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 왔다. 사람들이 하룻밤 동안 한 방에 모여 순서대로 괴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꾼 한 명에 듣는 사람도 한 명, 한 번에 하나의 이야기를 청하여듣고 그 이야기를 결코 바깥에는 흘리지 않으며,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
이것이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의 정취이다.

지금 막 들어온 소식입니다. 조금 전 오후 8시 20분 쯤, 주자동차도다카이도 인터체인지 부근에서도로를 달리던 고속버스가 방호책을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승무원과 승객 중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방호책의 이음매에 처박힌 형태로 차체 왼쪽이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파손된 버스가 TV 화면에 크게 나오고 있었다. 마치 종이처럼 구겨진 버스의 모습은 충돌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버스 운전기사는 경상을 입은 듯 구급대원에게 응급처치를 받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큰 사고를 내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졸음운전을 했습니다."

교통조사과로 발령받은 지 벌써 5년이다. 신입 니시키노에게 요모기다는 만주 박사 같은 존재인데 그새에는 수많은 희생자가 쓰러져 있었다. 최근 2, 3년 동안 교통사고 사망자 수 추이는 연간 4 명에서 5천 탈락이였는데, 자신이 경찰관이 된 해에는 9천 명을 넘어섰다. 교통전쟁이라고 불립 치 오래인데 그 상황이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전쟁 상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사체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다행인 편이다.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진사체, 배속 내용물이 아스팔트에 쏟아져 흩어진 사체, 상반신이 저며지다시피 한 사체.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이누카이의 지적을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은 와중에, 교통조사과에서는 고다이라를 자동차운전 과실치사상죄로송치하자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물론 그보다 중죄인 위험운전치사상죄 적용도 논의했지만 원래 졸음운전이나 지병이 있는 상태에서의 운전은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아서 이안은 단박에 무산됐다.

형법 제211조 2항, 자동차 운전상 필요한 주의를 게을리하여 사람을 사상케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또는 백만 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그 상해가 가벼운 경우에는 정상을 참작해 형을 면제할 수 있다.

자동차운전 과실치사상죄의 조문은 읽을수록 이번 사건과 일치했다. 더욱이 피의자 고다이라 신지에게는 음주벽이나 사소한 위반 기록도 없다. 체포 후 태도도 성실하고 사고 직후부터 사죄 의지도 어필하고 있다. 우수한 변호사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정상 참작을 이끌어 내리라.

"실제로 말입니다, 하루 운행거리 제한이 670킬로미터라는 기준부터가 정상이 아니에요.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형사님도 심야에 670킬로미터를 운전해 보세요. 분명 도중에 녹초가 될걸요?"

"그렇겠죠. 버스회사 운행 관리 담당자들은 전부 연속 운전 거리는 4백 킬로미터 정도가 한계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670킬로미터라는 기준은 국토교통성에서 내놓은 지침일 텐데………."
"그 670킬로미터의 근거를 아십니까?"
"분명, 국토교통성이 전국 아흔두 개 전세버스 사업장의 운행 데이터를 추출해서 분석한 결과……였을 텐데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현장의 목소리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670킬로미터라는 제한 기준에 다른 근거가 있다는 말이지요."
"다른 근거라니요?"
"물론 이건 우리 기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긴 하지만, 오사카에서 도쿄 디즈니랜드까지 거리가 딱 670킬로미터거든요."
"설마요. 그냥 우연이겠죠."

"설마가 사람 잡는 일 많습니다. 형사님도 공무원이니 매년 국토교통성에서 트럭 협회나 대기업 여행대리점에 낙하산 보내는 거 아시잖아요. 만약 그런 황금노선이나 장거리를 운전기사 한 명으로 커버할 수 있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이득이죠."
"하지만 이번처럼 운전기사의 과도한 근무가 사회 문제시되면 국토교통성도 기준을 수정하라는 압박을 받을 겁니다."

실제로 언론 보도가 과열되고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토교통성의 안전정책과는 제한 기준 670킬로미터의변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검토에 감시체제 강화를 목적으로 한 새 법인 창설 안도 당연히 따라붙었다.

한 노인의 죽음, 그리고 지나치게 착실한 젊은이 한 사람의 앞날을 제물 삼아 관료들이 또다시 약속의 땅을 넓혀갔다. 그것이 이 나라가 돌아가는 꼴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부끄러움이 남는다. 두 눈을 뻔히 뜨고도 정말 죄많은 자들을 못 본 체하고 마는 분한 마음도 남는다. 지금 요모기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제물이 된 젊은이의죄상을 현실적으로 타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 정도다.

"이건 제 지론인데, 세상에는 완전히 착한 사람도, 완전히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속이는 자와 속은 자만 있을 뿐입니다."
"고다이라 씨에게 사람을 속이는 자라고 하는 건 듣기 거북하군요."
"제가 언제 고다이라를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고다이라는 속은 자입니다."
"네?"

