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아직 못봤는데 보고 싶어진다.보관함에 책은 쌓여가고...

[책읽기 365] 박제가 ‘궁핍한 날의 벗’

입력: 2007년 01월 31일 18:27:13
 
합종연횡의 계절이 왔다.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으로, 오늘의 벗은 내일의 원수로 바뀐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잡는 것이며 12월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변신도 받아들일 태세다. 유권자는 혼란스럽다. 나 외에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한결같음의 위력, 맑은 영혼이 그리울 때는 박제가 산문선집 ‘궁핍한 날의 벗’(태학사)을 든다. 이 책에서 궁핍은 물질적 가난이자 희망 없는 시절에 대한 배고픔이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백동수 등은 종로 백탑(원각사지 10층석탑) 아래 모였다. 시를 짓고 노래하며 춤을 추지만 그들을 위로한 건 시문이나 가무가 아니다. 함께 분노하고 함께 취해가는 벗의 눈망울이 하루하루를 버티게 만드는 힘이다.

그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맹세했다. 초발심을 잊어버리지 않기, 제도의 권위에 눌리지 않기, 관례를 혁파하고 하루하루 새로운 정책들을 주장하기. 정조 등극과 함께 그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이룬 것도 있고 더 큰 절망이 찾아들기도 했지만 백탑파의 삶은 변절이나 배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함께 늙어간 멋진 벗들이 서로의 삶을 살폈기 때문이다.

신문을 가득 채우는 말들의 상찬이 의심스러운가. 국가지도자로 나서려는 그들의 벗을 살펴보라. 궁핍한 시절을 같이 이겨낸 오랜 벗들이 그와 어깨 걸고 있는가. 아니면 지난 시절 풍광은 모조리 사라지고 멋진 오늘과 더 멋진 내일만 홀로 그려내는가. 독불장군이 새 역사를 열어가기는 어렵다. 정조 시절에도 또 21세기에도.

〈김탁환/소설가·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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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아파트 생활이 20년이 넘었다.중간 중간 개인주택도 살았고...700만원 단칸방도 월30만원 장기여관방도 살았다. 그럼에도 중심 거주공간은 아파트라는 생각이 든다.중학교 때 처음 아파트로 이사하고 얼마나 좋았는지...춥지도 않고 따뜻한물 잘나오고 천장에 쥐도 없고(나중에 알았다.아파트 위층에는 사람쥐가 산다는 걸) .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아파트와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화단이 아름다웠던 개인주택을 비교하면서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게 있다는 걸 알았다.결론을 말하자면 아파트에는 '집'이 없다.좀 쉬운표현으로 하면 '아파트는 집이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다.나는 지금도 '집'에 살지 못하며 '집' 을 꿈꾸기만 한다.

어제 TV에서 '살림의 여왕' 이효재 씨의 집을 보았다. 작은 한옥의 아름다운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나는 이효재씨를 만난적이 없지만 친근하게 느꼇다.내가 좋아하는 형님이 그녀의 부군 임동창 선생과 막역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자주갈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 나도 그 모임에 꼽사리 할 수 있었을 텐데....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형에게 전화도 한통했다.

나는 이명박 전 시장처럼 고래등같은 한옥집은 생각도 않는다. 내 생각과 내 손길을 먹은 작은 한옥집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청도 한옥학교에 다녀야 할까.....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기사다.

 

“한국은 이상한 아파트공화국” 佛 줄레조 교수

입력: 2007년 01월 31일 18:26:29
 
“땅은 좁고 사람은 많기 때문이죠.”

“한국에는 아파트가 왜 이렇게 많죠”라는 물음에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대답한다. 보통 한국인이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공리(公理)다. 과연 그럴까.
줄레조교수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도시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무심한 국민이라고 했다. 한강 원효대교 남단에서 바라본 서울 이촌동 지구 아파트 단지. /남호진기자

1993년 한국을 찾은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40·마른 라 발레대 교수)는 ‘아파트의 나라’ 한국에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빈민주택의 통칭인 아파트가 한국에선 어떻게 부의 상징일까. 어떻게 ‘주택이 유행인 나라’가 생겨났을까. 유럽에서 실패한 ‘공동주택’에 대한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이상이 한국에서 실현된 것일까. 그는 서울의 아파트를 연구, 박사논문을 쓴 데 이어 최근의 연구성과를 담아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을 출간했다.

줄레조가 우선 문제삼는 것은 ‘인구밀도와 아파트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념이다.

