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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참 사건과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다. 100년 전,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지금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부상하기까지 한국이 걸어온 역사는 특급 청룡열차와도 같았다. 날마다 격변기였고, 해마다 전환기였던 한국 현대사에서 2009년은 특별한 해였다.

두 대통령의 죽음,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1980년 광주를 겪으며 새롭게 등장했던 민주화운동 세대가 주역이 되었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우리네 일상은 늘 그렇게 이어져 흘러가지만 역사는 한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다음 시대가 곧바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다.

영화가 끝나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갔는데, 아직 다음 회가 시작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광고도 예고편도 시작하지 않은, 그런 어정쩡한 어둠 속에 우리는 놓여 있다.

촛불을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대한문 앞의 조문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열어야 할 새로운 시대로 향한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루쉰이 한 얘기처럼 어디에고 처음부터 길이 나 있는 법은 없다.

1980년대는 광주의 죽음을 끼고 산 시대였다. 전두환이 뿌린 피를 뒤집어 써야 했던 사람들은 광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는 참 불행한 시대였지만, 광주의 자식들은 그 불행했던 시대를 정말 열심히, 정말 치열하게 살아냈다. 한 시대의 가장 우수한 젊은이들이 자기 시대의 가장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헌신했던 때가 바로 1980년대였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 등 수많은 악조건에 둘러싸였던 한국이 대단히 빠른 시간 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젊은이들의 헌신성에 크게 의존했다고 할
것이다.

어른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렸지만, 바위가 깨졌다. 그런데 계란이 꾸었던 꿈만큼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지만 깨진 계란과 그 선배들은 무언가가 되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이해찬은 국무총리가 되고, 임채정은 국회의장이 되고, 김근태, 유시민은 장관이 되고, 386 학생회장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그밖에도 수두룩 빽빽하게 무언가가 되었다. 20대에 감히 꿈도 꾸지 않은 높은 자리, 좋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세상은 그만큼 좋아지지 않았다.

그들만의 민주화였다. 비록 바위는 깨어졌어도, 변하지 않은 세상이 참으로 넓었다. 그들만의 민주화는 너무 멀리 나가버리더니, 민주주의는 여의도에서의 투표 절차로 찌그러져 버렸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만큼 민주화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대통령이 벼랑에서 뛰어내려야 할 만큼 민주화되지 않았다고 얘기해야 한다.

이번 강의 제목을 ‘지금 이 순간의 역사’라고 지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역사라고 하면 그저 오래된 옛날이야기로 치부하는 분들도 있지만, 역사를 흔히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들 하잖아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건 결국 모든 역사가 ‘오늘 이 순간’으로 귀결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란 게 길게는 수천 년, 짧게는 수년의 역사적 변화들이 축적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는 바로 지금 만들어지는 것이죠.

5·18에 대해 좋은 책*을 쓴 최정운 교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5·18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한 사건이다."

1972년 유신헌법 공포식
박정희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국민들의 얼을 빼 놓은 후 10월 전격적으로 유신 체제를 가동시켰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등 유신헌법이 보장한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등에 업고 그는 본격적인 독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보도사진연감)

총을 내려놓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절대로 총을 못 내려놓겠다는 겁니다. 왜? 총을 내려놓는다는 건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그냥 내주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어떻게 텅 빈 도청을 내주느냐,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거죠. 그 사람들 어떻게 됐습니까? 그 사람들이 5월 26일 밤 도청에 남았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 보셨죠? 마지막 부분에 신애가 마이크를 잡고 외칩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죠. 배우 박철민 씨가 분한 인물이 도청에 남아 있다 마누라한테 붙들려 가죠. "이 웬수야" 하며 마누라가 잡아갑니다. 집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밤중에 그 방송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이불 속에서 꺼이꺼이 울죠. 그러니까 마누라가 한마디 합니다. "가!……" 그렇게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도청에 있었습니다.

광주의 힘
왜 광주는 기억되는가?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뻔히 죽을 것을 알고, 죽음을 기다리며 그 자리를 지킨 사람들 말이다.

광주가 진압된 이후 지역 신문들이 다시 발간되었는데 〈전남신문〉인지 〈광주일보〉인지 한 신문사에서 이런 제호를 뽑았답니다. "무등산은 알고 있다." 검열 때문에 어떠한 진실도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그저 "무등산은 알고 있다"고 표현한 거죠. 광주 시민들이 그 신문 보고 다 울었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어머니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나서지 마라.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껏 살아라."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는데, 인권변호사가 되어 데모하는 학생들을 만나보니까 그 학생들의 부모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죠. "그저 눈치껏 살아라. 나서지 마라. 너만 다친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총을 들었을까?"

