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서연을 베풀던 성정각
창덕궁 동궁은 이렇게 딱한 운명이었지만 그나마 왕세자의 독서와 서연이 이루어진 성정각이 남아 있어 동궁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동궁과 관련된 건물에는 어질 현(賢) 자가 많이 쓰였다. 
어진 이를 기다리는대현문(待賢), 
어진 이를 인도하는 인현문(引賢門), 
어진 이와 친하게지내는 친현문(門) 등이 그것이다.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작은 곁문에는 영현문(迎賢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어진 이를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인데, 서연에 참석하는 학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 P177

왕세자의 서연은 임금의 경연과 같은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서연을 ‘신하들이 세자를 모시고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고 도의를 올바르게계도하는 일‘로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내내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 P177

농사가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즐겁게 여길 것이니 그 기쁨이 크다. 옛사람 (소동파)이 희우로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도 반갑게 내리는 비의 기쁨을 새겨두려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 반갑게 내린 비를기뻐하면 그만일 터인데 어찌하여 정자의 이름까지 그것으로 지었단말인가? - P179

이 전각은 예로부터 세자의 집이라
집 안에 훌륭한 작품들이 새롭구나
계속하여 밝게 빛나니 어진 이를 높이 받들어
날로 더욱 친하게 되도다 - P181

효명세자는 관물헌에서 내다보는 전망을 좋아하여 관물헌 사영시(四을詠詩)로 봄꽃(春花), 여름날(夏日),  가을 달(秋月), 겨울 눈(冬雪)을 읊기도 했다. - P182

요절한 문예군주, 헌종
이제 우리의 창덕궁 답사는 내전의 동쪽 마지막 공간인 낙선재로 향한다. 낙선재의 주인공은 헌종이다. 헌종을 생각하면 나는 애처로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일어난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모두 고유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혹은 치세로 혹은 전란으로 심지어는 무능으로, 임금 자신과 당대의 상을 그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조선의 24대 왕 헌좋은 존재 자체가 희미하다. 재위 기간이 15년이나 되고 수렴청정 기간외에 직접 정무를 본 것이 9년이나 되어도 헌종 대는 세도정치 시대라고불릴 뿐 역사에서 헌종을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현종에게 헌종나름의 인생과 치세가 있었다. - P189

낙선재 권역
  헌종은 문인 학자들과 자주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여 1847년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문인들의 사랑채를 본뜬 낙선재를 지었다. - P191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留盡之巧以還造化 / 留盡之祿以還朝廷 /
留盡之財以還百姓 / 溜盡之福以還子孫 - P201

1926년 순종황제가 죽고 남겨진 세 남매는 해방 후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껄끄럽게 생각해 입국을 허가하지않았다. 이들이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가정권을 잡은 1962년 이후의 일이며, 의친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재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 P207

자연을 경영하는 한국의 정원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그대로 정원으로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한국 정원의 미학이다. - P215

한국의 전통 건축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고 풍경이다.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 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 P218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삼청동  북창(北倉)근처에 호환이 있다고 하여 포수를 풀어서  잡아내게 했습니다. 오늘 유시(酉時, 오후 5~7시경)에  인왕산 밑에서 작은 얼룩무늬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칩니다. 호랑이를 잡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고 계속 사냥하도록 하겠습니다. - P220

빙그레 난간에 기대어 작은 연못 굽어보며
조용한 정원에 일 없으니 맑은 빛 구경한다
한 쌍의 오리는 섬뜰 위에서 뒤뚱거리고
고기 새끼가 뽐내며 우쭐거리는 것이 희망에 차 있구나

嘆倚畫欄臨小塘
閑庭無事玩澄光
玉砌緩行雙彩鴨
漁兒自得意洋洋 - P231

앞서 말했듯 중층 누각의 경우 아래층을 각(閣), 위층을 루(樓)라 하기에 규장각 주합루라고 한다. 규장각의 규奎)는 28수 별자리 중 문운을 관장하는 별이고, 장(章)은 문장 또는 밝다는 뜻이 있으며, ‘규장‘ 이라는 말은  임금의 글을 지칭한다. 따라서 규장각은 임금의 어제, 어필등을 보관하는 서고를 말한다. - P239

정조의 규장각 건립
규장각 주합루는 그 건물도 건물이고, 또 거기서 내려다보는 부용정의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은정조대왕이 규장각을 세우고 학자들에게 학문과 경세를 연구케 하고 그것을 국정에 반영하여 정치 개혁과 문화 창달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500년 종사에서 세종대왕의 집현전과 정조대왕의 규장각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큰 자랑이자 오늘날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준다. - P244

