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히 세워졌다고 믿었던 정신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최근 몇 차례 있었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끝없는 우울과 고독의 심연이 다시 드러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하든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오래 전 외로움에 대해 썼던 잡스러운 에세이에서 인용했던 노래 가사를 다시금 떠올려야 했다.












너를 떠나 살 수 있을까

나의 가장 오랜 벗이여

나는 네가 없이는 내가 아닐 것 같아

차가운 너의 품 안에서 눈 감으면

어느새 꿈속을 걷는다

- 자우림, 슬픔이여 이제 안녕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음에도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사랑하는 손)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던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연달아 읽으며, 그녀의 시 세계 전반에 깔려 있는 괴로움/외로움/그리움/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내 청춘의 영원한)로 함몰하는 나를 보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하면서 끝까지 읽어낼 수밖에 없는 것은, 허무와 죽음만이 상존하는 세계 한복판에서 자신의 고통을 끊임없이 언어와 이미지로 잡아내려는 시인의 처절한 외침이 토해내는 정서가 나를 끊임없이 붙잡기 때문이다. 김치수 평론가는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잡아냈지만, 난 그녀의 시를 읽을 때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때의 외로움이란 감상(感傷)으로서의 외로움(loneliness)이 아닌, 모태의 순간부터 죽음에 진입하고 있음을 체감한 시인의 외로움(solitude)에 가깝다. 나를 맴돌고 있는 트라이앵글의 한 축으로서의 외로움이 결국 고독이라는 근원에서 뿜어내는 핏물과 같은 것인지를 생각하며, 여전히 나는 처음으로 만났던 그녀의 시, 외로움의 폭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만남 이후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집을 완독하였지만, 여전히 첫 시를 가장 좋아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죽음과 어둠이 전부인 곳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외로이 살아가는/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때로는 골수와 핏물이 넘치는 모습으로, 때로는 사지가 절단되어 내버려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는 시인에게 청춘()이란 초록의 무서운 공황이자 귀신 같은 푸르름(무서운 초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극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음에도 서른 살은 온다(삼십세)는 것이며,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가 시인 자신뿐이기에, 너희들 문간에는 언제나/외로움의 불침번이 서 있"음에도 "고독한 시간의 아가리 안에서/너희는 다만/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절망하기 위하여 성교(과거를 가진 사람들)할 뿐이기에 더 거대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시가 표출하는 이미지들이 섬뜩하면서 잔혹하고, 때때로 추악한 모습을 띠는 것은 정과리 평론가의 말처럼 죽어가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 너희들을 깨우기 위함일까.

  













즐거운 일기에서도 시인의 인식은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서 세계 자체로 시선을 돌리는 시편들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는 유해 색소의 햇빛에 조금씩 들끓으며/발효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반죽 덩어리이자, 입으로는 하루종일 먹었던 온갖 더러움을 게거품처럼 조용히 게워내는 세계이다(여의도 광시곡).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읍니다.”(즐거운 일기) 시인은 홀로 대낮에 서른 세 알 수면제를 먹고도 잠들 수 없는 사악한 밤의 세계에서(수면제), 어느 한 순간 세계의 모든 음모가/한꺼번에 불타오르(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는 곳에서 폐광처럼 깊은 잠을잘 수 없고, 항상 깨어서 이 피곤한 컹컹거림(시인)을 멈추지 않는 것이 자신의 숙명임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울부짖음은 불발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어서, “공포이자 암흑덩어리인 세계는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악순환)처럼 악순환을 반복할 따름이다.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릿츠버그나 오덴달루스트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 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가나 오스망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나 불발의 혁명을.(겨울엔 바다에 갔었다, 강조는 인용자)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 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 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197×,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 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아무도 그 시간의 화상(火傷)을 지우지 못했다, 강조는 인용자)


