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까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게 발리는 별로 매력적인 섬이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가 관심을 갖고 있던 육두구, 정향, 커피, 사탕수수 등 향신료와 상품작물이 발리에서는 충분히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풍부한 쌀, 노예무역을 위한 인력 공급지, 인도네시아 동부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연결하는 중계무역항으로 활용되었다.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1846년 발리섬 북부의 싱아라자 항구가 있던 불레렝(Buleleng) 왕국을 시작으로 1906년부터 1908년까지 바둥(Badung), 타바난(Tabanan), 클룬쿵(Klungkung) 왕국까지 8개 소왕국을 정복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의해 소왕국이 정복당하던 시기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906년 9월 바둥 왕가의 ‘뿌뿌딴(puputan)’이다.

덴파사르에 도착한 네덜란드군은 기존의 전투와 다른 모습에 직면했다. 1906년 9월 20일 행진의 선두에 있던 왕이 타고 있던 가마에서 내리자, 힌두교 사제는 왕의 뜻에 따라 크리스(keris, 단도)를 왕의 가슴에 꽂았다. 왕을 따르던 귀족과 주민들도 자결을 선택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여성은 보석과 금화를 네덜란드 군대를 향해 던짐으로써 그들을 조롱했다. 당황한 네덜란드 군인들은 소총과 포탄을 난사했고, 수백 명의 주민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발리인은 네덜란드군의 엄청난 화기를 이미 경험했기에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마지막 항전이자 무저항 자결 행진을 택했던 것이다.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약 1000여 명의 발리인이 명예의 죽음 행진을 선택했다. 이후 발리 전 지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에 포함되었다.

바둥 뿌뿌딴은 발리를 넘어 전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저항을 상징하는 국가 유산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인에게 뿌뿌딴 공원(Taman Puputan Badung), 자갓나타 사원(Pura Jagatnatha), 발리주립박물관(Museum Negeri Propinsi Bali)은 발리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약 100년 전 수많은 사람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던 자리에 뿌뿌딴 공원과 기념조형물을 건립하여 이들의 정신을 기린다. 기념조형물은 네덜란드 군대에 대항해 보잘것없는 무기를 들고 영웅적인 자세를 취한 3명의 발리인 가족을 묘사한다. 여성의 왼손에는 네덜란드군을 조롱하려고 던진 보석이 들려 있다.

신들의 섬에서 만나는 전통 무용과 음악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 강희정,김종호 등저

미국의 인류학자 기어츠는 발리인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주술적 신앙과 관행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했다. 발리의 어원 역시 ‘제물 등을 바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스크리트어 ‘와리(wari)’인데, 발리 힌두교의 믿음의 기반은 천상계의 신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행위의 일상적 반복이다.

수십 명의 남성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그런 원을 만든 후 개구리 울음소리인 "께짝께짝"을 합창한다. 원숭이 군단의 군무와 라마야나 이야기에 기초한 춤이 한데 어우러져 한 편의 종합 예능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상을 겪은 서구인들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에서 ‘진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에덴의 가든’이나 ‘진짜’의 이미지를 발리에서 찾고자 했다. 과거에 대한 복고적인 향수를 발리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관광지 발리’는 1920년대 이러한 믿음에서 시작되었고, 한 해 500만 명의 외국인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하지만 발리섬의 상업화에 따라 관광객의 여행 만족도가 점점 더 낮아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정관광, 대안관광, 생태관광 등 좀 더 나은 관광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어쩌면 100년 전 서구인이 찾았던 ‘진짜 발리’나 좀 더 나은 여행을 찾는 현대인에게 발리인의 진정한 삶이 펼쳐지는 덴파사르가 새로운 대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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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소개 Caffe人(카페인)
서울대학교 커피 동아리

잠 쫓기 위해 마시던 커피,
이제 맛과 향을 즐겨 보아요!

2007년 3월, 국내 최초의 커피 동아리로 
태어났습니다.
카페인(Caffe)에는 커피와 디저트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때문에 커피를 사랑하고 아침에 만든 
갓 볶은 커피의 향기를 알고 있다면 누구나
카페인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모든 단과대에 걸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고, 대학원생도 가입 가능합니다.
동아리의 주된 활동으로는 커피 모임, 
커피 교육 등이 있습니다.
커피 모임은 서울의 유명한 카페들을 
찾아다니는 활동입니다.
한 학기에 한 두번씩 커피 교육을 진행하고, 
평소에는 동아리방에서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실 수도 있습니다.
3월 초에 열리는 동소제에 오셔서 자세한 사항을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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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에 열리는 동소제에 오셔서 자세한 사항을 물어보세요!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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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행자
짧은 글 긴 생각

상상 속에서 나는 누구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나만의 상상 속 여행을
자유롭게 떠나 보세요.

