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첫 책모으기

뿌듯하다. 포인트, 적립금, 쿠폰 긁어모아 알라*, 교*, 네 에서 구입.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6권
˝지중해, 펠리페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4권
+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총 11권을 사 모았다. 꽃아둘데가 없다.
만들어보자. 페르낭님의 나머지 책도 모으자.

지중해의 기억 절판이랍니다 ㅠ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에서 노마드가 독서모임에 가입하려한다. 즐겨읽는 분야가 뭐냐고 묻자 자기개발서라 답한다. 바로 퇴짜를 맏고 그럴싸한 책을 읽는데 그게 바로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펠리페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다

이 책을 지금 당장 읽겠다는게 아니다.
읽고싶지만 이게 보통 고된작업이 아닐듯 싶다.

나는 아직 독서 중독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물질문명~~~글자도 작고 줄간격 좁고 되게 촘촘하다. 지중해~~~얘는 그래도 좀 낫다. 줄간격 좀 넓고, 활자도 물질보다 훨 눈에 잘 들어온다.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교육자로 파리의 중등학교, 브라질의 상파울루대학 등에서 강의하였고 《아날(年報) Annales》지의 편집인,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15~18세기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가 있다.

출생-사망 1902.8.24 ~ 1985.11.28

나무위키
https://naver.me/GGhpjYp0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출생 - 사망 1906.10.14. ~ 1975.12.4.

“생각하는 일은 (…) 정치적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저명한 학자들이 보통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불행히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나무위키
https://naver.me/GaLmBW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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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1-03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장정님 안녕하세요?^^

열독하시는데 질문드려서 귀찮으실지도....
페르낭 브로델과 나란히 Horden and Purcell의 책 [The corrupting Sea]를 설명하는 글을 읽던 차인데 갑자기 대장정님이 생각났어요.
혹시라도 ˝지중해~~˝ 걔에서 ㅎㅎ(대장정님 표현 따라) 이 책이 언급되면 알려주시겠어요?^^ 찾아서라도 꼭 봐야할 부분이 있어서 ...

혹시나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대장정 2024-01-04 00:05   좋아요 2 | URL
네, 얄라님, 언제 읽게될지 모르겠지만서두 읽다가 찾게되면 말씀드릴께요~~

bookholic 2024-01-04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척 어려워 보이는 책들입니다.
저는 대장정님의 써주실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
즐거운 하루 되세요~~

대장정 2024-01-04 08:17   좋아요 1 | URL
저도 읽기보담 구매욕 때문에 😂 장만했습니다. 소장용ㅎㅎ 올해도 벌써 4일째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후에는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 정치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서의 좌파 혹은 노동자 정당, 계급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 없지만 만약 진보당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4ㆍ19 혁명 이후 선거에서 민주당에 맞서는 주요한 경쟁 정당이 되었을 것이다. 1960년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몰락했고 다른 혁신계 정당은 대안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전체 의석의 75퍼센트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1당 지배 체제가 되었다.

다음날 4월 19일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전 국민적인 규모로 커진다. 4월 25일에는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서울대학교 당시 문리대 교수회관에서 성명을 내고 시위를 한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막을 내린다. 한 달 후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선거로 정권의 정당성을 얻다
박정희를 지도자로 하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이 주축이 된 5ㆍ16 군사 쿠데타는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후 군사혁명위원회, 그리고 얼마 뒤 이름을 바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군정을 실시했다. 정당 및 사회단체는 모두 해산되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거 이슈는 사상 논쟁이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 이후인 1948년 11월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선거 유세 막판에 폭로한다.

박정희와 윤보선에 대한 지지는 도시와 시골에서 차이를 보였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30.2퍼센트를 얻은 반면 윤보선은 65.1퍼센트를 얻었다. 이에 비해 전남과 경북에서는 박정희가 57.2퍼센트, 55.6퍼센트를 얻었고, 윤보선은 각각 35.9퍼센트, 36.1퍼센트를 얻었다. 제1공화국 때도 나타났던 시골에서는 여당, 도시에서는 야당이라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나타났다.

이전 투표에서와 달리 여촌야도 현상도 사라져,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30.2퍼센트였던 것이 45.2퍼센트로, 부산에서의 지지율도 48.2퍼센트에서 64.2퍼센트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광주, 전주, 수원을 제외한 전 도청 소재지에서 박정희는 승리를 거뒀다.

박정희 그리고 젊은 김대중의 등장
3선 개헌으로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세 번째로 출마하게 되었다. 그 이전 두 차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의 경쟁자는 윤보선이었지만,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야당인 신민당 내에서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40대의 젊은 정치인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면서 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뒤이어 같은 40대인 이철승과 김대중도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더욱이 신민당이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얻은 의석수는 개헌을 막을 수 있는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훌쩍 넘는 것이어서 1967년과 같은 날치기에 의한 정권 연장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무렵은 전태일 분신,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폭동, 한진 노동자 KAL 빌딩 방화 사건, 사법파동 등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박정희 체제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역시 변경되었는데 우선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했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을 국민이 아닌 대통령이 지명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득표율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야당인 신민당은 32.8퍼센트로 공화당의 득표율 31.7퍼센트를 앞섰다. 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득표율에서도 여당에 앞서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여기에 소규모 야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퍼센트와 합치면 여당의 패배는 더욱더 자명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김영삼은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당선된다. 유신 체제에 도전하는 반체제 정당으로 신민당이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정국은 소용돌이치면서 유신의 종말을 향해 나가게 된다.

