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이 남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때는 진흥왕의 후대인 문무왕이 삼한을 통일하고, 이곳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을 설치하고부터다.

신라가 5개밖에 없는 소경小京 중 하나를 이곳에 두었음은 특별한데, 그것은 예향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남원이 전주(대략 지금의 전북), 무주(전남), 강주(낙동강 서편의 경남)가 접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남원은 또한 종교에서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했는데, 이 사찰은 한국사 최초의 선종 계열 사찰이었다.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동영東瀛(일본)으로 건너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만복사는 실상사, 선원사보다 더 발전해 남원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실로 장관이어서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도선이 ‘이 땅의 기운을 눌러야 한다’고 본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절을 짓자. 그래서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고, 한과 울분이 맺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자. 그래야만 남원으로 모여든 나쁜 기운이 해원 상생의 길을 통해 스러지리라. 이것이 도선이 남원에 여러 사찰을 지은 참뜻이 아니었을까.

조선 중기 이후, 개화기 이전의 남원은 두 가지 주제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광한루이다. 광한루는 처음에 황희가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는 일에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귀양을 왔을 때(1419년) 짓고는 광통루廣通樓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앉아서 술 마시며 독서하던 곳이다. 황희는 귀양이 풀려 조정에 돌아간 뒤로 자신이 반대했던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명재상이 된다.

하지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현대의 지성,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의 유명한 옛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사람의 뜻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을 베푼다’라는 것이다. 춘향의 절개, 심청의 효심, 흥부의 자애는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대부분의 민초들의 비원이었다.

마음에 황금을 비춰주는 금빛 바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이를 막기 위해 보강 설치된 진지가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돌산 방답진이었다. 그리고 1591년에 마지막 묘수가 두어진다. 바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었다.

들불처럼 번진 반란은 또한 빠르게 진압되고 말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의 지원까지 받아 철저하게 역도들의 소탕에 나섰다.

당시 국내에 10대밖에 없던 비행기가 모조리 여수 하늘로 날아왔을 정도로 정부는 진압에 진심이었다. 숫자와 무기에서 밀린 반란군은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등장하는데, 정부의 진압은 군인들만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아니, 반란군이 자취를 감춘 여수, 순천을 접수한 진압군은 오직 민간인만을 무력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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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유적이 많은 조선의 풍패지향

전주 도심에는 옛 유적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는 전주 객사이고, 현판을 보면 호방한 필적으로 풍패지관豐沛之館이라 적혀 있다. 풍패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지칭하여 풍패지향은 건국자의 고향을 뜻하는 관용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풍패지향이 바로 전주라는 뜻이다.

조선 왕실이 소중하게 여긴 도시가 한양 말고, 몇 군데 더 있다. 이성계의 고조부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함흥(조선 왕실에서는 이쪽을 풍패지향이라고 부르는 때가 많았다), 원산, 그리고 전주다. 전주는 대대로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호족 생활을 했던 곳이다.

견훤이 남긴 그림자의 아픔을 씻다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이 전주가 아닐까 하는 추정이 있다. 나중에 붙여진 이름인 완산完山의 완과 전주全州의 전은 모두 완전하다, 둥그렇다 등의 뜻이 있고, 원산의 원도 그것이라는 추정이다. 과거에 마한의 영토였다가 백제의 영토로 바뀐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1380년에 이성계가 남원 쪽에서 그의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황산대첩을 치르고 개경으로 올라가다가 이곳 전주에 들렀다. 그리고 전주 이씨 종친들과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병사들과 함께 한바탕 질펀한 잔치를 벌였다. 술이 거나해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풍가」를 불렀다고 한다.

큰 바람大風이 일어났네. 구름은 높이 떠올랐다네.
온 세상에 위엄 크게 떨쳤네. 이제 고향에 돌아왔네.
어디서 또 용맹한 무사를 얻을까.
사방을 지키도록 맡길까?


