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주요 법령을 정비하면서 "공직에 나가 국가 운영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길드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조항이들어갑니다. 원래 피렌체에서 경제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길드에가입해야 했는데, 이 시기부터는 정치 활동에도 길드 가입이 필수가 된 거죠. 귀족 출신이었던 단테도 공직에 나가기 위해 길드에 들어가야 했을 정도니까요. 결국 길드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할 수 없었던 겁니다. - P206

중세 피렌체의 경제 축
첫 번째는 지중해 중계무역입니다. - P206

두 번째는 섬유 산업입니다. - P207

세 번째는 앞서 주목했던 은행업입니다. - P207

당시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자기 앞에 조그만 테이블을 놓고 손님을 상대했는데, 테이블은 중세 이탈리아어로 ‘방카(Banca)‘라고 합니다. 은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뱅크(Bank)‘는 여기서 유래한 말이죠. 또 은행이 파산할 때 이 테이블을 부숴버렸다고 해서 ‘뱅크럽트(Bankrupt, 이탈리아어 Banca rotta)‘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 P207

중세 피렌체의 번영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바로 피렌체의 대성당입니다. 정식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인데간단하게 두오모라 부르죠. 아래 사진을 보세요. 도시에 대한 피렌체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아내듯 웅장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 P209

자부심이 강해질수록 탑은 높아진다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조토는 건축과 토목 기술에도 능했습니다.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피렌체 형 인재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죠. - P216

앞서 피렌체의 경제적 번영과 길드의 역할을 이야기했었죠? 사실피렌체를 이야기할 때 경제가 중요하긴 합니다만 역시 정치를 빼놓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피렌체는 공화국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국가를 책임진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어요.
피렌체의 공화제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 P221

브루니가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혀 있기 때문이죠.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피렌체인의 명예의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미켈란젤로나 갈릴레오도 이성당에 묻혀 있고요, 묻힌 곳만 보면 브루니는 당시 피렌체 사람들에게 미켈란젤로나 갈릴레오만큼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죠 - P222

무엇보다도 브루니의 책에 따르면 피렌체인들은 피렌체가 공화국이었다는 사실에큰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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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좀 더 흐르면 전혀 다른 양상이 찾아와요. 흑사병 직후에는작품의 질이 후퇴하지만 점차 미술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엄청나게 확대되는 시기, 즉 르네상스가 도래하는 거죠. - P175

미술을 저렴하게 만들다 
흑사병은 미술을 좀 더 대중과 가깝게 했습니다. 이전에는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 그리고 성공한 상공인들처럼 부유한 사람들만 살수 있는 비싼 그림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중산층이 구입할 수 있는비교적 저렴한 그림도 많이 그려지게 되지요. - P175

개인적으로 웬만한 사고나 사건은 역사의 큰 줄기를 바꿀 수 없다고생각합니다만, 흑사병만큼은 역사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변화들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유럽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많은 도시국가들 중에서도 흑사병을유독 힘들게 보낸 지역이 있습니다. 바로 르네상스 문화의 시작을보여줄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입니다. - P177

전쟁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영국 국왕은 막대한 돈을 피렌체 은행에서 빌려갔습니다. 그런데 결국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영국 국왕이 빌려간 돈을 못 갚아요. 그 여파로돈을 빌려줬던 바르디 가문과 페루치 가문이 파산했습니다. - P178

‘피‘는 무슨 뜻인가요?
촘피는 하급 노동자, 그중에서도양모를 손질하는 기술자를 가리킵니다. 즉 이런 기술자들이 지금의촘피광장 주변에 모여 살았기에 촘피란 이름이 광장에 붙여진거지요. - P183

역사적으로 그런 평가를 받습니다. 이들의 반란은 일단 성공해서촘피는 4년 동안 피렌체를 지배합니다. 결국은 내분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죠. 하지만 촘피의 난은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반란,
노동자 혁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근대 자본주의 역사의한 획을 그은 사건이 피렌체에서 벌어진 겁니다. 어떻게 보면 피렌체에는 이미 이때부터 상업화와 함께 산업화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던 거죠. - P184

1347 년 유럽을 덮친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사람들의삶의 모습까지 바꿔놓았다. 그러나 한편 줄어든 인구는 집값의 하락과 임금 상승을불러와 미술의 대중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 P186

피렌체는 1315년부터 대기근을 겪음. 1337년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피렌체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함. 그러한 상황에서 흑사병이 창궐하고 촘피의 난과밀라노의 위협까지 덮침. 1400년대에 이르러 혼란이 정리되기 시작하자 도시 재생사업을 벌임.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바로 르네상스가 됨. - P187