꿈행자
짧은글 긴 생각

상상 속에서 나는 누구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나만의 상상 속 여행을 자유롭게 떠나 보세요.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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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화재와 개보수가 낳은 명성

도시 구획과 그 기본 틀은 다문화의 온실이 되기에 충분했지만 도시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 건설된 도시 조지타운에는 구하기 쉬운 나무로 지은 목조건물들이 들어섰다. 그 때문에 화재에 취약했다.

수상가옥에서 살아간 중국인 이주민들의 신산한 삶

여러 인종과 종족이 모여 살던 조지타운보다 뒤늦게 건설된 곳이 제티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페낭으로 몰려든 중국인 이주민들은 돈이 없어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라서 마땅한 거주지를 찾지 못했다. 그들 중 일부는 조지타운의 숍하우스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몰아닥친 이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숍하우스는 주로 2층에 있던 방을 쪼개서 임대를 주었다.

좁은 방에 여러 명이 살아야 할 정도로 주거 환경은 열악했고, 화재나 각종 재난에 취약했다. 더 늦은 19세기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수상가옥 집성촌인 ‘클랜 제티’로 모여들었다. 현지에서는 그들의 성을 따서 다양하게 부른다. 림 제티(Lim Jetty), 츄 제티(Chew Jetty), 옹 제티(Ong Jetty), 탄 제티(Tan Jetty) 같은 식이다. 주로 중국 푸젠성과 광둥성에서 온 사람들이기에 현재 베이징 중국어와는 발음이 다르다.

클랜 제티는 바닷속 깊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뗏목 같은 구조물을 올려 평평하게 만든 후에 지은 집들이다. 지상에서 보면 다른 집과 별 차이가 없다. 물결에 따라 살짝 움직이는 듯한 느낌은 있지만 전기도 끌어다 놓고 수도도 있어서 얼핏 보면 수상가옥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957년까지는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고 하니, 그 물 위에서의 삶이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처럼 깊은 가난이라고 할까?

이들 중에는 대표적인 화인 거상으로 거듭나 페낭 지역사회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유럽인, 아랍계 거상들과 친분을 쌓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회관을 만들고 비밀결사를 유지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스스로 자치를 했다.

대표적인 이주민 가문 중 하나인 구씨 집안에서 만든 일종의 회관이 쿠콩시(Khoo Kongsi)다. 1906년에 완공된 뒤 지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정식 명칭은 용산당(龍山堂) 쿠콩시(邱公司)다. 외부적으로는 조상을 섬기기 위한 사당이자 모임 장소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비밀결사를 유지하기 위한 회합 장소로 쓰였던 회관이다.

아마도 중국인 화상(華商)의 유산 가운데 압권은 청켕퀴의 페라나칸 맨션과 총파츠의 블루맨션일 것이다. 청켕퀴는 중국인 사회의 수장을 의미하는 카피탄 시나이자 주석 광산 개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호였다.

1897년에 착공해서 1904년에 완공된 그의 저택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싼 염료였던 인디고블루를 써서 짙푸른색으로 외벽 전체를 칠해 블루맨션으로 불린다. 원래는 대지 1490평에 건평 955평이었다고 하나, 그의 후손들이 이 저택을 지키지는 못해서 지금은 푸른 본채 건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세기 말 인도네시아 메단 부동산의 75퍼센트를 소유했던 거상 총아피의 딸 퀴니 창(Queeny Chang)이 페낭에 놀러왔을 때, 열세 살의 소녀는 페낭 거부들의 생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 와서야 페낭 부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인생을 어떻게 즐기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이 모든 걸 보니 메단의 우리 집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라고 썼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쿠칭은 밀림으로 가득 찬 거대한 섬인 보르네오로 향하는 관문이다. 흥미롭게도 쿠칭은 ‘고양이의 도시’로 불린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고양이가 많기 때문이다. 거리와 상점을 활보하고 다니는 고양이들의 모습은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쿠칭(Kuching)’이라는 발음 자체가 말레이어로 고양이를 가리키는 ‘쿠칭(Kucing)’과 같다.