이때 정조는 규장각에 제학(提學), 대교(敎) 등의  직제를 마련하고 황경원, 홍국영, 유언호 등 명신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정조는 규장각 관원들을 후원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세손 시절부터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척신(戚臣, 임금과성이 다르나 일가인 신하)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을 깊이 알고 있다. 그래서 즉위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 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를 내세운다고 장식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체로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하려는 뜻에서였을 따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부록 정조대왕 행장) - P245

그럴듯한 형식으로 장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하나 되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정조는 재위 3년(1779) 3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직을 설치하고 특명으로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인 박제가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을 등용했다. 이들이 유명한 규장각 사검서다. - P245

見來客不起
손님이 온 것을 보아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라

非先生勿入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마라 - P246

정조는 너무 기뻐서 이 책의 장점을 새로 잘 고치고 홍재(弘齋)·만기지가(萬機之暇)·극(極)·조선국(朝鮮國) 등  자신의 장서인을 찍어 개유와에 보관하도록 했다. 본래 규장각의 부설기관인 장서각에서는조선 책은 서고(西庫)에, 중국 책은 열고관(觀)에 보관했는데 중국책이 늘어나면서 새로 증축한 서고가 개유와였다. 개유와란 ‘모든 게 다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그 기상을 알 만하다. - P249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 오래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궁중의 회사(事)를 김홍도로하여금 주관하게 했다. - P252

정조시대의 문예 창달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예전 같은 기능은 하지 못하고 그저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했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영할 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 P253

서향각 書香閣
  규장각 서편에 동향한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큰 건물로,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규장각에 봉안된어진, 임금의 글과 글씨 등을 보관하고, 이따금 서적을 널어 말리던 곳이다. ‘책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 P255

정조는 진실로 인간적인 계몽군주였다. 그래서 규장각에 오면 건물이보여주는 아름다움과 함께 정조의 위업을 기리게 된다. - P260

창덕궁 후원 관람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창덕궁 후원 같은 정원이 있다는 것은 서울 사람의 복 중에서도 홍복이다. 그러나 창덕궁 후원을 다녀온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창덕궁 후원이 일반인에게 처음 개방된 때가 2004년 5월 1일로,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된다. 실제로 작년(2016), 재작년 창덕궁 관람 인원은 연간 내국인 약 160만 명, 외국인 약 40만 명이었으나 별도의 입장료(현재 5천 원)를 더 받는 후원 입장객은 많아야 하루 1,400명 수준이다.
후원 관람은 인원을 하루 최대 14회(30분 간격), 1회 100명으로 제한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봄가을을 제외하고는 100명이다차지않으니 1년에 3만 명 정도다. 그러니까 후원 개방 후 현재까지 후원 관람객은30만 명밖에 안 된다. 그중 30퍼센트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 P261

그동안 내가 맞이한 외국인 내방객들의 감상과 반응을 보자면, 그들은 자연히 자기 나라의 정원과 비교하여 말하는데, 일본인은 교토의 사찰 정원에 비해 규모가 크면서도 종합적인 것에 감동하고, 거대한 스케일에 익숙한 중국인은 자연스러운 멋에 놀란다. 중국인은 경복궁에서는자금성을 떠올리며 자기네 문화의 아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창덕궁 후원에 이르러서는 한국 문화 자체로 본다. - P262

서양인은 한결같이 인간적 체취를 말한다. 가는 곳마다 지금도 사람이 살면서 사용하는 것 같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을 경험하고 온 분들은한국의 미학이 따로 있음을 창덕궁 후원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다며 이곳 하나를 본 것만으로도 이번 방문에 만족한다고 한다. 이런 창덕궁 후원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은 진정 서울 사람의 복이자 큰 자산이다. - P262

불로문
 불로문은 넓적한 화강석 통판을 과감하게 디귿 자로 오려 세운 문이다. 모서리를 가볍게 궁굴린 것 외에는 손길이 더 가지 않았다. 돌문 머리에 새겨넣은 ‘불로문(不老門) 세 글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전서체다. - P263

의두합과 기오헌은 뜻이 일맥상통한다. 도연명의 유명한 「귀거래사」에는 ‘남쪽 창에 기대어 호방함을 부려보니, 작은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의두합과 기오헌이라는 이름을 따온 것이다. 다만 이 건물은 북향이기 때문에 남창(南窓)이 아니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두(斗) 자를 썼다. 이 집을 혹 이안재(易安齋)라고 하는 것도 이 구절에서 비롯한  것이다. - P270