피렌체를 관통해 흐르는 아르노강은 때때로 범람하기도 했으나 피렌체 사람들에게 풍부한 물 자원을 제공했으며 지중해로 나아가는 창구가 되어주었다. 아르노강줄기를 따라 피렌체 사람들은 기꺼이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갈 것을 택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강 위에 세워진 다리들을 건너며 찬란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 아르노강, 이탈리아 피렌체 - P192

피렌체의 모든 것들은 붉은 포도주처럼 부드러운 보라색으로채색되어 있는 듯합니다.
- 헨리제임스, 1869년의 편지에서 - P194

앞서 스탕달이 미술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했지요? 사실 스탕달 신드롬은 ‘피렌체 신드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탕달이 미술품들을 열정적으로 감상했던 곳이 피렌체였거든요. - P195

피렌체의 전경 
‘아르노강의 아테네‘라고 불리는 피렌체는 14세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다.
이 도시를 배경으로 조토부터 미켈란젤로까지 쟁쟁한 미술가들의 이야기가 동화같이 펼쳐진다. - P196

강 하나를 두고 피렌체와 피사가 결투를 벌인 셈이네요.
꼭 고구려, 백제,신라가 한강을 놓고 싸웠던 것과 비슷하죠. 어떤사람들은 피렌체를 ‘아르노강의 아테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대 문명의 중심이 아테네였다면 르네상스 문명의 중심에는 피렌체가 있다는 뜻을 담아서 말입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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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漢拏山
2월의 마지막날 눈 다 녹기전 한라산에 가자.
지인 3명과 다녀오다.
한라산은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고도 1,000이 넘으니 눈이 있고 길이 얼어 아이젠을 착용한다.
좀 일찍 2월초에 설국이었을때 왔어야됐는데.
탐방로 예약이 꽉 차 있어 마지막날자로(2.28) 겨우 네자리, 관음사 코스로 예약. 막차 탔다.
날이 너무 좋아(사실 더웠다, 성판악 쪽 등로는 눈이 녹아 질퍽거렸다) 어려움없이 상쾌한 산행이었다.
일행중 5백넘는 산은 첨 오른다는 사람이 있어 내심 걱정했으나 다행이 별 탈없이 산행을 마쳤다.
영산이라 그런지 산객이 많았다. 젊은 처자들도 많이 보인다. 백록담 정상석 인증 줄이 100미터도 넘는다. 사진 찍기에 방해되지 않게 옆에 서 있다 잽싸게 찍고 빠진다.
관음사코스로 올라 성판악으로 내려오다 사라오름 찍고 마무리.
연휴가 끼어 제주공항엔 人山人海.
올핸 신년산행을 못했는데 한라산행으로 대신.
그동안 찍었던 백록담 사진 네컷 올려본다.

심경호 선생의 山文記行
동양 고전의 권위자 심경호 교수가 엄선한
조선시대 유산기遊山記의 정수

전국 48개 산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이이(청학산-오대산), 허목, 정약용, 채제공, 이산해, 주세붕, 허균, 김종직, 이곡, 남효온, 김만중, 유몽인 등 이름 석자를(두 자인 분도 있다)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올려 누구나 다 알고있는 쟁쟁한 분들의 유산기가 실려있다.

한라산에 대한 유산기는 총 3편
1. 林悌 南溟小乘 중 한라산부분 발췌
2. 李衡祥 地誌 중 한라산부분 발췌
3. 崔益鉉 遊漢拏山記

최익현의 유한라산기는 중고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어 아마 가장 유명한 기록이라 생각된다.

1873년(고종 10년) 대원군을 탄핵하다 제주에 유배되었고 1875년 사면되었다.
1875년 3월 27일. 제주 선비 이기남의 인도로 어른 10 명 종자 6명과 함께 탐라계곡을 거쳐, 삼각봉, 백록담 북벽으로 정상을 오른 후 남벽으로 내려와 선작지왓에서 1박 노숙한 뒤 영실로 하산했다.
현재의 관음사코스로 올라 남벽, 윗세오름을 거쳐 영실로 내려온 듯

