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님의 실록을 읽어보자.

읽을수록 지명 비정하는데 짜증이 나는구나

실록: 실록(實錄)은 동아시아권에서 편년체 역사 기록 양식 및 이 양식에 따라 쓰여진 기록을 총칭하는 말이다. 전근대 중국, 한반도, 일본, 베트남의 왕조들이 실록을 출간했으며, 현대까지 실록을 만들고 있는 나라는 군주제(천황제)를 시행하는 일본이 유일하다. 실록이라는 명칭은 ˝실제로 있었던 일(事實)을 그대로 기록한다(直錄)˝라는 뜻.

박영규님의 고구려, 백제, 신라왕조 실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설서라 부르자

다음은 신라왕조실록 중 심각한 오류?
집필 당시 넋을 놓은 것인가?

본책 p000.e북이라 몇페이진지는....
˝재위 4년 2월에는 감물(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충남 보령의 남포면)에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는 업적을 일궜다. 또 재위 4년 3월에는 말갈군과 대치하고 있던 장령진에 몸소 거동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하사하는 여유도 보였다.˝

재위4년은 서기157년 이때 찌질한 아달라왕이 지금의 충북 괴산과 충남 보령에 현을 설치하다니. 괴산은 눈감아 주겠다. 근데 보령이라니? 충남 서쪽 맨끝, 서해와 맞닿은 보령까지 진출하려면 보령의 동쪽 부여, 논산, 진잠(대전), 옥천까지 다 평정했단 말인가? 아님 그냥 앉아서 남의 땅에 현을 설치한 것인가? 신라는 2세기에 동해에서 서해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제패했다?
신라는 6세기 말 진흥왕대에 가서 백제와 연합하여 겨우 당항성에 진출했을 뿐이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중 감물과 마산은 지금의 어디인지 누구도 정확히 비정하지 않고 있는데 존경하는 박영규님께서는 왜 그랬을까? 박씨라서, 신라박씨라서?

괄호의 내용은 왜 집어 넣은 것인가?
그냥 사기 기록 그대로 인용했으면 좋을 것을.

마산현은 삼국사기 잡지 웅진주편에 나온다. 이는 곧 후대, 남북국 시대의 일일 것인 바.

이 책이 나온지 20년. 아직까지 이것을 수정하지 않고 있는 저의는 무엇인가?

박영규님은 옛지명을 좀더 서쪽, 북쪽으로 비정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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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2-25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영규 님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을 읽었는데 반갑네요.

대장정 2023-12-25 17:29   좋아요 0 | URL
˝한 권으로~~실록˝은 처음 읽는 책은데 시대상황과 맞지 않게 지명을 작가 맘대로 비정하는데 짜증이 좀납니다.^^~
 

"신라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가?"

이 단순한 물음에도 확실한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인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반도 원주민이 아닌 망명객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시황의 지배를 피해 온 연나라 망명객과 위만에게 망한 고조선의 유민이 합쳐진 색다른 세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과 풍속이 특이하여 마한이나 백제, 고구려와는 아주 다른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화랑도가 철저하게 성적으로 얽혀 있는 집단이라는 사실 또한 이채롭다. 또 성을 서로 나누는 행위를 전혀 추잡하게 여기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 정치에 여성들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이나 태후나 유력한 왕실의 여자들이 왕을 갈아치우는 일도 신라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이다.

거기엔 비단 학자들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머릿속엔 광대한 영토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암암리에 신라의 삼한 통일에 대한 거부감으로 귀결되었다. 즉, 신라가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는 지금 광활한 영토의 주인으로 살고 있으리라는 회한의 역사 의식이 강하다는 의미다. 또한 신라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했다는 원망 섞인 시선도 있으리라.

신라인들이 중국 대륙에서 흘러든 종족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진한 사람들 중 일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한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곧 신라인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신라인들은 두 부류의 망명객들에 의해 형성됐다. 첫째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B.C. 221년)로 인해 고통받던 연나라 망명객들이고, 둘째는 B.C. 194년에 위만에게 쫓겨난 고조선의 준왕이 이끌고 온 유민 세력이다. 이들은 마한의 배려로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이것이 신라와 가야의 모태인 진변 24국이다.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다른 기록에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곧 신라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진한의 6부가 ‘조선의 유민’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여기서 조선이라 함은 물론 고조선을 일컫는다).

