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뉴스에서 '밥값내기' 비슷한 제목의 칼럼을 보려고 했는데, 우연히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칼럼이 눈에 띄었다. '여성혐오'라고 번역되는 '미소지니(misogyny)'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온 역사에 대한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단어가 사회학자보다 문학연구자들이 먼저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물론 내가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나 기타 책들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문학사는 작가들의 이런 태도를 총괄해서 미조지니라고 불렀으며, 그 말을 한자 문화권에서 여성혐오라고 옮겨서 잘못될 것은 없다. 그러나 번역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 하나가 이 번역어와도 연결되어 있다.

(...)

다른 작가들을 스탕달과 비교할 때 그들이 어떻게 여자들을 삶에서 소외시켜 종속적 존재로 만들었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미조지니라는 말은 저 작가들이 여자를 현실에서 소외시킨 모든 태도와 방법과 의식을 함축하게 된다. 그 의미의 폭이 이렇게 확대된다. [링크]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한창 논란이 뜨거울 때(지금도 물론 뜨겁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가 적절한 번역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읽었던 적이 있었다. '혐오'가 연상시키는 'hate'라는 단어가 어떤 극단적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비판도 있었고,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남성혐오'라는 대립항을 상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인지될 수 있기에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번역어로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당시에 작은 논쟁이 있기도 했다. 정희진의 경우 번역의 정치성을 지적했고,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는 말을 번역하면서 남성 중심적 문화가 반영되었다며 '미소지니'라는 말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했다. (정희진의 견해는 예전에 스크랩해둔 미디어오늘의 기사[링크]를 참조했다) 내가 처음에 미소지니라는 말을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았을 때 그 해석이 매우 포괄적이어서 번역어가 적절한지에 대해 호기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 황현산 평론가의 이번 칼럼은 내 궁금증을 자극해주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네이버 메인에도 안 올라와 있었기에 우연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의견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나는 1개 국어 이용자인데다 국어를 전공했다..) 딱히 덧붙일 말은 없지만, 요즘 종종 불편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이런 내용의 칼럼을 본 사람들이 '당신 같은 기성세대가 문제를 키웠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들이 받은 수혜를 무시할 순 없겠지만, 이런 식의 댓글들은 '당신만 깨끗한 척하지 마라', '수혜자였으면 닥치고 있으라'는 말로 보여 불편하다. 얼마 전 문유석 판사의 칼럼(링크)에 대해서도 페이스북의 '자유주의' 페이지에서 반박하는 게시글(링크)을 올렸는데, 게시물에 달린 댓글의 반응도 판사라는 직함을 가진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말할 자격 있냐는 둥, 당신 같은 기성세대가 어떻다는 둥하는 반응이 대다수다(게다가 저 칼럼은 대단히 일반적인 내용만을 다뤘다. 지면상의 문제 등이 있었겠지만..). 그 사람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혜자들의 반성도 분명 필요하지만, '기성세대 책임'이라는 식으로 그들 모두의 목소리를 막는 행위, '너는 깨끗한 줄 아냐'는 식의 반응은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을 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바꾸려는 생각이 있는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 있는지도 나는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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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북 `자유주의` 페이지가 아직도 있군요. 되도 않는 논리, 특히 자유경제원 소속 인물들의 생각을 인용해서 별로에요.

아무 2016-09-09 13:57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자유경제원 쪽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나 기타 사상에 부정적인데, 그쪽에서 무슨 근거로 이야기하는지 보려고 찾아봅니다. 볼 때마다 그런 되도 않는 논리 때문에 ˝내가 왜 이걸 보고 있나..˝라는 생각은 들지만..

