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게 외국인들의 땅으로 한국인은 쉽게 들어가 보지도 못하며 서울 교통망의 맥을 끊어온 미군기지의 반환이 시작되었다. 2013년부터 미8군 사령부, 유엔군 사령부 등이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한미연합사와 일부 미군부대만 남아 있으며, 완전히 이전이 끝난 뒤에는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 집값의 가파른 상승이 공급 부족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공원 대신 아파트를 짓자는 말이 나오고,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 국방부 자리에 집무실을 마련함으로써 혼란이 이는 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서울 한복판의 풍광 좋은 이 권역이 군부대와 묘지, 유흥시설 등에 오래 매여 있었던 셈이다.

서재필을 비롯한 독립협회는 360년이 지난 1897년에 이 영은문을 헐고 두 기둥만 남겼다. 그리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모화관은 독립문으로 바꾸었다).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김가진이 썼다고 하나,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설도 꾸준하다. 당시 이완용도 독립협회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심지어 독립 건립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독립협회와 급진 개화파 구성원들은 대체로 반청친일의 입장을 띠고 있었다. 사실 독립도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근대 주권국가로서 독립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강화도 조약 제1조가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사대 일번지를 이렇게 갈아엎은 것이다.

1908년에 경성감옥으로 세워졌는데, 사실상 의병 감옥이었다. 을사조약으로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병을 붙잡아서 가두고 고문할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년 뒤 연창수가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근대 한국 최초의 정치범 처형이었다) 국권 상실까지 수십 명의 의병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서대문형무소 내부는 이미 대한제국의 주권이 털끝만큼도 미치지 않는, ‘먼저 온 일제강점기’였다.

일제 내내 상황은 비슷했다. 김구, 손병희, 한용운, 여운형 등이 이곳을 거쳤고 유관순, 강우규 등은 이곳에서 죽었다. 강우규는 처형, 유관순은 옥사였다. 안창호도 고난의 수감 생활로 병이 생겨 출옥 후 사망했다. 김구는 "옥사 면적에 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수용되어, 발 뻗을 틈조차 없었다. 자다가 몸이라도 뒤척이면 옆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라고 회상한다.

해방 뒤에도 서대문형무소는 정치범들을 억압하기 위한 공간으로 종종 활용되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이승만과 겨루기도 했던 조봉암이 1959년에 여기서 처형되었다. 이유는 ‘평화통일을 주장함으로써 북괴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정권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다. 똑같은 사법 살인은 1975년에도 있었다. 유신정권은 제2 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32명을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고, 그중 8명을 이곳에서 죽였다.

리영희, 문익환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들도 이곳에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곳의 열악한 환경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지, 리영희는 "몸을 간신히 누일 공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마치 관 속에 들어간 듯했다. 화장실 바로 옆에서 밥을 먹어야 했기에, 구더기들이 음식 위로 우글거렸다"라고 썼다.

1978년 그 하중도인 난지도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하고 1993년까지 서울과 그 인근 도시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이곳에 매립함으로써 ‘피라미드의 33배 규모’라는 어마어마한 쓰레기 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제 못지않게, 해방 뒤에도 이 권역에 대한 대접이 험했던 셈이다.

본래는 난초와 지초가 아름답게 피어서 난지도라 불렸으며 유원지로 활용되던 난지도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고약한 섬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곳을 포장하고 치장해서 ‘월드컵공원’을 조성하기는 했다. 그래도 한동안 봄철이면 오물 냄새가 인근에 퍼졌으며, 이곳에서 발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염물질이 건강을 해치니 절대 놀러 가면 안 된다는 ‘도시 괴담’이 아직도 있다.

1409년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조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안암동에 터를 잡았다가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 정릉貞陵이 되었다. 당시의 임금은 태종으로, 그는 계모이며 정적이었던 그녀에게 뒤끝이 있었다. 그래서 유지 보수를 전혀 하지 않았을뿐더러 청계천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을 가져다 고쳐 깎아서 새 돌다리를 만들도록 하는 등 파손에 앞장섰다. 이후 무슨 잡초만 만발한 언덕배기처럼 방치되었다가 1669년 이후 겨우 손질을 해서 오늘에 이른다. 이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泰陵도 여기에 있다. 두 여성 모두 성격이 강했고 정치적 센스가 뛰어났다. 신덕왕후는 태종 이방원과의 정쟁에서 패배했으나 문정왕후는 승리해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여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음이 차이랄까.

이곳은 독재정권에 맞선 학생운동의 진원지라는 자부심이 있다. 이 권역에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4월 18일에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다 동원된 폭력배들에게 피습되었다. 이 일이 서울에서 4·19 혁명이 일어나게끔 촉발했다. 이를 감안했는지 1962 년에 성북구 수유동에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희생자 묘지가 건립되었다. 이 권역에는 고려대 외에 국민대, 한성대, 성신여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등 대학교가 많으며 종로 - 중구 권역의 성균관대와도 가깝다. 서대문 권역의 신촌 같은 대학촌은 없으나 서울에서 가장 대학생들이 많은 권역 중 하나다.