이 「대풍가」는 한고조 유방이 기원전 196년에 군벌들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고향인 풍패에 들러 잔치를 베풀고 불렀다는 노래다. 한마디로 천하를 평정한 제왕의 노래로, 이성계에게 이미 고려는 자신의 나라였다. 이 노래를 듣고 기가 막혔던 이성계의 친구이자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는 홀로 남고산성에 올라 통곡하며 우국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여립을 비롯한 당사자들의 심문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종결되어, 과연 역모 자체가 있었는지를 포함하여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아무튼 그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기축옥사로 알려진 많은 사람(1000명이 넘었다)의 처벌, 숙청이 뒤따랐으며, 정여립이 동인 계열이었기에 당시 집권당인 동인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정철 등 서인 쪽에서 세력 역전을 노려 만들어낸 역옥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정여립이 죽도를 중심으로 대동계라는 사조직을 만들고 활동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대동계에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공화주의적 사상과 문약文弱에 빠진 당시 세태에 반해 무공과 실용 학문을 닦는 행동규칙도 있었다고 한다. 이 또한 워낙 파격적이라 사실일지 의문이지만 단재 신채호 등은 이를 사실로 믿고, 정여립을 시대를 뛰어넘은 선구자로 존경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러 신흥종교가 나왔다. 전주 모악산은 예부터 특이한 정기가 서린 곳으로 풍수가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까지 계룡산보다도 많은 신흥종교를 낳았는데, 오늘날에도 세력이 대단한 증산교와 그 계통인 보천교, 태을교 등 약 40개의 교단이 모악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향토요리는 양반의 도시이면서 상업의 도시였던 조선 후기의 전주를 나타내며, 신흥종교는 조선 말기 백성의 불안과 고통에 응해 사람과 하늘의 이어짐과, 해원상생, 천지개벽을 추구하는 생각과 마음이 결집된 것이다.

낡은 것과 새것, 양반과 상인, 붉고 푸르고 노랗고 검은 것들이 뒤섞이면서도 결코 잡스럽지 않은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것이 비빔밥에서 얻을 수 있는 전주의 교훈이리라. 그러려면 이 도시의 역사에 굴곡을 가져왔던 이단적 존재들, 견훤이나 정여립이나 전봉준과 같은 존재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하나로 어우르며 발전할 수 있는 지혜와 도량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의 변두리에서 소외된 빛고을
광주는 오랫동안 호남의 중요 도시였으나 대표 도시로 떠오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한의 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독자적으로 부족국가를 세우지는 못한 채 지금의 장성 또는 나주의 부족국가 중 하나의 영역에 속했거나 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백제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던 4세기 무렵 백제에 통합되었고, 그 전후에 노지奴只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듯하다. 백제 때는 물이 많은 평야인 물들에서 무진주武珍州라는 이름을 얻었다. 광주를 대표하는 산인 무등산 역시 여기서 유래했을 것으로 본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에서 딴 이름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광주는 크고 중요한 도시일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이 처음에 광주 목사를 맡았는데, 공을 세우자 나주가 광주보다 훨씬 중요하므로 나주 목사로 전임 발령했다는 행주대첩비의 기록에서도 광주의 처지를 알 수 있다.

신군부는 전국에 2만 3000명의 계엄군을 투입하고, 제7공수여단에게 광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였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출정하여라
영원한 민주화 행진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 『광주 출정가』

왜 쏘았지(총)?
왜 찔렀지(칼)?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오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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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 관련된 전설이 살아 숨쉬다

"옛날 옛적에, 산에 약초를 캐러 간 젊은이가 산속에서 여인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이는 여인의 뒤를 밟았다가 그 여인이 곰으로 변해 사슴을 때려잡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이 곰과 결혼했음을 깨닫고 도망치던 젊은이는 뒤쫓아 오는 곰에게 잡히기 직전, 금강 변에 이르러 물에 뛰어들었다. 곰도 물에 뛰어들었으나 헤엄치지 못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곳을 고마나루(곰나루)라 불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전해지는 ‘고마나루 전설’이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흑백 텔레비전에 나오던 「전설의 고향」으로 처음 접했다.

하지만 그 현장인 공주 고마나루에 가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잘하면 걸어서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수심이 얕고 물결이 잔잔한 강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 곰은 헤엄을 잘 친다!

