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프랑스혁명에 빚지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개선문을 바라보며 우리는 프랑스혁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헤아려보았다. 그 혁명이 어찌 프랑스 시민만의 것이겠는가. 인류 모두가 그 혜택을 입었다. 프랑스혁명이 있었기에 후세는 공화국의 가치를 알았다. 자유와 평등이란 지표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통념을 부정한다. 베를린의 본래 뜻은 ‘습기가 많은 땅’이었단다. 이 도시를 적시는 풍부한 강물과 근교의 크고 작은 호수로 인하여, 이곳은 오래전부터 습지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졌다 해도, 시민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 베를린은 곰의 도시가 맞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이 도시 한복판에는 파리 광장이 있다. 1814년 프로이센 군대는 연합군의 일부로서 파리를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영원히 물러났다. 이를 기념하여 베를린 도심에 파리 광장이란 지명이 생겼다. 그 이전에는 지형이 사각형이었기 때문에 ‘피어에크’(사각형)라고 했다. 바로 그곳에 브란덴부르크 문이 나를 보란 듯 버티고 서 있다.

상수시 궁전에서 게오르크와 나는 비스마르크 수상을 떠올렸다. 그는 빌헬름 1세 때의 명재상이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연달아 격파했고, 급기야는 독일제국을 건설한 으뜸가는 공신이었다. 그는 재상으로 취임할 당시, ‘오직 철(무기)과 피(전쟁)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해 ‘철혈재상’이란 별명을 얻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전형적인 군국주의자였다.

그때 비스마르크는 예언하였다. ‘만약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내가 퇴임한 지 15년쯤 뒤에 독일제국이 파멸할 것이다.’ 그가 해임된 것은 1890년이었고, 독일제국이 파산한 것은 1918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천만 명의 전사자와 2천만 명의 부상자를 낸 채 끝났으나,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은 형언할 수 없이 처참하였다.

1942년 1월 20일에는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숫가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나치 친위대의 별장에서 열린 그 회의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이 구체적으로 계획되었다. 이후 유럽에서는 오직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0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의 인종청소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과거 유럽 역사에서 반유대주의 광풍이 간헐적으로 되풀이되었으나, 마침내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현재 독일은 순항 중인 것 같다. 역사상 오랜 숙적이던 프랑스와도 관계 개선에 성공했다. 두 나라는 힘을 합쳐 유럽통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 길은 험하고 아득히 멀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초유의 역사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평화와 공존을 향한 노력이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성 평등 지수(GDI)가 가장 높은 곳은 어디일까. 덴마크이다(2019년 현재). 그럼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역시 덴마크이다.

그들은 세상의 아이들이 더없이 좋아하는 레고(LEGO)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잘 만들어도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다!

공원을 개장한 게오르그 카스텐슨은, "사람들이 즐겁게 놀 때 정치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왕의 허락을 얻었다. 정치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민들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할 궁리에 여념이 없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가 다음과 같은 말로 덴마크 사람들을 고무 격려했단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노란 별을 가슴에 붙이라고 명령한다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노란 별을 달 것이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발한 반격인가.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어린이만을 위해서 동화를 창작한 것도 아니었다. "어린이는 내 이야기를 피상적으로 읽는다. 성숙한 어른이라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까마득한 옛날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에 세관이 있었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독일을 하나로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취리히라는 도시의 이름이 세관을 뜻하는 라틴어(Turicum)에서 유래했다니 신기하다.

모스크바는 날씨도 빈부 차이도 극단적이다. 이곳에는 1천 200만(2019년 현재) 명의 시민이 거주한다. 일부는 서구적 가치를 내면화했다고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가 ‘모스코비치’(모스크바 사람)의 가슴을 지배한다.

도시 분위기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다.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들의 독특한 생활 감정을 피부로 느꼈다. 차르(황제)와 보야르(고위 귀족)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크렘린이 역사의 주된 무대가 된 것은 13세기였다. 모스크바 공국의 창건자 유리 돌 고루키가 이곳에 목책을 둘러 요새를 구축했었다.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뜻하는 러시아어가 크렘린이다.

알래스카를 잃었음에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다. 그들에게 시베리아는 유형지였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그러했다. 레닌도 스탈린도 시베리아 유형을 직접 체험하였다. 지금은 그곳이 천연자원의 보고로서 사랑받고 있으나, 한때는 저주받은 자들의 땅이었다.

