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건 대부분 울적한 것이야."
유감스럽지만 시즈카도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선은 어렵고 악은 쉽다 판사로 일했던 40년 세월 동안 뼈저리게느꼈다. 정의를 따르는 데는 귀찮은 수속과 각오가 필요한데 악행을 하는 데는 아무런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 한순간 양심에 뚜껑을 닫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람의 마음도 제도도 마찬가지다.

하여튼 사람은 계급을 만들고 싶어 한다. 자기 아래에 다른 사람을 놓고 싶어 한다. 수입의 많고 적음도 사회적 지위와도 관계없는, 어쩌면 사람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통역하면 세계화, 지구 규모화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나라와 나라 사이를 가로막던 구조와 법률이 철폐되고사람 · 물건 · 돈이 국경을 넘어 찾아오는데 이는 꿈도 미래 이야기도 아닌 2005년 현재 시작된 일입니다. 쉽게 말해외국 기업체가 일본 시장에 진출하거나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난 것 등입니다. 장벽이 없어지면 균일화가 진행되어나라와 지역마다 격차가 없어지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당연히 단점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싼 노동력이 흘러들어오기때문에 젊은 층의 취업 사정이 악화하는 것입니다. 한편 고령자 쪽은 연금 제도가 파탄 나지 않는 한, 현역 때 벌었던 금액 이상의 연금을 받기 때문에 가장 유복한 세대가 되리라고 예상됩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든 악당은 돈이 많은 곳을 노리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한 군데에 봉을 모아놓고 고사카이가 열변을 토한다. 우스이의 증언을 생각하면 추임새를 넣거나 회장을들뜨게 만드는 바람잡이도 섞여 있었겠지. 요컨대 영감 상법"을 응용한 것인데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 노인이 앞다퉈 먹이에 달려든다.
* 상품이나 서비스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속이고 파는 상술.

사기죄 구성 요건은 기망→착오→교부(처분) 행위→재산의 이동이라는 흐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안건의 경우,우선 문제는 기망에서 착오의 단계로, 투자 어드바이저인 고사카이의 기망을 증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틀림없이 고사카이도 사기 그룹의 한 사람이겠지만 ‘시니어 서포트 주식회사 상장 준비실‘에서 설명을 의뢰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하면 입증은 어렵다. 게다가 업적 악화와 분식결산 사이의 인과 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어서 기업이사기 행위를 저질렀다고 입증하기 힘들다. 모두에게 보여준 자료는 ‘시니어 서포트‘ 측에서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하면 고사카이 자신도 피해자가 된다.

속은 쪽에도 책임이 있다.
남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마라.
물론 그것도 사고방식의 하나이지만 시즈카는 이에 완전히 동의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왜냐하면 그건 법의정신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헌법은 인권을 인정하고 법률이 그 확대를 억제한다. 그러나 헌법과 법률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있다.건강한 자보다 병든 자를, 부자보다 가난한 자를, 그리고 강자보다 약자를 돕는다.

법이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에 나는 여자면서 판사를 목표로 했다. 여성의 위치가 지금만큼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였기에 더욱 그랬다. 판사 임명을 받았을 때도 정당함보다 상냥함을 우선으로 하는 재판관이 되자고 결심했다. 엄격하고 준엄하더라도 마음속에 확실한 조리만 있으면 상냥함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노인이 울고 있다. 불합리와 악랄과 기댈 곳이 없음에 분노해 비관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어떻게 법조계에 몸을 담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빠른 사람이 임자라든가, 투자가인 당신들에게만이라든가, 요컨대 자신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 다른 사람이 어떻든 자신만 이익을 보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꼬임에 빠지는 거야. 본래 몇백 만,
몇천 만 엔이라는 돈은 말라서 더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야. 그걸 그저 자고 일어난 것만으로 손에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시점에서 나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재판관 자리에서 본 경험과 비교해 보면 사기 피해자는 대개 자신을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명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당연히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사기꾼에게 그런 사람만큼 알맞은 사냥감은 없다. ‘묘하게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 쉽다‘라고 사기 상습범에게 여러번 들은 적이 있다.

타인보다 현명하니까 자신은 그들보다 대접을 더 받아야 한다. 그래서 뜻밖의 행운도 선민의식도 당연하다 옆에서 보면 웃음이 나오는 이론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존재 의식이 된다.