2016-09-13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4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무슨 시험인지 모르지만, 열심히 준비하면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

아무 2016-09-13 23: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대구 쪽은 이제 여파가 가셨는지 모르겠네요. 어제 독서실에서 책상이 흔들흔들하길래 뭔가 싶었는데, 수도권이 이정도면 정말 큰일났었겠다는 생각이...;; 아무튼 좋은 결과 있을 거라고 믿고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cyrus님도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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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은 미국으로 이주한 인도인들이 주인공이다. 그런 이유로 이민자 소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자신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녀의 작품에서 인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민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처하게 되는 보편적인 조건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축복받은 집에서는 인도미국이라는 표피를 뒤집어썼을 뿐. 낯선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상황에서 인간은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음을 추구하고 거기서 위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축복받은 집은 내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 관계의 맺음과 얽힘, 어긋남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읽으면서 첫 작품인데 이렇게까지 잘 쓸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부 사이의 말 못할 관계와 상처를 풀어내는 방식(일시적인 문제, 질병 통역사, 축복받은 집), 미국이라는 공간(이 단편집에서 미국은 어떤 국가라기보다 각기 다른 이유로 모인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에서 겪게 되는 아픔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방식(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센 아주머니의 집) 등 다양한 관계에 내재된 상처를 풀어내는 문장의 힘이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차마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밝음과 어둠의 아이러니로 풀어낸 일시적인 문제를 맨 처음 읽었을 때, 정말 훌륭하다는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굉장히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스러운 면모가 뒤섞여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도 그렇고, 섹시에 등장하는 로힌역시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이 같으면서도 허를 찌르는 것 같아 성숙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결국 나는 보관함에서 하얗고 네모난 초콜릿을 하나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그러고 나서 전에는 한 적이 없는 행동을 했다. 그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다 녹았다고 생각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씹으면서 피르자다 씨의 가족이 안전하고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전에는 기도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적도, 얘기를 들은 적도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내가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밤에는 욕실에서 이를 닦는 시늉만 했다. 이를 닦아버리면 내 기도도 씻겨나갈 것만 같았다.

-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61-62)


그게 무슨 뜻이니?”

뭐가요?”

그 말 말이야. 섹시, 무슨 뜻이니?”

()

로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아이가 다시 매트리스를 차려고 애를 쓰자 미랜더가 아이를 꾹 눌렀다. 아이는 침대 위로 벌렁 넘어지더니 등을 반듯이 펴고 누웠다. 아이가 입가에 손나발을 만들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 섹시(172-173)


줌파 라히리의 단편들이 갖는 힘은 그녀의 섬세한 묘사에서 오기도 하지만, 작품에 내재된 꽉 짜여진 형식에서 오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미는 특히 결말 처리 방식에서 두드러지는데, 어느 부분에서 맺고 끊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누군가는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 갑작스럽게 끝난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단편들의 매력은 군더더기 없이 끝나는 결말을 다 읽은 뒤 잠시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했을 때 물결처럼 다가오는 여운에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몇몇 단편을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를 떠올린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이었으리라(특히 축복 받은 집의 결말은 굉장히 카버스럽다).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질병 통역사도 그렇고, ‘가 핼러윈 때 받은 사탕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도 그렇지만, 특히 내가 감탄한 결말은 섹시.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현실에서의 관계란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대부분의 관계는 흔히 우리가 소설에서 보듯이 격정적인 사건이 있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남이 드물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게 되는 것이다.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이 훌륭하지만, 나에게 정서적으로 큰 울림을 주었던 단편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다. 먹고살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연애 없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먼저 이주해 온 와 그가 세들어 사는 집의 노파 크로프트 부인 사이의 이야기.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단편은 크로프트 부인의 말을 빌려서 말하면 굉장한단편이다. 100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노파에게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에게도 6주라는 시간은 순간과도 같은 것이지만, ‘영원에 가까운 100년이라는 시간보다 6주라는 순간이 주는 울림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처럼 이 단편에도 스펙터클한 사건은 없지만, 영원과 순간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는 감동, 특히 마지막 대목이 주는 감동은 대단하다는 말만 하게 된다. 이 마지막 대목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족(蛇足)이어서 군더더기 없는 완결성을 추구했던 이전 단편들과 비교되지만, 이 군더더기 때문에 이 단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형식적으로 가장 훌륭한 단편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이 단편을 꼽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 특히 장편이 읽고 싶어졌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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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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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과잉의 시대,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라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 중에서도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 특히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유럽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미지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고통의 이미지들을 너무 쉽게 관람할 수 있게 된 현실, 타인의 고통이 전시/상연되는 현실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우리가 윤리적 감수성의 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실 고통이 사진에 찍히기 시작한 순간부터, 즉 고통이 대상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타인(우리와 타인을 가르는 것은 얼마나 난폭한 행위인가)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의 전반부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진이 얼마나 많이 조작되어 왔는지가 나온다. 흔히 사진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진실성이지만, 하나의 프레임을 고정시켜 한 순간을 담는다는 행위(shot) 자체가 갖는 폭력성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며, 사진은 그 안에 담긴 피사체를 미학적으로 변형시킨다. 설령 그것이 전쟁을 담고 있다고 해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텔레비전, 스트리밍 비디오, 영화의) 이미지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진이 가장 자극적이다. 프레임에 고정된 기억, 그것의 기본적인 단위는 단 하나의 이미지이다. 정보 과잉의 이 시대에는 사진이야말로 뭔가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자 그것을 간결하게 기억할 수 있는 형태이다. 사진은 인용문, 그도 아니면 격언이나 속담 같은 것이다. (44)