다만 이 이야기들은 그리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 말레이어라도 말레이반도의 말레이어와 쿠칭의 말레이어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쿠칭에서는 고양이를 ‘푸삭(pusak)’이라고 부른다. 그럼 쿠칭이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쿠칭이 크게 두 가지 사건을 기점으로 도시로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첫 번째는 1820년대에 안티몬 광석이 발견되면서 유럽인들의 눈에 띈 것이고, 두 번째는 1819년 인근 싱가포르섬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자유무역항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브루나이의 왕자 마코타(Makota)가 1824년에 최초의 마을을 조성하게 되는데, 바로 쿠칭의 시작이다.

사원 건물이 중요한 이유는 19~20세기에 걸쳐 화인 공동체 간의 동질성과 소속감을 강화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화인 자녀들을 교육하는 기능, 새로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직업을 알선하는 기능, 상인들 사이의 정보 교환 및 협상 공간을 제공하는 기능, 명절에 행사가 치러지는 광장의 기능 등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화인이 외지에 정착하게 되면 가장 먼저 짓는 것이 사원 건물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사원은 쿠칭의 전체 화인들을 통합하기 위한 ‘수산정 복덕사 대백공묘(Tua Pek Kong temple 壽山亭福德祠大伯公廟, 줄여서 대백공묘)’로 1820년대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어로 ‘뜨리마 까쉬(terima kasih)’는 ‘고맙습니다’라는 뜻이다. ‘마뚜르 누운(matur nuwun)’은 자바어로 ‘고맙습니다’라는 의미다. 족자카르타(Yogyakarta)에서 ‘뜨리마 까쉬’ 대신 ‘마뚜르 누운’이라고 말하면 현지 주민들은 여행객에게 좀 더 친근함을 표현할 것이다. 이렇듯 족자카르타는 자바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릴 만큼 과거 자바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한 도시 중 하나다.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지역에 자리 잡은 도시다. 도시의 북쪽에 위치한 메라피 화산의 영향으로 활화산의 위협이 상존하지만, 상대적으로 기름진 평야지대에 위치한 장점도 있다.

족자카르타는 신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다는 뜻의 ‘족자’와 도시를 뜻하는 ‘카르타’가 만나 ‘안전한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인구 40만 명의 작은 도시다.

족자카르타에는 26개의 종합대학이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 최고 명문대학이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가자마다대학(Universitas Gadjah Mada)과 유명 예술대학 중 하나인 족자카르타 예술대학(Institut Seni Indonesia Yogyakarta)이 있다. 더욱이 족자카르타는 물가가 저렴하고 우수한 교육 시설이 있어, 전체 인구의 20퍼센트가 학생일 만큼 ‘학생의 도시’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족자카르타 전통문화의 중심지, 말리오보로 거리

관광지로서 세계적 명성이 높은 발리섬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역 중 하나다. 이에 비해 족자카르타의 별칭은 ‘인도네시아의 숨은 보석’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 곳곳에 자바의 전통문화와 연관된 문화자원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바섬 공예의 백미는 2009년 10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도네시아 바띡’이다. 바띡은 ‘점이나 얼룩이 있는 천’이라는 뜻의 자바어 암바띡(ambatik)에서 유래한다. 뜨거운 밀랍을 이용한 일종의 염색 기법이다.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의 불교와 힌두교 유적

환태평양 조산대, 즉 불의 고리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지진, 화산, 해일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나라다. ‘세계 최대 단일 불교 유적’,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불교 유적’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가진 보로부두르 사원은 사일렌드라 왕국의 멸망과 함께 약 1000년 동안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대나무 숲에 있는 사원’이라는 뜻의 믄둣 사원에는 자바 조각의 최고 걸작인 석불삼존상이 있다. 약 3미터 높이의 석가모니 본존불이 중앙을 차지하고, 오른편에 관을 쓴 관음보살상이 있다. 왼편에 있는 반가상은 문수보살로 추정된다. 사원 앞에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관계있는 수령 400년의 보리수나무가 우뚝 서 있다.