p.523
이른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보라고 했더니, 알리는 말이 어제 초저녁과 같거나 오히려 심한 편이라고 했다. 그냥 돌아가 머물러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자가 열에 일고여덟이었다. 나는 억지로 홍조, 술 한 잔을 마시고 국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끝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해 앞으로 나아갔다. 돌길이 꽤 험하고 좁았다. 5리쯤 가자 큰 언덕이 있는데, 중산이라고 했다. 관원들이 산을 오를적에 말을 묶어 두고 가마로 갈아타는 곳이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풀어져 걷히고 햇빛이 새어 나와 내리쪼여 바다 경치와 산 모양이 차례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성(二成)의 곳으로 말을 돌려보내고, 옷차림을 가벼이 하고 짚신을신고는 지팡이를 짚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주인 윤규환은 다리가 아파 물러나겠다고 청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생선 두름처럼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p.525
이렇게 6~7리를 나아가 비로소 상봉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섞여 있고 평평하지도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하고 풍후한 봉우리가  이마 위 가까이 있었다. 초목이 나지 않고 푸른 이끼와 담쟁이 넝쿨만 돌의 표면을 덮고 있어서 앉거나 눕거나 할 만했다. 높고 밝으며 넓게 확  트여 정말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몰고 갈 만해, 의연히 티끌 세상을 잊고 속세의 먼지에서 벗어난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검은 안개가 한바탕 몰려와 냅다 치달려서 주위를 깜깜하게 만들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겼지만 이곳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흙을 한 삼태기  더 붓지 않아 구인(九仞)의 높은 산을 이루지  못하는 꼴이 될 것이므로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앞으로 나아가서 북쪽가의 오목한 곳에 이르러 굽어 바라보았더니,  가장 높은 봉우리가 여기에 이르러 갑자기 중앙이 터져 움푹 내려가 구덩이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른 바 백록담이다. 둘레가 1리를 넘고 정지한 수면은 담담하며, 반은물이고 반은 얼음이다. 홍수나 가뭄에도 불거나 줄지 않으며, 얕은 곳은 가랑이만 걷으면 되고 깊은 곳은 무릎까지 걷어 올려야 했다.

p.526
석벽에 매달려 내려가서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일행은 모두 지쳐서 남은 힘이 없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절정이기에조금씩 나아가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가니, 따라오는 자는 세 사람뿐이다. 평평하게 퍼지고  널찍이 트여 시선이 그리 어질어질하지 않지만 위로는 별과 아주 가깝고 아래로는 인간 세상을 굽어보고 좌로는 부상(扶桑, 동방의 나무)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하며, 남으로는 소주, 항주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을 끌어당기며,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은 큰 것은 구름 조각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해서 놀랍고 괴이할 정도로 천태만상이다.

p.527
20리쯤 내려오니 이미 황혼이었다.
내가 ˝듣건대 여기서 인가까지는 매우 멀다고  하고 밤공기도 그리 차지 않으니, 도중에 길에서 자빠져 지쳐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시  노숙하고서 내일 일을 홀가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자, 일행이 모두 ˝좋습니다.˝ 했다. 마침내 바위에 의지해서 나무를 걸치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후에 한바탕 얼풋  잠을 자고 깨어 보니 하늘이 벌써 새어 있었다. 밥을 먹고는 천천히 걸어 나아가는데 어젯밤 이슬이 미처 마르지 않아서 옷과 버선이 다 젖었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길을 잃어 이리저리 방황했는데 그 고달픔은 구곡양장(태황산 산길)과 십구당(양자강 상류의 험한 협곡)을 가는 정도보다 훨씬 더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는 형세라서 어제에 비하면 평지나 다름 없었다.

p.528
10리를 가서 영실에 이르자 높은 정상과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 괴석이 빼곡하게 늘어서서 웅장하고 위험이 있다. 역시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으며 그 수가 백이나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는 천불암이라 이름하는데, 아무래도 이른바 오백장군이다. 산의 남쪽과 비교해 보면 이곳이 더 기이하고 웅장하다. 산 밑에는 시내가 흘러나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길가에 있기 때문에 매우 얕고 퍽 드러나 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앉아 얼마쯤 쉬다가  이윽고 출발해 20리를 가서 서쪽 계곡의 입구로 나오자, 감영의 군졸들이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를 하고는 어스름 저녁 그늘이 깔릴때 성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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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3-03-05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장정님 멋집니다! 2023년 대운의 기운 가득^^

대장정 2023-03-05 10:4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스콧님께서도 대운이 가득하시길 바라요.