전쟁 사진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였다. 우리가 베트남 전쟁 하면 떠올리는 닉 우트(Nick Ut)의 네이팜탄 폭격 사진을 비롯한 많은 사진들은 반전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포토저널리즘의 발달이 세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손택은 고통을 담은 사진들에 내재된 통제와 검열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지 못했거나, 남아 있는 이미지가 별로 없는 잔악 행위들은우리의 집단적 기억에서 잊혀지고, 널리 알려져 있는 사진들 역시 특정 사회가 한번쯤 생각해 보자고 선택해 놓은 것(130)이라는 이야기다. 공개된 사진에서도 희생자들은 배경인 장소가 이국적일수록 모습이 선명해지며, 사망한 미군 병사들이나 9.11 테러 직후 발견된 주검 사진들은 훌륭한 감식력에 따라 공개되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려는 국가적 합의(134)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들처럼 피사체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버리는 사진들도 있다. 이런 사진들은 특정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과장하고, 우리는 사진에 담긴 고통의 규모에 위축되어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122) 어떤 식으로 개입을 해도 변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래서 포기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정부의 통제와 언론의 자기 검열을 통해 공개되는 이미지들은 전쟁이라는 비극이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나는 안전하다라는 인식이 사람들을 무관심해지게 만든다(손택은 이를 관음증적 향락이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해서 손택이 사라예보의 한 여인에게 들은 일화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자신이 안전한 곳(91년 당시의 사라예보)에 있다고 느끼는 한, 인간은 타인의 고통(세르비아의 크로아티아 침략)에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하지만 손택은 여기서 다른 것을 본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이미지를 보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는 무력감과 공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폭력의 이미지들이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폭력을 외면하기도 한다고 손택은 말한다. 이는 사진에 관하여(1977)에서 그녀가 폈던 주장(이미지로 뒤덮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무감각해진다)에 대한 이의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진들은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타인의 고통을 더욱 적나라하게 포착해 보여주고, 우리는 움찔움찔하면서도 그런 사진들을 보며 관음증 환자의 위치에 놓인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린 이미지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손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우리의 특권과 그들의 고통 사이의 연결고리를 숙고해보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 강조는 인용자)


다소 길지만 이렇게 인용한 것은 이 부분이야말로 손택이 말하고 싶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지난 몇 년간 내가 취해왔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수많은 뉴스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을 느꼈던 나에게, 손택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나에게는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67)고 말하는 것이다. 연민이나 환멸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함의 표현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손택은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는 작년에도 들었지만 여전히 무력해지고 있었다.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 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 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눈먼 자들의 국가, 72-73, 강조는 인용자)