의원직 제명 당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발언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다.

결국 1987년 6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를 받아들인 6ㆍ29 선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6ㆍ29 선언과 민주화로 이끈 매우 중요한 출발점은 1985년의 총선거였다.

한나라당은 거액의 불법 정치 자금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트럭 째로 받은 이른바 ‘차떼기’ 수법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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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폭력과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권력을 위임할 것인가에 대한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브루나이와 같은 왕국에서는 특정 가문에 의해 권력이 세습된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권력 위임은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뤄진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뜻을 반영하면서도 폭력적인 형태를 수반하지 않고 권력을 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선거다. 이는 민주주의가 낳은 매우 훌륭한 정치제도다.

한국 정치사에서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는 항상 선거 정치가 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은 모두 쿠데타를 통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두 군인 출신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다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전두환 대통령보다 높게 평가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경제 성장에 대한 성과,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광주 시민에 대한 학살을 떠올린다는 차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쿠데타 이후 대통령직에 어떻게 올랐느냐의 차이가 크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갖게 된 정치적 정당성에는 차이가 컸다. 이처럼 심지어 권위주의 통치자들에게까지도 국민적인 동의를 얻는 절차를 가졌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이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정책 집행의 책임을 맡고 있던 미군정에서 반관선半官選 반민선半民選의 준準 대의기구를 구성해 선거법을 제정하고 이를 토대로 완전한 대의기구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에 의해 실시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성이나 자주성을 갖는 입법기구는 아니었다.

당시 투표율은 95.5퍼센트였다. 오늘날까지 포함해서 가장 높은 투표율이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표 참여를 사실상 강요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사실 김구가 제헌국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결정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만약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했다면 제헌국회 내에서의 헌법 제정이나 반민족특별위원회 등 제헌국회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크게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치인은 최선이 어렵다면 차선이라도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구 선생이 제헌국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직선제를 포함한 발췌 개헌에 성공하며 이승만은 한 달 후 1952년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75.2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다. 직선제 개헌 후 한 달 만에 치러진 선거였던 만큼 다른 경쟁자들에게는 선거를 준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승만에게 맞설 수 있었던 김구는 1949년 6월 암살되고 말았기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어 조봉암이 11.4퍼센트, 이시영이 10.9퍼센트를 각각 얻었다. 2, 3위 후보자의 득표율을 볼 때 이승만의 손쉬운 승리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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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평성세를 일군 장수왕과 남북조 시대의 전개

(서기 394~491년, 재위기간:서기 413년 10월~491년 12월, 78년 2개월)

장수왕 시대는 중국에서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종결되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때문에 중국 대륙은 다시 한 번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고구려는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세력 팽창의 기회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참수하여 소수림왕 이후 지속적으로 계속되던 고국원왕에 대한 복수전을 마무리한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거련(巨連)’이다. 394년에 태어났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409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413년 10월에 광개토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고구려 제20대 왕에 올랐다.

1. 문자명왕의 영토수호 노력과 나제연합군의 협공

(?~서기 519년, 재위기간:서기 491년 12월~519년 모월, 약 28년)

문자명왕은 광개토왕과 장수왕에 의해 확장된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 연합군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문자명왕은 나제연합군에 밀려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다시 축소되기에 이른다.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이며 이름은 나운(羅雲)이다. 아버지는 장수왕의 맏아들 고추가 조다인데, 그가 결혼 후에 일찍 죽음에 따라 장수왕은 손자인 나운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장손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기 491년 12월에 장수왕이 죽자 나운은 고구려 제21대 왕에 올랐다.

1. 안장왕의 치세와 국제정세의 변화

(?~서기 531년, 재위기간:서기 519년 모월~531년 5월, 약 12년)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흥안(興安)이다.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태어난 연도도 알 수 없다. 서기 498년(문자명왕 7년) 7월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고구려 제22대 왕에 올랐다.

문자명왕이 즉위할 당시 중국은 남쪽엔 양 왕조, 북쪽엔 위 왕조가 서로 세력을 다투며 대립하고 있었다.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들 양국 관계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와 양의 비중을 똑같이 두고 양쪽과 모두 화친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위는 자신들이 먼저 생긴 국가일 뿐 아니라 거리상으로도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며 양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곤 하였다.

