 최갑주, 박승민, 김길영, 박은희, 임화섭, 이성일, 김상현, 우광혁, 송영택, 류태형, 김방현, 이재준,신민자, 이혜경, 김용배, 김영호, 김대진, 이순열, 선병철, 박제성, 박성수, 서동진, 김정순, 윤정열, 신수정(응답순서) 등 모두 31명이었다.

역시 복수 투표와 점수제 투표를 혼합한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 고득점 순으로 1위부터 30위까지가 1.호로비츠 2.리히테르 3.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4.박하우스 5.길렐스 6.브렌델 7.미켈란젤리 8. 폴리니 9.아르헤리치 10.굴드 11.켐프 12.슈나벨 13.코르토 14.하스킬 15.리파티 16.기제킹 17.아슈케나지 18.페라이어 19.아라우 20. 라흐마니노프 21.루돌프 제르킨 22.피셔 23.프랑수아 24.쉬프 25. 체르카스키 26.루프 27.백건우 28.무어 29.베르만 30.나트, 데 라로차 (동률)의 순으로 나타났다. 간발의 차로 여기에 들지 못한 피아니스트는 굴다, 솔로몬, 크라우스, 바렌보임, 코바체비치 등이다.

결과를 살펴보면 최근 10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호로비츠, 리히테르, 미켈란젤리, 켐프, 아라우, 제르킨, 체르카스키 등이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 특징적이다. 지난 호의 ‘지휘자’의 선정결과와 가장 큰 차이점은 현존하는 피아니스트들 중에 브렌델, 폴리니, 아르헤리치 등 3명이 ‘10인’ 안에 들었고, 여성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아르헤리치, 하스킬, 데 라로차, 릴리 크라우스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켐프, 슈나벨, 코르토, 하스킬 등은 아쉽게도 아주 근소한 차로 ‘10인’ 안에 들지 못했다. 그밖에 선정과정에서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각각의 피아니스트를 소개하는 본문기사에 소개한다.

참고로 ‘객석’ 1989년 6월호에 소개된 특집기사(pp.75∼81) ‘한국 피아니스트 100인이 선정한 현존 명피아니스트 10인’에서의 순위는 1. 폴리니 2.호로비츠 3.아슈케나지 4.브렌델 5.아라우 6.데 라로차 7. 페라이어 8.아르헤리치 9.켐프 10.침머만 11.부닌, 미켈란젤리 13. 리히테르, 헤블러 15.루돌프 제르킨 16.백건우 17.바두라 스코다, 베르만 18.루프의 순서였다. 물론 각각 ‘현존’과 ‘20세기 총망라’로서 두 기사의 선정 기준이 다르긴 해도, 지난 9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들이 상당수 되고, 또 언급되는 피아니스트들도 순위 차이만 있을 뿐 상당 부분 겹치고 있어 당시와 지금의 선호도의 변화를 살핀다는 의미로서 두 기사를 비교해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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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9-2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하! 너무 아프겠어요. 알고 봤더니 부시 아저씨로군요. 그냥 둬도 괜찮을 것 같군요.^^

하얀마녀 2004-09-2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년만 저렇게 해놓으면 좋겠군요. 흐흐.

드팀전 2004-09-21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 그럼 똥꼬에 피날거 같아요....대선 전략에 큰 차질이 빚어지겠는걸요.^^

마태우스 2004-09-2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그래도 넘 잔인하다는 생각이...

비로그인 2004-10-0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주 마음에 드네요... ^^;;
 

닉네임을 <반성하는 사유>에서 서재 이름인 <드팀전>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괜히 한번 그러고 싶어서이죠.

태어나서 계속 본명만 쓰고 있어서 이름 바꾸기는 어떨까하는 마음에서 바꾸기로 했답니다.

두번째는 저 혼자 글쓰고 놀때는 스스로 다짐하는 마음에 <반성하는 사유>라고 했는데

점점 서재에 글을 남겨주시는 분들도 많고 님들이 줄여쓰기 좋게 좀 이름을 줄여볼까 했습니다.....일단 좀 길잖아요.^^

그리고 왠지 <반성.....> 뭐 어쩌고 하니까 현학적인 것 같구 또 한편으론 계몽적인거 같구...이미지 상으로도 왠지 도서관에서 맨날 고민만하는 것 같은 분위기여서 제 기본 노선과 좀 배치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 진지한 이야기도 농담처럼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이름이 너무 무게감이 넘친다는 자체 판단을 했죠.^^  (전 매사에 진지한 사람 딱 싫어하거든요.일단 지루하고 재미없잖아요.^^ 그렇다고 날리는 것도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

서재 이름 '드팀전'은 옛날에 어떤 님이 '피륙가게'라고 했는데.. 뭐 그런 뜻입니다.

근데 '피륙가게' 보다는 '포목점'이 낫지 않나요. 제가 이 단어를 알았을때는 '포목전'의 우리말로 알고 썻거든요.