그 와중에 조용히 죽음은 우유 배달부의 길을 타고 온다.”(무제 2) 여전히 더럽고 오물로 가득 찬, 절망과 고통과 공포와 죽음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시인의 외침은 단순히 울부짖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때로는 죽음 충동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멈추지 않겠다는 아픈 다짐을 본다. 근원적으로 피비린내나는/이 세상의 고요 속으로/나는 처음으로 내려서겠읍니다.”(하산)와 같은 구절에 보이는 마음가짐에서, 나는 끝내 잠들지 못하고 고통을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을 읽으며 아파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에서 나타나는 처절한 비극의 언어는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때로는 극언의 형태로 충격을 안기며 온다. 그것은 이미 죽음이 전체를 덮은 세계 때문이기도, 모태를 벗어난 순간부터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나 시인은 컹컹대며 현실의 맨얼굴을 말하겠지만, 어떤 언어로도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의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녀의 시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인뿐만 아니라는 것을, 뒤로 벌렁 누운/거대한 다족류의 벌레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죽어가고 있는 피골이 상접한 내 정신(여의도 광시곡)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매번 읽을 때마다 실감하는 까닭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8-07-03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넘 오랜만입니다! 최승자 시인 시 읽으면 말씀처럼 절절한 외로움 때문에 읽는 게 괴로울 지경... 님 글도 참 힘든 게 느껴져서 ;_;).... 바다 구경이 필요할 듯!

아무 2018-07-03 20:35   좋아요 1 | URL
따뜻한 환대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그냥 읽어도 괴로운 시를 휑한 마음으로 읽는 건 참 고통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런 마음 상태가 아니었으면 두 권을 연달아 읽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최승자 시인도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몸부림치는 듯한 시를 쓴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문득 어깨에 손을 올려 사람을 놀라게 하는 벗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보내려고 합니다. 바다를 보며 뻥 뚫리는 기분도 느끼면서.. ^^;;

2018-07-04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6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1-12-22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링크타고 와서 읽었습니다. 아무님은 정말 평론가 같으시네요. 요즘 최승자 에세이 다시 나오고 있는거 같죠. <이 시대의 사랑>은 제게도 최고의 시집입니다. 나중에 에세이 읽고나면 한번 더 읽으러 올께여 ㅎㅎㅎ

아무 2021-12-23 00:00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뭔가를 쓸 때마다 항상 걱정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가 이걸 잘 이해해서 쓰는 건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어렵게 쓰고 있는 건가?‘하는 것이에요😅 어려운 것, 혹은 감정이나 상념처럼 언어로 잘 표현하기 어려운 걸 쉽게 풀어서(또는 빗대어서) 쓰는 능력을 갖는 게 제 목표 중 하나입니다 ㅎㅎ.. 에세이는 딱 두 꼭지만 읽어보았는데 여전히 좋았어요. 내년에 다 읽고 다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쟝쟝님 건강 조심하시고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랄게요🥳 북튜브도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공쟝쟝 2021-12-23 12:39   좋아요 1 | URL
어렵게쓰는 것도 능력이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ㅋㅋ 하지만 잘 풀어쓰고 싶은데 어렵게 써진다면 더 연마 하셔야…(응?) 북튜브… 아무님 보지 마세요 ㅋ 그거 보지말고 책보고 글써요 ㅋㅋㅋ 자주 많이 쓰라고요!! 주간 아무르 홧팅!!

아무 2021-12-24 17:28   좋아요 1 | URL
유튜브는 잘 안 봐도 북튜브는 나름 챙겨보는 것들이 있답니다... ㅎㅎ 연말 업무폭탄들만 잘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혼자이든 여럿이든 평안한 크리스마스 연휴 보내시길😁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주어진 것이 과연 온당한지 돌아보는 것, 아니라면 기꺼이 내려놓는 물결에 동참하는 것. 긴 이야기 끝에 도달한 곳은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돌아볼 수 있는 ˝예민한˝ 이성과 감각에의 요구. 다만 나에겐 더 정교한 언어가 여전히 필요하다. 예민함을 받쳐줄 더욱 세밀한 언어의 칼날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우스터리츠의 근저를 이루는 의 관찰기는 북미산 너구리에 대한 관찰로 시작된다. “() 분명히 녀석은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는 이런 행위를 통해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 같았다.”(8) 뒤에 이어지는 아우스터리츠의 건축사를 읽다 보면 너구리 이야기는 사족처럼 느껴지지만, 아우스터리츠의 탐원기(探源記)를 다 읽고 저 문장을 다시 보았을 때 밀려오는 상념이란 이런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부분이 아닌, 여기부터가 시작이었구나, 하는 생각.