이참에 궁궐 건축에서 건물 이름 끝에 붙는 명칭을 살펴보면, 건물의 형태, 성격, 지위에 따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홍순민 교수는 이를 간략히 정리해 ‘전(殿)·당(堂)·각(閣)·합(閤)·재(齋)·헌(軒)·루(樓)·정(亭)‘으로 요약했다. - P270

전(殿)은 선정전, 대조전처럼 왕과 왕비의 건물에만 사용되었고, 당(堂)은 희정당, 영화당 등 왕이 정무를 보는 집과 왕세자의 정전인 중희당 같은 건물에 쓰였다. 각(閣)은 신하들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왕세자가 서연을 여는 성정각, 내각의 학사들이 근무하는 규장각이 그 예다.
그보다 중요도가 약간 낮으면 합(閣)이라 했다. (홍 교수는 합이 각보다 오히려 높다고 보았다.) - P270

재(齋)는 낙선재처럼 서재내지 사랑채의 성격을 지닌 집이고, 헌(軒)은 마루가 넓은 건물에 붙였으며, 루(樓)는 주합루처럼 이층 건물이라는뜻이다. 정(亭)은 정자인데, 사다리나 계단으로 오르는 구조이면 평원처럼 루(樓)라고 불렀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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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華而不侈(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p.126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김부식『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15년 p.127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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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9-16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구가 용산으로 옮긴 무언가가 생각나네요
 

종묘제례의 소임을 맡은 제관들은 제사 7일 전, 의정부에 모여 제례의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를 재계라 한다. 그날부터 4일간은 산재(散), 3일간은 치재(齋)를 행하는데, 산재 기간에 왕과 백관들은 집무를 보지만 형벌과 관계된 문서는 처리하지 않는다. 귀로는 음란한 말이나 저속한 음악을 듣지 않고, 눈으로는 악한 것을 보지 않고, 입으로는술을 마시지 않고 마늘, 파 등 매운 음식을 먹지 않으며, 문상이나 병문안을 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 P84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 P91

내가 종묘 답사는 늦가을 토요일 오후나 눈 내린 겨울 아침에 자유 관람으로 하라고 권하는 것은 그래야만 이 길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P92

국가 의례를 행할 때 사용했다. 따라서 새로 지은 창덕궁은 별궁(別宮)이아니라 또 하나의 정궁(正宮)이 되어 양궐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이를 역사적으로 ‘법궁이궁(離宮) 양궐체제‘라고 했다. 왕조로서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별도의 궁궐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양궐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 P99

궁궐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인 동시에 왕과 왕의 직계존속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왕의 아버지,생존해 있는 왕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왕의 비빈 등이 포함됐다. 그때문에 계속 궁궐 규모를 확장하거나 별궁을 지어야 했다. 그로 인해 창경궁이 생겼다. - P99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 P101

내가 태조께서 개창하신 뜻을 알고, 또 풍수지리의 설이라는 것에괴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알기는 하지만, 술자(術者)가 ‘경복궁은 음양의형세에 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들은 이상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또 무인년(1398) 집안의 일(제1차 왕자의 난)은 내가 경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 P103

일제는 왕가의 전통을 지우기 위하여 창경궁을 동궐에서 분리하여 동물원·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을 창경원이라 바꾸었다. 창덕궁 후원만강조하여 관리소 이름을 비원청(秘苑廳)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두 궁궐은 창덕궁과 창경궁이라는 이름 대신 오랫동안 창경원, 비원이라고 불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창덕궁, 창경궁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국민학교 때는 창경원과 비원으로 소풍을 갔다. - P105

돈화문 앞 월대가 땅에 묻히게 된 것은 1907년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새로 마련한 캐딜락 자동차가 내전까지 들어올 수있도록 월대를 흙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후 1932년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로질러 원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돈화문 앞으로내면서 광장으로서 월대의 옛 모습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미국 제너럴모터스사에서 제작한 순종황제의 어차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P108