『삼국유사』에서는 혁거세를 고허촌장 소벌공이 혼자 발견하여 키운 것이 아니라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쓰고 있는 점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크게 다른 부분이다. 그러나 양산촌 나정 우물 곁에서 혁거세를 발견했다는 점은 두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즉,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량리는 바로 고허촌이다. 고허촌 사람들이 급량부 출신인 혁거세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고허촌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진한과 변한의 망명족들은 바로 이런 마한의 약화를 틈타 독립을 모색했고, 혁거세의 옹립은 바로 마한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었던 것이다.

‘혁거세’는 ‘불구내’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이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아마도 ‘혁거세’는 ‘불구내’의 뜻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인 듯하다.

신라인들이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마한에서 왕을 파견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거서간의 한자 의미를 풀어 보면, ‘서쪽에 살던 왕’이란 뜻이다. 신라인들은 마한을 ‘서한’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서쪽에 살던 왕’은 곧 마한에서 온 왕을 가리킨다. 원래 진한의 왕을 마한에서 파견했기 때문에 진한인들이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서간이라는 말은 마한 속국 시대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마한이 그처럼 분열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마한 땅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고구려에서 망명한 온조의 세력이 서기전 18년에 마한의 북방 변경 지역에 백제를 세웠던 것이다. 백제의 건국은 세력을 팽창시켜 마한 땅 전체를 장악하려던 신라국에겐 대단히 위협적인 복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혁거세왕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님을 알려 주고 있다. 더구나 왕후도 함께 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은 혁거세왕이 살해되었음을 한층 명확하게 전해 주고 있다.

"두 분(혁거세와 알영)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이 기록에 따르자면 남해왕은 혁거세왕에게 왕위를 넘겨받은 것도 아니고 왕위 계승권자도 아니었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혁거세왕과 알영이 죽자, 백성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그 무렵, 석탈해라는 인물이 현명하고 용맹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남해왕은 그를 불러 만나 본 후 사람됨이 남다르다고 판단하고 장녀 아효를 그에게 시집보내 그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이후, 탈해를 대보에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전담시켰다.

차차웅이라는 용어에 대해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이렇게 말한다.

"방언으로는 무당이다. 사람들이 무당을 귀신으로 섬기고 제사를 지내 줬으며, 그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자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탈해는 훌륭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유리와 자기의 이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수가 더 많자, 탈해는 자기의 측근들과 함께 유리를 받들었다. 그후로 ‘잇자국’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하였다고 전한다.

재위 9년에는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기틀을 잡았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이씨 성을,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최씨 성을, 대수부는 점량부(또는 모량부)로 고치고 손씨 성을,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정씨 성을,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치고 배씨 성을,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설씨 성을 내렸다.

6부를 정한 뒤에는 이를 두 편으로 나눠서,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 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들 두 편으로 하여금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쌈 시합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을 대접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온갖 오락이 곁들여졌다. 이 행사를 가배라고 했는데 한가위, 즉 추석의 기원이 되었다.

유리왕은 관직도 17등급으로 나눠 정부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이때 확립된 관등제는 신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제1등급은 이벌찬, 2등급은 이찬, 3등급은 잡찬, 4등급은 파진찬, 5등급은 대아찬, 6등급은 아찬, 7등급은 일길찬, 8등급은 사찬, 9등급은 급벌찬, 10등급은 대나마, 11등급은 나마, 12등급은 대사, 13등급은 소사, 14등급은 길사, 15등급은 대오, 16등급은 소오, 17등급은 조위라 하였다.

신라는 갈문왕 제도를 뒀는데, ‘갈문왕(葛文王)’이란 왕의 아버지 또는 장인, 유력한 왕족에게 붙이는 추증 시호로써 조선의 대원군이나 부원군, 고구려의 고추가 등에 해당한다. 대개는 죽은 사람에게 시호를 내리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책봉된 경우도 있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제3대 유리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이어지며, 지금도 ‘임금’이라는 단어로 남아 왕을 지칭하고 있다. 이사금이 임금으로 변한 과정은 대개 ‘이사금 - 니슨금 - 닛금 - 니은금 - 임금’으로 보고 있다.