 

정체성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는 선을 톺아보며 구성하는(또는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아우스터리츠에게 정체성 찾기의 길은 요원하다. 물론 그러한 내력을 가진 그였기에 공간에 상흔처럼 새겨진 시간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독자로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기록된 바도, 전해진 바도 없스스로는 어떤 기억의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장소와 물건 속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30)을 기록할 수 있게 된 대가로 얻게 된 매우 위험한 감정의 소용돌이(40)는 그를 불안정한 외줄로 내몬다. 그의 감정을 일렁이게 했던 정거장이라는 공간이 떠남과 머묾의 이중주가 새겨진 장소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기행이 안착하는 일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암시다. 결국 소설에 기록된 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간 나에게 남은 그의 정체성은 그가 언제나 들고 다녔던, 이후의 그의 모든 삶을 요약하는 베라의 정확한 표현(192)인 륙색이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리버풀 스트리트 정거장 동쪽 끝에서 내려 한두 시간 그곳에 머물렀고, 아침 일찍부터 벌써 피곤한 다른 여행객들과 노숙자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거나 난간에 기댄 채 서 있으면, 그때 내 속에서 지속적인 당김, 혹은 일종의 심장의 고통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흘러간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나온 것임을 예감하기 시작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43-144)

 

개인의 기원을 찾아 장소를 끊임없이 수색하던 그의 방랑은 건축사라는 그의 전공과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시간 탐색으로 확장된다. 인간이 구축한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배음을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꾸준하면서 집요해 보이기도 하는 발자취는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으로 귀결되는데, 브렌동크 요새로 대표되는 별 모양의 방어 시설에서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어지는 공간사()의 끈은 세상은 19세기의 종식과 더불어 끝난 것(156)이라는 그의 시간론과 상통한다. 그것은 36도라는 온도를 끊임없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종의 숙명인지도 모른다.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105)라는 마술적 경계가 부여하는 나방과 같은 숙명. 그 와중에 공간에 남겨진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사()는 끊임없이 시간의 권위에 저항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시간과의 부딪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전달할 뿐이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 또는 진술의 진술이라는 방식을 택한 것은, 공간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이 시간과 부딪치며 전해지기 때문이고, 그렇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파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사 또는 문명사라는 이름으로 그어진 선에서 벗어난, 그래서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113)의 말들은 진술 또는 증언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술들은 (미처 다 읽지 못한) 공중전과 문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고와 감정의 작동 능력이 마비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우스터리츠의 회상이 선형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끝없이 곁가지를 치며 주변 인물과 장소로 확장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의 이름이 아이러니를 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이 거둔 뛰어난 승전의 장소이자, 스스로 가장 사소한 것까지 주목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소도구 역할을 하(82) 역사 속 장소는 끊임없이 가장자리를 일각으로 끌어 올리려 헤매던 그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을 침잠시키는 역사-시간의 폭력이랄까. 시간의 무자비함 앞에서 그는 한 권의 책을 결코 완성할 수 없었고, 무한히 확장되는 페이지들이 반감과 구역질을 안겨주었지만,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항상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137)이었다. 모든 것을 추구(芻狗)¹와 같이 여기는 시간의 물결 앞에 모든 시도는 끝에 이르면 무위로 남겠지만, 실패의 연속 사이에서 휘둘리고 있음에도, 자신의 근원을 찾아간 몰다우 강에서 바라본 도시가 "꼭 그려진 그림 속의 니스 칠처럼 지나간 시간의 구불구불한 틈과 균열에 의해 관통되고 있는 것처럼"(180쪽) 보임에도 호명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어떤 이의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목소리였고 모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흩어지는 메아리들이었다. () 수만 권의 책들, 유명하고 위대한 이름들. 그것들은 일각一角이었다. 일각에 불과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고 그중에 실리가 있었다. ()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 황정은, 명실중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이 이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보편성이 할퀴고 간 자리를 기록하려는 아우스터리츠-제발트의 집념 때문이기도 하고, 이를 표현하는 문장들이 품고 있는 애수와 처연함 때문이기도 하다. 엄혹한 역사가 진행 중인 현실을 마주하려는 그의 문장이 이런 감정을 빚어내는 것은 잠겨 있는 이름들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자, 압도하는 시간의 폭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회의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취하는 기록자로서의 태도는 이민자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름들과 무관한가. “() 이 세상을 이렇게 어둡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하고 말했어요. 일라이어스가 그녀에게 대답했지요. 잘 모르겠소, 여보, 난 모르오.”(73) 평생을 자신이 믿었던 세계의 섭리 속에 살다가 무너져버린 일라이어스처럼, 우리 역시 아우스터리츠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공간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할 감각을 기르지 않았을 뿐. 결국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속에 있기에, 난처하고 허망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필요로 한다. 설령 그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라도.