좁은 땅에 인구밀도가 높은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는 도시 집중화가 대규모 아파트 건설로 이어지지 않았다. 90년대 이후 서울 강북의 아파트 증가는 인구밀도 상승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서울 신공덕동은 오히려 아파트가 들어선 이후 인구밀도가 낮아졌다.

줄레조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더 많은 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라며 “통행로, 소방로를 효율적으로 구상하고, 수도나 전기의 조직망을 개선한 3, 4층 건물로의 재개발은 왜 대안이 될 수 없느냐”고 반문한다.

줄레조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숱한 면박을 들으며 면접조사한 한국인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로 ‘깨끗함’을 든다는 것. 여기서 ‘깨끗함’은 ‘더러움’의 반대가 아니다. ‘오래돼 값어치가 떨어졌다’의 반대말로, ‘최신의’ ‘새롭다’의 의미라는 것을 한참 뒤에 이해했다.

그는 여기서 ‘새 것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를 읽는다. 와우아파트 때만 해도 대다수 시민이 혐오한 아파트가 70년대 갑자기 ‘첨단주택’으로 탈바꿈하고, 신도시·뉴타운에서 보듯 ‘신’ ‘뉴’라는 접두사가 무한 반복됐다. 줄레조는 냉대받던 아파트가 명품으로 자리잡은 이유를 권위주의 산업화 이래 정부, 재벌, 중산층의 ‘3각 특혜동맹’에서 찾는다.

70년대 ‘주택건설 200만호!’ ‘주택건설 180일작전!’ 등 구호를 내건 정부는 훈장 수여와 각종 혜택으로 대기업 건설사의 참여를 독려했고, 중산층을 아파트로 결집시켰다. 대기업은 정부의 든든한 파트너가, 손쉽게 집 장만하고 돈까지 번 중산층은 확실한 표밭이 됐다. 아파트는 상품, 재테크 수단으로 변모했고 한국인들은 “도시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무심한’ 국민”이 됐다. 여기에 부의 분배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택’의 개념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는 ‘아파트의 현대성’에서도 한국인들의 모순된 인식을 읽는다. 한국인들은 ‘현대적’이라고 하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한옥을 트집잡는 이유로 든 신을 신고 벗는 것, 상을 옮기는 일을 여전히 수행한다는 것이다. 현대성 신화는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인 셈이다.

아파트 문화를 성찰한 변변한 연구조차 없는 한국 현실에서 한 이방인의 주도면밀한 관찰은 “미학적 기준에 반하는 도시경관” “지리학에 반하는 도시” 한국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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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2-0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타이틀만 잠깐 봤는데, 그게 책이었군요!..

드팀전 2007-02-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오늘은 로쟈님보다 빨랐습니다.우하핳..이 승리감 3초만 만끽하겠습니다.^^ 아파트나 주거공간과 관련된 인문사회학 책들도 소개해주세요.
 

오늘 아침 재미있는 기사 두 개를 읽었다.

<민노당 창당 7년…약속했던 희망을 왜 못주나>

민주노동당이 30일 창당 7주년을 맞았다. ‘다른 정치’를 약속하며 국회에 진입한 지는 3년이 됐다. 9명의 의원과 7만3000명의 당원을 자랑하는 유일 진보정당이란 자랑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민주화 20년이 가져다 준 소중한 결실의 하나이다.

그러나 민노당이 한국의 진보세력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며 한국사회의 진보적 발전 전망을 제시하고, 진보적 의제를 실천하는 진보정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2004년 총선 직후 21.9%까지 치솟던 당 지지율은 4%대까지 추락했다. 이는 민노당이 떠받들어야 할 수많은 빈민과 서민, 가난한 노동자들이 민노당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결과이다. 왜 그들은 민노당을 자기의 정당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가.

이후는 짧게 정리하자.민노당 지지율 하락의 원인

1.민노총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현재 당원 중 민주노총 조합원이 40%이다.민주노동당=민주노총 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최근 불거진 노동계의 비리사건,폭력사태등 노동계의 문제는 당의 지지로 하락으로 이어졌다.

2.서민당이 서민고통에 무능.부유세,토지공개념 도입 등 공약을 제시했으나 보수정당과 차별화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결국 서민들에게 대안세력으로 인식을 심어주지 못했다.