박물관 앞에는 푸시킨 부부 동상이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나 손을 마주 잡지는 않은 모습이다. 그 두 사람의 손을 함께 잡으면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청춘 남녀들은 부부의 손끝을 쥔다. 시인 부부의 손끝이 매끈하게 닳아 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레닌의 후계자는 스탈린이었다. 그 역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망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레닌의 뒤를 이어 차르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스탈린이란 말은 ‘강철 사나이’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였다. 신앙심이 강했던 모친의 영향으로,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그를 혁명가로 만들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는 헤어나기 어려운 혼란에 빠져 있었고, 혁명의 기운이 움텄다. 스탈린은 권력을 손에 쥐자 산업화를 서둘렀다. 계획경제를 신봉했기 때문에, 그는 5개년 계획을 세웠다. 3차에 걸친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방면에서 초유의 속도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업은 겉만 번지레하였다. 실제로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는 최악의 독재자였다. 끝없이 자신을 우상화하고, 죽을 때까지 공포정치를 펼쳤다. 불행히도, 그를 모방한 독재자들이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에 등장했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를 비롯해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북한의 김일성도 스탈린의 분신이었다.

국경 도시의 비운
처음부터 이 도시는 국제적인 교통의 요지였다. 인구는 고작 30만 명(2019년)이지만 이곳을 독일어로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라고 한다. 로마 시대부터 그렇게 불렀다. ‘스트라스(stras)’는 큰길이란 뜻이요, ‘부르(bourg)’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가리킨다. 즉 한길에 자리한 성곽도시였다. 수백 년 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는 훈족의 지배 아래 신음하였다. 5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그 후로는 줄곧 독일 영토였다.

스트라스부르는 중세부터 문학의 중심지로도 호평을 받았고, 출판업의 전통도 깊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금속활자로 이름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오늘날 구시가지에는 구텐베르크 광장이 있고, 그의 동상이 있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다. 16세기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출판업의 중심지였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
스트라스부르의 운명은 기구했다. 19세기 후반, 근대화에 성공한 프로이센(독일)이 팽창전략을 펼쳐 옛 땅을 회복하였다(1870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 무렵 알자스의 민심은 어땠을까. 프랑스 애국 시민의 관점에서 쓴 문학작품 하나가 있다. 『마지막 수업』이란 단편소설로, 알퐁스 도데가 1871년에 발표한 인기 소설이다. 이 소설은 국토 상실이라는 첨예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나도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소설을 읽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모국어를 상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이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이 애국심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해, 그 시절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의 모국어는 아직도 독일어였다. 그들은 심한 사투리를 사용하였고, 지금도 큰 차이가 없다. 도데의 소설이 묘사한 애국심은 너무 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스트라스부르는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독일 쪽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또다시 독일군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프랑스로 국적이 또 바뀌었다. 1869년부터 1946년까지 스트라스부르 시민의 국적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혼란의 연속이었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점차 강화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학은 자본주의의 하급 간부를 육성하는 공장이 되고 말았다. 지식인들이 이를 묵인하는 슬픈 현실이다."

당시 유럽 대학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한 다음, 공저자들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대학생들은 오직 사회 전체에 대한 처절한 저항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당면한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은 제아무리 훌륭한 문명을 건설한다 해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다. 만약 이 사실을 망각하면 큰 재앙이 올 뿐이다. 자연 앞에 오만한 도시는 결코 오랫동안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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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람들은 영어도, 불어도, 독일어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래서일까. 암스테르담 사람들, 나아가 네덜란드 시민들은 좁은 자기네 땅 안에서 복작거리며 심하게 다투지 않는다.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진출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그는 작중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포착하는 데서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렘브란트가 22세 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있다. 이 그림을 감상한 독일의 문호 괴테는 우울과 방황으로 세월을 보낸 자신의 청춘 시절이 떠올랐다고 고백했다. 과장된 표현일지 몰라도,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시킨 셈이었다.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평안에 대한 사랑이 저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저는 공적 교육 활동과 거리를 둠으로써, 약간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자유와 관용을 중시하는 암스테르담이었으나 한계는 명백했다. 20세기 초에도 남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에서 현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인종차별은 암스테르담조차 여간해서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지금은 인종차별이 거의 사라졌으나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런던을 버리고 떠날 지식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런던이 싫다면 삶에 지친 것인데 이곳에는 인생의 무게를 견디게 할 모든 것이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 시인 새뮤얼 존슨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 영국에는 제1차 산업혁명 바람이 불었다. 성공한 부르주아가 많았다.