"그렇지만, 겐타로 씨. 그것도 역시 강자의 논리예요. 궁지에 빠진 쥐도 고양이를 물어요. 학대당한 사람, 궁지에몰린 사람이 역습하는 것은 본능일지도 몰라요. 천성까지 법률로 판가름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일리 있는 말이군. 하지만 시즈카 씨. 전에 어느 법률가에게 들었는데, 재판은 범죄 행위를 판가름하는 것이지 죄를 저지른 사람의 마음을 판가름하는 건 아니라더군."
"맞아요. 법률은 사람 마음을 제어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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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편안히 작품활동 많이 하라며 한적인 가평군수로 내려보낸 것도 감동적이다. 또 율곡 이이에게는 매월당 김시습 전기를 지어오라고 명하기도했다. 그래서 영·정조 시대 문인들은 선조의 치세를 일컬어 그의 능이름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칭송했다.  풀이하자면 선조대왕 문예부흥기라는 뜻으로 명문이 나오면 ‘목릉성세에도 이런 문장은 없었다‘라며 칭송하곤 했다. - P279

동의보감의 편찬 원칙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시한다. 둘째, 처방은 요점만을  간추린다. 셋째,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 P279

책이 완성되어 광해군에게 바치자 광해군은 출판을 서두르게 하여광해군 5년(1613) 에 개주 갑인자(甲) 목활자로 출간되었다. 이때 허준의 나이 76세였다. 내의원에서 펴낸 『동의보감』 초간본 중 보존상태가 좋은 3종(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서울대 규장각소장본)은 국보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 P281

이 책을 완성한 뒤 허준은 칠순을 넘긴 고령임에도 끊임없이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의서를 펴냈다. 그것이 온역(疫, 급성 전염병으로티푸스로 추정된다고 함)에 대한 대책을 내놓은 신찬 벽온방과 성홍열에대한 처방책인 『역신방(辟疫神方)』이다.  그리고 1615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동의보감」이 완성되고 5년 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광해군은 그에게 보국숭록대부라는 칭호를 내렸다. - P281

허준의 묘는 임진강을 굽어보는 파주 진동면에 자리 잡았다. 민통선가까이 있어 오랫동안 방치되던 것을 군 당국 협조로 새 단장을 했고1992년 경기도기념물로 지정했다. - P281

고양군, 오늘날 서울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 교문동 경계에 있는 이 산이 망우산(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묫자리 (동구릉의 건원릉)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언덕에 올라 이제 나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 P286

그러나 이에 대한 전거를 보면 비슷하지만 상황 설명이 약간 다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9년(1683)  3월 25일 기사에 태조의 존호를 올리는대신들의 논의 중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태조께서는 자손들이 뒤따라 장사 지낼 곳이 20개소에 이를 정도로 많게 된다면 내가 이제부터 근심을 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곳(동구릉)의 가장 서쪽 한 가닥의 산봉우리를 이름하여 망우리(忘憂里)라  하였습니다. - P286

종친 1품은 사방 100보로 하고 이하 10보씩 줄여 문무관 1 품은 사방 90보, 문무관 2품은 사방 80보, 문무관 3품은 사방 70보, 문무관4품은 사방 60보, 문무관 5품은 사방 50보, 문무관 6품 이하 및 생원 · 진사는 사방 40보 - P291

일찍이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누추한 서재를 읊은 누실명(陋室銘)」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스럽다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有龍則靈 - P295

1. 불굴의 애국지사 묘역: 한용운 · 오세창 · 방정환 등
2. 찬란한 문학 위인 묘역 : 계용묵 · 김말봉 · 박인환 등
3. 생생한 역사 위인 묘역: 장덕수 · 조봉암 · 지석영 등
4. 감동의 예술 위인 묘역 : 이중섭,이인성 · 권진규·차중락 등 - P301

10월 12일 이화학당은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런데 1935년에 이태원공동묘지 전체가 망우리로 이장할 때 무연고 묘로 분류되면서 여기에합장된 것이다.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때 순국했고 유관순 열사의 후손이 있을 수 없어 무연고 묘가 되었던 것이다. 유관순 열사의 넋을 우리가 이렇게밖에 기릴 수 없게 되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 P304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1962년에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19년에는 1등 서훈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 추서되었으며 중랑구에서 매년 기일인 9월 28일에 추모식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 P304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 그리고수많은 은지화(紙)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원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 P311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 P317

겨울밤에 오는 눈은 어머님 소식
혼자 누운 들창이 바삭 바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 납니다 - P341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리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웃지요.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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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던 것은 이 성북천의 푸근하면서도 호젓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북천이 복개되면서 많은 집들이 철거되었다. 그중 하나가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68)의 집이다.  조지훈의 당호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다.  "내 소, 남의 소를 가릴 것 없이 설핏한 저녁 햇살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어디에 가 있든지 아랑곳할 것이 없이 "(방우산장기1953) 내 집으로 삼는다고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성북동길 역사산책로를 조성하면서 조지훈의 집터에 ‘시인의 방 방우산장‘이라는 설치물을 세웠다. - P126