광주에서의 죽음은, 광주의 장엄한 패배는 수많은 광주의 자식에 의해 위대하게 부활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청년학생들은 투쟁성의 회복을 목표로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이 단체의 상징이 두꺼비였습니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 독이 퍼져 결국 뱀은 죽어버리고 뱀의 몸을 자양분으로 수많은 새끼 두꺼비가 태어납니다. 광주의 자식들이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죽고자 했던 겁니다. 저 강고했던 군사독재가 왜
무너졌겠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이론적인 금기의 벽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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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강령의 주요 내용
 
5. 건국 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국가를 건립·보위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연환(連環) 관계를 가지게 하되 다음에 열거한 기본 원칙에 의거하여 경제정책을 추진·실행함.
① 대산업기관의 공구(工具)와 시설을 국유로 하고, 토지·광산·어업·수리·임업·소택과 수상·공중의 운수사업과 은행·전신·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공·상·기업과 성시(城市)·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 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은 중소기업을 사영으로 함.
② 적의 침략·침전 혹은 시설한 관공·사유 토지와 어업·광산·농림·은행·회사·공장·철도·학교·교회·사찰·병원·공원 등의 산업과 기타 토지 및 경제·정치·군사·문화·교육·종교·위생에 관한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附敵者)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③ 몰수한 재산은 빈공(貧工)·빈농 및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국영 혹은 공영의 집단 생산기관에 충당함을 원칙으로 함.
④ 토지의 상속·매매·저압(抵押)·전양(典讓)·유증(遺贈)·전조차(轉租借)의 금지와 고리대금업과 사인의 고용농업의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농장생산 소비와 무역의 기구를 조직 확대하여 농공대중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 정도와 문화 수준을 높임.
⑤ 국제무역·전기·수도·대규모의 인쇄소·출판·영화극장 등을 국유·국영으로 함.
⑥ 노공(老工)·유공(幼工)·여인의 야간 노동과 연령·지대(地帶)·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⑦ 농공인의 면비의료(免費醫療)를 보급·실시하여 질병의 소멸과 건강을 보장함.
⑧ 토지는 자력자경인에게 나누어 줌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자작농·소지주농·중지주농 등 그 지위를 보아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줌.

특강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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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처음 놓인 다리가 1917년 개통된 한강인도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한강대교라고 부르는 그 다리가 한강을 배를 타지 않고 건너게 해준 최초의 다리죠.

제2한강교는 1962년에, 제3한강교는 1966년에 착공됩니다. 지금의 양화대교와 한남대교죠.

체 게바라는 "둘, 셋, 더 많은 베트남을 만들자"는 유명한 연설까지 했죠. 실제로 그는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의 콩고와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로 건너가 또 다른 베트남을 만드는 계획을 실천했습니다.

현대건설 사장 시절의 이명박
1970년대에 입사해 12년 만에 현대건설 사장이 되었던 이명박은 당시의 성공 경험에서 비롯된 토건공사 제일주의 마인드가 골수에 박혀 있다.

영어로는 이 같은 토건국가의 담합정치를 ‘돼지밥통정치(pork barrel politics)’라고 해요. 이런 먹이사슬을 공유하고 그 돼지밥통에 주둥이를 처박는 사람들을 토건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재벌들이 백화점을 세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자체가 엄청난 부동산이기 때문이죠. 아파트하고 맞물리는 거예요. 주변에 좋은 백화점이 들어서면 아파트값이 올라가죠. 그러면 아파트값 올라갔네, 기분이다, 하고 백화점에 가서 물건 또 왕창 사주고요.

프랑스 혁명 당시에 상위 5퍼센트가 전국 토지의 25∼3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프랑스 혁명사에서는 "혁명이 안 일어나면 이상한 것"이라고 기술했지요. 우리나라는 1988년 기준으로 상위 5퍼센트가 전국 사유지의 65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만들고 보니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웃기는 짜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불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유교 국가로서 공개념이 굉장히 셌던 나라입니다. "보천지하 막비왕토, 솔토지빈 막비왕신(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이라는 말이 있죠.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하늘 아래 왕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건국강령을 기초한 조소앙 선생이 그 내용을 해설하면서 공개념을 이야기하죠. 즉 "전통적으로 토지는 공적인 소유였다, 우리나라 토지제도는 국유제에 모범을 두었고 문란한 사유를 국유로 전환하는 태도를 가졌다"고 규정했습니다.