영국 친구 윌리엄은, 영국 사회의 특징이 무어냐고 묻는 나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실용주의에 기초한 합리성이라고. 그래서일까, 영국에는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계몽사상가는 많았으나 독일의 칸트나 헤겔에 견줄 만한 형이상학적 철학자는 없었다.

‘비틀즈’라는 대중음악의 달인은 있어도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고전적인 음악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하는 철학자요 수학자이자 실천적 행동가인 버트런드 러셀만 하여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글을 남겼을 뿐, 복잡하고 난해한 철학을 논하는 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의 영광도 사라질 때가 왔다. 20세기 초반,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의 위상에 엄청난 변화가 왔다. 한때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의 약진이 눈부셨다. 그러나 런던은 여전히 세계 최상급 대도시이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국제금융의 중심지이다. 뉴욕을 필두로, 싱가포르, 홍콩과 더불어 세상을 움직이는 돈줄인 것이다.

‘아편전쟁’ 개전을 결정했다. 아편 밀매에 종사하는 무역상들의 로비로 인해,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이 ‘더러운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전쟁으로 인하여 청나라는 제국주의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바람에 청나라라는 울타리를 믿고 의지했던 조선이 덩달아 무너지고 말았다. 다른 나라의 보호를 기대한다는 것은 한없이 어리석은 일이다.

사원 한쪽에는 3천 명도 넘는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있다. 각기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사회적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들이다. 아이작 뉴턴이라든가 찰스 다윈, 스티븐 호킹 같은 과학자도 있고, 윌리엄 피트, 파머스턴, 윌리엄 글래드스톤과 윈스턴 처칠 등 유명한 정치가의 이름도 발견된다.

비엔나는 선망의 도시다. 향기로운 문화도시다. 이곳은 화가 클림트가 활동한 곳이며, 심리학을 인류에게 선사한 프로이트의 고향이다.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한 곳이다.

비엔나를 가장 비엔나답게 만든 것은 고전음악이었다. 음악의 물결이 잔잔히 흐르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숨결을 이곳저곳에서 느낄 수 있다. 도심을 산책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음악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비엔나의 카페는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이 글을 고풍 있는 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끼적였다. 비엔나 시민에게 카페는 ‘제2의 거실’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시내에는 약 1,200개 카페가 성업 중이다. 2011년, 유네스코는 이 도시의 카페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먼저 잔에 커피를 반쯤 붓고 우유를 넉넉히 따른다. 그 위에 생크림을 얹고는 카카오 가루를 뿌린 것이다. 300년 넘게 이어진 전통의 비엔나커피이다. 본래는 ‘아인슈페너’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라는 뜻이다.

파리의 위대함은 무엇일까. 이 도시는 귀족과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파리가 상류층의 취향을 배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강조점은, 평범한 시민들도 이곳에서는 주인 행세를 하며 산다는 사실에 있다. 파리 시민들은 골목길에서 이웃을 만나 정답게 수다를 떤다. 또 아름다운 뤽상부르 공원으로 가서 귀족처럼 우아하게 피크닉을 즐긴다. 프랑스혁명의 도시답게 파리는 일반 시민의 것이다.

프랑스인 입장에서 보면 노트르담 대성당은 특정한 종교기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 1천 년 동안 프랑스가 겪은 역사적 경험의 총체가 응축된 역사의 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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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라 얘들아

[정산보고]
44,700
하루키 翁 노르웨이 숲 제외,
노인과 바다, 분노의 포도, 무기여~~
3권은 책 상태 불량 매입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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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대학교(University)는 어원상 일반인도 참여하는 ‘조합’이란 뜻이다. 카를대학교의 역사를 보아도 조합이란 표현이 맞는 거였다.

체코는 카를대학교를 통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전한 새로운 이론과 주장을 수용했다. 얀 후스처럼 출중한 인물이 나온 것도 개방적인 국가 간 문물교류의 결과였다. 예부터 개방과 자유는 대학의 생명줄이었다.