작년 봄에 읽으면서 접어두기까지 했건만,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고통과 마주하기를 피하려는 몸부림 때문이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염세적 세계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숙고하지 않으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사진 너머에 존재하는 통제와 검열의 논리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의 고통에 수치심을 느끼고, 나와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숙고하고,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명심해야 할 것은, 타인의 고통을 사진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손택이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는 사진은 제프 월(Jeff Wall)<죽은 군대는 말한다>(1992)이다. 1986년 아프가니스탄 모코르 지역의 소련 정찰군을 담은 이 사진은 사실 작가가 공개적으로 작업장에 만들어 놓고 연출한 것이다. 사진 속 피사체들 중 아무도 살아 있는 자(우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무언가를 고발하는 듯한 사진 속에서 설령 그들이 우리에게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사진은 우리가 그 고통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을 관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현실 감각을 잃지 말 것. 둘째, 사진만으로 그들의 고통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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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7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NS에 공개되는 사진은 늘 좋은 것만 보여줍니다. 그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은 참 행복하고 잘 사는구나’라고 착각하죠. 그래서 저는 SNS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일이 과연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 2016-09-08 00:10   좋아요 0 | URL
자기 과시의 심리죠 사실. 그런 행태의 가장 극단에 있는 것이 인스타그램일 겁니다. 다소 강박적이기까지 한 sns 사진에는 자기 과시의 욕구도 있겠지만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요새 합니다.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진 사회에서 내 선택이 맞다고 해줄 사람들이 필요한 거죠...
 














문학잡지 <Axt>가 1주년을 맞아 형식에 변화를 시도했다. 전체적으로 다른 부분은 평소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흥미로웠던 것은 'hyper-essay' 부분이었다. 총 네 편의 글이 실렸는데,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이 갔던 부분은 황현산과 이명현의 글이었다. 짤막하게나마 기억할 만한 부분을 적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면 금방 잊어버리니까...


1. 황현산, 「폐쇄 서사 ─ 영화 <곡성>을 말하기 위해」
















황현산 평론가는 영화 <곡성>의 서사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텍스트를 가지고 온다.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와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기욤 니클루의 『잭 몽골리』다. 세 편 모두 읽어본 적이 없으니 글쓴이의 말을 빌려오면, 『라모의 조카』는 "악이 그 자신의 입으로 저 자신을 고발"(72쪽)하며 와해하는 서사이며, 『경마장 가는 길』은 "객관적 시선으로 위장한 이 철저한 편파성에 의지해"(74쪽) "악이 악의 테두리에 갇혀서 스스로를 고하는 서사"(76쪽)이고, 『잭 몽골리』는 "제가 제기하려는 주제 속으로 실종하여 그 주제 자체가 되어버리는 서사"(76쪽)이다. 그렇다면 <곡성>은? "어느 쪽 서사도 철저하게 실천하지 못한 서사"라고 글쓴이는 말한다.


그는 영화의 주제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설을 제시하는데(저자 스스로 스포일러가 있다고 했으니 해설의 내용은 적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안 본 사람 입장에서 읽으니 이게 스포일러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다고 영화를 볼 것 같진 않지만..), "나홍진 감독은 두 번째 해석의 관점에서 영화의 서사를 이끌려 하였으나 그 자신이 첫 번째 해석의 관점에도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고"(77쪽) 쓴다. 그리고 영화에서 낚시라고 이야기되는 요소들은 모두 "첫 번째 해석의 관점과 '공모'한다"고, "그 낚시질에 가장 먼저 걸려든 것은 감독 그 자신"이라고 쓴다. "마약 조직에 신분을 숨기고 잠입한 수사관이 끝내 헤어나지 못하고 그 자신이 진짜 조직원이 되어버린 꼴"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감독은 자신이 외부적 관찰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글의 결론이다.


