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도 건넛집도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구조가 비슷해 지금 내가 나온 집이 과연 어느 집인지 4, 5미터 지나갔다가 되돌아오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기한 동네다.

가게이름이 찍힌 덧옷을 입은 남자가 한복판에서 앉지도 서지도못한 자세로 몸을 못 가누고 허우적거렸다. 지금까지 진흙탕에 여러 번 넘어졌는지, 원래부터 색이 바랜 덧옷이 축축하게 젖어 추워보였다. 경찰이 누구신데 이러냐고 묻자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나 말이오? 나는 인간이지." 하며 뻗대었다. 그때마다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사쿠 부인도 남편의 얼굴을 보고웃었다. 그러자 주정뱅이가 가만있지 않았다. 눈을 험악하게 뜨고주위를 둘러보며 "뭐, 뭐가 우스워? 내가 인간인 게 우습냐고, 이래봬도......." 그러면서 고개를 툭 떨구었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인간이다." 하며 큰 소리를 질렀다.

"자, 이 사람아! 데려가줄 테니 여기 타게." 술 취한 사람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맙다며 짐수레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는 밝은 하늘을 보고 침침한 눈을 두세 차례 껌뻑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멍청아, 내가 이래봬도 인간이다." 키 큰 남자는 "그래, 인간이다. 인간이면 얌전히 굴어야지." 하고 대꾸하며 새끼줄로 주정뱅이를 짐수레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도살한 돼지를 싣고 가듯 짐수레를 덜커덕거리며 큰길로 끌고 갔다. 오사쿠 부인은 여전히 코트 자락을 붙잡은 채 설날 금줄 장식 사이로 멀어지는 손수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짱네 집에 가서 해줄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돌아간 지 일주일 뒤 청년은 다시 원고를 들고 왔다. 그렇게 올 때마다 자기가 쓴 원고를 항상 놓고 갔다. 그중에는 세 권짜리 대작도 있었다. 하지만 그 원고는 완성도가 가장 떨어졌다. 나는 청년이 쓴 원고 가운데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두 차례 잡지사에 소개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편집자의 배려로 잡지에 실렸을 뿐 원고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때서야 나는 그의 생활고에 대해 들었다. 그는 앞서 글을 써서 입에 풀칠할 생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 어느샌가 청년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해가 잘 안 드는 방에서 홑옷 한 장만 걸치고 가만히 독서하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웠다.

그날은 마침 목요일이었고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밤이었다. 나는 대여섯 명과 함께 큰 상을 둘러싸고 구리꿩 국을 먹었다. 그리고 화려한 두꺼운 무명 주름바지를 입은 창백한 청년의 성공을 빌었다. 사람들이 돌아간 뒤 나는 청년에게 감사 편지를 썼다. 그 안에 지난해에 빌려준 돈에 대해서는 개의치 말라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모나리자의 입술에는 여성의 비밀이 있다.  원시 이후 이 비밀을 그려낸 이는 다빈치뿐이다.  이 비밀을 풀 수 있는 자는 없다."

다음날 관청에 출근한 이부카는 사람들에게 모나리자가 뭐냐고물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다빈치가 누구냐고 물었지만그 또한 아무도 몰랐다. 이부카는 아내가 권하는 대로 그 불길한그림을 넝마주이한테 5 전에 팔아넘겼다.

"돈은 어느 부분에서 보면 수고의 기호일 거야. 그 수고가 결코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니 같은 돈으로 대표하게 해서 서로 상통하면 아주 큰 잘못이 되겠지. 예를 들어 내가 여기서 석탄을 만 톤 캤다고 해보자고. 내 수고는 기계적인 수고에 불과해 그걸 돈으로 바꾸었다 해도 그 돈은 그와 같은 종류의 기계적인 수고와 교환할 자격만 있을 뿐이 아닌가. 따라서 일단 이 기계적인 수고가 돈으로 변형되자마자 갑자기 자유자재의 신통력을 얻어 도덕적인 수고와 자꾸 교환될 걸세. 그리고 정신계가 제멋대로 교란되어버릴 거라고. 괘씸한 요물이 아닌가 말일세. 그래서 색으로 구분해 얼마간이나마 본분을 알게 해야 하는 거라고."