이 대학의 졸업생 가운데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많았다. 특히 근현대의 탁월한 문인들이 많았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해 프란츠 카프카, 카렐 차페크, 밀란 쿤데라가 대표적이다. 릴케와 카프카는 현대 독문학계의 큰 별이었다.

차페크는 사회비판 정신이 넘치는 작가였다. 쿤데라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로,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신음하는 인간존재의 비극을 탐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현대 문학계의 최고 거장으로 정평이 있다.

브라헤는 탁월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덴마크인으로 성격이 괴팍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 번은 사촌과 결투하다가 코가 잘렸단다. 그래서 황동으로 만든 코를 달고 다녔다. 브라헤는 최후의 순간도 극적이었다. 갑자기 방광이 터지는 바람에 운명했다고 전한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준비했다는데, "그는 현명하게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는 기이한 글귀였다.

프라하 시절, 청년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브라헤의 문하로 들어왔다. 케플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프라하로 온 것이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했다. 또한, 스승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행성이 타원형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것이 ‘행성운동’의 제1법칙이다. 그 밖에도 그는 면적과 속도가 보존된다는 내용의 ‘행성운동’ 제2법칙도 발견했다. 또, 행성과 태양의 거리와 운동 주기에 관한 제3 법칙도 알아냈다. 케플러는 평생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다 쓸쓸히 사망했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재확인한 이는 영국의 뉴턴이었다.

프라하의 봄
자유를 향한 프라하의 행진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을 기억한다. 1968년 8월이었다. 소련군을 선두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탱크가 프라하를 침략했다.

체코 공산당은 공산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목표는 민주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었다. 동구 공산권의 맹주 소련은 당황했다. 그들은 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과 함께 체코를 압박했다. 이에 대항하여 체코 지식인들은 이른바 ‘2천어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시민운동으로 맞섰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얀 후스의 후계자임이 명백했다.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한 5개국이 20만 명의 연합군을 편성해 프라하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체코 개혁파를 숙청했다. 개혁파로 분류된 50여만 명의 당원도 체코 공산당에서 모두 제명되었다.

‘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작가 출신 대통령 하벨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축구로 유명하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팀이 있어서다. 그런데 이 도시는 현대사의 깊은 암울을 간직하고 있다. 청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좀 든 시민들은 스페인의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1892~1975)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히틀러와도 거래한 인물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우파를 총동원해 스페인 내전(1936~1939)을 치르기도 하였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종군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은 많은 이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드리드에서 교수형을 받고 죽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드리드에서는 도저히 제 명대로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끔찍한 혹평인가.

내가 가장 주목한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이 그림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이 유명한 걸작 앞에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게르니카는 지명이다. 그것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바스크라면 스페인에서도 소수민족이 사는 특별한 지역이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군을 지원하던 히틀러의 독일 공군이 이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 삽시간에 2,000여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피카소는 사후에야 조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었던 이 화가에게도 이처럼 꼿꼿한 일면이 있었다. 조선 시대 선비를 떠올리게 하는 꼬장꼬장함이 아닌가.

역시 스페인 화가였던 고야는 조국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을 때를 잊지 못했다. 그는 침략군에게 직접 저항을 표시할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침략군이 물러난 다음, 고야는 과거의 비참한 광경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그는 1808년 5월 3일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학살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무고한 양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역사책을 읽어보면 어디서나 끔찍한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고야와 피카소처럼 전쟁의 비극을 날카롭게 고발한 화가는 별로 없었다.

침략자들은 금과 은에 걸신이 들린 마귀처럼 아즈텍과 잉카의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수천만을 헤아리던 원주민을 강제노동으로 내몰았다. 금과 은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고통을 받던 원주민들이 몰사했고, 그에 더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각종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원주민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스페인 사람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고 와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착취한 금은 보배를 이용해 새로운 산업을 육성한 것도 아니고, 전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스페인의 침탈로 인해 위대한 잉카 문명이 사라졌고, 그들이 앞장섰던 종교전쟁을 통해 유럽의 분열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1930년대에는 내전의 고통도 겪었다. 그때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스페인을 찾았다. 마침 그가 쓴 기행문이 남아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작가는 황량하고 쓸쓸한 스페인의 풍경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과 패잔병이 가득한 도시의 골목길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돈키호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
때는 스페인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홀연 세르반테스라는 작가가 등장했다. 그는 작중 인물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 사회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예리하게 분석하였듯,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는 곧 스페인의 원초적인 초상이었다.