건국강령을 기초한 조소앙
조소앙은 건국강령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전통적으로 토지는 공적인 소유였다. 우리나라 토지제도는 국유제에 모범을 두었고 문란한 사유를 국유로 전환하는 태도를 가졌다"고 규정했다.

적어도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국가 이전에 사람, 주권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거꾸로 국가가 절대적인 존재로서 국민을 지배한다고 배웠어요. 지난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그렇게 배운 거죠.

또 헌법 전문에 보면 "대한국민이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통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하면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했어요. 새로 ‘건국한다’고 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계승해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다음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나오는데 이 내용이 제헌헌법으로 이어졌고 현행 헌법의 전문에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제헌헌법 제87조에서 "공공성을 띤 중요 기업은 원칙적으로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할 것을 규정"한 것은 1948년 헌법을 제정할 때를 기준으로 보면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삼민주의에 입각한 중국 두 나라를 제외한 각국 헌법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예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헌법이 진보적인 색깔을
띠었다고 강조합니다.

1950년대 집권 여당이던 자유당도 1952년 창당할 때 강령을 만들면서 "우리는 독점경제 패자(覇者)들의 억압과 착취를 물리치고(요즘 운동권에서도 이런 표현은 잘 안 쓸 텐데 그때 자유당이 쓴 겁니다) 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 기업가 및 기술 있는 자의 권익을 도모하여 빈부차 등의 원인과 그 습성을 해부하고, 호조호제(互助互濟)의 주의로써 국민생활의
안정과 향상을 기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야, 이거 우리가 이렇게 충성할 필요가 없구나, 나도 내 몸 돌봐가면서 충성해야겠다, 살아야겠다, 교훈을 얻은 거죠.이게 우리나라에서 고문이 없어지게 된 과정입니다. 경찰의 인권의식보다는 물불 안 가리고 충성하다가는 나만 개피 본다는 현실적인 자각이 우리나라에서 고문이 사라지는 계기가 된 겁니다.

"그날 죽고자 한 사람은 대개 다 죽었고 살고자 한 사람은 대개 다 살았다."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이요원)가 차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시내를 돌면서 방송을 합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계엄군도 더 좋은 마이크, 더 많은 차량을 동원해 방송을 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도청이 폭도에 의해 장악되어 있습니다. 이제 계엄군이 작전을 개시하려고 하니 무고한 시민 여러분은 집으로 돌아가주십시오."

신경림 선생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 거기서부터 힘이 연결되어 100만 명이 모이는 6월 항쟁을 만들어내는 데 딱 다섯 달이 걸렸습니다.

길거리에서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죠. 정말
목이 터져라,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습니다.

10대가 불만스러워한 것이 뭘까요? "내 입에 들어갈 것을 왜 니들이 마음대로 정해? 내가 먹기 싫다는데 왜 자꾸 먹으라고 난리야." 누가 정하느냐의 문제죠. 이거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겁니다. 이 부분이 손상당한 거죠.

1992년 대선에서 정주영 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습니다. 출마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딱 네 글자로 줄여서 "드러버서"입니다. 정주영이 어느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길, 뻑하면 100억씩 달라고 하는데 아무리 재벌이지만 돌아버리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그놈들한테 100억씩 퍼 주느니 아예 그 돈 가지고 자신이 정치를 해보겠다는 거죠. 그때 정주영이 ‘아파트 반값 공약’을 처음 내놓고 ‘공산당 합법화’까지 공약으로 내놓았습니다만 떨어졌죠.

그때 자기 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욕망을 콱 죽이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운동하다가 그 조절장치에 이상이 온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모이는 데가 어딜까요? 뉴라이트입니다. 욕망을 죽이고 한참 달리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닌 것 같아, 하고 완전히 브레이크다운 된 친구들이 돌아간 곳이 뉴라이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때 검찰 고위 간부가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자조적으로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문다"고 했어요. 왜 수사 결론이 바뀌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허, 자신을 개라는데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번 촛불시위 끝나고 딱 그 표현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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