 

아우스터리츠의 진술은 자신의 아버지와 마리 드 베르뇌유를 찾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끝난다. 이 작업은 현실의 그림자가 무에서부터 감광지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과 같이 붙잡으려 하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기억(87-88)이기에, 아우스터리츠의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고 언제나 진행형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종종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이었다. 허망하며 허망하고, 이미 그 끝이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호명하기를, 기억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마저 없다면 무너질 것이라는 윤리적 감각의 외침 때문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그들, 또는 당신을 불러야 할지 그 자세를 생각할 따름이다..



¹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노자, 도덕경) 추구(Straw Dogs)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원제이기도 하다.



덧붙임) 행복한 책읽기책읽기의 괴로움

오랫동안 나에게 아우스터리츠는 숙제와 같은 책이었다. 제발트 읽기라는 다짐이 긴 시간 동안 미뤄지고 있다는 반성의 외침이기도 했다. 결국 불현듯 손에 집게 된 이 책을 다 읽은 뒤 내가 느꼈던 감정은 김현 평론가의 책 제목들과 같았다. 때로 한 페이지가 넘게 이어지는 제발트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나, 현기증. 감정들에서 내가 담고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했으니 행복한 책읽기였다고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와 같은 구태의연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감정이 다른 감정을 상쇄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단순한 공존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감정의 뒤섞임은, 내가 다시 이 책을 펼쳐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강들은 필연적으로 양쪽으로 경계를 갖지요. 그렇게 본다면 시간의 강변이란 무엇일까요? 유동적이고 상당히 무겁고 투명한 물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간의 특성이란 무엇인가요? 시간 속으로 잠기는 사물들은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과 어떤 차이가 날까요?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이 동일한 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왜 시간은 한 곳에서는 영원히 정지하거나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곤두박질을 치나요? 우리는 시간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13-114쪽)

그들의 체온은 포유동물이나 고래,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징어의 체온과 마찬가지로 36도에 해당한다고 했어요. 36도는 자연에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입증된 수위계, 즉 일종의 마술적 경계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언젠가 이 규범에서 이탈한 것과 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와 관련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알폰소는 말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05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06-21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의 리뷰,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

아무 2018-06-21 17:30   좋아요 0 | URL
유령처럼 그동안 보내온 건 저의 게으름 탓입니다^^;; 변명 같지만 생업과 독서를 병행한다는 건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더라구요.. 그나마 2년째가 되니 책을 읽을 여유는 어떻게든 마련했는데 이를 정리할 짬을 내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독서에도 체력과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하루하루 실감하며.. 그래서 꾸준히 서재 활동을 이어가시는 cyrus님 같은 분들이 대단하시다고 느낀 날이 많았던 지난날이었습니다..ㅎㅎ..
 