만해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온돌방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고 그 위에 ‘심우장(尋牛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심우란 진리 또는 자기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것을 동자가 소를 찾아가는 과정에 비유한 데서 나온것이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써준 ‘심우장‘ 현판은 따로 있고 여기 걸린현판 글씨는 당대 초서의 대가로 꼽힌일창 유치웅의 작품이다. 일창 선생 또한 성북동에 사신 분이다. - P140

만해 선생이 심우장을 지은 것은 54세 때인 1933년이고 여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은 해방 직전인 1944년이었으니 생애 후반 마지막 11년을여기서 보내신 것이다. - P140

「무제5」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물이 흐르기로 두만강이 마를 건가
뫼가 솟앗기로 백두산이 무너지랴
그 사이 오가는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 P144

이산(山) 김광섭(金光燮, 1905~77)은 민족적 지조를  고수한 시인이며, 초기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지적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간성과문명의 괴리 현상을 서정적으로 심화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성북동 비둘기는 시인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1960년대 후반성북동 집 마당에 앉아 하늘을 돌아 나가는 비둘기떼를 보고 쓴 시라고한다. 북정마을에 와서 읽으면 이 시가 그렇게 가슴에 와닿을 수 없다. - P147

선릉 
선릉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과 왕비인 정현왕후의 능으로 두 개의 능침이 있는 동원이강릉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긴 박석 길(참도)이 뻗어 있고 여기서 성종의 능침과 정현왕후의 능침으로 갈라진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오른쪽 숲 너머 언덕에 있다. - P153

제주목사는 보우에게 객사를 청소시키고 날마다 힘이 센 무사40명에게 각각 한 대씩 늘 때리도록 하니 마침내 보우는 주먹에 맞아죽었다.
- P213

당시 유학자들은 보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이다. 보우의불교 중흥은 문정왕후의 권세를 끼고 벌인 사상적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보우에 대한 증오는 오랫동안 유가 사회에 내려와 급기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진짜 ‘요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 역시 한때는 보우스님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 P213

그러나 보우 스님은 진심으로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고자 노력했던당대의 능력 있는 스님이었다. 그는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아 열과 성을다해 불교를 일으켰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보우 스님은 비참한 죽음을맞았고 유학자들의 기록에 역사를 더럽힌 죄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만약에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불교는 진짜 미미했을 것이다. - P213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 같은 엘리트를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 P213

지금의 선불당은 1941년에 지은 것이고 옛날에는자그마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선불당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추사 김정희가 바로 이 건물 남쪽 벽에 딸려 있는 목조 가건물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냈기 때문이다. - P223

김약술의 추방현기 발견 과정
추사 김정희는 1856년, 나이 71세로 타계하는 바로 그해에 봉은사에머물면서 선불당자리에 기거하고 있었다. 봉은사에서의 추사 모습은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이 쓴 「추사방현기(秋史記)」에  아주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 P223

봄바람 같은 아량은 만물을 능히 포용하고
가을 물 같은 문장 티끌에도 물들잖네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 P227

법정 스님의 ‘무소유‘
<판전>을 보고 일주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길 바로 아래에는 돌기와 담장을 낮게 두른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여기는 주지 스님의 거처로사용되고 있는 다래헌茶來軒)이다. 한때 법정 스님은 여기에 기거했다.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인 ‘무소유에는 이 다래헌 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 P232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逆)이니까.
이것이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상을 펴는 계기가 되었다. - P233

이어서 관아재는 겸재 정선의 예술적 역량과 성취는 중국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지칭되는 송나라 미(米),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과 거의필적할 만하다며  이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볼 수 없는 경지라고까지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겸재를 화성으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 P249

내 시와 자네 그럼 서로 바꿔 봄세
경중을 어이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에서 나오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我詩君畫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畫揮手
不知誰易更誰難 - P257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높은 산봉우리들 희미하게 나타나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 P260

曙色浮江漢
觚稜隱約參
朝朝轉危坐
初日上終南 - P260

진경문화체험실에 가면 관람객들이 관심 가는 대로 버튼을 누르면서빠짐없이 눌러보는 것이 ‘압구정‘이다. 동호대교 건너 고급 아파트의 상징인 현대아파트가 있는 곳이기에 더욱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옛날 압구정동의 풍광이 이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에 금석지감을 느끼곤 한다. - P263

산중에 폐호(戶)하고 한가히 앉아 있어
만권서(萬卷)로 생애(生涯)하니 즐거움이 그지없다
행여나 날 볼 임 오셔든 날 없다고 사뢰라 - P267

구암 허준의 의관 시절
허준은 중종 32년(1537)에 태어나 호를 구암(龜巖) 이라고 했다. 허준의 할아버지(허곤)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우수사(정3품)에 이르렀고 아버지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군수종4품)을 지냈다. 허준은 이런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서자였다. - P277