어쨋건 약간의 혼란을 감당하며 이름을 바꾸었으니 많이들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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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9-1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 말고 그냥 "반사유"는 어때유? 흐흐.

깍두기 2004-09-10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사유에 반대한다는 말인가요? 아님 반만 사유하라는?^^
자, 그럼 드팀전이 되신 반성하는 사유님 첫인사 드립니다. 진작에 즐찾은 했건만 어려워서 인사는 못했드랬습니다.

바람구두 2004-09-10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다 괘안치 않나요? 흐... 깍두기님!

mannerist 2004-09-10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 좋습니다. 왠지 녹두전, 파전, 등등의 형제뻘같기도 해서요(전이라면 환장하는 매너인지라.... 용서를... 핫핫핫... -_-;;;;;)

조선인 2004-09-1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친정어머니께서 드팀전을 하셨지요. 좋네요. ^^

파란여우 2004-09-10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감자전이 좋은데요..^^
 

어제 알라딘에서 주문한 책이 날아왔다. 집에 갔더니 와이프가 "책 왔어" 하면서 포장을 띁은 책들이 쌓여있는 곳을 가르켰다. 평소에도 책이 날라오면 반가운데 어제는 더했다.한권 한권을 넘겨보며 "어휴 이 귀여운것들...내가 빨리 읽어주마..귀여운것들" 그랬다. 하루에 한두시간이라도 집중해서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잘 안된다.집에와서 밥먹고 운동하러 갔다오면 밤이 깊어진다. 집에 들어와서 책을 펴면 운동하느라 힘을 써서인지 조금 보다 보면 눈이 빨개지며 감기기시작한다. 그래서 이 귀여운 녀석들을 언제 다 넘겨줄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즐겁니다. 

 어제 주문한 칼비노의 나무위의 남작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에 큰 애정을 갖고 있다.번역도 늘 안심이되고 절판되었거나 소개되지않았던 현대소설들을 한권씩 내는 작업에 박수를 보낸다. 남미문학의 톡특성은 늘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 소설 역시 그러리라 믿는다.

 

 

 

   미셀 투르니에의 소설인데 콩쿠르상을 받았던 작품이다.한동안 절판이 되어서 구하기 어려웠는데 ......최근에 출판사를 바꿔서 증보해서 낸 듯 하다.책이 좀 비싸서 조금 그런데 돈값을 한다고 양장본에 종이 질도 좋더군. 슈베르트의 가곡에도 나오는 유럽의 마왕신화를 모티브로 신화와 현실이 변주된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단 미셀 투르니에의 수필을 읽으며 그의 복잡한 문장에 좀 머리가 아팠는데 어느정도 가만하고 읽어야겠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책이다 . 몇년전에 그가쓴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이란 책을 아주 좋게 읽었다. 진보적인 시각에 학술적인 분석이 바탕이 된 우리사회 분석이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와 더불어 기본적으로 믿음감이 가는 책을 내는 교수님이다. 신문에 난 서평을 보니.. 그동안의 우리 민주화운동을 비정상성에 대한 정상성회복의 운동으로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절차적 정상성이 회복된 사회에서 또다른 소수에 대해 눈을 돌리는 것이 정상성에 대한 저항이란 제목이 가진 함의인듯하다.

 

 

 이 책은 내가 평소에 보는 류의 책은 아닌데...알라딘에서 어떤 님이 리뷰쓰신거보고 관심이 갔다. 그림이 무지하게 예쁘더라.

재미있을것 같았다.금방볼수도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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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9-0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니에 책이 다시 다왔군요. 문장이 좀 복잡한가요? 전에 단편을 본적이 있었는데 꽤 괜찮았지요. 암튼 저 <마왕...>책 다시 나왔다니 반갑네요.리뷰 올리실거죠?^^

물만두 2004-09-08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 사셨군요. 무지 좋아요. 전 시리즈 다 샀어요...

하이드 2004-09-1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주문했는데, 언제나 올래나요~ 히히. 그 기분 알지요. 미셸 투르니에 작품과 나무위의 남작 보관함에 담아놓고, 민음사 세계문학 구경하러갑니다.

마녀물고기 2004-09-08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 위의 남작>은 민음사 칼비노 전집으로 갖고 있는데 역자도 그대로,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더군요. <마왕>은 벽호출판사 것이 있는데 증보한 것이라니 함 보고 싶어집니다. 책 받고 즐거워 하시는 모습, 그려지는고만요, 흐.

marine 2004-09-10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 갔다 와서 책 읽으려면 졸립죠? 저도 그래서 책 읽는 시간을 바꿨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 조용한 시간에 독서를 하면 집중이 잘 되요 전 원래 완벽한 저녁형 인간인데 책 볼 욕심에 새벽 4시면 일어납니다 새벽 독서가 생각보다 즐겁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