우리는 벌써 과학적이지만 국가와 민족과 사회가 제 일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비과학적 사고가 용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서사가 새로운 틀을 만들려 할 때 자주 머뭇거리게 되는 이유의 하나가 거기 있다. (78쪽)


2. 이명현, 「과학자가 문학을 즐기는 여러 가지 방식」
















천문학자 이명현은 '다윈주의 문학 비평'을 소개한다. 그는 "진화 이론과 진화 심리학을 바탕으로 문학 텍스트를 분석하고 문학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90쪽)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인간 본성과 문학을 포함한 인간의 문화적 현상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를"(90쪽) 하는 입장이다. 이 비평의 입장에서 문학은 "진화적인 존재인 작가가 인간 본성을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반영한 문화적 결과물"이다. 작품 속 인물들의 행위 동기를 유전이나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추적하고 인간 본성의 맥락에서 성찰하는 비평인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또다른 비평이론은 피에르 바야르의 '개입주의 문학 비평'이다. 이는 문학작품을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오브제로 보고 평론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필요하다면 작품을 변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입주의 문학 비평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추리 비평 : 텍스트 자체를 변형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문학적 결론을 재검토해서 문제가 있다면 다른 해석을 하자는 입장

2) 개선 비평 : 결말의 재추론에서 더 나아가 필요하다면 작품을 뜯어고치자는 입장

3) 예상 비평 : 미래는 현재에 흔적을 남긴다는 시간의 흐름의 방향을 무력화시킴으로서 문학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입장


바야르가 제시한 개입주의 문학 비평의 바탕에는 정신분석학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의 무의식이 작품 속에 반영되기 때문에 작가가 작품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결론을 무조건 믿을 수가 없고, 비평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바야르의 주장에서 다윈주의 문학 비평과의 접점을 발견하는데,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모순된 본능들의 집단인 인간 본성을 갖춘 작가가 만들어낸 진화적인 존재인 등장인물들이 판치는 불완전한 텍스트"(92쪽)가 바야르가 말하는 문학 텍스트의 '유동성'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개입주의 문학 비평은 현대 과학의 인식론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야르도 사적인 자리에서 저자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한다)


바야르는 개입주의 문학 비평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창조 비평'이라고 말한다. 논픽션인 문학 비평이 픽션인 소설과 제3의 지대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창조 비평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개입주의 문학 비평을 통해서 문학 비평이 점차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전환되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문학의 본질을 픽션으로 보는 바야르의 관점에서 시작된 시도다. 다윈주의 문학 비평에서는 이야기의 기원도 진화적 적응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로 파악한다. 바야르가 완성하려고 하는 창조 비평은 어쩌면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분화되기 전의 '이야기'로 거스러 올라가서 비평과 창작을 통합하겠다는 큰 꿈일는지도 모르겠다. (93쪽) 


개인적으로 '창조 비평'에 대해서는 회의적인데, 이 관점대로면 평론가에게 중요한 것은 일종의 예술적인 감식안이나 통찰력, 또는 텍스트를 하나의 아포리즘으로 압축하는 능력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평이 과학이냐 예술이냐라는 이야기와도 연결될 수도, 평론가에게 우선하는 자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탁 치며 받은 통찰(그것이 옳든 그르든)을 아름답게 꾸며낸 아포리즘의 비평보다, 성실하게 분석하고 그 결과로 독자에게 읽기의 저변을 넓혀주는 비평을 읽고 싶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다른 글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노승영 번역가의 「작가-번역가 커플을 찾아서」도 흥미로운 빅데이터 분석이었다. 오역이 없는 번역은 없다지만, 글에 제시된 '작가-번역가 공식 커플' 표를 보며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번역가의 궁합이 잘 맞는지 작품을 보며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단편 중에는 백민석의 「소돔 0일」이 흥미로웠지만(멀지 않은 미래여서 그런가?), 다른 작품들은 난해하기도 하고 너무 짧아서 제시된 상(像)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은 유년시절의 성장기를 전형적으로,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다루고 있었지만 마지막 눈 오는 장면에서의 몇몇 문장은 힘을 준 게 티가 났다. '이게 중요한 문장이다'라고 못 박은 느낌이랄까. 서평을 기고한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진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말로는 지지난번에도 기고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고... 작가 지망생과 블로거가 기고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응준 작가는 지난번까지는 '소설가'로 소개됐던 것 같은데, 왜 이번 호에서는 '경(輕)수필가'로 소개된 걸까? 하성란과 오한기의 장편연재는 좀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지난 호까지 연재되던 이기호와 김이설의 연재는 중단된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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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30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윈주의 문화 비평은 신선한 내용입니다. 이과와 문과의 만남인가요? ㅎㅎㅎ 이 지구상에 나온 비평 이론을 열거하면 얼마나 될까요? 복잡해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같아요. 어차피 텍스트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은 다양하니까요.