예전에 내가 알던 나카무라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총재가 되었다. 예전의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총재는 어떤 일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나카무라도 내 소설을 아직 한 장도 읽은 적이 없을 것이다.

문을 여는 사람은 항상 여자 분이다. 근시라 그런지 안경을 썼고 볼 때마다 놀란다. 나이가 쉰 정도라 상당히 오랜 세월을 세상을 보면서 살아왔을 텐데 아직도 놀라다니 정말 놀랍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기 미안할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어서 오세요!’ 한다.

선생은 아일랜드 사람이라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다급히 말할 때면 도쿄 사람이 사쓰마 사람과 싸움을 할 때만큼이나 어려워진다. 선생은 아주 덜렁대고 조급증이 심해서 나는 만사가 귀찮아지면 하늘에 운을 맡기고 선생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수염은 그야말로 안쓰러우리만치 흰 수염과 검은 수염이 마구잡이로 났다. 언젠가 베이커 거리에서 선생을 만났을 때는 채찍을 잃어버린 마부인 줄 알았다.

이 책이 187……년의 출판이고 내 연구는 그보다 훨씬 전이니까…….’ 나는 선생의 끈기에 혀를 내둘렀다. 내친김에 그럼 언제 완성되냐고 물었다. ‘언제인지 알 게 무언가? 죽을 때까지 하는 게지.’ 선생은 《다우든》을 원래 자리에 갖다두었다.

귀국해 2년쯤 지났을 때 새로 나온 문예잡지에 크레이그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실렸다. 셰익스피어 전문학자라는 내용이 두세 줄 덧붙어 있었을 뿐이다. 잡지를 내려놓은 나는 그때 사전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그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건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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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지는 것은 여물고자 함이니 복사꽃

[연재]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1화 | 미야베 미유키 저/이규원 역

지방도시에 출장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이와사 쇼조는 서른둘의 젊은 나이였다. 외동딸 미쓰하의 새 신부 모습은커녕 란도셀초등학생용 책가방을 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운명은 쇼조에게 잔혹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도 멋지게 성장하여 아키코를 만나 결혼하고 미쓰하도 태어나 마침내 행복해졌다 싶었는데, 음주운전 차량에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당시 아키코는 쇼조가 너무나 불쌍해서 남편을 여읜 슬픔에 빠지기보다 내내 분노해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반년 만에 미쓰하를 얻었다. 조금 성급했어, 아직 모아 놓은 돈이 얼마 안 돼─아키코는 초조했지만 쇼조는 크게 기뻐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이 진짜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만세 삼창을 하는 장면을 아키코는 처음 보았다.

“저는, 유 상이 아저씨라고 해도 변함없이 좋아했을 거예요.”

그 순간 아키코는 운명의 경보기 소리를 들었다. 딸의 연애를 막지 못한 어머니 귀에만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경고음을.

교제하고 2년 2개월 만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스물두 살 신부와 서른 살 신랑. 기념사진만 찍고 식은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진짜 합격할지도 몰라. 사악한 마법에 늘 따라다니는 주문이다.

복숭아꽃 가지에서 꽃잎 여러 장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세계의 한구석이 부서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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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최초의 생명이 대략 40억 년 전 원시 지구의 바다나 연못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다. 최초의 생물은 오늘날의단세포 생물만도 못한 것이었다. 단세포 생물은 고도로 정교한 형태를구비한 어엿한 생물이다. 생명의 첫 걸음은 이보다 훨씬 보잘것없는수준에서 시작했다. - P80

사람은 100조 개가량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람 한 명 한 명은 수많은 생활 공동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군집인 셈이다. - P82

성性은 대략 20억 년 전부터 생긴 듯하다. 그 전에는 새로운 종의 출현이 무작위적 돌연변이의 축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유전 설계도의 글자를 한 글자씩 바꾸어 돌연변이를 만들고 그것을 또 시험해야 했으므로, 진화는 고통스러우리만큼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 P82

한때 지구상에 번성했던 동식물들 중에는 이렇게  완전히 사라진 예가 많이 있으며, 현재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이 물론 과거에 모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오래된 암석과 화석 가운데 우리와 같은 동물들은 눈을 씻고봐도 찾을 수가 없다. 종들은 잠깐 나타나 그럭저럭 살다가 완전히 멸종하고는 한다. - P85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DNA 중합체효소가 복제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면 돌연변이가 생긴다. - P91

