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

그리고 주소(注疏, 각주)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성(成)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均)이란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교육 현장에서도 인성교육의 참뜻으로 새겨들을 만한 것이다. - P381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국초 이래 왕조의 문신·학자들이 거의 다 성균관을 거쳐갔다. 매월당 김시습, 율곡 이이 등이성균관 출신이었고,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은 이 학교 교장인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조선왕조는 쉽게 말해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 유일한 국립대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었다. - P383

유생의 사회적 지위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1429)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고 임진왜란 후 재정 부족 탓에 75명으로 줄였다가 영조 때 120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말기에는 위상이 낮아지면서 다시100명으로 줄었다. 성균관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시행되는 사마시에 합격한 진사 100명과 생원 100명에 한해 입학이 허용되었으나 어느 시대어느 사회에나 뒷문 입학이 있듯이 성균관에도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일종의 보결생(生) 제도가 있었다. 이를 기재생(生)이라 했다. - P385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은 영원히 나라의 자산이고 희망이기에 성균관유생들은 이런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들 역시 지식인 집단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를 유학생의 상소라고 해서 유소(儒疏)라고 했다.  유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는데권당(捲堂)이라불렀다. 그래도 안 되면 동맹휴업을  감행했다. 이는 성균관을 비운다고해서 공관(空)이라고 했다. 많은 면에서 오늘날의 대학과 비슷했다. 조선시대엔 성균관이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 P386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중종 14년 (1519) 대사성 윤탁(尹悼)이 명륜당 아래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주 보게 심으면서 기초가튼튼해야만 학문을 크게 이루고 나무는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잘 자라니 공부하는 유생들도 이를 본받아 정성껏 잘 키울 것을 당부했다고한다. - P404

숭교방의 반궁먼 옛날로 돌아가서 600여 년 전,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삼봉(三峰) 정도전 (鄭道傳)은 동네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성균관 일대는  ‘가르침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교방(崇敎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학로가 있는 성균관 옆 동네가 동숭동 (東崇洞)인 것은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 P409

양반 관료사회였던 조선왕조에서 생원진사가 되었다는 것에는 출세의 첫 관문을 넘어섰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기다리는 대과는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에서 소과는 생원진사 합쳐서 200명을 뽑지만 대과는 33명뿐이었다. 게다가 재수는 기본이고 3수, 4수가 보통이었다. 대과에 급제한 나이를 보면 퇴계가 35세, 다산은 28세, 추사는 34세였다. 그때 나이 34세라면 지금의 체감 연령으로는 40대 중반은 된다. - P412

그래서 한두 번 대과를 치러보고 포기하는 이도 많았다. 또 설사 대과에 합격한다 해도 당색(黨色) 때문에  출셋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일찌감치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기도 있었다. 대과에 급제하지못하면 고급 관료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당색이 맞으면 종6품 이하 하급직은 얻을 수 있어 종6품외직(外職)인  현감까지는 나아갈 수 있었다. - P412

한때(2010) 인기를 모았던 KBS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원작은정은궐 작가가 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파란미디어 2007)인데, 그는 반중잡영」에서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며 실제로 소설 속의 일부 장면들이 무명자의 시에 기초하고 있다. - P416

그러나 이 소설과 드라마는 허구로 엮은 것이어서 반중잡영」의 내용이 전혀 관계없는 스캔들로 변질되기도 했다. 이에 성균관스캔들이방영될 때 성균관 측은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제목 로고에 ‘과자를 붙여 성균관 스캔들로 바꾸었다고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 P416

면책과 처벌
재사에는 면책 (面)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면전에서 꾸짖는행위다. 마치 요즘 대학에서 선배들이 하는 신입생 길들이기 같은 악습이다. 선배가 면책 줄 후배를 부르면 재직들이 깡충깡충 뛰며 모여들었고 이름이 불린 유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함부로 성과 이름을 부르면서 "면책이오!"라고 하고는 후배의 옷을 휘어잡아 밀쳤다 끌었다 하며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홉 번을 넘어뜨리면서 후배를 호명한 선배 앞에 - P430