지금은 재벌 1세대만이 그곳에서 계속 살며 그 후계자들은 강남 등지로 나가서 살짝 시대에 뒤져 가는 감이 있으나 아직도 최고 부촌의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비슷하게 개발되어 부촌 대열에 들었으나 이후 부동산 개발 대책이 꼬이면서 철거된 집터만 잔뜩 남아 을씨년스러워진 장위동 같은 곳도 있다.

1970년,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이 이런 현실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동대문구청에, 나중에는 노동청에 진정을 넣고 대통령에게까지 탄원서를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결국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책을 불사른 다음 스스로의 몸에 석유를 붓고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결코 과격하지도 급진적이지도 않은 이 요구가 무시되던 현실은 그의 젊은 생명을 태움으로써 비로소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가 분신했던 청계천로 274번지에 그의 동상이 서 있으며, 기념관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동대문시장은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패션·의류·주얼리에 중점을 둔 복합 쇼핑몰들이 들어서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생겨 패션 디자인의 메카로 거듭나 있다.

어색한 짧은 머리를 만지며 입영 열차를 타러 가는 신병들이나, 경주 등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들의 새 출발을 수없이 많이 지켜본 청량리역이다.

고려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낙성대(고려 시대에 처음 세워졌으나 폐허처럼 된 것을 거의 통째로 새로 지었다)와 국립현충원은 모두 북쪽의 침략에 맞서서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호국 정신을 강조하고 현창하는 의미가 있었다. 대학로를 비롯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서울대학교 캠퍼스를 관악산 자락으로 이전 - 통합한 것은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였다.

대한민국의 모두가 탐하는 땅

"이럴 줄 알았으면, 빚내서 강남에 집을 사두는 건데!"

현대 한국인의 흔한 푸념이다. 문제는 이 말을 10년 전에도, 20 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흔히 들었다는 것이랄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는 이런 말이 아예 나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강남 집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아서라기보다, 빚을 져서 살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기에) 점이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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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제한테 선물받은 책들
-신의가면 1,2는 내가 산 거

신의 가면1~4
인도철학사1~4
러시아의 역사 상,하

해마다 삼실서 직원. 복지로 20만원 어치 책을 사준다고, 책 모으는 거 좋아하는 형부 다 사란다. ㅎㅎ 착한처제

작년엔 덕분에 강만길 저작 시리즈를 다 모았다.

그동안 장바구니 담아놓고 비싸서 못사던 책들을 보아봤습니다.

근데, 꽂을 책 꽂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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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6-09 21: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더 이상 책장 공간이 없습니다. 읽고 팔던지 줄여야하는데...ㅋㅋㅋㅋ
<러시아의 역사>저도 사두었어요^^
훌륭한 마음씨의 처제를 두셨네요!