그런 허준이 어떤 경로로 의학의 길로 들어섰고 서출이라는 신분적제약을 넘어 종1품 숭록대부에까지 이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의림촬요(醫林撮要)"의  ‘본국 명의‘ 편에 나오는 짧은 증언밖에 없다. - P277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러 사람을 살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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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 평 (605제곱킬로미터)이나 된다(참고로 제주도는 약 6억 평).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왕조의 멸망 이후 근현대에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넓은들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테네, 로마 같은 고대도시들과는사뭇 다른 지형적 이점이다. 특히 한강 남쪽의 드넓은 강남 지역으로 인구가 대이동하면서 서울의 넓이와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 - P5

이런 이유로 서울 사대문 밖의 역사문화 유적은 대부분 양주군·광주군·고양군·양천현 등 옛 조선시대 경기도 군현(郡縣)이 그대로 편입된것이어서 ‘서울적(的)‘이지  않은 것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순조의 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 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 이 왕릉들의 답사기를 쓰자면 미상불 별도의 한 권이 될 것이다 - P5

성북동은 여느 유적지와 다른 근현대사 답사처다. 이곳은 근대사회로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형성된 동네로 사대문 안의 북촌, 서촌과는 또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밖 10리 지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屯田)이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때 둔전 주민들이비단 표백과 메주 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집 주위에 복숭아를 많이심어 이곳은 ‘북둔도화(北屯桃花)‘라는 명승의  이름을 얻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 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다. - P7

1930년대 들어 경성(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일제가 택지 개발을적극 추진할 때 성북동은 신흥 주택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만해한용운의 심우장,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간송 전형필의 북단장,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조지훈의 방우산장,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 수화 김환기의 수향산방 등이 있었다. - P7

한국전쟁 이후에도 시인 김광섭, 작곡가 윤이상, 화가 김기창과 서세옥, 박물관장 최순우 등이 들어와 살면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를  형성했다. 거기에다 백석 시인의 영원한 사랑 김자야의 요정 대원각이 법정 스님의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고, 간송미술관과 함께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성북구립미술관이 들어서면서 품격 높은 문화예술의 동네가 되었다. - P7

‘망우리 별곡‘은 망우리 공동묘지 답사기다. 망우리 공동묘지 역시1930년대에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성 근교 이태원, 미아리, 노고산, 신사동(은평구 고택골) 등에 있던 기존의 공동묘지들을 멀리이장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40년간 4만 7,700여 기가 들어섰다. 1973년에 매장이 종료되고 이후 이장과 폐묘만 허용하면서 현재 약 7천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 P8

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죽산조봉암, 설산 장덕수, 종두법의 지석영, 독립운동가 유상규, 소설가 계용묵,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조각가 권진규,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락 등많은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할때 무연고 묘지의 시신을 화장하여 합동으로 모신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에는 유관순 열사의 넋이 들어 있기도 하다. - P8

망우리 공동묘지는 폐장된 이후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이곳을 역사문화 위인들을 기리는 묘원공원으로가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고, 독립유공자 여덟 분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호(1~8)로 일괄 지정되었다. 금년(2022) 4월 방문자 센터 ‘중랑망우공간‘이 개관하면서 이름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었다. - P8

이번에 서울 답사기 두 권을 펴냄으로써 서울편은 4권으로 완결되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은 총 12권이 되었다. 돌이켜보건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 나온 때가 1993년이었으니 그로부터 장장 30년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가 이제 12권째를 펴냈는데도 아직 수많은 답사처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답사기 시리즈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장 여기에서 끝내지 못하는 것은 경주남산, 남도의 산사, 경상도의 가야고분 등 시리즈 전체로 보았을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유적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마침표를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다음 답사기는 ‘국토박물관 순례‘라는 제목으로 그간 다루지않은 유적들을 시대순으로 펴내고 이 시리즈를 끝맺을 계획이다. 첫 번째 꼭지는 ‘전곡리구석기시대 유적‘이고, 마지막 장은 ‘독도‘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

2022년 10월 유홍준 - P9

서울 성북동
성북동은 한양도성 북쪽 성곽과 맞붙어 있는 산동네로 북악산(백악산)구준봉에서 발원한 성북천의 산자락에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집들이 무리 지어 들어서 있다. 타동네 사람들은 성북동이라고 하면 번듯한 외국대사관저와 높직한 축대 위의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부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이 전화를 걸 때 "여기는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 집들은 1970년 12월 30일,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꿩의 바다‘라는 길을 중심으로 들어선 신흥 저택들이다. 성북동에는 이곳 외에도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묵은 동네들이 따로 있다. - P13

성북동 주민의 마전과 메주
성북둔의 설치로 30여 호의 집이 들어서면서 성북동은 비로소 사람사는 골짜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산비탈의 골짜기인데다오랫동안 버려둔 거친 땅이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둔전사람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별도의 일감을 찾아주어야 했다. 이에 물이 맑고 풍부하다는 이점을 이용해 베나 무명을 빨아 볕에 말리는 마전 일을 맡기게 되었다. 마전은 희게 표백하는 작업으로 포백(白)이라고도 한다. 내용인즉 도성 안에 있는 점포의 무명, 베, 모시 전부와 송도(개성)의 모시전부를 독점적으로 마전하는 권리를 준 것이다. - P23