이르게 하고 흩어졌다. 무명자가 말하기를 이는 후배에게 곤욕을 주기위함인데 비록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정이라고는 하나 결코 좋은 장난은아니라고 했다. - P431

성균관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건물 생김새나 둘러보다가 대성전 안을 들여다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대성전에 공자만 모셔져 있는 줄 알았다. 안자, 맹자 등 중국의성현과 정이,주희 등송대유학자를 함께 모신 것까지는 그랬었구나 하는 새로운 일깨움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 18명의 위패가 있는 것은 신기했다.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 조광조·이황이이송시열 등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낯익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김굉필 · 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준길·박세채 등 그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내 지식으로는 학문과 이력을 말하기 힘든 학자들의 위패도 있었다. -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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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은행나무
내 스마트폰 다이어리의 11월 첫째 일요일과 둘째 일요일에는 성균관(成均館)이라고 메모가 되어 있다.  그날 석전제라든지 무슨 행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성균관 은행나무의 단풍이 피크(peak)를 이루는 날짜를기억하기 위해서다. 성균관에는 모두 네 그루의 은행나무 고목이 있고그중 명륜당(明倫堂) 앞마당의 수령 500년 된  한 그루는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는데 해마다 11월 초가 되면 아름답다기보다 환상적으로 물든 그 모습이 보고 싶어 발길을 옮기게 된다. - P377

우리나라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아주 많아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 142주 중 은행나무가22주나 되고 그중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등은 수령 1천 년을 헤아리고 있다. - P378

성균관의 건립 과정조선왕조의 성균관이 한양에 세워진 것은 건국 6년 뒤인 1398년 7월이지만 그 역사의 뿌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에서는 태학(太學, 372년), 신라에서는 국학(國學, 682년),  고려에서는 국자감(國子監, 992년)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이름과 성격은 다르지만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점은 같다. 고려의 국자감은 이후 국학·성균관·성균감(成均監) 등으로 불리다가  공민왕 11년(1362)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그 상태에서 조선왕조가 들어섰다. - P380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周禮)』의 「대사악(大司樂)」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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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의 첫문장 比較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
雪国であ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 군마 현(郡馬縣)과 니가타 현(新潟縣)의 접경을 말한다. 본문의 <국경>은 모두 이 뜻이다.
† 군마현과 니가타 현을 잇는 시미즈(淸水) 터널을 가리킨다.

1. 민음사, 유숙자 번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덮고 있었다.

2. 청목사, 유승휴 번역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희뿌연히 밝아 왔다. 신호소에 기차가 멎었다.
맞은편 자리에서 처녀가 일어나 시마무라 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밀려 들어왔다. 처녀는 창 밖으로 온통 몸을 내밀고 멀리 외치듯이 소리쳤다.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사내는 목도리를 코 위에까지 두르고 귀에 모자의 털가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3. 문예출판사, 장경룡 번역
현(懸)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雪)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라(島村) 앞에 있는 유리창을 열었다. 차디찬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처녀는 차창 밖으로 잔뜩몸을 내밀더니 멀리 대고 외쳤다.
˝역장니임, 역장니임!˝
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다가온 사나이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싸매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으로 내리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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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29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명한 첫 문장으로 자주 언급되지요. 저도 저 문장이 넘 좋아서 읽다가 줄거리가 ?! ㅎㅎㅎ 전 민음사 판으로 읽었어요.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좋네요 *^^*

대장정 2022-09-29 18:18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민음사판으로 읽고, 청목사판 또 읽고 있습니다. 편안한 저넉시간 보내세요 미니님! ><.
 