석탈해, 박혁거세, 김알지는 모두 알이나 황금 상자에서 태어났고, 신라 왕실을 일군 박, 석, 김, 세 성씨의 시조라는 공통점이있다. 이들뿐 아니라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과 가야를 세운 김수로도 한결같이 알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탈해 이야기는 가야의 개국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달려온 탈해와 수로왕의전쟁 이야기에 용성국에서 내쫓긴 탈해의 신라국 망명 이야기가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리왕의 재위 기간은 33년 1개월간이지만, 『삼국사기』는 그의재위 20년부터 34년까지 약 14년 동안은 거의 기사를 남기고 있지 않다. 31년과 33년 기사가 있긴 하나, 그것은 천체와 기후에관련된 것일뿐 유리왕의 정책과는 상관없다. 이 14년은 신라본기」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기록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더구나 33년 4월의 다음 기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33년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에서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공교롭게도 유리왕 20년(서기 43년)은 탈해가 신라의 아진포에도착했다는 혁거세왕 39년(서기전 19년)으로부터 62년째 되는해이다. 즉, 아진포에 도착한 서기전 19 년을 탈해의 출생 연도로잡을 경우에 유리왕 20년에 그의 나이가 62세가 된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아귀가 잘 맞아떨어진다.

다시 말해서 탈해는 혁거세왕 39년에 신라국에 도착했고, 그 시점을 출생한 때로 계산하여 62세 되던 유리왕 20년에 왕위를 넘겨받았으며, 유리왕은 왕위를 넘겨준 뒤에도 14년을 더 살다가서기 57년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은 유리왕이 물러난 때부터 사망 때까지의 기사를 고의로 삭제하고, 유리왕이 죽은 때를 탈해의 즉위 시점으로 삼아 역사를 정리했을것이다.

탈해가 대보로 있던 시절의 한반도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삼한의 맹주였던 마한은 서기 8년(온조왕 26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도성이 무너졌고, 마한 왕실은 북쪽으로 달아나고구려에 의탁했다. 이후, 마한 잔여 세력은 원산성과 금현성에병력을 집결하고 1년 동안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백제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한의 저항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한군은 곳곳에서 군대를 일으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같은 형국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서기 16년에는 마한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군대를 일으켰으나 패배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수로‘라는 단어는 단순히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뜻보다는 ‘우두머리 왕‘이라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수로(首露)라는 명칭을 분석해 보면 ‘수‘는 머리이고,  ‘로‘는 왕을 의미한다. 수로왕 당시의 백제 왕들은 ‘다루‘, ‘기루‘, ‘개루‘ 등의 묘호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루(婁)‘는 망루 또는 별을 지칭하는 것으로 마한 말로 왕을 의미한다고 밝힌 바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수로왕이 158세 되던 건안 4년(199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158 년이라는세월을 살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 때문에 이 158년을 한 사람의 생애로 치부하는 것은 무리다. 즉, 수로왕은 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158년이라는 기간은 수로라는 명칭을 사용하던 세월, 즉 여섯 가야가 하나로 통합되어 다스려지던 햇수로 보아야 한다.

이는 단군이 1908세에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하여, 단군이라는 단어를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왕을 칭하는 보통 명사로 보고, 1908년을 단군 조선이 지속된햇수로 보는 해석법에 따른 것이다.

신라는 박석·김 세 성씨에 의해 왕조가 유지되었다. 총 56명의신라 왕 중에서 박씨가 10명, 석씨가 8명, 김씨가 38명이다. 초기 8대까지는 탈해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박씨이며, 제9대부터 제16대까지는 미추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씨이다. 그리고 제17대부터 제52대까지는 모두 김씨이고, 제53대부터 제55대까지는다시 박씨이며,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은 김씨이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그는 파사에게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황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성을 김씨라 하였으니 알지가 열한을 낳고, 열한이 아도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으니, 미추가 왕위에 올랐는데, 신라의 김씨가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탈해왕은 왜 김알지를 양자로 받아들였으며, 그를 대보로 삼았을까? 왕이 양자로 받아들일 정도면, 필시 김알지는 아주 귀한 신분이어야 한다. 탈해가 그랬듯이 그도 어느 나라의 왕자 신분이었거나 그에 버금가는 집안 출신이었을까?
중국의 『수서』는 신라 왕실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달아나 신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서』의 기록대로 정말 신라의 김씨 왕실의 시조, 즉 김알지는백제 사람일까? 어떻게 보면, 김알지를 백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김알지는 백제 사람이 아니라 마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알지가 신라에 온 때인 서기 60년에서 65년 사이의 한반도 상황을 점검해 보면, 알지가 마한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얻어 낼 수 있다.