권세가들의 별장(別莊)과 별시(別)가 들어서게 됐다.  별장과 별서는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庭園), 정확히 말해서 원림(園林)으로 꾸며져 있다. - P29

무성한 송림 사이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
몇 리를 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네
연기 피어 올리는 집 몇 채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천길 절벽 위 망루 하나 외로운 봉우리에 기대 있네

一流水夾萬株松
數里行過人未逢
姻火幾家隱何處
城譙千仞倚孤峰 - P29

문화유산의 가치는 학문적 통섭을 통해 총체적으로  규명할 때 제빛을 발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 P32

망국의 왕손으로서 수난받은 일생이었으나, 그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은 기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의친왕 시절 성북동 별서의 일은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동아일보』 1927년 12월 23일자에는 ‘이강공 별저 화재‘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 P39

20일 오후 12시 경에 시외 숭인면 성북리 이강공 전하 별저에 불이나서 오전 1시까지에 안채열네 간이 전소하고 부속 건물 한 채가 반소하였는데 원인은 온돌을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며 손해는 건물2,000원에 가구 100원, 합이 2,100원이라더라. - P39

동소문 밖 성북동은 호수가 70여 호에 생업되는 바는 다만 포백 장사뿐으로 (・・・) 요사이 가뭄으로 인하여 동리 우물이 29개소나 말라버리고 또는 시냇물이 또한 말라서 포백을 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그 업을 폐지하다시피 전부 중지하고 그 대신 짚신과 미투리를 삼아서 겨우 호구하기 때문에 동민의 생활난을 부르짖는 소리가 창천하던바,
요사이로 가끔 비가 시작되어 다시 시냇물이 회복되었므로 전과 같이 포백업을 시작하고 동민들은 매우 낙관을 하는 모양이라 하더라. - P41

이런 추세 속에서 성북동 ‘성저십리‘에도 주택 붐이 일어났다. 그 실상을 이태준은 「집 이야기」(1935)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성북동과 혜화동에 짓느니 집이다. 작년 가을만 해도 보성고보에서부터 버스종점까지 혜화보통학교 외에는 별로 집이 없었다.
김장배추밭이 시퍼런 것을 보고 다녔는데 올 가을엔 양관), 조선집들이 제멋대로 섞이어 거의 공지(空地) 없는  거리를 이루었다. (안동네인) 성북동도 (・・・)  공터라고는 조금도 없다. - P54

이 쌍다리께의 문인촌 중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다.  이태준은 1933년에 초가집을 사서 들어와 이듬해에 이를 헐고 아담한 한옥을 지었다. 이후 1946년 7월 무렵 월북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문학을 꽃피우고 잡지 - P56

『문장(文章)』을 주관하며 생의 전성기를 여기서  보냈다. 특히 이곳은 근원 김용준, 인곡배정국등자칭 ‘호고일당(好古一黨,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성북동 근현대 문화예술인 거리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집 앞으로 난 길에는 ‘이태준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P57

이태준은 이 집을 지을 때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던 자신의 안목을 유감없이 구현했다. 이태준은 목재부터 생목을 쓰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철원의 고가를 해체한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목수도 고급인력을 썼다며 목수들」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 P58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전에 대어 온다. (…)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기뻐하며 바란다.(『문장』 1권 8호) - P59

이태준의 상고 취미
본래 이태준에게는 뿌리 깊은 상고(尙古) 취미가  있었다. 그의 상고취미는 한마디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인 취미를 이어받은 것으로 그의롤모델은 추사 김정희였다.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이 집 현판으로 새겼다.  - P60

건넌방에 걸린 ‘문향루(聞香樓)‘ 글씨는 ‘향기 맡는 누대‘ 라는 뜻으로 차 마시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추사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 P61

이태준은 「고완」에서 조선백자의 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첫눈에 화려하지 않은 대신 얼마를 두고 보든물려지지 않고, 물려지지 않으니 정이 들고, 정이 드니 말은 없되 소란한 눈과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선 서로 어루만짐을 받고, 옛날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 영원한 긴 시간선에 나서 호연(浩然)해 보게 하고,
그러나 저만이 이쪽을 누르는 일 없이 얼마를 바라보는 오직 천진한심경이 남을 뿐이다. - P63