자바섬 힌두 사원의 백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프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이 있다. 프람바난 사원은 3개의 동심원 광장으로 설계되었고, 총 224개의 크고 작은 사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람바난 사원은 중부 자바의 힌두 문화를 배경으로 한 산자야 왕국의 문화유산이다. 9세기 중반 산자야 왕국의 라카이 피카탄(Rakai Pikatan) 왕에 의해 축조되었다. 하지만 16세기 ‘불의 산’이라 불리는 머라피산의 분화와 화산재 그리고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 사실상 방치되어 있었다. 1918년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복원이 시작되었고, 주 신전을 비롯해 18개의 신전이 1953년에야 복원되었다. 하지만 2006년 5월 27일 지진으로 일부 신전이 다시 무너졌다.

종족별·지역별 분리와 차별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자바인의 나라’로 불린다. 따라서 족자카르타의 음식은 인도네시아 국민 음식으로 여겨지지만, 여전히 이 지역 음식은 중부 자바의 지역적 색채가 강하다. 앞서 소개한 구득 외에도 디저트와 간식으로 분류되는 자잔 파사르(Jajan pasar) 역시 족자카르타를 대표하는 지역 음식이다.

자잔 파사르는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파는 각종 간식이라는 의미다.

여행객 대부분은 이 섬의 주도인 덴파사르를 방문할 일이 거의 없다. 입국 시와 귀국 시 발권되는 티켓에 약자로 ‘DPS (DENPASAR)’로 기재되거나 기장의 안내방송에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덴파사르 국제공항이라는 명칭과 달리, 이 공항의 실제 위치는 발리 남부 지역의 투반(Tuban)에 위치한다. 관광객의 대다수는 덴파사르에 도착하지만 덴파사르를 방문한 적이 없는 이상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발리주는 8개 군과 1개 시로 구성되는데, 이 1개 시가 주도인 덴파사르다.31 덴파사르는 발리 전체 인구의 대략 4분의 1인 80만 명이 거주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에게 인식되지 않는 미지의 도시이기도 하다.

서구인들은 일찍이 이 섬을 ‘신들의 섬’으로 명명했고, 이는 발리의 신비한 풍경과 특색 있는 전통문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관광지로 성장하는 데 일조했다. 이에 반해 덴파사르는 공공시설, 상업시설, 교육시설 등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신들의 섬에서 발리인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덴파사르다.

바둥 뿌뿌딴, 저항을 상징하는 국가 유산

인도네시아 말루쿠 군도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는 16세기 네덜란드와 영국 등 유럽 강대국이 아시아 지역에 눈을 돌리게 한 작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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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은 일찍부터 유럽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이식된 것은 물론이고 인도, 중국, 아랍계 이주민들의 디아스포라가 짧은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척의 배로 페낭을 점령한 영국

1786년 8월 11일 영국은 페낭을 점령했다. 사실상 네덜란드나 스페인, 포르투갈에 비하면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영국은 당시 페낭을 지배하던 끄다(Kedah)의 술탄과 협약을 맺었다.

다인종, 다종족 도시의 형성

열대우림이 우거진 미개척지였던 페낭에서 비교적 먼저 건설된 곳이 조지타운이다. 조지타운 건설 초기의 과제는 늪지대를 메우는 것이었다.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 영국 해협식민지 정부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계약노동자들을 투입했다. 여기에 유럽 아르메니아인까지 들어가 다인종, 다종족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고푸라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종다양한 신과 동물, 자연물을 조각하고 명도가 높은 색으로 화려하게 색칠을 했다. 어쩌면 밋밋한 조지타운 도시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을 신전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구나 쉽게 사원을 잘 찾아오라고 눈에 확 띄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호화찬란한 색은 역시 인도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스리 마하마리암만 사원의 고푸라 역시 페낭의 다문화적이고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

가톨릭이 처음 전해진 후 조정의 박해로 신학교를 개설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의 학생들도 페낭까지 와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페낭신학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양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12 1855년 이만돌, 김요한, 김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을 시작으로 1884년까지 여러 명의 신학생이 페낭에서 사제 교육을 받고 돌아갔으며, 이 중 12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페낭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으며, 교정에는 페낭신학교 교수였던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있다.

조지타운의 페낭교구박물관에는 박해를 받아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와 ‘황사영 백서’ 사본이 있다.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1775~1801)이 신유박해(1801)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적은 기록이다.13 지금은 페낭신학교의 옛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거니플라자와 거니파라곤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신학교의 일부였던 성요셉학교만 보존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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