"학교폭력은 뒷골목에서 못난 인간이 못난 인간을 괴롭히는 짓이야. 그래서 강자와 약자가 있으면 반드시 학교폭력이 일어나지. 비단 요즘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야. 우리 때도 있었어. 그러니까 몇 년이 지나도 학교폭력 자체는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하지만 이번 일로 교장이든 야가미 선생이든 징계를 받으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학교폭력은 언제 어디에나 있어. 제 몸 지키기에 급급해 책임 회피할 궁리나 하는 놈들이 교사거나교육위원회에 있는 한 이런 사건은 절대 없어지지 않아."
"하루키. 넌 괜찮은 거지?"
어머니가 문득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거나 괴롭힘당하지는 않지?"
"엄마, 내 성격 알지? 이번 마사야 사건 때는 나서기는 했지만 원래 눈에 띄지 말고 소란도 일으키지 말자는 주의잖아. 그런 콘셉트니까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흠, 글쎄.........

"그런데 중2라서 처벌받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만 14세 미만이면 법률상 성인과 같은 벌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야. 교도소에는 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가정법원의 판결로 소년원에 갈 수 있어."
"그렇게 끔찍한 짓을 했는데도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에요?"
"소년법은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개정 이야기가 나온단다. 적용 연령을 낮췄는데 이번에는 그 적용 연령보다어린아이가 흉악범죄를 일으켰지. 마치 도돌이표처럼."
"그런 건 이상해요."

"너희 나이 때는 아직 모를 테지만 평범하게 산다는 것도 나름대로 힘들고 대단한 일이란다. 게다가 평범하기에오히려 더 수많은 사람과 희노애락을 나눌 수 있지.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밤에 안심하고 푹 잘 수 있다. 평온한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범죄자는 그렇지 못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열지 못하며 불안해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지지. 그게 갱생하지 못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진정한 형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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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우수한 도자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때우리보다 뒤처졌던 사람들도 해온 일들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만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다보니 우리의 도자문화를 보편화·세계화시키지 못한 탓이다. 단언컨대, 자포니즘 도자기의 어디엔가는 조선백자의흔적이 묻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등한시하다보니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을때, 우리는 세계에 대고 우리의 도자문화가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194

이제 우리는 자신을 세계사적 지평에 올려놓고 우리가
가졌던 것과 갖지 못했던 것을 반듯하게 가려내면서 이어가야 할 것은 또한 무엇인가 깊이 사색해봐야 할 것이다. - P195

유용한 수산지원이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그러나 제대로 개발해 활용하고 있지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된 평가다.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국민의 잠재된 에너지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비숍의 지적이다. - P199

조선인들의 성정(性情)이나 생활관습은 언제  어디서나 이방에서온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도덕과따뜻한 인정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곳곳에서 찾아볼수 있다. 한반도를 8년간 12번이나 여행하고 『한영대사전』을 편찬해우리나라 영어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게일(J.S. Gale)은 저서 『전환기의 조선』 (1909)에서 한국인은 정직해서 신뢰할 수 있고, 신용을 중시하며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등서양인보다 더 훌륭하다는 호평을 내린다. - P201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나 이미지는 이토록 다르다. 이러한편차는 근원적으로 보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주의적 ·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인식지평에서 바라보는가 아니면 남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타자의 인식지평에서 바라보는가 하는 근본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들의 조선체류기간이나 체험의 심도, 그리고 정보수집대상과 경로의 차이도 그러한 편차를 낳게 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 P203

서양인들이 본 조선을 떠올리노라면 비분강개하기도 하고 애상이나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것을 피하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공자가 "논어"의「학이(學而篇)」에서 말하듯이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하기 [往而知來者]" 때문이다. - P204

고구마가 알려지면서 재배된 시기는 1760년대다. 당시 예조참의였던조엄(趙)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쓴 기행문인 『해사일기 (海事日記)』에 의하면,  그가 일본으로 가던 길에 쓰시마섬[對馬島]에서  고구마를 발견해 들여왔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쓰시마섬에 감저(甘藷)라는 것이 있는데, ‘효자‘ 혹은  ‘고귀위마‘로 부른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져다가 심으면  문익점의 목면처럼 백성들을 매우 이롭게할 것이라고 말한다. - P219

1905년에 국내 최초의궐련으로 ‘이글‘이 생산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30여 종의 담배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로서의 담배 도입은 당초부터 적지 않은 저항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담배에 인이 박인다는 이유로1650년경에 인조가 금연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 P224

조상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것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아니라 우리의 기호와 실정에 맞게 고치고 새김질하여 완전히 소화함으로써 전통문화로 승화 고착시켰다. 이것은 문명교류에서 보기드문 순기능적 수용의 본보기다. - P225