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기 전까지는 단편집이기 때문에 이 제목에 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처럼. 맨 앞에 실린 작품이 모르는 사람이어서 더욱 그런 확신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을 전부 다 읽은 다음에는 괜히 책의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각기 다른 여덟 편의 단편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들은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아는 것이 없었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잘 모른다는 진실에 직면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부자 관계일 텐데, 이승우 소설에서 행적과 성격이 베일에 싸여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드문 소재가 아니다. 다만 이전까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일반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열중하거나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번 단편집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게 차이점이다(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앞에 실린 네 편이 모두 아버지의 숨겨진 면모를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은 여전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당신을 이해한다는 단정 아래 만들어진 이해는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21), 이 이해가 인물들을 진실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현실로 내몰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내가 당신을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모르는 사람, 복숭아 향기), 끝까지 진실을 부정하며 자신이 세운 이해의 벽에 그를 가두거나(윔블던, 김태호), 부정의 끝에 이르러 그의 전철을 밟기도 한다(강의).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당신이라는 하나의 인격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를,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기이한 일(161)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를 읽는 동안 종종 실감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은 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해한다는 것 역시 실패라는 귀결을 낳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견디며 나아가야 한다는 울림을.

 

인물들이 겪는 여정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여정의 종착점에서 얻는 부분적인 이해는 이해하려고 했던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모르는 사람에서의 이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추적에서 그가 얻은 것은 남편이 있는 동안에도 그의 부재를 겪어야 했던 의 어머니다. 생의 이면에리직톤의 초상에서 보였던 성()과 속()의 관점을 가져오면 자신의 운명을 좇은 아버지의 삶이 성()이고 어머니의 삶이 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 발견한 것은 평생을 속()의 풍파 속에서 살았던 어머니에게 발현되는 성()이다. 이것은 작가가 앞서 언급한 두 장편에서 일관되게 말하던 ()은 속()의 한복판에 있다는 관점과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넘어가지 않습니다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려움 속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거부하던 그녀는 어떻게든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 전화를 쓰려는 틴 카우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녀가 이해하게 되는 것은 틴 카우가 아니라 그녀 자신, 정확히 말하면 그를 마주하면서 세균처럼 퍼졌던 두려움의 정체다. “세상을 견딘다는 것은 나를 견딘다는 뜻이기도(35) 한 까닭이다. 자신의 두려움이 죄책감과 얽혀 있음을 이해하고 그를 안으로 들이려는 그녀와 절대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낸다.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어떤 문장을 생각했다. “네 탓이라고 누군가 노려볼 때 그게 왜 내 탓이냐고 항변하고 싶은데 생각하고 보면 내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삶. 멀쩡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불규칙한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 같은 그런 심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거칠게 정리하면 소설집 안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자신이 잘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들이다. 그 과정들은 작가가 동어반복으로 직조하는 문장의 힘을 얻어 치열함과 깊이를 더한다. 누군가에겐 군더더기로 보일 문장들을 사유의 깊이로 구축할 줄 아는 그의 문장은 언제나 감탄스러운 것이지만, 그 솜씨는 단편보다 장편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읽는 동안 자주 했다. 그 생각은 밀어두었던 그의 장편소설들로 눈을 돌리며 나를 재촉한다.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를, 나아가 작가의 작품을 읽는 자신을 이해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 이해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을 견디는 것도 이해의 한 과정이라는 것도.

 

 

(*) 황정은, 작가노트, 2014 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34-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붓질은 더 섬세해졌고 렌즈는 배율이 늘었지만, 늘어난 분량만큼 절제와 압축의 미는 줄었다. 첫 단편집이 보여준 원석 같은 광채가 바래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그러나 '헤마와 코쉭' 연작에 담긴 힘이 모든 걸 덮어준다. 다 읽은 뒤 스미는 가랑비 같은 슬픔이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7-10-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히리 읽으려고 이 책 들었다가 50페이지 읽고 덮었어요. 어지간하면 완독하자 주의지만 흥미가 전혀전혀 안 생기더라고요. 다시 읽고 싶을 거 같지도 않아서 팔았어요ㄱㅜ 첫 트라우마로 책장에 있는 줌파 라히리 다른 책도 좀 두려워요;

아무 2017-10-01 00:21   좋아요 1 | URL
뒤에 있는 헤마와 코쉭 연작이 아니었으면 별 네 개를 주진 않았을 겁니다. 가장 좋았던 그 연작도 <축복받은 집>보다 좋진 않았고.. 앞부분에 대해서는 분량만큼 방만해져 단편의 묘미를 취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저도 첫번째 단편 다 읽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