3.대중과 괴리된 대북 태도 개선이 없다.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북한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민주노동당과 조선노동당이 중첩되면서 국민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이부분은 좀 민주노동당이 이미지정치에 피해자로서 좀 억울한 부분이 있다.하지만 대중의 정치의식이 왜곡되어 있다면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밑그림을 그릴 필요도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문제이다.

또 다른 기사..

<反한나라·非우리당 ‘새 진보’ 결집 시동>
 

진보개혁진영의 ‘제3세력’으로 주목받는 ‘창조한국 미래구상’(미래구상)이 30일 발기인 대회를 열고 12월 대선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미래구상은 시민사회 중심의 대안과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민정치세력화’를 이뤄내겠다고 천명했다. ‘반(反) 한나라당’의 기치를 들고 나섰지만,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민주화세력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되겠다는 목표다

과녁은 ‘한나라당 집권 저지’=‘미래구상’의 목표는 선명하다. 유의미한 시민·사회세력을 형성,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겠다는 것이다. 반 한나라당 전선 결집을 통한 대선 승리가 이들의 1차 목표다. 한나라당 등 보수 성향 대선주자들이 앞서나가고, 뉴라이트가 세(勢)를 넓히는 정치·사회적 ‘보수 회귀’ 흐름에 맞서 진보적 시민사회가 저항선을 치고 나선 셈이다

두 기사를 배치하다보니 <경향신문>이 <창조한국 미래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그런 혐의는 조금 더 두고봐야 할 듯하다.

<창조한국 미래구상>은 일종의 '시민사회 중심의 새로운 민주주의구성론'처럼 보인다.신문 기사에서도 후에 지적하는데 이것이 결국 기존 정치권에 수혈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도 높다.또한 기치로 내걸고 있는 '반한나당 비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의 집권은 막자'는 논리는 이번 대선에 진보를 자처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내걸 간판을 선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결국 '보수회귀'는 막자는 '공포의 정치'가 또 한번 작동한다.열린 우리당 지지자 이탈세력중 한나라당에 넙죽 업드리기에게는 자기양심이 거부하거나 열린우리당은 밉고 민노당은 불편한 열우당 지지자들은 또 이쪽을 기웃거릴 가능성도 있다.개인의 선택이니까 뭐라 할 수 없다.차라리 지지할 정당이 없다면 뭘 고를까 고민하는 시간에 '대의제'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해보고 이번 한번만은는 상징적인 의미로 차라리 '기권'하는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오해를 막기 위해 밝힌다...기권은 정치적 고민의 철학적 결과물이어야한다.별로 생각도 없으면서 마지못해 찍을 바에야 차라리 '투표거부'라는 방식도 정치적 소신의 표현이다.안따깝지만 이 생각의 밑바닥에는 대선에서 '보수야당'의 후보가 당선될것이라는 판단이 깔려있다는 점을 밝힌다.)

<황해문화>에서 김정훈교수는 민주화 세력의 한계에 대해 그들이 '적대적 의존관계'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그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듯이 그의 상대역인 진보세력 역시 그 의존고리에 의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한다.이는 민주노동당에도 그래도 적용할 수 있을 법하다.민주노동당 역시 어느정도 '보수정당'의 반사이익에 의해 이익을 보고 있다는 점을 자성해야만 한다.김정훈 교수는 스웨덴이나 독일의 진보정당,노동자당들의 예를 들어 '정책 대안' '정책 개발'을 위한 씽크 탱크의 중요성을 말한다.결국 급변하는 자본주의 질서와 대중들의 정치사회의식 변화에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반사이익만 얻는 시대는 지났다는 점은 민주노동당의 지지율 하락이 반증하고 있다.

김정훈 교수는 민주화 세대가 대중 교육과 재생산 과정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현재 진보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30,40대들이다.20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공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조선일보가 30,40대 고립론을 펼쳤던 것도 이런 정세파악에 근거한다.즉 20대의 보수와 50,60대의 보수가 만나면 386 좌파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20대의 정치의식에 대해 20대를 떠난지 오래되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그러나 간혹 만나는 또는 간접경험을 통해 얻는 정치의식은 과거 세대에 비해 치열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아니 좀 못되게 이야기하면 '정치의식이 없다' 가 정답이다.경제난과 대규모 청년실업은 젊은이들을 '자기 생존의 경제법칙'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치 무관심에 돌을 던질 수 만은 없다.또 그나마 정치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그 토대가 연약하기 그지 없다.내가 관심이 가는 쪽은 후자이다.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부터 조금 더 자유로왔다.또 청년들의 기본적 저항의식이 내재화되어 있다.이것이 가끔은 정치적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미군 장갑차 사건등에 대한 촛불 시위같은 것들이다.그러나 20대의 정치의식은 성긴 그물같다.꾹꾹 눌러담을 근기가 필요하다.성긴 진보의식은 감상적이며 즉자적 저항일 뿐이다.또한 쉽게 기존 체제의 공격에 포섭당한다.이런 20대는 아주 쉽게 3,40대가 되며 아주 쉽게 자신이 욕하던 기득권이 되어 같은 말을 내뱉는다.