끝으로 『표해록』의 행간마다에서 저자 최부의 높은 소양과 도도한기질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만의 특성이라 말할 수 있다. 최부는 조선의 문사로서 
포학지사(範學之士, 박식한 인사)다움을, 
조선의 사람으로서 정도직행지사(正道直行之士,  바른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인사)다움을 
조선의 관리로서 충군애국지사(忠君愛國之士)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233

최부의 표해록』이 3대 중국기행문의 하나라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4대 세계기행문의 하나로 꼽힌다. 이렇듯 우리는 자랑스러운 세계적 문화유산을 다수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세계적 문명교류에도 기여해왔다고 당당히 자부할 수 있다. - P234

우리 겨레의 5,000년 문명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순간도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늘 남들과의 어울림 속에서무언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 주고받음은 공간적 매체인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명사에서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을 통틀어 씰크로드(Silk Road)라고 한다. 씰크로드를 제쳐놓고 문명의 교류나 세계성을 논할 수 없다. - P237

요컨대 씰크로드는 문명의 유대이고 세계로의 이음길이다. 그런데 이 본연의 유대와 이음길이 무시당해왔으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238

한 나라의 세계성은 비단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보편성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가치의 창출, 즉 개별성에 의해서도 보장된다. 사실 모든 보편성은 교류를 통한 개별성의승화다. 개별성을 떠난 보편성이란 있을 수 없다. - P251

‘문명교류기행‘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류사적 이해에서 시동을 건긴 여정으로서, 그 지향점은 ‘한국 속의 세계와 그 세계성을가늠하는 데 있다. 비록 영욕이 엇갈린 역사지만 그것이 우리와 운명을 같이해온 역사이고, 또 그 연장선상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더 냉철하게 어제를 성찰하고 오늘을 점검하며 내일을 설계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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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李五德, 본관?

출생 1925년 11월 14일

사망 2003년 8월 25일 (향년 77세)

이오덕을 읽어보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는줄 미처 몰랐다.
읽은책, 가지고있는책 단 1권 ㅠㅠ

<알라딘 저자소개>
1925년 11월 4일에 경북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에서 태어나 2003년 8월 25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무너미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열아홉 살에 경북 부동공립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예순한 살이던 1986년 2월까지 마흔두 해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스물아홉 살이던 1954년에 이원수를 처음 만났고, 다음 해에 이원수가 펴내던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아동문학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 뒤 이원수의 권유로 어린이문학 평론을 쓰게 된다. 1973년에는 권정생을 만나 평생 동무로 지냈다. 우리 어린이문학이 나아갈 길을 밝히기 위해 1977년에 어린이문학 평론집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펴냈다. 이 책에서 절대 자유의 창조적 정신을 발휘한 어린이문학 정신을 ‘시정신’, 그에 반하는 동심천사주의 어린이문학 창작 태도를 ‘유희정신’이라 했으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린이문학의 ‘서민성’을 강조했다. 또한 모든 어린이문학인이 새로운 문명관과 자연관, 아동관에 서지 않고서는 진정한 어린이문학을 창조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린이문학의 발전을 위해 작가들과 함께 어린이문학협의회를 만들었으며, 어린이도서연구회를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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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23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네요. 얼마 전에 <우리글 바로쓰기 1>권만 읽었어요^^; 한 작가를 파려면 다른 읽기는 물리쳐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네요~ㅎㅎ

대장정 2022-10-23 08:31   좋아요 1 | URL
선생님, 요즘은~ 7년전에 한권읽었어요. 퐁당퐁당 읽으면 그래도 괜찮더라구요. 책 준비해서 한번 해볼랍니다.ㅎㅎ^^.

프레이야 2022-10-23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오덕 읽기 대장정 시작하시네요. ^^
모아놓으니 이렇게나 많군요. 집에 두세 권 있는데 읽었던 게 까마득합니다. 깨끗한 우리말 쓰기 이오덕 선생님 불러주셔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심한 번역투도 그렇고 오염된 우리말 우리글 쓰고 있진 않은지 말이죠.