인간 세포 하나에 들어 있는뉴클레오티드의 총수는 대략 100억개나 된다. 어마어마한 수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00억 개 중의 단 하나가 그렇게 큰 차이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른 뉴클레오티드들에서 생긴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하다. - P92

더욱 중요한 점은 핵산 정보를단백질 정보로 바꾸는 데 나무와 사람이 동일한 설계도를 사용한다는사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 지상의 모든 생물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생명 현상이 보여 주는 분자 수준에서의 동질성으로부터 우리는 지상의 모든 생물이 단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 P93

나무, 사람, 아귀, 심지어 변형균과 짚신벌레 같은 지구의 모든 생물이 과거로올라가면 단 하나의 조상으로 수렴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생명의기원인 바로 그 물질은 지구 생성 초기에 과연 어떻게 만들어질수있었을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원시지구의 기체와 물을 시험관에 함께 넣어각종 반응을 겪게 한 다음, 거기에서 무엇인가 꼬물거리는 것이 기어나오게 한 적은 한번도 없다. - P95

생물학은 물리학보다 역사학에 더 가깝다.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잘 알아야 하고, 그것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야만 한다. 역사학에 예견론이 없는 것처럼 생물학에도 확립된 예견론이 없다. 이유는 양쪽 모두 같다. 연구 대상들이 너무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P103

그러나 생물학과 역사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타자他者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 P103

외계 생명에 관한 단 하나의 예만 연구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하나가 아무리 미미한 수준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물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와 다른 생물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외계 생물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우리는 외계 생명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적 어려움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계의 생명은 우리가 추구할 궁극의 목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P103

우리는 이제껏 지구라는 작은 세상이 들려주는 생명의 음악만 들어 왔다. 이것은 우주를 가득 채운 생명들이 연주하는 푸가의 한 성부만을 들어 온 셈이다. 자 이제 저 웅장한 우주 생명의 푸가의 남은 성부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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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는 긴 봄날의 소품, 짧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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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안에서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유리문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월동 준비를 해놓은 파초와 붉은 열매가 매달린 낙상홍 가지, 멋없이 치솟은 전신주가 곧바로 눈에 들어오고, 그 밖에 특별히 늘어놓을 만한 것은 없다. 서재에 있는 나의 시야는 지극히 단조롭고 아주 좁다.

마음이 편치 않아 독서도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앉았다 누웠다 하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뿐이다.

좁은 나와 넓은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문 안으로 가끔 사람이 들어온다. 어떤 때는 뜻밖의 인물이 들어와 내가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런 사람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조차 있다.

유리문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지도 못할 것 같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정치가나 군인, 실업가나 스모 팬을 밀어내고 쓰는 셈이다. 나 혼자서는 도무지 그럴 만한 담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는 음침하게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내 사진을 보내주었지만, 그 사진을 싣는다던 잡지는 결국 보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내게 강아지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졸랐다. 나는 ‘헥토르’라는 대단한 이름을 아이들의 친구에게 지어주었다.

존은 함부로 사람을 무는 버릇 때문에 결국 맞아 죽고 말았다.

원목으로 된 작은 나무 묘비를 사오라고 해서 ‘가을바람이 들리지 않는 땅에 묻어주다.’라는 글귀를 적었다.

"산다는 것을 인간의 핵심이라 생각한다면 그대로 살아가도 지장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나 고귀함을 근본 의의로 놓고 인간을 평가한다면 문제가 달라질지도 모르지요."

숨 막힐 듯 괴로운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그날 밤 오히려 인간다운 흐뭇한 기분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숭고한 문학작품을 읽은 후의 기분과 같은 느낌이었다. 유라쿠자 극장이나 제국 극장에 가서 뻐기고 앉아 있던 내 예전 모습이 공연히 한심하게 느껴졌다.