나는 20대의 정치의식 부재가 사실 현장성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내 개인적 편견이다) 일을 하다보면 간혹 똑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사회현상에도 남달리 관심이 많고 또 나름대로 독서량도 있다.생각도 바른 듯 보인다.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진보는 늘 책이고 분석이고 논리적 싸움일 뿐이다.(물론 학자들에게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이론공급을 위해서 이 버려도 될 것들이 필요하다.이런 것들을 많이 아는 것은 또한 의식을 촘촘히 하는 과정이기도 한다.)그러나 이 버려도 될  3가지 외에 다른 것은?.... 다른 것은?

10권의 책보다 한번의 시위 참여가 더 배울 것이 많다는 선배의 꼬드김은 언제나 사실이었다.시위를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사람을 통해 배우고 사람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인 '현장성'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그 과정은 지난하고 실망스럽고 때론 짜증난다.사람들 때문에 정치적 옮바름도 싫어질 때도 있다.그런데 이게 의식을 튼튼하게 만들고 이론의 틈새를 메꾸고 몸을 바르게 하는 것 아닌가 싶다.흔히 말하는 강철을 단단하게 하는 '풀무질'은 그런게 아닌가? 이런 두드리는 과정이 없으면 현재의 진보는 진보도 아니다..아무런 행동도 없으면서-스스로도 돌아보자- '미제' '반자본' '진보'를 '논리'로 두드려봐야 아무 소용없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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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31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침에 저 기사 인터넷으로 보고 황망해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민노당뿐만 아니라 전교조도 마찬가지죠. 열심히들 살아왔지만 전교조 죽이기의 악플 앞에서 대안 세력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망스럽고 짜증나는 현실과, 논리로 두들겨도 소용없는 세상은 개인을 달팽이집 속으로 쏙, 들어가고 싶게 만듭니다.
홍세화 씨 말대로 '못된 선배' 만나서 운동을 알았는데, 이제 '못된 후배' 때문에 달팽이집으로 숨지도 못하게 생겼군요. ㅋㅋ
글이 서늘해서 좋습니다.^^

드팀전 2007-01-3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황망하지는 않았습니다.민주노동당 역시 진보세력 위기에 일조했으니까 환골탈태를 위한 자성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로보트 태권브이도 돌아오니까...비판을 통해 성장해야겠지요.

바라 2007-01-3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차악이나마 택하려는 '공포의 정치' 앞에서 과연 어떤 걸 할 수 있을지는 참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04년도 초인가 쯤에 한창 탄핵이랑 파병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 국민발의, 국민소환제 이런 운동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이번엔 어떨런지...
 

정말 우리나라는 책을 잘만든다는 생각이 든다.외양 말이다.그래서 가끔 가벼운 책을 들면 마음까지 가벼워진다.<녹색평론>책들도 그렇지만...개인적으로는 <녹색평론>책보다 표지는 조금 낫고  종이질은 그정도의 책이 마음에 든다.<보리>나 <도솔>에서 나왔던 몇권의 책들 정도 예를 들면 <야생초편지><잡초는없다>정도의...

'너무 무거운' 우리 책, 알고보니 이유있네!

[SBS TV 2007-01-15 22:27]    
<8뉴스>

<앵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책 읽는 모습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혹시 책이 너무 거창하고 무거워서 그런 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 책들은 왜 이렇게 무거울까요?

장세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외국책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외국 서적 매장에 나와 있습니다.

같은 책을 기준으로 원서와 번역본의 무게 차가 얼마나 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320페이지 분량의 미국판 원서의 무게는 260g

일본에서는 글자 크기 등을 줄여 2백80페이지에 150g짜리 문고판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원서보다 크기가 10%정도 커지고 80쪽이 더 늘어나 무게가 미국 원서의 2배를 훨씬 넘었습니다. 