대장정 2022-10-23 09:26   좋아요 2 | URL
ㅎㅎ 아직요, 준비가 아직 안됐습니다. 정수일교수님 책 사기만하고 읽지 않은게 많아서 교수님 책 좀 빼고 연장준비해서 시작하려구요. 제가 하는일이 건설쪽이라 아직 일본말이 많이 남아있고 저 자신도 무의식?중에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네요.ㅠㅠ 선생님책 읽으면서 반성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명교류에서 타 문명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전통문화를 가일층 발전 · 풍부화시키는 이른바 융합(融合)의 묘미를 살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 중에는 이러한 융합물이 적지 않지만, 고려청자는 단연 그 수작으로 꼽힌다. 문명교류사에서 보면 융합성을 구현한 문명만이 선진의 반열에 올라 세계성을 인정받게 된다. - P94

작기도 하여라 푸른 옷 입은 동자
고운 살결 옥과 같구나.
너의 고마움을 무엇으로 갚을손가,
깨지지 않게 소중히 간직하리. - P98

고려청자는 시대를 넘기면서 조선시대의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磁)로 그 맥을 넘겨주었고 덕분에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세상에서 자기를 만들어 쓰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뿐이었다. 그것도 우리는여러 면에서 중국을 앞섰다. 이렇듯 문명간의 융합성을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고려청자는 ‘꼬레아‘의 상징으로, ‘미스 고려‘의 화신으로 우리 문화사뿐만 아니라 세계 도자사를 빛나게 수놓고 있다. - P102

그러나 최초의 인쇄술은 그 첫 단계인 단순인쇄 단계에서 출현한 날인인바 그 시원은 중국이 아니라 5,000년 전의 메소포타미아이며, 인쇄술의 꽃이라고 하는 금속활자의 도입에서는 우리에게뒤지고 있다. 목판인쇄의 경우에도 중국사람들은 자존심을 걸고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약칭『무구정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면서 신빙성도 별로 없는 몇몇 목판인쇄본 유물을 들고 나와 우리보다 앞섰다고 강변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인쇄술이 중국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통념은 이제 깨져야 할 것이다. - P105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과 금속활자본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인쇄문화에 관한 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가 인쇄문화의 당당한 창도자라고 한들, 여기엔 하등의 하자가 없다. - P107

중국에서 금속활자인쇄에 실제로 성공한 것은 15세기 말엽 명나라 때다. 우리의 『직지』보다 한 세기나 뒤에나온 인본들을 보면 활자의 주조나 조판 기술은 우리 것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허술하다. - P111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인쇄문화연구가카터(T. F. Carter)는 고려 말과 조선 초 무렵에 "한국은 인쇄술에서세계를 선도하고 금속활자의 사용을 고도로 발전시켜 중국에 ‘역수출까지 했다고 지적하면서, 활자인쇄가 고려로부터 유럽에 전해졌을개연성은 있으나, 그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늘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퍽 의미 있는 지적이다. - P112

* 2005년 5월 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 포럼 - 세계정보기술 정상회의‘에 참석한 미국 전 부통령 고어(Albert Gore)는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유비쿼터스는 금속인쇄술에 이어 세계가 한국에 두번째로큰 신세를 지는 커뮤니케이션 부문의 큰 성과"라고 하면서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인쇄술은 한국에서 건너온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 P114

대장경(大藏經)이란 ‘3개의 광주리‘ 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 (Tripitaka)를 번역한  말로서 ‘삼장경‘ 혹은 ‘일체경‘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인 경(經)‘과 불자나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인 ‘율장(律藏)‘, 그리고 ‘경장‘과 ‘율장‘에 관한  다양한 해석인 ‘논장의 3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불전을 나뭇잎에 새겼기 때문에 일괄해서 ‘패엽경(貝葉經)‘이라고 불러오다가 경장과 율장,  논장을 3개의 광주리에 나누어 보관했다는 데서 ‘대장경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러한 불전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양 각국에서는 경문을 나무에 판각하기 시작했는데, 그 종류가 20여 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도 완벽한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이다. - P117

경판의 길이는68~78cm이고, 폭은 약 24cm, 두께는 2.7~3.3cm, 무게는 3~3.5kg정도이다. 한 면에 23행, 한 행에 14 자로 앞뒤 양면에 644 자이니, 전체 글자 수는 줄잡아 5,200 만 자를 헤아린다. - P121

그리고 글자를 새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성(至誠)의  발현 그 자체다. ‘1자 1배‘, 즉 글자 한자를 새길 때마다 한 번씩 절을 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기에 그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각자(字)에 오자나탈자가 거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세계 인쇄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각자공한 사람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긴다고 하면, 각자에만도 연인원 130만 명이 동원된 셈이다. 그밖에 필사공, 목공, 칠공, 운반부, 교정사, 기도승 등의 인력도  매일 200명 이상이함께했으니, 판각을 완성하는 데는 연인원 약 25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 장의 무게를 3킬로그램씩만 잡아도 240톤이나 되는 경판 전체를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 P122

고려 500년사는 국권을 지키기 위해 주변국들과 화전(戰) 양면의교착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교류를 펼쳐온 역동적인 과정이다.
특히 후반기에 와서는 강화도로 파천(播遷)까지 하는  국난 속에서도 30년간(1231~1259) 몽골의 7차 내침을 막아내고, 근 100년간(1259~1351) 의원간섭기를 슬기롭게 타개함으로써 몽골중심 천하에서유일하게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냈던 것이다. - P126