아무 2016-08-30 20:21   좋아요 0 | URL
90년대에 나왔다고 하는데 저도 처음 봅니다. 문이과의 만남이라고 하시니 통섭비평?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ㅎㅎ 읽으면서 신선하긴 했어요 이 관점으로 본 문학작품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저자는 김유정 작품을 다르게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ㅎㅎ

AgalmA 2016-09-0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입주의 문학비평은 정신분석과도 겹치네요.
치료자가 환자의 감정에 휘말리는 `역전이` 처럼 적극적이면 추리비평, 부정적이면 개선비평이 되겠고, `시간을 무력화시켜 문학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예상비평은 심리의 본질로 가려는 `최면술`? ㅎㅎ 프로이트가 최면술을 신뢰하지 않아 정신분석이 튼튼해진 기틀이 되기도ㅎ

저는 비평도 창작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 창조비평을 하나의 장르로서는 인정합니다. 단 비평하는 작품에 대한 월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면 전문가인 비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의 주체성이 중요하다고 하겠죠.

곡성은 나홍진 감독이 코미디를 생각하고 만든 거라 하는데, 그래서 보는 자와의 괴리감이 그리 커진 건지도.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저도 코미디 소스 하나 얻게 되려나 합니다ㅎ

백민석 작가라면 당연히 소돔을 잘 말할 만한 작가 아닌가! 매우 궁금함!
이응준 소설가 소개는 작가가 고집한 게 아닐까요. 그 사태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으로.

아무 2016-09-04 20:06   좋아요 1 | URL
바야르가 애초에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개입주의 비평을 제시했다고 해요. 예상 비평은 악스트에 딱 저만큼만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하긴 어렵지만.. 생각해보면 개입주의에서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걸 다윈주의 비평에선 본성이라고 부르는 거 아닐까 싶네요 ㅎㅎ

저도 ˝비평=창작˝이라는 관점을 너무 부정하면 어떤 비평도 작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결론에 빠져서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월권의 경계라는 것이 모호하니.. 결국 주체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긴 하죠.

제가 1년에 영화를 열 편도 안 보는 사람이라서(극장과 집에서 보는 거 전부 포함해서) <곡성>은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전 제가 좋아하는 감독 영화도 챙겨보질 않거든요..^^;;

전 백민석 작품을 처음 읽어봤는데,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소극처럼 느껴져서 재미있었습니다. 서평 중에 <헤이, 우리 소풍 간다>를 다룬 것도 있어서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응준 작가는 예전에도 악스트에 한두번 기고했었는데 그때는 소설가로 소개됐거든요. 이번에 실린 게 에세이라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에세이 내용 자체가 다 허구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 영화 <사울의 아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사울의 아들>(2015)은 아우슈비츠에서 '화장터의 까마귀'라고 불렸던 존더코만도의 이야기를 다룬다. 죽음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사울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고안되어진)에게 적합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른 동료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봉기하려는 존더코만도들의 계획을 (결과적으로) 방해하면서까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랍비를 구해 아들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 그것뿐이다. 이 부분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왜 저렇게까지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심지어 그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오로지 형식만으로 승부를 거는, 그래서 나에겐 독특한 경험이었던 영화다.