대장정 2024-06-16 09:57   좋아요 2 | URL
늦게 봤네요. 팔수도 줄일수도 없어요ㅠㅠ. 일부는 이북으로 사는데, 이북이 없는것도 있으니 원...즐거운 휴일 되세요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이 권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 세워진 나라는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배반당한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한韓이다.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 하나였던 한이 마한과 진한과 변한으로 갈라진 것인지, 아니면 한이 곧 마한이며 진한과 변한은 별도로 형성된 것인지, 아예 준왕의 남하설 자체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맞는지 등이 모두 불분명하다. 아무튼 그 시점에 한강 남쪽에서 국가가 형성되었다면 구석기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 짓고 살아온 강동구 권역은 뭐가 되었든 한 나라의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단순한 토성이었든 목책을 높이 올려 방어력을 높인 것이든, 공성기기를 갖춘 대군의 집중 공격에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결과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풍납토성의 남은 부분에서 불에 심하게 탄 것 같은 곳들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공성전의 흔적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북성이 먼저 무너지고 뒤이어 남성이 무너졌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북성이 풍납토성이자 위례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므로, 위례성이 견디지 못할 것 같자 개로왕이 몽촌토성으로 헐레벌떡 도망쳤지만 그 성도 함락되면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혔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중심에서 한반도의 중심이 되다
지금의 서울 지역은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한주는 너무 넓은 땅을 대충 하나로 묶은 변방 지대였고, 군사적 중심지인 중원경中原京은 서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지금의 충주에 들어섰다. 그래서 고구려가 위례성을 무너뜨린 5세기 말부터 10세기 초까지 서울은 역사적 암흑기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원 간섭기 시절 고려 조정은 3경 체제를 유지하기가 버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1308년에 남경을 한양부로 격하했다. 한양이라는 이름은 신라 때부터 한양군으로 불렸다고 하나, 이때부터 널리 쓰였다. 다시 원나라가 기울어지며 반원 정책을 쓰자 세력 판도를 바꿔보려는 군주가 으레 그러하듯 공민왕이 한양 천도를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1390년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대에 와서 실현되지만 불과 반년도 못 채우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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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댐과 헬도라도 퀸 축제
1931년은 라스베이거스 발전에 기폭제가 된 역사적인 해였다. 네바다주가 도박을 합법화했고, 이혼 필요조건으로서 거주하는 기간을 6주로 단축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그해에 후버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라스베이거스 인구는 순식간에 5,000명 정도에서 2만 5,000명으로 불어났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가족이 없는 남자들이어서 대규모 유흥 시설이 필요했다. 라스베이거스 사업가들과 마피아 큰손들은 카지노와 쇼걸 극장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후버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서부 사람들 사이에서 라스베이거스는 남자들의 환락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호텔-카지노와 ‘원자폭탄’의 도시
후버댐 성수기는 지났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라스베이거스는 계속 성황을 이루었다. 1941년 후반에 라스베이거스에 육군 공항이 완공되었다. 1만 1,000명의 장교들과 약 5,000명의 조종사 훈련생들이 라스베이거스에 머물렀다. 1950년 이곳은 넬리스 공군기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60차례의 주요 공중전에 참전했던 윌리엄 넬리스 중위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1951년부터 라스베이거스는 원자폭탄 실험 장소로 유명하게 되었다. 원자폭탄 관련 실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북서쪽으로 10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었는데, 폭탄이 투하된 후 피어오르는 버섯 모양의 구름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1963년부터 실험이 지하로 들어가서 더 이상 버섯구름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라스베이거스는 한동안 ‘원자폭탄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최고의 휴가지가 되었다. 주변의 그랜드캐니언이나 옐로스톤 국립공원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2008년에 발표된 흥미로운 통계에 의하면, 매년 약 1,100명의 라스베이거스 방문객이 사망하는데 그중 15퍼센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이미 라스베이거스 도시 자체도 ‘미국의 자살 수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데, 이는 외부 방문객의 자살률까지 더해진 것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오랫동안 ‘죄악의 도시’로 알려졌다. 도박과 술, 마약 등 각종 성인 유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스트립 거리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뒤에 숨겨진 라스베이거스의 어둠이 미국 자본주의의 명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미친 말’과 커스터의 전설적인 대결, 리틀 빅혼 전투

1874년, 사우스다코타의 검은 언덕Black Hills에서 금이 발견됐다. 서부 개척 시대에 금이란 황무지를 순식간에 노다지로 바꿔 버리는 마력을 지녔다. 검은 언덕도 마찬가지였다. 언덕의 입구에 위치한 래피드시티는 전국에서 몰려든 야심가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백인들이 ‘파인 리지 보호 구역’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땅과 인디언들을 유린했다. 라코타 부족은 연방 정부가 약속을 깨고 그들을 쫓아내려 한다며 결사 항쟁의 의지를 보였다. 이것이 1876년부터 2년간 계속된 ‘위대한 수족의 전쟁’이었다.

1876년 6월 25일~26일 ‘미친 말(크레이지 호스)’이 이끄는 수족 전사들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연방군 간에 전설적인 리틀 빅혼 전투가 벌어졌다. 예상을 뒤엎고 ‘미친 말’의 대승이었다. 600명 규모의 커스터의 군대 중 무려 268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 커스터도 포함되었다. 미국 역사상 인디언 최대의 승리로 기억되는 전투이다.

운디드니 학살
사우스다코타 수족의 운명은 결국 미국 대평원에서 벌어진 최악의 비극을 낳고 말았다. 1890년 12월 9일, 미국 기병대는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 구역’에 거주하던 수족을 무장 해제하려고 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젊은 전사 ‘검은이리’는 총을 뺏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고, 그 과정에서 한 발의 총알이 발사되고 말았다. 기병대는 인디언들이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약 300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했다. 기병대는 큰 구멍을 파서 인디언 사망자 시체들을 몰아넣었고, 부상자들을 방치한 채 떠나 버렸다. 수많은 부상자들이 눈발이 휘날리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 하나둘 동사하고 말았다. 그중에는 ‘큰 발 추장’도 포함되었다.

래피드시티는 ‘검은 언덕’을 중심으로 인디언들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서부 사우스다코타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만약 래피드시티를 방문해서 한 곳만을 둘러본다면 어디를 갈까.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마운트 러시모어를 갈지, 좀 더 서쪽으로 가서 미친 말 기념지로 갈지, 아니면 남쪽으로 가서 ‘파인 리지 보호 구역’을 둘러볼지. 미국 서부 개척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보려면 가능하면 이 모든 곳을 다 봐야 할 것이다.

