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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이런 느낌... 뭔가에 휘말리듯 글을 읽어내려갔던 경험... 딱 한번 있었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읽었을 때였다. 곳곳에서 웃움이 터져나오면서도 그냥 맘놓고 웃을 수만은 없었고, 역사의 굴레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듯한 느낌때문에 [고래]를 읽은 후 다른 소설들이 살짝 시시하게 느껴진적도 있었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때의 그 기분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마르코 스탠리 포그. 그는 지금 아주 오래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인양 아주 상세하게 그때의 그 감정에 푹 젖어 들어 회상하고 있다. 그는 결론과 일어난 사실을 먼저 말하고 그때의 감정을 또는 그 결론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나중에 서술한다. 마치 글쓰기 개요를 작성하듯 한문장으로 주제문을 쓴 후 상세 내용을 쭈욱~~ 써내려가 듯 말이다. 그래서 결과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시작부터 키티 우가 자신을 먹여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와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야기등이 나오기 때문에 아~ 이 사람이 아버지겠구나, 얘와 사랑에 빠지겠구나.. 뭐 이딴식의 결과가 궁금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결과에 이르게 됐는지에 대한 과정이 어찌나 방대한지 침을 꼴딱 꼴딱 삼켜가며 얼른 빨리 좀 보여달란 말이야!! 하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겨대야했다. 에핑의 자서전 집필 과정은 M.S 포그 만큼이나 피가 마를 정도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이렇게 뜸을 들이다니... 중간의 식사 시간과 에핑의 뜸들이기 때문에 가파르게 올라가던 언덕길에서 잠시 쉴수 있는 터를 마련해주기도 하지만 아니 더 치고 올라갈 여력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이러다니..하면서 폴 오스터의 교활한 글쓰기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림은 블레이크록의 [문라이트] 이다. 에핑이 포그에게 전철비와 미술관비를 주며 문라이트를 보고 오라고 한다. 3M, 60센티, 바로 눈앞, 전체적인 구도를 살핀 후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피라고 하며 노트는 하지 말고 그 그림의 모든 요소를 기억할 수있는지 알아보라고 한다. 사람들의 모습과 자연적인 물체들, 캔버스에 찍힌 한 점 한 점의 색깔들을 모두다. 하나하나 정확한 위치를 외면서 눈을 감고 스스로 시험을 해보고 눈을 떴을 대 풍경속으로 들어가고, 화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스스로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한다. 어쩜 이는 내가 학교에서 배운 명화 감상법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렇지만 솔직히 미술관에서 한 작품앞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요한적은 없었다. 사진을 찾고 포그와 같은 시점으로 감상을 하기로 하여 보았다. 포그의 감상은 바로 폴 오스터 자신의 감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어 갈수록 폴 오스터 자신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 같아 작가에 대한 호감도가 확~~ 높아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몇군데에서 서로 맞물린다. 특히 세계 박람회의 경우는 3대가 한데 얽메인 최고의 장소가 된다. 할아버지의 운명과 다를게 없는 아버지의 운명, 그리고 할아버지의 그 거친 사막에서의 삶과 다를게 없었던 포그의 센트럴 파크에서의 삶... 잘 맞는 톱니바퀴가 쉼없이 돌아가듯 그렇게 달의 궁전의 이야기를 굴러간다. 그리고 왜 이 소설의 제목이 달의 궁전이며 그림 문라이트를 얘기했는지에 대한 마지막 정리도 잊지 않고 해준다. 달의 궁전은 친절하면서도 독자를 이리저리 요리할줄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이 만들어 낸 책이다. 다른 책에서도 이런 행복감을 맛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