『택리지』는 서울을 수도로 삼은 나라라면 자연히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도가 제2의 중심지로 각광받을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준다. 백제든,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약초 캐던 젊은이가 암곰의 품에 안기듯 이곳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날이 왔다.

두 사찰에는 공교롭게도 항일운동과 관련되어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도 있다. 먼저 갑사는 기허당 영규靈圭대사가 도를 닦던 곳인데,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을 일으키고 금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또 한 사람은 백범 김구다. 그는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한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에 따라 감형된 뒤 1898년에 탈옥했다. 그리고 몸을 숨긴 곳이 바로 공주 마곡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받고는 1 년 동안 승려로 살았다.

김구가 공주의 품에 숨어들기 약 4년 전, 1894년 말에는 공주 땅에서 비극이 있었다. 바로 우금치전투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2만 명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 무참한 학살이었다. 지금 우금치를 가보면 제법 가파른 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동학군은 고개 아래에서 위로 달려 올라갔고, 일본군과 관군은 고개 위에서 그들에게 기관총을 쉴 새 없이 발사했다. 농민들은 몇 차례에 걸쳐 고지 탈취를 시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6·25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근대 전투로서 가장 처절하고 처참했던 나흘간의 전투는 동학군의 완전 궤멸과 동학농민운동의 종식으로 끝났다. 지금은 그런 피와 눈물, 울분, 절망과 원한은 간 곳 없고, 우금치 고개 정상에 그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만이 조용히 서 있다.

세종시가 행정수도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갈수록 커진다면 공주, 청주, 천안 등도 하나의 ‘수도권’으로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문명을 향한 젊은이의 그리움과 사랑과 안식에 목말랐던 곰의 염원, 잃어버린 왕도의 꿈과 한이 풀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전근대 한반도 최고 교통의 요지

천안삼거리 흥 /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 휘늘어졌고나 흥

에루화 에루화 흥 / 성화가 났구나 흥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민요인 「천안삼거리」다. 그 첫 연에 나오는 버드나무는 오늘날 천안시의 시목이 되었다. ‘천안’ 하면 곧 버드나무를 떠올릴 정도다. 강릉의 소나무에 비해 버드나무는 유연하고 관능적인 이미지가 뚜렷하다. 나무 자체가 제멋에 겨워 휘늘어진 듯,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휘 구불거린다. 예부터 길가에 많이 심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스쳐가며 잎을 따서 짐짓 우물물 뜬 바가지에 띄워도 보고, 잎을 솜씨 있게 잘라서 버들피리도 불어보며 희롱하는 소재도 된다. 화류계, 노류장화라는 말에서 버드나무 류柳가 나오듯 깊은 산속 고고히 서서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와는 정반대의 이미지가 있다.

조선 후기에 유형원은 『동국여지지』에서 "동도솔과 서도솔을 합쳐 천안부를 만들었다는데, 『삼국사기』에 그런 지명은 없다"며 다섯 용은 믿지 못할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대신 지리적 장점이 천안을 만들었을 것이라 보았다. 실제로 936년에 왕건은 그동안 천안에서 조련한 군사와 개경에서 끌고 내려온 군사를 합쳐,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출정하여 일리천(경북 선산)에서 신검의 후백제군과 맞붙어 이겼다. 후삼국 시대를 끝맺는 전투였다.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 김남주, 「길」 중