영화는 시작 부분부터 특이한 방식을 취하는데, 화면의 초점이 나간 상태에서 화면 앞으로 다가오는 사울의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지며 시작된다. 이후에도 사울만 선명하게 보이거나 종종 다른 인물 한두명이 보일 뿐, 대부분 초점이 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가스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시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게다가 평소보다 작은 화면(4:3)에 사울의 뒷모습이 항상 걸려있어 볼 수 있는 화면도 제한적이다. 이것은 '사울이 보고 있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한 영화의 형식이자,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윤리적인 답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제한된 시각으로 인해 소리에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고, 실제로 소리의 묘사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청각적인 포르노'라며 비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해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만연했던 고통이나 잔혹함을 재현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감독의 고민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어둠에서 벗어나기』는 <사울의 아들>의 감독 라슬로 네메시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이 책을 내기 전에 이미 '쇼아는 (이미지로) 상상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은 글을 발표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역주를 빼면 100쪽이 채 안 되는 이 책은 영화비평서라기보다 영화를 통해 작가의 철학을 드러내는 철학서에 가깝다. 그가 주로 이야기하는 이미지의 '잔존'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영화에 대한 좀더 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를테면 이 영화가 1944년 존더코만도의 봉기와 그들이 찍은 사진 네 장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 유대인들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나 희생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보다 '쇼아'(Shoah, 재앙 또는 파국)라는 단어를 선호한다는 점, 사울의 이야기가 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아있다는 점 등등. 특히 이 책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미래지향적 저항(봉기)과 과거지향적 저항(장례)의 개념이다.


사울은 미래를 향한 전투-저항résistance-combat(봉기 및 소각장 폭파 계획)을 과거로 향하는 존중-저항résistance-respect(아이의 시신을 전통에 따라 장례하는 일)으로 치환합니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산 자vivants들의 사회société보다 현재와 과거의 망자morts들의 계보학généalogie을 선호합니다. 그는 힘의 관계(모든 이들이 "조난당한 자"인 공동체임에도 존재하는 승자와 패자, 권력과 전략의 게임)보다 의례의 권위(랍비와 유대 기도문, 규칙을 준수하는 장례)를 선호합니다. (63쪽) (강조는 저자)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봉기를 꾸미는 전투-저항을 지지하고 계획에 수시로 훼방을 놓는 사울을 걸림돌처럼 여기게 되는데, 사실 영화에서 더욱 근본적인 저항을 하는 사람은 사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이미 죽어 있어."라는 사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그들은 존재 자체가 부정된 망자이며, 그 안에서 또다른 망자(아들)에 대한 경건한 매장에의 요구는 "망자의 비-존재함"에 저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망자가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쇼아라는 어둠에서 벗어나는 이미지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망자의 존재를 증거/증언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위베르만이 인용하는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죽어 가는 자의 권위"가 이야기의 기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서 이야기라고 함은, 사울이 장례라는 "고독하고 절망적인 계보학적 탐색을 수단 삼아" 전달하려는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흔적을 남기게 되고, 그 흔적(잔존하는 이미지)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죽어가는 자의 권위라고 위베르만은 말한다.
















마치 삶이 다하면 인간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이때 이 이미지 속에는 평소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마주쳤던 자신의 생각이 펼쳐진다)가 활발히 움직이는 것처럼, 임종의 순간에는 갑자기 그의 표정과 시선에 잊혀질 수 없는 일들이 떠오르고 또 이 잊을 수 없는 일은 그와 관계했던 모든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 「얘기꾼과 소설가」 (178쪽)