성장소설 사상의 월야
소설가 이태준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는 아무래도 「달밤」(1933)을꼽아야겠지만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그의 성장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인 사상(思想)의 월야(月夜)」(1946)다.  이를 읽으면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역경을 헤쳐온 어린 시절 이태준의 삶에 무한한 동정과 존경을 보냈고, 그의 문학에 깔려 있는 짙은 인간애는 어린 시절 겪었던아픔을 승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장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 P64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 용담에서 큰 부잣집 서자로 태어났다.
개화에 눈뜬 아버지는 이태준 나이 5세 때인 1909년에 식솔(어머니 ·누나. 외할머니)을 전부 이끌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런데 부친은 가자마자 죽고 말았다. - P64

이에 유족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함경도 청진을 지날 때 임신 중이던 어머니가 배 안에서 누이동생을 낳았다.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청진에 정착했고 외할머니는 강원도집이라는 작은식당을 하면서 살아갔다. 이때 이태준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그런데 8세 되는 1912년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죽었다. - P64

이후 이태준이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외할머니의 극진한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는 과정은 애처로움을 넘어 소년 이태준의 불굴의 의지에 감탄을 보내게 한다. 철원 봉명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나 칭찬해줄 부모가 없는 것이 서러웠고, 새 옷이 없어 누나 결혼식에 가지 못하고 추석날이면 동네 아이들을 피해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 P64

이태준의 문학세계
누가 뭐라 해도, 또 누구나 말하듯 이태준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별이다.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이다. - P67

이태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밤」 「복덕방」 「가마귀」 「밤길」 「돌다리」 같은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주인공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에 가슴이 아려와 책장을 덮고 한동안 빈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모진 세월을 어처구니없는 아픔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인데 전편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는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 P68

그리고 그 문장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패강랭(浿江)」의 "하늘과 물은 함께 저녁놀에 물들어 아득한 장미꽃밭으로 사라져버렸다" 같은 자연에 대한 묘사라든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글쎄요‘ 하고 없는  정을 있는 듯이 웃어 보이니…" 같은 심리 묘사가 나오면 밑줄을 긋게 한다. 특히 이태준의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에서 그 미문(美文)의 진수를볼 수 있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달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패강랭」) - P68

이태준의 문학세계를 말할 때면 으레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립해김기림 · 정지용·박태원 이상 등과 순수예술을 추구한 ‘구인회(九人會)‘의 핵심 멤버였다가, 8·15 해방이 되자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즉 카프와 함께하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뜻밖의 사상의 전환처럼 회자되곤한다. - P68

그러나 이태준의 지향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수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한 카프 방식에 반대하면서도민중적 삶의 운명을 ‘진짜‘ 문학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시대상황이 돌변하면서 이를 적극 실현할 의지를 굳혔을 뿐이다. 최원식 교수의 표현대로 ‘평지돌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당시 이태준의 마음과 결심은 무엇보다도 「해방전후」에 명확히 드러나있다. - P69

그러나 이태준이 1946년 여름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와 월북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족이었다. 그의 문학이 망가진 것은말할 것도 없고 인생 자체가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 P69

차는 다시 떠난다. 객은 모두 다시 눕는다. ‘이곳을 누워서 지나거니!‘ 깨달으니 문득 나의 머리엔 성삼문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세종께서 지금 내가 쓰는 이 한글을 만드실 때 삼문을 시켜 명(明)의한림학사 황찬(黃瓚, 음운학자)에게 음운을 물으러 다니게 하였는데 황학사의 요동 적소(所)에를 범왕반십삼도운(凡往返十三度云)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1, 2왕반도 아니요 13도라 하였으니성삼문의 봉사도 끔직한 것이려니와 세종의 그 억세신 경륜에는 오직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 P71

"근원은 항시 거기는 어떤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 P91

"남에 있었으면 북으로 올라갔을 거고, 북에 있었으면 남으로 내려왔겠지."

일제강점기라는 불우한 시대를 살다가 마침내 희망찬 해방을 맞이했으나 어지러운 해방공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 결과적으로 불행하게 생을마감한 그분들과,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한 지식인들의 삶이 안타깝게 다가오기만 한다. - P92

문장 전 26호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답사하면서 이분들의 ‘호고일당‘으로서 모습만 말하고 정작 이들이 합심하여 혼신의 힘으로 펴낸 『문장(文章)』을 말하지 않는다면 성북동  근현대거리 답사로서 크게 부족한 것이다. - P92

『문장』은 민족문학의 계승과 발전을 기치로 내걸고 1939년 2월에 창간했다. 이태준이 편집주간이었고 발행인은 이태준의 휘문고보 동창생으로 그의 일본 유학을 도와준 김연만이었다. 표지화와 권두화는 주로근원 김용준이 맡았고, 인곡 배정국은 광고주로 지원했다. 『문장』은 성북동 문인들의 합작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매달 『문장』 편집을 위해 수연산방에 모여 술상, 찻상을 앞에 두고 의견을 나누었을 모습을 능히 상상할수 있다. 어쩌면 『문장』이 있어서 우정이 더욱 깊어갔는지도 모른다. - P92