이제 김알지의 출신과 정체는 자명해진 셈이다. 김알지는 마한의 마지막 왕의 직계 후손이며 부흥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런 그가 신라에 와서 탈해왕의 양자로 취급되고, 재상 격인 대보의 벼슬까지 부여받는 등 왕족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은 것은 바로 마한 왕실을 대표하는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신라에 귀부함으로써 신라는 마한의 적통임을 자부하며 백제에 대하여 마한의 영토를 돌려 달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그의 생활 태도에 대해 "절도 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꼈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고 적고 있다. 파사왕은 스스로 검소한 삶의 모범을 보이며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유리왕의 적장자인 일성(逸聖)왕은 유리왕이 죽은 후 77년이나 지난 뒤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그는  유리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거나 그 후대의 자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여러 곳에서 일성왕을 유리왕의 아들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일성왕이 유리왕이 만년에 낳은 장자가확실하다면 그는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오른 셈이다.
이렇듯 늦게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즉위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않았다.

일성을 제치고 파사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파사의 부인사성부인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서기』의 연도는 인덕천황 시대 이전의 것에 대해서는 2갑자 더한 연도로 계산한다. 『일본서기』의 기년에 2갑자를 더하는 것은 『일본서기』 신공황후 대의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등의 죽음과 즉위에 관한 기록들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확하게 120년 차이가 나고, 그런 현상은 응신, 인덕천황 대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인덕천황 이전의 기년에 2갑자를 더해서 연도를 환산하게 된 것이다.

『일본서기』에 이처럼 120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는 것은 『일본서기』 편자들이 고의로 여왕들의 비중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들을 은폐하고 조작한 결과이다.

『삼국사기』는 이 해로부터 10년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다가 184년 3월에 아달라왕이 죽었다는 기록만 남기고 있다.

아마도 이 10년 동안 신라 사회엔 엄청난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굶주린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여 또 하나의 사회 불안 요인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그렇다면 비미호와 일여에 대한 기록을 폐기한 것은 그들이 혹시 왜국 천황족이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비미호는 왜국의 천황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으로 천황족을 무너뜨리고 왕국을 건설한 외방족의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식(日蝕)의 ‘식(蝕)’은 ‘벌레가 먹어 치운다’는 뜻인데, 이때 ‘蝕’ 대신에 ‘食’을 쓰기도 한다. 즉, 고대인들에게 일식이라는 것은 ‘벌레가 해를 잡아먹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태양을 갉아먹는 이 벌레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있었다. 그 동물이 바로 까마귀였다. 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길조였으며 신령스런 동물이었다. 또 그 새까만 깃털 탓에 불에도 타지 않는 동물로 여겨졌다. 새까맣게 타 버린 숯은 더 이상 불에 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했던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로 일식 때에 까마귀를 하늘로 날리는 소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오랑이라는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끌어들이는 남자’라는 뜻이다. 즉, 연오랑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의 소임을 나타내는 직업적인 명칭으로서, 일식이 일어나면 까마귀를 불러들여 잡은 뒤, 다시 태양을 향해 날아가도록 풀어 주는 소임을 맡았다는 뜻이다.

벌휴왕 재위시 특이한 일들이 몇 가지 기록되어 있는데, 재위 10년인 193년 3월에 한기부 여인이 한 번에 4남 1녀의 다섯 쌍둥이를 낳았다. 다섯 쌍둥이도 매우 드문 일인데 모두 산 채로 나왔으니, 당시로선 큰 경사요 이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럴 경우 대개 나라에서 상으로 쌀을 내리고 왕이 직접 축하 서신을 띄우곤 하였다.

벌휴는 내례부인이 이끌고 있던 박씨 종실과 부인 김씨 집안의 후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어쨌든 석씨 집안의 이름을 걸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는 자신의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기반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벌휴 이후에 내해(제10대), 조분(제11대), 첨해(제12대), 유례(제14대), 기림(제15대), 흘해(제16대)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라는 것이 이 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제13대 미추왕이 비록 김씨이긴 하지만, 그도 석씨 집안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석씨 왕실의 집권은 184년부터 356년까지 172년간 지속된 셈이다.