념으로 1278년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협상 끝에 원의 주둔군과 다루가치를 철수시키고 조세징수의 권한을 돌려받는 등 몇 가지 국권회복 사항에 합의함으로써 20년 전 원세조가 부왕에게 한 ‘불개토풍‘의약속과 그 연장선상에서 고려의 존속을 보장받는 사대관계의 기조를 재확인했다. 이렇게 원 세조 때 양국 간의 관계를 규제하기 위해모색된 체제를 ‘세조구제(世祖)‘라고 한다.  이 ‘세조구제‘는 향후양국 간의 국가적 관계는 물론 교류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P128

그 밖에 우리말로 굳어져버린 낱말들에서 몽골어의 잔재를 찾아볼수 있다.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비를 가리키는
‘마누라 (마노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 주로 몽골 출신 공주들의 활동무대였던 궁중에서 쓰는 이러한 호칭들은 몽골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 속어인 ‘양아치‘에서 어미 격인 ‘치‘는 ‘다루가치‘나 ‘조리치‘ (청소부), 화니치‘
(거지), ‘시파치‘ (매사냥꾼) 등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글자 ‘치‘를취한 것이다. 매나 말과 관련된 ‘보라매‘나 ‘송골매‘, ‘아질게말‘ (망아지), ‘가라말‘(검은말) 등도 몽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 P132

이와 같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대변되는 고려와 원나라 간의교류에서 우리는, 비록 이질 문명이지만 생산적인 융합이 이루어질때문명 본연의 상보 · 상조적 교류가 실현 가능하게 되며, 문명은 모방성이란 근본속성으로 인해 ‘불개도풍‘ 같은 인위적인 제어도 무릅쓰고 사방으로 전파되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는 등 문명교류의 유의미한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다. - P132

역사는 언제나 냉철하다. 누가 뭐라고 해서 그대로 되는 법도 없고,
또 누가 아니라고 해서 무턱대고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1,000년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일찍부터 있어온 한국과 아랍 이슬람 세계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코 ‘은자(隱者)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그러기에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를 이어고려와 조선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지속되어왔다. - P135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초기인 1024년과1025년, 1037년에 열라자(悅羅慈)와 하선(夏)을  비롯한 회회상인들이 100여 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개경에 와서 수은이나몰약(沒藥, 방부제), 소목(蘇木,  외과용 약)  같은 진귀한 공물을 진상했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객관(客)까지 마련해 후대하고, 돌아갈 때는 황금과비단을 하사하기도 했다. 열린 나라 고려의 아량이며, 이질 문명 간의 범상찮은 만남이었다. - P134

이슬람세계로 말하면 이때는 압바스조 이슬람제국(751~1258)의 전성기로서 이슬람문명이 세계를 향해 종횡무진으로 파급되어 급기야는 그 물결이 직·간접적으로 한반도까지 밀려왔던 때다. 그러다가몽골군의 서정(西征)으로 인해 이슬람제국이 붕괴되자 그 물결은 일시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서 고려 중기에는 만남의 자취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문명 간의 만남에는 한때의 멈춤은 있어도 영원한 끊임은 없으며, 그 멈춤조차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쉼표이자 뜀대에 지나지 않는다. - P135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진다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 - P138

고려와 이슬람세계간의 교류물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소주다. 서양에서는 ‘취중진담(醉中眞談)‘이란  이유를 들어 술을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술이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을 주선한 매체가 되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이 두 문명에 하사한 실로 진중하고 신기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 P139

이처럼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과 교류는 주로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역설적으로 이러한 만남이었기에 이슬람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심대해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P140

이렇게 문익점의 3년간 귀양살이 여부가 기록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원으로부터 귀국한 때도 3년간의 차이 (1334년과 1337년)를 보이고있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이 금지되어 목화씨 10개를 붓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의 절절한 애국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가공 · 윤색한 전설적 일화라고 짐작된다. 역사는 이런 유의 전설을얼마든지 허용하고 있으니, 굳이 허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 P145

작금 시빗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목숨을 걸고 가져온 소중한 목화씨를 남에게 부탁해 심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심증‘을들어 천익과의 협력재배를 부인하며, 또한 실 뽑는 기구인 ‘물레는호승의 도움을 받아 천익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문익점의 손자인문래(萊)가 만든 것으로서 그 이름 역시 문래에서 유래했다고 하면시, 천익은 목화재배나 수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다른 편에서는 목면재배에 성공한 사람은 문익점이 아니라 정천익이므로 사적 108호인 ‘문익점면화시배지‘란 명칭을 응당 ‘목면시배지로 바꾸어야 한다며 행정소송까지 제기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못 안타깝고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147