나무를 비벼 새 불씨를 만드는 것을 일러 찬수(遂)라 했다. 이때 쓰는 나무의 종류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맞추어 계절마다 달리했다. 이를테면 봄에는 푸른빛을 띠는 버드나무 판에 구멍을 내고 느릅나무 막대기로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 P116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찬수개화는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살아야 한다는 삶의 조건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절기가 바뀌었음을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내병조는 바로 이 찬수개화를 했던 곳이다. - P116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像 - P127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의 아름다움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땅이 시키는 대로 한 건물 배치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  두드러진다. 3조란 외조(外朝), 치조(朝), 연조(燕)를  말한다. 외조는 의례를 치르는 인정전, 치조는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宣政殿), 연조는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인 대조전이 주 건물이다. 경복궁에서는 이 3조가 남북일직선상에 있지만 창덕궁에서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래서 경복궁에 중국식의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면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가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 P129

창덕궁 전경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서 두드러진다. 창덕궁의 3조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로 인해 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를 풍긴다. - P130

경복궁 전경  
경복궁은 외조, 치조, 연조의 3조가 남북 일직선상에 있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주례」에 충실한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 - P131

"자연 지형과 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이죠. 요즘 우리나라 건축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건물 대지를 반듯하게 밀어놓고 짓는 데 있어요. 땅을 생긴 그대로 두어야 우리 정서에 맞는 좋은 건축이나오는데 말이죠. 쉽게 말해서 땅이 시키는 대로 하면 좋은 건축이 나옵니다." - P131

이 두 대의 자동차는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어차고에 방치되어 거의폐차 상태였다. 그러다 1997~2001년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미국과 영국의 본사에서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는 아주 희귀한 앤티크 자동차로대접받고 있다.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 어차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하 1층 로비에 상설전시되고 있다 - P138

순종과 황후의 어차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는 1903년에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고 황후가 탄 어차는 1909년 영국 다임러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드문 앤티크 자동차가 되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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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 제도와 종묘의 증축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150여 년이 흘러 13대 명종 대에이르면서 종묘는 한차례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5대 봉사를 한다는 것은 그 윗대 조상의 신주는 땅에 매장하여 안치하고 더 이상 제를 지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외로 불천위(不遷位) 제도라는 것이 있다. - P36

불천위 제도란 공덕이 많은 임금의 신위는 변함없이 계속 모신다는뜻으로, 신위를 옮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천위라고 한다. 태조는 무조건불천위였고 태종과 세종도 불천위로 모셔졌다. - P36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 P42

우암 송시열이 효종대의 공신으로 배향된 것도 100년 뒤 노론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추가로 들어간 것이었다. - P43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발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 P43

칠사당
  칠사당은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 공간이면서도 토속신을 끌어안아 모신것이 이채롭다. - P44

칠사당에 모신 일곱 신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칠사란 궁중을 지키는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들로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 중류(中), 국문(國門), 공(公),
행(行) 등이다. 사명은 인간의 운명, 사호는 인간이  거주하는 집, 사조는 부엌의 음식, 중류는 지붕, 국문은 나라의 성문, 공려는 상벌, 국행은 여행을 관장한다. 그러니 칠사 토착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세상을 잘 다스리기 힘들 것이다. - P44

많은 현대 건축가가 찬사를 보내듯 신을 모시는 경건함에 모든 건축적 배려가 들어가 있다.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 P46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 P49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 (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 P52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 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 P52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 P52

국가 의식으로서 종묘
제례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세종대왕이 연회 때 사용하기 위해 회례악(禮樂舞)로 작곡한 것이 「보태평」과 「정대업」이다. 보태평은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으로문덕(文德)을 칭송한 것이고, 정대업은 ‘대업을 안정시켰다‘는 뜻으로무공(武功)을 찬양한 것이다. 두 곡 모두 세종 이전 6대조까지, 즉 태조의 네 선조(목조·익조도조·환조)와 태조, 태종 등의 공을 칭송한 것이다. - P62

내가 아악을 창제하고자 하는데 창제란 예로부터 입법(立法)만큼이나 하기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면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면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하면 못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졌고, 국가가 무사(無)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리라. - P68

1910년 조선왕조가 끝나고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서 종묘제례도 막을 내렸다. 다만 대한제국 황실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李王職)이 향화(香火)를 올리는 것으로  제례를 대신했다. 8·15해방 뒤에는 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향화마저 못했다. 외침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란임을말해주는 대목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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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과 사랑으로 쓴 서울 이야기
1『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어릴 때 단성사, 명보극장 같은 개봉관에 새 영화가 들어올 때면 ‘개봉박두(開封迫頭)‘와 함께 ‘걸기대(乞期待)‘라는 말이 늘 붙어 다니곤 했는데혹시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 P4