돈키호테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저돌적인 행동파라고 분류하기 쉽다. 사람들은 사색적인 햄릿의 반대편에 돈키호테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세트의 평가는 달랐다. 그는 돈키호테야말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스페인의 혼이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라는 말이다.

첫째, 눈앞의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보이는 것도 지워야 한다. 그 대신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 스페인 미술의 거장들이 걸어간 길에서 배운 바이다. 마드리드에 오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점이다.

둘째, 마드리드에서 내가 만난 역사의 거인들은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삶을 구속하는 기성체제의 비판자들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곤욕을 치렀고, 세상은 그들을 곧 망각했다. 그러나 얼마 뒤 새 세상이 밝아올 때면 그들은 다시 찬란하게 부활했다.

유럽에는 흥미로운 속담이 하나 있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창조했다." 많은 사람의 눈에 이 나라는 쓸모없는 땅덩어리로 보였다. 그래서 서양 중세의 탐욕스러운 귀족과 성직자들조차 외면했다.

덕분에 역사적 반전이 일어났다. 용감한 평민들이 암스테르담의 개펄을 일궈 옥토로 만들었다. 그들의 이마에서 흐른 구슬땀이 한 뼘 한 뼘 땅덩어리가 됐다. 말이 쉽지 바닷물을 뽑아내고, 파도를 막아 밭을 일구고 마을과 도시를 만드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가 지켜온 관용의 전통 때문에 나는 이 도시를 특별하게 여긴다. 그들의 관용은 개방적인 문화 또는 자유의 정신과 안팎을 이룬다. 이야말로 암스테르담의 생명력이 아닐까 한다.

세상 풍조에 무조건 영합하기보다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추구했던 렘브란트였다. 그는 성찰적인 화가였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화상은 그의 자서전이었다.

어느 모로 보든 렘브란트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예술가의 삶이 있었기에, 관용과 자유는 암스테르담을 지배하는 정신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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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1907년에는 자연환경이 또다시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닷물이 이 도시와 북해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였다. 브뤼헤는 문자 그대로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도시 경제가 힘차게 회생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이래 그 물길이 막히고 트이고를 반복할 때마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였다. 역사에 보기 드문 사례였다.

프라하는 날씨가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습도도 낮아서 살기 편하다고 생각한다. 연간 강수량은 한국의 절반 이하인데 7월의 프라하는 기온이 지나치게 높지 않고 공기도 쾌적하다. 사철 다 좋지만, 여름의 프라하는 최상의 여행지가 아닐까 한다.

19세기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굴지의 공업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산품 중에는 정교한 무기도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군도 체코제 기관총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68년 1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은 소련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되었다. 온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보다 10여 년 앞서 역시 동구권의 일부였던 헝가리에서도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1956년 10월). 김춘수 시인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지어 소련의 군홧발에 짓이겨진 헝가리 자유화 운동의 비극을 노래했다.

프라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분수령으로, 소련 다음으로 강성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 동독이 붕괴했다.

이어서 체코와 헝가리 및 폴란드 등 동구권 전체가 흔들렸고 곧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프라하는 소련의 지배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의 출발점이자 동구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종착지였다고 말해도 좋겠다.

얀 후스의 저항 정신이 살아 있는 곳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 앞에서 진실 즉, 정의를 결코 부정하지 말라!

후스의 옥중서신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불의한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서야말로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 점이 문제가 되어 결국 콘스탄츠공의회에 불려갔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1415년).

그런데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후스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추구했다. 『교회론(Deecclesia)』과 『강론집』 등의 저술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영혼의 구원은 신이 예정한 대로 이뤄진다. 따라서 돈을 주고 구매한 <면벌부>(면죄부) 따위로는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으나, 당시에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후스는 <면벌부> 판매에 골몰하던 가톨릭교회와 정면충돌하였다.

루터와 후스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다행스럽게도 루터 곁에는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가 있었다. 루터는 활자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곧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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