고려조 우왕(禑王) 때에는 문익점이 살던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웠고, 조선 정종 때는 그가세상을 뜨자 묘사를 짓게 했으며, 태종 때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을 하사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면서 시호를 충신(忠)이라  했으며 부조묘도 세우게했다. 세종대왕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해서 ‘부민(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했다. 실로 문익점이야말로 문명교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목화씨 전래와 무명의전파란 장거로 국민을 복되게 한 부민교류의 큰 별이다. - P149

교류사에서 보면, 일본의 면직업은 문익점을 통한 간접전파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일본의 면직업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했다. 우리나라도 조선조의 면업장려정책으로 인해 17세기 중엽까지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졌고,
명나라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해 그 질이높았다. 그러나 그 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문턱에서 그만 머뭇거리다가 급기야 망국과 더불어 조락하고야 말았다.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다. - P150

흔히들 우리 겨레는 ‘한핏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씨 가운에서절반 가까이가 외부에서 들어온 귀화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혈통을 따질 때, 우리들 중 순혈과 혼혈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귀화에 의한혼혈이 만만찮은 비중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100여 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1895)의 저자인 푸른 눈의 쌔비지 - 랜도어 (A. H. Savage-Landor)의 눈에 조선은  다민족의 혼혈사회로 비쳤나보다. 그런데도 우리가 굳이 ‘한핏줄‘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민족(韓民族)의 ‘용광로‘ 속에서  귀화인들을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에서는 동질성을 확보했기때문일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와 경우가 비슷하지만, 다민족화를 방치한 나머지 전근대적 민족갈등을 빚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 자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주체적 구심력이 강할 때만 인간을 포함한 외래의 문물을 순기능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 P158

당쟁을 한국인의 고질적 ‘민족성‘이라고 냉소하면서,
조선시대의 큰 병폐 때문에 나라가 망해 결국 한일합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는 일제식민사학의 해악을 갈파하고 있는 오늘, 같은 맥락에서 또 다른 병폐라고 꼬집는 이른바 ‘쇄국‘에 대해 재고를 요청하고, 조선은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 였다고 항변한들 과연 그것이 무리일까. - P164

동양 3국은 근대화와 서구에 대한 대응을 위한 방편으로서 공히 서학을 수용한 점에서는 역사의 궤를 같이했지만, 그들이 처한 역사적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수용태도라든가 서학이 3국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서로가 사뭇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한·일양국의 서학수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 P179

흔히들 조선의 서학수용을가리켜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근대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고 하며, 일본의 란가꾸수용은 일본의 정신 위에 서구의 유용한 것을 가져와 사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로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경우는 중국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서구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을 쓴다. 용어는 달라도 뜻은 그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동도‘나 ‘화혼‘ ‘중체‘는 ‘이적 측면을, ‘서기‘나 ‘양재‘ ‘서용‘은 ‘기적‘ 측면을 염두에 둔 낱말들이다.  여기서의 공통된 난제는 서학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가 하는, 이를테면전통과 근대의 조화 문제다. - P180

이러한 넉넉함과 질박함은 우리나라 도자문화의전통이다. 미술사학자 김원룡(金元龍)은 중국도자기가  장대하고 완벽하게 잘 차린 경극배우 같다면,  일본도자기는 화려하게 꾸민 기생 같고, 한국도자기는 수수하게 차린 가정부라고 했다.  - P192

그럴듯한 익살스러운 비교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도자기는 다양하고 완벽한 모습을, 일본도자기는 화려한 색깔로 꾸민 모습을, 한국도자기는 무던하고 소박한 모습을 각각의 특색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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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하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가(處容歌)」다. - P13

이 같은 처용설화의 전체 문맥을 종합해보면, 크게 3가지 주제로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흥미소가 다분한 처용-처-역신(姦夫) 간의 애정적 갈등을 내용으로 한 민담적간의성격의 주제이고, 둘째는 왕과 처용의 신이한 힘과 무속적 효험을 과시하는 신화적 성격의 주제이며, 셋째는 사찰의 영험을 확산하는 불사연기(佛事설적 성격의 주제다. 이렇게 처용설화는 민담과 신화,전설의 서로 다른 3가지 주제가 융합된 복합설화라고할 수 있다. - P15

이러한 복합성은 신라사회 자체가 무속과 불교가 혼재한 무불습합(巫佛習合) 사회라는 데서 비롯된다. 바로 이같은 복합적 성격으로 인해 처용설화는 노래와 춤, 주술과 가면 등다양한 기능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왔으며, 또한 다각적인논의의 소지를 낳게 되었다. - P16