바람돌이 2023-03-05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월의 한라산은 또 그대로 멋지네요.
멋진 대장정님덕분에 멋진 한라산 사진도 보고, 최익현선생같은 분이 길에서 자빠져 자는 것보다는 같은 표현을 한 것도 알게 되고 좋네요. ^^

대장정 2023-03-05 18:2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라산은 언제가도 멋집니다. ㅎㅎ 심경호 선생께서 번역을 잘하셔서 그런거 같아요. 자빠져 자는게 아니고 지쳐서 자빠져 있단 말 같아요. 다른분 번역한거 보면 ˝피곤해서 길거리에 쓰러지는거보다˝라고 번역된거도 있네요

대장정 2023-03-05 18:19   좋아요 0 | URL
원문 찾아보았습니다.
余曰.˝聞此距人家甚遠 夜亦不寒.
與其顚倒疲困於途中,曷若暫次露宿 使明日事爲易易也.˝
 

사실 그렇게 보는 게 가장 적절합니다. 실제와 허구, 어느 한쪽으로보기보다는 둘이 서로 섞어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거예요. 즉 시에나를 이상적인 도시의 기준으로 삼아 이를 더 미화시켜 그린 그림인거지요. 도시 안에 춤추는 사람을 그려 넣은 것도 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을 출 만큼 나라가 태평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 P116

활기찬 시장이 중심이 되는 걸 보면 태평성시도나 로렌제티의 좋은정부가 다스리는 나라 모두 경제 번영을 평화로운 도시의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평화로운 도시를 상상하면서 상업 활동을 아주 생생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 P119

위의 사진과 그림을 보세요. 왼쪽이 오늘날 시에나의 전원 풍경이고 오른쪽이 그림 속 전원 풍경입니다. 중간중간에 조금씩 숲이 자리한 언덕에 농작물이 줄지어 있는 모습은 지금이나 700년 전이나똑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로렌제티의 그림은 화가가 상상력을발휘해서 그린 유토피아 같은 곳이지만 바탕은 자신들의 생활 터전인 시에나와 그 주변의 세계였던 거지요. - P121

그런데 왜 평화의 여신만 저렇게 누워 있나요?
꼭 다른 신들이 열심히 일하면 자신은 하는 일 없이 쉬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지않나요? 사회가 잘 돌아가면 평화는 그냥얻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뻔한 교훈이지만 이걸 이토록 거대한 그림으로 그렸다는 점이 독특해요. - P125

벽화가 그려지던 때 시에나는 한 명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아홉명의 국무위원이 함께 통치하는 집단 지도 체제였습니다. 대통령이나 집정관 1인이 통치하는 방식은 독재 정치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도시 내의 정치 세력들에서 각각 대표를 뽑아 한시적으로 통치하는방식을 택한 거죠. - P127

두초는 시에나를 주 무대로 활약한 화가입니다. 두초가 시에나 공화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대성당 안에 그린 제대화가 아래 마에스타죠. 마에스타는 ‘위대한 자‘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위대하신 성모 마리아를 말합니다. - P137

마에스타는 나무 패널을 이어 붙여 만든 그림 중에서는 상당히 큰작품에 속합니다. 사실 벽화를 제외하면 이 시대에 그려진 작품 대부분은 이러한 패널화입니다. 오늘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볼 수있는 작품도 패널화가 많고요. 패널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제대 위에 놓이는 그림인데 제대 위에 놓인 그림이었다고 해서제대화라 부릅니다. - P139

스크로베니 예배당에서 조토를 만나보았고, 시에나에서는 두초를만나보았으니 이제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 두 사람을 모두 만나본 셈입니다. 이쯤에서 르네상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중요 포인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르네상스 그림을 두 개의 타입으로 구분해감상하는 방법입니다. 일단 성모자상을 중심으로 비교해볼까요? - P142

마돈나는 성모마리아를 뜻해요. - P145

시에나는 로마로 가는 순례길이 통과하던 도시로,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중세도시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당시 시에나는 피렌체와 경쟁하며 도시의자긍심이었던 도시 미관을 정돈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이러한 노력은도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 P151

세계는 일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한동안 흐느끼는 사이에종말을 맞을 것이다.
제인 구달, 희망의 이유 중 - P152

흑사병의 파괴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흑사병의 충격이 제2차 세계대전보다 컸다고 보기도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대략 6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엄청난 전쟁의 참화도흑사병의 충격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 P154

그런 점에서 르네상스를 새롭게 바라볼 필요도 있습니다. 역사가발전해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세계가 밝아오는 게 아니라 엄청난대재앙이 벌어지자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바로 르네상스일수도 있다는 겁니다. - P157