총26호를 펴냈다. 『문장』은 창작(소설), 평론·학예, 시, 수필, 고전번역 등으로 구성 및 편집되었다. 총 26호에 실린 작품 편수는 각각 소설 162, 시 180편,  시조 34편, 수필 183편, 희곡 6편 시나리오 2편, 평론 119편등이다. - P93

이광수·김동인 · 이태준·이기영 · 채만식·한설야·현진건·유진오 ·박태원 · 계용묵. 이효석·김유정·이무영 ·정비석 · 나도향 등 기라성 같은 소설가의 명작이 실렸고, 정지용·김기림 · 김광균·이육사·오장환·백석·신석정·변영노유치환 등 당대 시인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고전문학 번역과논문에는 이병기 최현배·이희승·조윤제 · 양주동, 수필에는 김진섭·이양하·이하윤· 고유섭·김소운·이능화·이극노·김상용 등이 있으니 근대 지성사의 인물들이 대부분 필자 명단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93

『문장』은 2호부터 전선문학선(戰線文學)‘이라는  고정란이 있었다.
여기엔 간혹 일제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이른바 ‘친일문학‘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당시 책 간행의 조건이자 굴레였다. 마치 1970년대 음반 테이프에 ‘건전가요‘가 한 곡 들어가지 않으면 발매할 수 없었던 것과 똑같은 강압이었다. 이태준이 1940년 『문장』(2권 9호)에 기고한 지원병 훈련소의 1일은 어쩔 수 없이 잡지의 생존을 위해 편집인이 희생한글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 P96

그런데 급기야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여 1941년 4월, 『문장』. 『인문평론』ㆍ『신세기』를 병합하고 일본어와 조선어를 반씩 실어 황국신민으로서 황도(道)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조치가 내렸다. 이에 『문장』은불응하고 자진 폐간을 단행했다. - P97

『문장』 마지막호 표지에 ‘폐간호‘라고 굵게 쓰여 있는 세 글자에는 패전을 앞두고 장렬하게 자결하는 장수의 죽음을 보는 것 같은 처연한 비장미가 깃들어 있다. - P97

수화 김환기 예술에서 전통
수화는 1913년 전라도 신안 안좌도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1933년 니혼(日本)대학 미술과에 유학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대학 재학생 시절부터 동경유학생들과 백만회(白蠻會)를 결성하고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벌였다. 백만회라는 이름은 ‘백의민족(白衣民族)‘과  포비슴(fauvism, 야수파)의 ‘야만(野蠻)을 결합한  것이었다. - P105

 <16-IV-70#166>이라는 그의 유명한 점화(點畵)를  출품했다.
화면 전체가 무수한 점들로 가득 찬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을 수화가 재해석한 것이다. 대상의 표현을 ‘맥시멈‘이 아니라 ‘미니멈‘으로 절제하는단순성을 점이라는 형태로 나타냈지만 그 점을 그리면서 수화는 ‘서울의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보고 싶은 얼굴을 그리며, 고향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상상하며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부제를 붙였다.  - P107

이 제목은 그의 중동학교 선배이자 성북동의 시인인 김광섭의 "저녁에"(1969)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P107

길상사의 관음보살상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창건 법회 때 법정 스님이 대시주자인 김자야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자 그는 "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제가 대원각을절에 시주한 소원은 다만 이곳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 P122

1999년 11월 14일 자야는 임종을 앞두고 유언하면서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고 했다. 백석의 시 나와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구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 순애보를 이생진 시인은 「내가 백석이 되어로었다.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자야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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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으로 출판계였다. (…) 입이있어도 말을 못 하였고, 붓이 있어도 글을 못 써온 40년 통한이 뼈에사무쳤거든, 자유를 얻은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인가? 눌렸던 것이 일시에 터진 것이니 세고당연(勢當然, 진실로 당연한 형세)이라,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 무방하리라. - P222

고서점과 헌책방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농부 철학자 윤구병(尹九炳)은 9형제 중 막내로 형님이  일병이부터 팔병이까지 있는데, 바로위윤팔병(尹八炳, 1941~2018)은 본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넝마주이의 왕초이자 빈민운동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한문과일어를 익혔고 사회과학서도 많이 독파해 인생관과 사회관이 뚜렷했다.
그리고 학생운동 하다 수배당해 도망다니는 속칭 ‘도발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도 준 의리로 유명하다. - P226

만 드리고 가려는데 팔병이형 뒤쪽 책꽂이에 서울대 도서관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영인본으로 펴낸 두툼한 장정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3책이 꽂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형님, 저 책이나 내가 사드리고 싶은데요" 하니 정색을하고 안 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값을 후하게 쳐드릴 건데요" 했더니 팔병이형은 찬찬히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요.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 P228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원고료도 못 드렸수 옜수 받아주슈." - P232