환상의 지역으로만 남겨진 불모지
1540년, 스페인의 코로나도Francisco Vázquez de Coronado가 이끄는 탐험대가 유타 남부 지역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이 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적인 시볼라Chibola의 ‘7개의 도시’ 중 일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금은 없었다. 백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랜드캐니언과 콜로라도강을 탐험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776년 도밍구에즈Atanasio Domínguez와 에스카란테Silvestre Vélez de Escalante 두 명의 가톨릭 사제가 이끄는 원정대가 산타페를 떠나 캘리포니아 해안 몬트레이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유타를 탐험했다. 그들은 북쪽 유타 호수까지 갔지만 다시 되돌아갔다. 대부분이 사막 불모지인 데다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연결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르몬교도의 성지가 된 솔트레이크시티
본격적으로 유타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미국 서부 개척사에서 가장 독특한 그룹이었다. 바로 말일 성도 그리스도, 이른바 ‘모르몬교’ 신자들이다. 유타와 솔트레이크시티를 얘기할 때 이들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연방 주로 편입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
그렇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어나는 유타 준주가 오랫동안 연방에 편입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였고, 그중에서도 그들이 오랫동안 실행하고 있었던 일부다처제 때문이었다. 미국 의회는 미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에 어긋나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유타 준주를 연방에 가입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77년 브리검 영이 사망한 이후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연방 정부의 일부다처제 폐지에 대항해서 투쟁했고, 이는 유타가 계속 연방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1890년 9월 모르몬교회 회장인 윌포드 우드러프가 공식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 1896년에 드디어 연방의회는 유타를 연방의 마흔다섯 번째 주로 받아들였다.

종교적으로 솔트레이크시티는 분명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도시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티 크리크 센터가 보여 주듯이 그곳은 미국적 자본주의가 깊게 배어 있는 가장 미국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영토가 된 에스키모의 땅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5,000년 전에 알루티크 에스키모Alutiiq Eskimos 부족이 카약을 타고 현재의 알래스카에 건너왔다. 서기 500년경에 알래스카 남부에 정착했던 에스키모족은 추가치 알루티크Chugach Alutiiq였는데, 그들은 알래스카 중앙의 산길을 통해 디나이나 아타바스칸스Dena’ina Athabaskans 에스키모가 들어오면서 다른 지역으로 쫓겨났다. 디나이나족은 정해진 정착지가 없었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생활했다. 여름에는 연안의 개울과 강을 따라 낚시를 하고, 초가을에는 큰사슴과 산양을 사냥하고, 늦가을에는 열매를 땄다.

알루티크 에스키모들은 그곳을 알래스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본 땅Mainland’이고 의미는 ‘바다가 향하는 곳’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동쪽 끝에 연결되는 반도라고 생각해서 ‘알래스카반도’라고 불렀는데, 이를 알래스카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미국이 매입한 ‘얼어붙은 황무지’
알래스카는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관심도 크지 않았다.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제국은 알래스카를 팔아 버리려고 했고 1867년에 미국에 팔았다.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H. Seward의 노력으로 미국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매입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거래를 ‘수어드의 어리석음’이라고 비웃었지만 수어드는 알래스카 매입을 성사시켰다. 그는 미국의 향후 운명이 태평양에 있다고 보았고, 그 태평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알래스카를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기회가 왔을 때 알래스카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알래스카 골드러시
‘혹시 금이라도 발견되면 모를까’ 하는 기대는 얼마 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1880년에 주노에 가까운 지역인 실러보 유역과 더글러스섬에서 금이 발견되더니 몇 년 사이를 두고 계속 알래스카와 인근 캐나다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그러다 1896년 알래스카와 인접한 캐나다 북서부의 클론다이크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됐다. 이른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로 1896년에서 1899년 사이에 약 10만 명의 광부들이 클론다이크 지역으로 이주했다.

세계 운송의 허브가 된 앵커리지
앵커리지는 그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알래스카와 미국 본토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송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앵커리지에서 뉴욕, 도쿄, 그리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는 거의 같은 거리이다. 전 세계의 선진 산업국가들은 앵커리지에서 항공으로 열 시간 이내로 연결된다. 특히 냉전 시기에 앵커리지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핵심 지역이었다.

알래스카는 면적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주로서, 그다음으로 큰 3개 주(텍사스, 캘리포니아, 몬태나)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총면적을 갖고 있다. 인구로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작은 주이며, 인구가 가장 분산되어 있는 주이기도 하다. 2022년 알래스카 인구는 72만여 명이고, 약 절반이 앵커리지 대도시 지역에 살고 있다. 앵커리지는 미국의 ‘마지막 프런티어’라고 불리는 알래스카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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