1.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안원왕의 복구 노력

(?~서기 545년, 재위기간:서기 531년 5월~545년 3월, 13년 10개월)

안원왕은 문자명왕의 차남이며, 안장왕의 아우로 이름은 보연(寶延)이다. 안장왕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보연을 자주 궁중으로 불렀다. 보연은 키가 7척 5촌이나 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인품 또한 뛰어나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이런 까닭에 형인 안장왕은 그를 무척 총애하였고, 결국 계승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죽자 보연은 고구려 제23대 왕에 올랐다.

동위는 산동 지역의 일부가 백제의 영역이라는 점을 못마땅해하고 있던 터라 고구려의 부탁과 상관없이 백제를 공략했다. 이 때 백제의 대륙기지는 529년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고구려의 침략으로 매우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위의 공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에 백제는 양나라에 도움을 청했지만 양나라는 고구려와 동위와의 관계를 생각해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 결과 백제의 대륙기지는 붕괴되어 동위에 함락되고 말았고, 이 때부터 백제는 대륙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의 계속되는 패전과 고구려의 위축

(?~서기 559년, 재위기간:서기 545년 3월~559년 3월, 14년)

양원왕은 안원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평성(平成)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호방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원왕 3년인 서기 53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45년 3월에 안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4대 왕에 올랐다.

신라의 강성으로 삼국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 또 하나의 세력이 고구려의 서북쪽 변방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북위의 멸망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돌궐이 어느덧 거란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551년 가을에 그들은 고구려 국경을 넘어 침입해 왔으며, 9월에는 평양성 북쪽의 신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내주어 그들과 대적하게 하였고, 고흘은 뛰어난 용병술로 군대를 인솔하며 돌궐군 1천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1. 평원왕의 화친정책과 수나라의 강성

(?~서기 590년, 재위기간:서기 559년 3월~590년 10월, 31년 7개월)

평원왕은 양원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양성(陽成)’이다[중국 사서에는 ‘탕(湯)’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양원왕 13년(55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59년 3월에 양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5대 왕에 올랐다.

1. 영양왕의 강병책과 수나라의 침입

(?~서기 618년, 재위기간:서기 590년 10월~618년 9월, 27년 11개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주변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지속함에 따라 영양왕 시대는 고구려와 수의 세력다툼이 지속된다. 이 과정에서 수나라는 네 번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고,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맞서 전면전을 펼친다.

영양왕은 평원왕의 맏아들이자 평원왕의 첫째 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원(元)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평원왕 7년인 56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90년 10월에 평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신책구천문(新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통달했고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에 이르렀다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전쟁에 이겨 이미 그 공이 높으니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족함을 알고 돌아가는 것이 어떠리

1. 온건주의자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반정

(?~서기 642년, 재위기간:서기 618년 9월~642년 10월, 24년 1개월)

영류왕은 평원왕과 그의 둘째 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이름은 ‘성(成)’이다. 서기 618년 9월에 영양왕이 후사 없이 죽자 고구려 제27대 왕에 올랐다.

1. 마지막 왕 보장왕과 고구려의 몰락

(?~서기 682년, 재위기간:서기 642년 10월~668년 9월, 25년 11개월)

연개소문의 반정으로 보장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악화된다. 당은 일찍부터 고구려를 침략하려 했으나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했는데, 마침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자 당 태종은 이를 빌미로 고구려 침략을 획책한다. 이에 따라 당은 총력전을 펼치며 고구려를 공략하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당나라의 침략에 대응한다.

보장왕은 평원왕의 셋째 아들인 대양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장[臧, 또는 보장(寶臧)]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서기 642년 10월에 연개소문이 그의 큰아버지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 제28대 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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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1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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⑸ 영락 태왕 10년(400년) 경자년 기사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南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 拔新羅城 *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戌兵 新羅城**其*******言**且***********************辭***出*******殘倭遣逃 拔*城 安羅人戌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廣開土境好太王****寐錦*家僕勾請***朝貢

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고구려군)이 그 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십분의 구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길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 ─ (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음) ─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寐錦, 이사금 또는 임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임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⑹ 영락 태왕 14년(404년) 갑진년 기사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連船*** 王躬率往討 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14년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지역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늘어선 배에서 많은 적들이 몰려왔다.>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죽은 적은 수없이 많았다(< > 속의 내용은 단지 ‘연선(連船, 늘어선 배)’이라는 문구만 확인되고, 나머지 내용은 추론한 것임).

⑺ 영락 태왕 17년(407년) 정미년 기사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城

17년 정미년에 보병,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 (내용 지워짐) ─ 왕은 사방 포위작전을 지시했다. 적은 대부분 궤멸되었으며, 개갑 1만여 영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자기계를 획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성을 격파했다.

⑻ 영락 태왕 20년(410) 경술년 기사

卄年庚戌 東扶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擧國服 獻出******王恩普覆 于是施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주몽)왕의 속민이었으나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거국적으로 두려워하여 굴복했다. 그리고 ─ (지워지고 없음) ─ 를 바쳤다. 왕의 은덕이 모든 곳에 미치자 환국하였다. 또 그때에 왕의 교화에 감화되어 관군을 따라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등이 왔다. (왕은) 일생 동안 64개 성 1천 4백 촌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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