『삼국사기』는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들이 미추왕의 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전혀 없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72년 후에 왕위에 올라 46년간 머물렀다. 만약 내물왕의 부인이 미추왕의 딸이라면 내물은 청년 시절에 팔순 노파와 결혼한 꼴이 된다. 실성왕은 미추왕 사망 시점으로부터 118년 후에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미추왕의 딸과 결혼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덤 속에서 썩어 없어진 시신과 결혼한 것이나 진배없다.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을 모두 미추왕의 딸로 기록해 놓은 것은 그들이 왕위를 얻기 위한 명분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작된 결과일 것이다. 어쨌든 내물왕과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들이 아닌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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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과거의 ‘적폐’를 문제 삼아 검찰, 경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혹은 국정원 등 이른바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반대파 등을 압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제왕적’으로 보이는 대통령이지만 정책적으로는 그다지 강한 대통령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통령의 정책은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거나 국회의 예산 동의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우리 국회는 다수결 방식보다 합의제 방식에 의해 운영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야당과의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법안 통과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임기 초반 제왕적 대통령으로 등장하지만 어느 순간 레임덕 대통령으로 바뀌고 만다. 더욱이 제왕적이라고 해도 권력기관이나 여론의 높은 지지에 힘입은 것일 뿐 실제 정책을 입법화하고 추진하는 데는 그렇게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 일하는 것으로는 약하고 정치적으로는 강한 대통령제인 것이다.

아무리 많은 지시를 대통령이 내린다고 해도 관료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이다.

2017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하면서 4년 중임제를 들고 나온 것은 적절한 대안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과거에는 독립운동을 했거나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일반인과 다른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확립해온 이들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강한 리더십과 권위를 갖춘 인물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의 대통령제는 3ㆍ1 운동 이후 설립된 임시정부에서의 정부 형태 논의, 그리고 그것과 연계된 해방 공간에서의 논의, 그리고 제헌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한민당 간의 대립 등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정치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갖는 집단끼리 타협과 양보에 의해 합의를 도출해내는 과정이다. 그래서 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촉진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선거.
격변을 예고하는 중요한 시그널

권위주의 권력은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얻고자 했지만, 동시에 무자비한 독재의 몰락을 예고하기도 한다. 선거는 들끓는 민심의 반영이며 오늘날 민주주의 가치 실현의 제일 조건이다.

선거는 복수의 경쟁적 후보 가운데 공직을 담당할 인물을 유권자들이 선택하는 과정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정치 권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사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사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대한 권력의 왜곡, 그리고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의 역사였다고 할 만큼 민주화 이전 한국 정치의 주요한 변화를 이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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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의 목표는 유신 이전의 상태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6월 29일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특별 선언, 이른바 6ㆍ29 선언을 발표한다.

헌법재판소와 같은 일부 조항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87년 헌법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부분적으로 전두환의 개입 속에서 개정된 것이다.

1987년 당시 헌법 개정을 주도했던 정치인들은 유신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민주화라고 생각했다.

1962년 개헌 | 제63조 ①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
1972년 개헌 | 제43조 ①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1987년 개헌 및 현행 | 제66조 ①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1962년 개헌 | 제121조 ① 헌법 개정안은 국회가 의결한 후 6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1972년 개헌 | 제49조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
1987년 개헌 및 현행 | 제72조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ㆍ국방ㆍ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

이들에게는 유신 체제 이전의 상태가 곧 정치의 ‘정상화’였다.

각 대통령 때마다 비서실 규모에 다소 차이가 생기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규모가 커져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대통령 비서실의 비대화가 대통령의 업무 수행 능력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서실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이 되고, 실제로 정책을 실행하고 추진해야 할 내각에 권한이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 부서가 실무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권력을 청와대가 틀어쥐고 갈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당정협의회는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한 김종필이 고안한 것으로 김종필은 공화당을 통치의 중요한 한 축으로 삼고자 했다.

한국에서 대통령제가 도입되고, 복원되고, 유지되어온 배경에는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강력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한국의 대통령제가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던 매우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 지도자의 존재와 관계가 깊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이들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을 뿐,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거나 분산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청와대 비서실의 규모와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단임 대통령제라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의 선거운동이 캠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세 번째 이유는 관료제에 대한 불신이다.

청와대 안에서 대통령의 뜻과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운 만큼 비서실은 동질적이거나 폐쇄적인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외부의 우려나 비판이 제대로 받아들여지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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