서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중 하나다. 한성백제 500년은 별도로 친다 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도시이면서 근현대 100여 년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수도이다. - P4

서울 답사기는 모두 네 권으로 구상하고 시작했다. 첫째 권은 조선왕조의 궁궐이다.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품위와 권위는 무엇보다도 조선왕조 5대 궁궐에서 나온다. 종묘와 창덕궁은 이미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만 해도 생각이 조금 모자랐던것 같다. 제대로 문화외교 전략을 펼쳤다면 서울의 5대 궁궐을 한꺼번에등재했어야 했다. 일본 교토(京都)는 14개의 사찰과 3개의 신사를 묶어서 등재했고, 중국의 소주(蘇州, 쑤저우)는 9개의 정원을 동시에  등재했다. 그리하여 세계만방에 교토는 사찰의 도시,  소주는 정원의 도시임을 간명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궁궐의 도시이다.
- P5

첫째 권의 제목으로 삼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은 말한다‘는 창덕궁 존덕정에 걸려 있는  정조대왕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 P5

둘째 권은 조선왕조가 남긴 문화유산들을 답사한 것으로 한양도성,성균관, 무묘인 동관왕묘, 근대 문화유산들이 어우러진 덕수궁, 그리고조선시대 왕가와 양반의  별서들이 남아 있는 속칭 ‘자문밖‘ 이야기로 엮었다. 둘째 권의 제목은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로 삼았다.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는 이 글은 오래전에 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에 찍혀 있는 도장에서 본 것인데 석파정 답사기를 쓰면서 생각났다. - P6

아직은 구상단계이지만 앞으로 셋째 권은 인사동, 북촌, 서촌, 성북동등 묵은 동네 이야기로 내가 서울에 살면서 보고 느끼고 변해간 모습을담을 것이다. 도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계속 바뀌어왔다. 과거 위에 현재가 자리잡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라진 과거를 다시 되살리려는 현재의 노력도 있다. - P6

넷째 권에는 서울의 자랑인 한강과 북한산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서울이 확장되면서 편입된 강남의 암사동, 풍납토성, 성종대왕 선릉과중종대왕 정릉, 봉은사 그리고 사육신묘, 양천관아까지 한강변의 유적들과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승가사, 진관사, 북한산성, 도봉서원터를 이야기할 생각을 하면 나도모르게 가슴이 열리는 기분이다. - P7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멀리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 P9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
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 P15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1995)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 P15

승효상이 본 월대
 건축가 승효상은 종묘의 박석을 두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사진은 승효상이 촬영한 월대의 박석이다. - P21

일찍이 일본 건축계의 거장이었던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1905~83)는 1970년대에 이 종묘를 보고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라고까지 극찬한바 있다. 이는 이후 많은 일본의 건축가와 건축학자가 종묘를 방문하는계기가 되었다. - P23

"15년 만에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군."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다 느낄 텐데." - P25

"이 아래 공간과 위의 공간은 전혀 다른 곳이란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즐기렴." - P25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 P26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미니멀리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플하고 스트롱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간단한 것을 미니멀리즘이라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미니멀리즘은 감정을 배제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서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당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성과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 P27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 P27

사직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 P28

종묘는 조종(祖宗, 임금의 조상)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 정치와 행정)을 내는것이며, 성곽(城)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아 국통(國國)을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서울을 정했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 P29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섬긴다.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곧 왕이 왕일 수 있는근거였다. - P28

건국 초의 종묘 건설
이성계가 역성 (易姓)혁명에 성공하여 조선의 건국을  선포한 것은 1392년 음력 7월 17일이었다. 
제헌절은 바로 이 날짜에서 유래한 것이다. - P29

특히 태종은 건축에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천한 신분의 박자청(朴子靑)을 공조판서에까지  등용해 수도 한양의 건설 공사를 주도하게 하였으며, 신하들이 박자청의 무리한 공사 진행을 성토할때에도 그를 끝까지 보호해주었다. 창덕궁 인정문 밖 행랑이 잘못 시공되었을 때는 그를 하옥시키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풀어주었다. - P31

조종(祖宗)을 위한다면서 토목공사를 어렵게 여겨 옛  전각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마땅히 옛날의 제도를 따라서 대실(大室, 정전)의 서쪽에 별묘를  세우라. 별묘의 이름은 마땅히 영녕전(永寧殿)으로 하라. 그 뜻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편안하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년(1421) 7월 18일자)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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