흑사병 시대가 오자 무엇보다도 종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가장 먼저 변합니다. 이전보다 종교에 더 깊게 몰두하는 사람이 늘어난 겁니다. 앞선 시기에도 죽음은 언제나 삶과 가깝게 있었지만 흑사병 때문에 죽음이 삶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을 테니까요. - P157

앞서 흑사병에 걸려 죽게 되면서 전재산을 파리에게 준 사람의 얘기를 해드렸는데, 이처럼 흑사병에 걸려 죽을 때에는 병자성사도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이에게 다가가서 성사를 거행해줄 용감한 성직자를 기대하기가 어려웠으니까요.
다시 말해 사람들은 종교도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된 거예요. - P158

네, 그렇게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르네상스 때 의학이 눈부시게발전한 건 상당 부분 흑사병이라는 재앙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결과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화가가 해부학을 연구한이유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하고 관련이 있었던 겁니다. - P159

그러나 두 수도회는 추구하는 바가 약간 달랐습니다. 프란체스코수도회는 대중을 상대로 포교 활동에 주력한 반면 도미니크 수도회는 이단 척결이나 신비로운 영성 추구를 엄격하게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도미니크 수도회가 유난히 인기를 끌게 돼요. - P166

참고로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도 흑사병 시대에 나왔어요.
1350년경에 쓰인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발발하면서 시골로 피신한 피렌체 젊은이들이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기들이 알고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 P173

이 책 서문에는 당시 흑사병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하고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보카치오는 흑사병 때문에 "피렌체도시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절망적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거의 일치하죠.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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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성인이 입은 걸로 알려진 옷이 지금도 프란체스코 성당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그 옷인데 정말 누덕누덕 기워이은 옷입니다. 성인은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후로는 이 옷 한 벌로 살았다고 하죠. - P95

그런데 이 옷 색을 한 번 보세요. 커피에 우유를 탄 색처럼 보이지 않나요? 여담입니다만 프란체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카푸친 수도회‘
사람들이 입었던 옷이 카푸치노 커피색과 똑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유를 넣은 커피에 카푸치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 P95

네, 십자군 패잔병에게 자기 옷을 벗어 주는 장면입니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그림을 보고 나서 프란체스코 성인을 그야말로 이타심의 표상처럼여겼을 거예요. - P96

당시 기독교는 이미 세상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꼭 ‘서비스‘를 해줄 필요가 없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대중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자기들이 가지고있던 기득권을 버리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가르침을 주려고 했죠. 다음 그림도 비슷한 맥락에서 그려졌습니다. - P99

11, 12세기경 도시가 성장하며 여러 사회문제들이 발생하자 청빈과 복종을 앞세우며등장한 프란체스코 성인은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강론을 펼쳤다. 프란체스코성당은 이러한 성인의 가르침을 담아낸 공간이었으며, 성당 벽면을 채운 그림들은사람들에게 강론과 함께 더욱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 P103

탁발 수도회: 최소한의 탁발로 연명하는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크수도회가 대표적. - P103

망토를 벗어주는 성 프란체스코: 무소유를 실천한 성인의 삶을 보여줌.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의 기도: 기도를 하다가 성당을 다시 지으라는 계시를 받아 산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함.
새들에게 설교함: 새들조차 들을 수 있는 강론을 펼치는성인의 모습 담아냄. - P103

우리의 모든 꿈은 추진할 용기만 있으면 이뤄질 수 있다.
- 월트 디즈니 - P106

시에나는 토스카나 지방이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리잡고있습니다. 토스카나 지방에는 중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가 여럿 됩니다. 물론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피렌체죠. 하지만 피렌체는항상 관광객으로 분주하기 때문에 중세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피렌체보다 시에나가 더 좋습니다. - P107

시에나가 이렇게 큰 도시로 발전한 건 11세기부터 불었던 순례 열풍덕분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로 가는 순례길이 바로 시에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거든요. 수많은 순례자가 시에나를 거쳐 가면서 도시는점점 커졌고 13세기에는 경제적으로도 호황을 맞아 크게 번창하게됩니다. - P109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높이가 102미터나 되는 시청사 종탑이 등대가 되어주니까요. 그리고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대부분 대성당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길을 찾기 쉽습니다.
물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마냥 걷다 보면 길을 잃기도 하지요. 이때당황하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어딘가에서 단테 같은 시인이시를 짓고 조토 같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들 거예요.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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