불쾌함으로 가득한 인생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는 언젠가 한 번은 도착해야 할 죽음이라는 경지에 대해 늘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을 삶보다 편안한 것이라 믿고 있다. 때로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상태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죽음은 삶보다 고귀하다."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라면 죽으면 되겠네요."
아무리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에서도 이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삶보다 죽음을 귀하다고 믿는 나의 희망과 조언은 결국 불쾌함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것을 초월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내게는 그것이 실천적인 면에서 나 자신이 평범한 자연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한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지간히 점잔 빼고 앉았네."
그때 친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입에서 ‘응’이라는 대답이 새어나왔다. 어째서 나를 비꼬는 말을 스스로 긍정하는 대답이 그다지도 자연스럽고 간명하고 지체 없이 목구멍에서 술술 잘도 나온 걸까. 그때 나는 투명하고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거 돋보기 아닌가? 먼 곳이 용케 보이나봐."
"뭐 그냥, 차부도(差不多)야."
나는 ‘차부도’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는 ‘별 차이가 없다’는 중국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날 밤 돌아오는 길에 전차에서 헤어진 친구는 다시 멀고 추운 일본 영토의 북쪽 끝자락으로 떠났다.
나는 친구를 떠올릴 때마다 다쓰진(達人. 학문이나 기예 등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그의 이름을 생각한다.

유리문 너머로 당장이라도 쓸쓸한 비가 내릴 것 같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모든 인간은 날마다 창피를 당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조차 할 때가 있다. 그러니 이상하게 쓴 글자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정도의 일쯤은 굳이 하려 들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렇게 보였어요. 내장의 위치까지 잘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어요."
"내장이 그렇게 잘 조절되고 있다면 몸이 이렇게 내내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몸이 아프지는 않아요."
그때 여자가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건 당신이 나보다 훌륭하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이렇게 옛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자주 떠올린다.

내가 시키(마사오카 시키. 시인이자 일본어 연구가)가 살아 있을 때 ‘경종과 나란히 선 높은 겨울나무여’라는 시구를 지은 것은 사실 그 경종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인간의 수명은 정말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다. 병치레가 잦은 나는 어째서 살아남은 걸까 생각해본다. 그 사람은 어떤 이유로 나보다 먼저 죽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럴 수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이 죽기 전까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연고가 있는 이 마을 이름은 너무 익숙하게 들으며 자란 탓인지 나의 과거를 불러내는 그리운 울림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재에 혼자 앉아 턱을 괸 채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조각배처럼 마음을 자유롭게 놓아두면 이따금 내 연상이 ‘기쿠이초’라는 네 글자와 딱 마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한동안 배회하는 일도 생긴다.

구스오코 씨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은 내가 위장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일 무렵이었다. 전화로 부고에 내 이름을 넣어도 되겠냐는 문의가 왔던 것도 기억난다. 나는 병원에서 구스오코 씨를 위한 추도시를 지었다.
"국화란 국화는 모두 던져 넣으리, 그대 관 속에."

어리석은 나는 친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믿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던가. 누가 물어본다 해도 도통 모르겠지만 어느 날 밤 이런 일이 있었다.

"저는 마치 독일이 연합군과 전쟁을 하는 것처럼 병과 전쟁을 하는 중입니다. 지금 당신과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천하가 태평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참호에 들어가 병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몸은 난세입니다. 언제 어떤 변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로 내 태도를 정리하려 한다면 다시 일종의 고민이 생긴다. 나는 나쁜 사람을 믿고 싶지 않다. 또 착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악인도 아니고 또한 모두 선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의 태도도 상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돼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 안 하시지만 무서운 면이 있어."
나는 어머니를 평한 형의 이 말을 지금도 어둠침침한 기억 저편으로부터 밝은 곳으로 꺼내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물에 녹아 번지기 시작한 글씨를 급하게 원래 형태로 되돌린 것 같은 절박한 단편에 불과하다.

긴 봄날의 짧은 글
(永日小品)

한참 햇살이 비치는 곳을 바라보는데
눈 밑에 아지랑이가 낀 것처럼 봄의 단상이 넘쳐난다.

《영일소품》은 1909년 1월 <설날>이 《아사히신문》에 게재되고, 1월 14일부터 3월 14일까지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24편이 게재되었다.
그중 14편은 《도쿄 아사히신문》에도 게재되었다.

주인아주머니로 말하자면 눈이 푹 패고 매부리코에 턱과 볼이 뾰족해 날카롭게 생긴 여자였는데 언뜻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여성성을 초월했다. 신경질과 비뚤어짐, 미련함, 의심 같은 온갖 약점들이 부드러운 생김새를 마구잡이로 농락한 결과 이런 비뚤어진 인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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