영화로 돌아와서, 사울은 전투 중에 아들의 시체를 메고 랍비와 도망쳐 장례를 치르려 하지만, 랍비는 기도문도 외울 줄 모르는 가짜였다. 결국 그는 강을 건너다가 아들의 시체를 놓치고, 다른 동료들의 손에 붙들려 강 건너 오두막으로 피신한다. 이때 그는 문틈으로 자신을 발견한 폴란드 소년(영화에는 폴란드 소년이라고 나오지 않는데, 위베르만은 폴란드 소년이라고 썼다. 서양인은 얼굴만 보고 국적을 구별할 수 있는 걸까?)을 보고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왜 미소를 지은 것일까? 추측이지만, 이미 죽어 있는 망자로서의 자신의 흔적, 즉 잔존하는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은 아들의 비-존재에 저항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의 비-존재에 저항할 수 있는 다른 '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엔딩 크레딧에서 사울의 아들(Saul Fia)은 두 명이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나치를 사울과 그 일행의 피난처로 인도하게 된 아이가 도망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어야 될 때구나..'였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작년에 읽고, 올해 『주기율표』를 읽다가 잠시 접어둔 상태라 구입을 미루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존더코만도나 카포에 대한 이야기는 2장 '회색지대'에 나오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나치 친위대와 존더코만도 사이의 축구 이야기는 섬뜩하다.


그런데 특수부대의 베테랑들을 대하는 SS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이 베테랑들을 확장된 동료로 인식했다. 곧, 이제는 자신들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존재,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공범성이라는 추악한 굴레에 묶인 한 배에 탄 동료로서 말이다. 니즐리는 '작업' 중 휴식 시간 동안에 SS 대 SK(존더코만도)의 축구 시합에 참관한 이야기를 한다. (...) 이러한 휴전의 이면에 있는 악마적인 웃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일은 완료되었다. 우리는 해냈다.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인종도 아니고, 반(反)인종도 아니고 라이히 천년왕국의 주된 적도 아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우상을 거부하는 민족도 아니다. 우리는 너희를 끌어안았고 타락시켰으며 우리와 함께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자부심 가득한 너희들은 이제 우리와 같다. 우리처럼 너희는 너희 자신의 피로 물들었다. 너희도 우리와 같이, 카인과 같이 형제를 죽였다. 어서와, 우린 함께 경기할 수 있어.' (62-63쪽)


물론 레비는 수용소에서 특수계층이었던 카포나 존더코만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라거라는 시스템의 문제까지 성찰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체험자로서, 가라앉지 않고 구조된 자로서, 증언자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레비는 라거라는 20세기 가장 잔혹한 시스템을 해부하고자 노력한다. 이 책에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언뜻 나타나던 인간성에 대한 신뢰나 따뜻함은 없다. '홀로코스트는 다시 실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레비는 '그럴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다. 여전히 현실에는 『나의 투쟁』에서 이름만 조금 바꾸어 교본으로 삼으려는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7장 '고정관념들'에 나오는데, 레비가 초등학교 5학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해주러 갔던 이야기다. 한 학생이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묻고, 레비가 이유를 설명하자 그 학생은 수용소의 약도를 칠판에 그려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하면 된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한계는 있지만 이 일화는 내가 보기에, 분명히 존재하며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간극을, 그러니까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과 개략적으로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 현재의 상상력에 의해 표현되는 상황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상상력은 치명적인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 이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192쪽)


이것은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전달되는 관음증적 쾌감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쇼아를 "사유 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사건, 이미지로 드러낼 수 없는 상상 불가능한 사건"이자 "절대적이고 숭고한 부정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무엇"으로 규정했던 지식인들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이미지를 떠올리니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생각나지만, 아직 읽고 있는 중이라 여기서 쓰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들여다보기에 너무 끔찍한 지옥이라는 이유로 어둠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반딧불처럼 미미하더라도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한 증언들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8장 '독일인들의 편지'를 보면 여전히 증언의 반딧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증언/재현의 방식을 고민해야지, 아예 증언/재현하지 않는 것은 어둠을 어둠으로 두겠다는 선택을 넘어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 일이 있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레비의 책들이 끊임없이 소환되고 읽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 마지막 문단의 '반딧불'의 비유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이라는 책 제목에서 가져왔다.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서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한 부분만 적었는데, 이미지-몽타주의 개념이나 잔존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딧불의 잔존』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에 보면 위베르만은 이미 서른 권이 넘는 저서를 냈다고 하는데, 국내에 나와있는 책은 이 두 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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