선생은 아침이면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있는 옥인동 자택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하셨다. 그래서 통문관 2층 전시실을 상암산방이라 했다. 어느 날 내가 상암산방으로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낡은 책을한 장씩 인두로 반반하게 펴고 계셨다. 선생은 나에게 앉으라는 눈짓을보내고는 "이 일 좀 끝내고"라고 하시며 연신 접힌 책장을 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돌보아주던 낡은 책들이 내 노년을 이렇게 돌봐주고 있다오." - P232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
불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 P242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혹은 밖으로부터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왔고 심지어는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왔습니다. - P259

‘힘‘ 포스터와 ‘전 사태‘  
1985년 7월 박진화, 손기환, 박불똥 등이 기획한 ‘한국 미술 20대의 힘‘전은 당국의탄압으로 전시장이 폐쇄되어 젊은 미술인들이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 P260

노팅힐  
영국 런던에서는 영화 「노팅힐에도 나온 포르토벨로마켓이 가장 유명한 미술품, 민속품 시장이다. - P269

인사동길 북쪽의 르네쌍스 음악감상실
나의 체험에 입각해보건대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전통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거리.
그러나 내가 인사동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인 1950~60년대 초에 고서점 말고 어떤 문화적 분위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도 증언도 별로 없다. 그래서 나보다 10년 연상으로 『우리네 옛 살림집(열화당2016) 등 생활사 분야에 많은 저서를 펴낸, 친구보다 친한 선배인 김광언형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 P271

인사동의 한정식집
인사동의 한정식집은 과연 서울의 명소로 지칭할 만한 것이었다. 상차림도 훌륭했고 맛도 정갈해 각계각층에서 회식 장소로 이용하면서 인사동을 풍성하게 만든 근거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단가를 맞출 수없어 대부분 문을 닫거나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니 사실 우리 전통 요식업계의 큰 상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에도 선천집의 구순 넘은 박영규 여사가 한정식집의 사명감을 갖고 청탁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는 간소한 밥상을 차려 옛 손님들을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 P276

음식점이란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드시는 분의 마음속에 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이숙희 사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상차림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P277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P286

김지하가 만취한 상태에서 단숨에 써내려간 이 이용악의 시는 행이나연 구분 등이 원문과는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김지하는 ‘내 글씨가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
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음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절 ‘지하형‘의 웅혼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 P293

북한산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산맥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해 한반도를 휘감아 내려오는 백두대간 중간지점의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내려오다가 솟구쳐 오른 것이 북한산이고 그 여백이 문득 멈춘 것이 북악산이다. 그래서 서울의 주산(主山)은 북악산이고  조산(祖山)은 북한산이다. - P311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臺)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壽峯), 남쪽에 만경대(景臺)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려왔다.
최고봉의 높이 836.5미터, 면적은 약 30만평 (77만 제곱킬로미터)으로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울특별시 도봉구·강북구 서대문구 ·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 양주시 의정부시 지역에 걸쳐있다. - P311

북한산은 지질학적으로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과 절리현상으로 형성된 많은 화강암 준봉들로 이뤄져 있다. 삼각산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상장봉(上將峯),  남쪽으로는 석가봉(釋迦峯)·보현봉(普賢峯)·문수봉(文殊峯) 등이 있고 문수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나한봉(羅漢峯)·비봉(碑峰)의 줄기가 백운대 서쪽  줄기인 원효봉(元曉峯) 줄기와 만난다. 
도봉산은 주봉인 자운봉 740미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五峰)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하고 있다. - P312

북한산은 서울시민과 수도권 주민에게 홍복(洪福)이 다. 시내에서 차로 30분안에 도착해 한나절 등산을 즐기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런 큰 산을 갖고 있는 대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등산 모임이 있어 나만 해도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초일회, 대학 때친구들의 문우회 멤버로 북한산 등산을 즐기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 P313

숙종 37년(1711)에 완공한 북한산성은 둘레 7,620보의 석성으로 대남문(大南門)·대동문(大同門) 등 13개의 성문, 동장대 · 남장대·북장대 등의 장대(將臺),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軍),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북한산성은 나한봉에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8킬로미터에걸쳐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문도 절반은 남아 있다. - P315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한양도성과 연결하기 위해 향로봉에서 홍제천 골짜기를 거쳐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이르는 약 4킬로미터의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조하고 홍지문을 세웠다. 이로써 한양은전란에 대비하여 남한산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강화도의 강도성으로수도권 외곽의 산성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더이상 한양까지 침범해오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 P315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불상은 그 불상이바라보는 곳이 아름다운 전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불상을 뒤로 하고앞을 내다보면 발아래 깔린 서울 시내는 물론 그 너머산세까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서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면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가 바라보인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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