또 다른 양장본도 달아본 결과 우리책이 40% 이상 무거웠습니다.

[하형주/독자 : 왜 한국에서는 책이 이렇게 무거울까...차라리 우리나라 이렇게 미국처럼 가볍게 하면 가방에 가볍게 하면 넣고 다니면서 지하철에서 읽을 수 있는데...]

유독 우리책이 무거운 이유는 커진 책 크기도 이유지만 무거운 종이의 질이 가장 큰 요인으로 분석됐습니다.

서울대 산림과학부 비교 분석 결과 영어판은 인쇄품질을 높이는 충전재 돌가루의 비중이 8%에 불과한 반면 우리책의 경우 3배가 넘는 27%나 됐습니다.

종이를 매끄럽게 해주는 돌가루는 펄프에 비해 무게가 2배 가량 더 나갑니다.

[이학래/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 : 탄산칼슘이나 활석 등 충전재는 인쇄품질을 높여주고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데 우리출판업계에서는 이런 충전재를 많이 함유한 용지를 많이 선호하는 편입니다.]   

책의 겉모양을 중시하는 독자들의 성향때문이라고 출판사들은 항변하지만 문제는 소장을 위한 양장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책들이 무겁게 만들어진다는데 있습니다.

[백원근/한국출판연구소소장 : 책의 무게도 굉장치 무겁고요, 그리고 컬러풀하거나 어떤 가시적인 측면에만 주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독서 생활화에 일정한 방해 요인이 되고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달 평균 독서량이 1권 꼴로 OECD 최저수준인 우리나라 독서 문화, 그 이면에는 책의 내용보다는 겉 모습에 집착하는 허위 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장세만 j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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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막신 2007-01-16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공감. 물론 무게때문만은 아니지만, 무거운 것도 들고다니며 책읽기 힘들게하는 이유중 하나예요. 학교갈때 가방에 생수한병, 책한권, 거기다 수업할 원서들고 가면 거의 등산가는 기분이예요.

딸기 2007-01-16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저는 전철안에서 주로 책을 보는데, 정말 넘 무거워요!

드팀전 2007-01-16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막신>전 학교다닐때 책은 사물함에 놔두고 다녔는데...^^ 너무 빈몸만 갈 때가 있어 왠지 학생같아보이지 않을까봐..고무줄로 잠금하는 학교파일을 들고 다녔다는.
딸기>젤 쪽팔릴때가 사당역에서 책을 폈는데 동작역쯤 가서 졸기시작할때죠...(앞에 있던 사람들이 뭐라할까 ^^)

게으름뱅이_톰 2007-01-1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요. 하드커버로 안 만들어도 될 책까지 하드커버. 도서관에 뚜벅이로, 버스로 다니는 제게 무거운 책은 진짜....=.= 팔이 빠질거 같아요.
 

[책읽기 365] 안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입력: 2007년 01월 03일 18:14:44
 
이 소설은 앙드레 말로가 1933년 당시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네번째로 출판했다. 내가 ‘인간의 조건’을 원어로 처음 읽은 것은 6·25 휴전 직후인 50년대 초, 시인·작가의 꿈을 꾸던 대학시절이었다. 내 불어가 서툴러서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내가 이 책에서 받은 강렬한 정신적·미학적 충격과 흥분은 약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 소설이 이같이 내게 다가오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소설의 무대는 1920년대 청조로 대표되는 전통적 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개의 대립되는, 그러나 다같이 서구적인 이념으로서 근대화라는 이름의 거대한 전환기를 맞은 중국 근대사의 한 작은 토막이다. 1927년 3월21일부터 4월12일 아침 6시까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의 몽타주로 구성되어 있다.

나를 사로잡은 이 소설의 힘은 그것의 드라마틱한 역사성 때문인가?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 아니다. 이 책이 보여준 정치적 이념 때문일까? 책은 정치소설이 아니다. 이 책에서 감지되는 사디스틱한 동시에 마조히스틱한 폭력성 때문일까? 이 소설은 최근 젊은이들의 공격적 본능에 의존하는 폭력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이 이 소설의 서정적이자 낭만적이고, 극적이자 수려한 문체와 표현력 때문일까? 약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실험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의 힘은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실존적 조건에 대한 작가 말로의 철학적, 아니 끈질긴 종교적 천착과 깊은 통찰력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소설 인간의 조건은 소설이기 이전에 인생의 숭고한 의미에 관한 깊은 사색록이다.

〈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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