<이봐요, 당신은 젊은 여성이에요. 그런데지금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대해 글을 쓰려 하는군요. 다정하고 상냥하게 굴어요. 아첨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추는 거예요. 우리 여성의 모든 술수와 책략을 쓰도록 해요. 당신에게 당신만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요. 무엇보다도, 정숙하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 펜을인도할 태세였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녀를 죽였습니다. 만일 내가 법정에 서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녀는 내 글쓰기에서 심장을 움켜 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펜을 종이에 대자마자 깨달았기때문입니다. 소설책 한 권을 평하려 해도, 자기만의 생각을 가져야 하며, 인간관계와 도덕과 성에대해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집 안의 천사>에따르면, 여성은 이 모든 문제를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성공하려면 매력적이라야 하고 환심을 사야 한다. 요컨대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내 종이 위에 그녀의 날개 그림자나 후광의 광채가 느껴질 때마다 잉크병을 집어 그녀에게 던졌습니다. 그녀는 좀처럼 죽지 않았습니다. 그녀가허구적인 존재라는 것이 그녀를 도왔지요. 유령을죽이기란 실재하는 존재를 죽이기보다 훨씬 어려우니까요. 그녀는 내가 쫓아 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기어 나왔습니다. 결국은 그녀를 죽여 버렸다고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주질긴 싸움이었고, 차라리 그리스어 문법을 배우든지 모험을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데 썼더라면 좋았을 만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경험, 그 시절의 모든 여성 작가에게 닥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집 안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여성 작가가 해내야 할 일의 일부였습니다.

소설가의 주된 욕망은 - 제가 행여 직업적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만 - 가능한 한 무의식적이 되는 것이랍니다. 그는 자신 안에 항시 나른한 상태를 유도해야 합니다. 그는 삶이 더없이 고요하고 규칙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날마다 같은 얼굴들을 보고 같은 책들을 읽으며 같은 일들을 함으로써,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환상이 그 무엇으로도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상력이라는, 그 지극히 수줍고 가뭇없는 정신 작용을 둘러싼 모색과탐사, 그리고 그 날쌔고 돌연한 발견 같은 것들이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이런 상태는 남녀 불문하고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우리가 싸우고 있는 목표, 이 막강한 장애물들과 싸움을 벌이는 목적에대해서도 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목표를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수많은 직종, 나로서는 다 알 수도 없는 직종에서일하는 여성들로 둘러싸인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보듯, 그 전체적인 형세는 대단히 흥미롭고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남성들이 전유하던 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획득했습니다. 여러분은엄청난 노력과 수고 끝에 그 집세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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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린 도독은 『난중일기』와 『징비록』에 공적에 욕심을 부리고 퇴각하는 왜군을 쫓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기술되어 있고, 춘원 이광수의 소설『충무공 이순신에서 진린이 이순신 장군의 공을 가로챈 나쁜 사람으로묘사된 이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진린 도독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가혹할 정도로 왜곡되었다며 객관적 자료에 의해 재평가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 P336

대국의 지원군으로 온 진린이 처음에는 술잔을 집어던지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이순신 장군의 인품과 전술에 탄복하여 힘을 합쳐 왜적을 물리쳤고, 이순신 장군의 사망 소식을듣는 순간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했다고 한다. - P336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순신이 조정 대신의 모함을 받아 통제사 지위를 빼앗기고 백의종군한 바 있는데 전란이 끝난 뒤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걱정했다. 아울러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구하여 황제의 신하로 삼아달라고까지 했다.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에게 팔사품(八賜品 보물 제440호)을 내려주었다는  것이 4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정설이었는데, 장경희 교수는 최근에 이 팔사품 또한 진린 도독이 주고 간 것으로 이후 제1대 통제사 이순신을 기억하는 상징이 되었음을 밝혔다 - P336

이순신은 하늘과 땅을 경영하는 재능이 있었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 P337

이순신 장군을 이처럼 한없이 칭송했던 진린 도독이었다. 진린은 귀국하고 얼마 안 되어 1607 년 광동 도독 재임 중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1644년 끝내 명나라가 망하자 광동성에 살고 있던 진린의 손자 진영소(陳)는 수하의 수병 5명과 함께 오랑캐에 짓밟힌 조국 명나라를떠나 조상의 얼이 살아 있는 조선으로 건너와 고금도 관왕묘에 있는 조부 진린 도독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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