요즘 해마다 울산에서는 처용문화제를 열어 처용을 기리는 문화 한마당을 흥겹게 펼치고 있다. 자칫 그 주인공이 외래인이라고 해서 탐탁찮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한낱 단견이고 기우이며 닫힘이다.
전승을 포함해 모든 문화현상은 어디서 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받아들여서 제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중요하다. 건국신화들을 비롯해 우리네의 많은 문화전통 중에는 그뿌리에 외래적인 요소가 적잖게 묻어 있다. 처용설화가 오랫동안의변이과정을 거쳐 전승으로 굳어져서 오늘로 이어진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만남이고 수용이며 열림이다. - P20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에 지어진 석굴암石窟庵)은 동서문명이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만나서 이루어낸 귀중한 결과물이다. 고대서양의 헬레니즘문화를 진취적으로 수용한 불교문명은 인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멀리 여기 신라땅에까지 전파되어 증세문명의 찬란한 한 장을 열었다. 그 가운데서도 석굴암은 건축구조에서부터 내용물의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문명교류의 화신으로 석굴미술사에 우뚝 서 있다. - P21

문명이 교류하는 것은 문명이 지니고 있는 근본속성의 하나인 모방성 때문이다. 문명이란 일단 생겨나면 주위에 퍼질 뿐만 아니라, 주위의 문명과 어울리면서 필요한 것은 본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문명전반을 살찌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조적인 베낌이 아니라 창의적인 모방이다. 이 점에서 석굴암은 독보적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 P22

이것은 석굴암 자체가 불법의 소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석굴암은 암자가 아니라 석불사(石佛寺)라는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소속되었다가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으로 불렀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이름에 대해 한번쯤 재고가 필요할 성싶다. - P25

그 후 주먹구구식으로 대여섯 차례 보수공사를 하면서범한 잘못들은 그 보존에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하고 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돔 외부를 보강한답시고 덧칠한콘크리트는 내부의 공기 흐름을 차단해 이슬 맺힘 현상을 낳았고, 그 후 그들이 이런 현상을 없앤다면서 두 차례 보수하면서 마구증기세척을 해댄 것이 결국 석재의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 P29

석굴암의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불교와 그에 바탕을 둔 복합적 문명체인 불교문명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숨 쉬는 문명이다. 그런데 미국의 안보전략가인 헌팅턴은 이른바 ‘문명충돌론‘에서 기상천외하게도일본은 하나의 문명권으로 설정하면서도, 불교문명은 아예 문명권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불교가 탄생지 인도에서 이미 소멸되었고,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토착문화에 통합되어 그 실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0

동남아와 동북아의 넓은 지역에 깊이 뿌리박고, 오늘도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고 있으며,  유럽인들마저도 심취되어가는 불교문명을 주제넘게 거세하는 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어불성설이다. - P31

자고로 한 나라의 위상은 그 나라가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을 얼마만큼 배출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이 많으면 소국도 강국이 되며, 세계에 대한 기여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세계성이란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하는 정신을 말하며, 이런 정신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이 곧 세계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정신을 지닌 첫 세계인이 바로 신라 고승 혜초 스님이라고 말할수 있다. - P32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 P37

月夜瞻鄉路월야첨향로
浮雲颯颯歸부운삽삽귀
我國天岸北이국천안북
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 P37

그리고 여행기에 나타난 대식 관련 기사는 특별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혜초는 사상 최초로 여행기에서 아랍을 ‘대식‘으로 명명하고 한(漢)문명권에서는 처음으로 대식 현지에서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전한 사람이다. - P39

바다는 강이든 물결은 어느 지점에서 수직으로 딱 멈춰 서지 않고잔잔한 여파를 남기면서 서서히 가라앉는다. 종교의 전파도 마냥 그러하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 물결은 중국에서 중단되지 않고 멀리 한반도까지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아직은 사료와 연구의 부족으로전파 시기와 내용, 성격, 영향, 결과 등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없지만, 그 개연성을 넘어 초전(初傳) 단계의 유입으로는 볼 수 있을것  같다. - P44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기독교의 상징물인 돌십자가가 발견된 사실,
즉 불교와 기독교가 한곳에서 어우러진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불상과 예수상이 한곳에 모셔졌다면 청천벽력이 일어날 오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상야릇한 일이다. 선이 악으로 변한 세상에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기에는 인간의 지혜가아직 너무 모자라는 현실에선 그저 그 선을 염불처럼 되될 수밖에 없다. 종교들의 어울림이라는 ‘선‘ 앞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대의 퇴행이자 고민이다. - P49

오늘도 분처상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이다. 이 역사를 알아듣지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종당에는 그러할 것이다. - P59

고선지는 우리 겨레 고유의 기개를 떨치면서 중세 동서관계사와 전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영걸이다. 그는 망국의비운을 삼키며 이국 땅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고구려유민(遺民)의 후예다. 아버지 고사계(鷄)는  고구려가 망한 후 성인으로 당에 끌려가 처음에는 하서군(河西郡, 현 깐쑤성)에서 중급장교로 있다가 점차  공을 세워 안서군(安西郡, 현 쿠처)의 사진교장(四鎭校將)으로 승격된 군인이었다. 이처럼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에 들어갔다. 그는 용모가 빼어나고 활을 잘 쏘며 말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감대담하고 인품이 출중해 20대에 벌써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올랐다. - P61

이 같은 급속한 승격은 그 자신의출중한 자질 덕분이었겠지만, 당시 파쟁에 휘말려 있던 한인 장군들과는 달리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빈천하고 무식한 번장(藩將, 이민족장군)들을 끌어들이는 이른바 ‘장기용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 P63

드디어 751년 7월 고선지가 인솔한 7만 대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과의 격전이 톈산산맥의 서북단에 있는 탈라스(현 올리아타)에서 벌어졌다. 이것이 당의 서역경영의 운명을 판가름하고 중세 동서관계사에획기적 의미를 지닌 탈라스전쟁, 즉 고선지의 제5차 서역원정이다.
불과 닷새밖에 걸리지 않은 이 전쟁에서 고선지는 전략·전술상의 착오로 패전의 고배를 마신다. 그는 상승일로에 있는 이슬람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대비책을 소홀히 했으며, 당과 동맹을 가장한카를루크족의 배반을 예견치 못하고 방심함으로써 결국 카를루크족과 이슬람군의 좌우협공을 받아 전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당군은대부분이 사살되고 일부(2만 명)는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고선지를 포함해 구사일생으로 패주한 자는 몇천 명에 불과했다. - P64

인간은 존재양식에 따라 크게 순수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단순 인간과 사회관계 속에서 남을 위해 남과 더불어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의 두 부류로 대별된다. 그런데 역사인으로서의 이 사회적 인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건적 인간‘과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건창조적 인간‘으로나누어진다. - P73

이 ‘사건창조적 인간‘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위인 (혹은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위인은 대체로 역사의 격변기에 나타나 그 격변을 타개하는 데서 선도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위인도 어디까지나사회관계 속의 인간인만큼 역사와 시대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 P74

그러나 정치의 유혹은 이 의롭고 현명한 위인을 무모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중앙귀족들의 왕권쟁탈전에 휘말리면서 딸을 46대 문성왕(文聖王)의 두번째 비로 바치기로 한다.  그러나 청운의 꿈도 잠시, 그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귀족들의 사촉을 받은 부하 염장(長)에게 술자리에서 피살되고 만다. 해상왕국 건국 18년 만인 846년의 일이다. 장보고 피살 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한동안 관장되다가 851년에 해체되고 주민들은 벽골제(碧骨堤,  현 김제시)로 강제이주되면서 찬란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 P79

신라인들의 도움 속에서 재당 9년 반 중 2년 반이나 신라인들의 도량인적산법화원에 기거한 천태종 3대조 엔닌도 귀국해서는 신라명신(新羅明神)‘에게 사은하는  예를 올렸으며,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적산선원을 세워 ‘적산대명신‘ (적산신라신)을 모셨다. 얼마 전 방영되었던 한드라마에서 장보고와 신라선단의 신묘한 활동을 ‘해신(海神)‘에 비유한 것은 이래서  일리가 있다고하겠다. - P81

고려는 우리 겨레사에서 첫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다. 그 역사적 위상에걸맞게 고려는 세계를 향해 선진해양국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3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늘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속에서 역사를 개척해왔고, 특히 바다를 잘 경영할때는 국운이 흥해 나라가 강성했다. 고려가 바로 그 선례다. - P84

우리 겨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세계적인 자랑거리를 들라면 으레고려청자가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려청자야말로 우리나라를 세계 도자기사의 선구로 자리매김하게 한 독창적인 문화유산이며,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세계적 수준의 자랑스러운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들의 자화자찬이 아니고 유수의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평가하는 바다. - P92

조선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로 전향한 영국의 세계적도예이론가인 버나드리치(Bernard Leach)는 백자에 엷게 비치는 청색을 보고 "이 색을 낸다면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감탄했다고 하며, 영국의 한 박물관 도자기 부장인 허니 (W. B. Honey)는 중국 및 극동 각국의 도자기』 (1945) 란 저서에서 "최상급의 한국도자기는 세계 도자기 중에서가장 우아하고 진실하며 도자기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 구비하고 있으니, 그것은 행복한 민족의 소산임을 첫눈에 말해주고 있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는다. - P93

그러나 같은 송대 사람인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수중금(袖中錦)』이란 책자에서 천하제일론 (天下第一論)」이란 글을 쓰면서 천하의 제일가는 것을 쭉  열거하는 가운데 "고려 비색(즉 청자)이 천하제일이다"라고 사실을 실토하고 만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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