길.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스쳐가고, 부딪치고, 웃고 울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태적 공간이다. 한반도에서 천안만큼 길의 의미를 짙게 머금은 도시는 없다. 그 도시의 내일, 그 도시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떤 영광과 아쉬움이,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깃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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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
감이 익을 무렵 사랑도 익어가리라
아아 아아 우리의 서울 우리의 서울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
- 이용, 「서울」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차 한 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눈물 속에서 멀어져 가는 그대여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오오오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 조용필, 「서울 서울 서울」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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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부터 강남 개발은 시작된다. 그야말로 논밭 아니면 황무지였던 곳이 닦이고, 포장되고, 파헤쳐져서, 아파트와 빌딩이 올라가는 신시가지로 바뀐다. 왜 박정희는 강남을 개발했을까? 정권 자체가 투기를 했다는 시각이 있다. 개발의 결과로 땅값이 천문학적으로 오르자(10년 사이에 약 200배가 올랐다고 한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미리 사둔 강남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권에 가까운 사람들은 사전 정보를 이용해 투기에 뛰어들 수 있었으므로,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더욱 높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직후부터 정부 고위층이나 서울시장 등과 서울을 발전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그때 이미 지금의 잠실 쪽에 대규모 체육 시설을 지어 올림픽대회를 유치한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규모를 확대하고, 앞서 본 영등포 권역의 테마별 개발처럼 강남 권역에서도 이를 시도했다. 그리고 영등포보다 더 백지에 가까웠던 만큼 상업 지구와 중산층 주거 지구로서의 특화 개발이 더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강북 도심에 모조리 모여 있던 정치·행정·경제·사회·문화 기능들을 한강 남쪽으로 분산시켰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본의 아니게 대구가 보수의 본거지가 되고, 광주는 진보의 본거지가 되었다면 서울 강남은 자유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한동안 김영삼 계열의 야당을 밀었다. 그러다가 1990 년 3당 합당으로 구 권위주의 세력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던 보수 야당 세력이 합쳐지자, 내내 그쪽만 밀고 있다. 강남 주민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우려한다.

대대로 이어져 온 물 많은 고을

고대에서 중세, 근세로 이어지며 이름이 여러 가지로 뒤바뀐 도시들이 많은데 수원은 의외로 일관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이는 이름은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며, 백제로 넘어가서 모수성이 된 다음 광개토태왕이 4세기 말에 한강 유역의 백제 땅들을 빼앗을 때 고구려로 넘어가 매홀군買忽郡이라 불리게 된다. 그런데 ‘모수’는 ‘벌(들판)의 물’이며, ‘매홀’은 ‘물의 벌’이라 사실상 같은 뜻이다. 결국 ‘수원水原(물의 벌)’이라는 뜻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졌으니(신라 경덕왕은 수성水城, 왕건은 수주水州라 하여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물 많은 고을이라는 뜻은 이어진 셈이다) 한국사에서는 매우 진귀한 예다. 지금 봐도 수원 경내에는 호수가 2곳, 저수지가 5곳이라 물이 많은 도시다운데 과거에는 더했던 것일까?

1592년 6월에는 광교산 자락(용인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삼도근왕군 수만 명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불과 1600여 명의 왜군에 참패했다. 총 병력만 많았지 조율이 안 되는 여러 지방의 병력들을 엉성하게 지휘하다 빚은 참사였다. 하지만 그해 12월에는 지금의 오산시에 속하는 독성산성에서 권율이 전라도에서 끌고 온 병력으로 맞서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1637년, 이번에는 광교산 자락에 북쪽 군대가 몰려왔다. 전라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조선군과 의병 3000여 명이 슈무루 양구리가 이끄는 2만 명 이상의 청나라 군대를 효과적으로 기습, 양구리를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왜란의 광교산전투가 왜란 전체의 최대 패배 중 하나였다면, 호란의 광교산전투는 최대의 승리 중 하나였다. 그처럼 명암이 갈린 이유에는 지휘관의 역량과 지형의 활용 등 여러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왜란 때는 각지에서 올라온 군대가 서로 부대끼며 혼란스러웠던 반면, 호란 때는 수원 주둔군과 수원 현지 민병들이 한 몸이 되어 싸웠다는 점이 가장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정조, 화성을 꿈꾸다

1793년에 수원부를 화성華城이라 바꾸고 부사보다 등급이 높은 유수가 책임을 맡도록 했다. 초대 화성 유수에 그가 가장 신임하던 재상인 채제공을 임명하고 그 이듬해에 화성 건축을 시작했다.

화성이 곧 실학이다
수원 화성은 ‘실학’이라 불리는 당시의 학술과 문화의 상징이자 집대성이다.
화성은 실사구시實事求是다.

서양에 비해 동양은 체계적이지 않다거나 뜬구름 잡는다거나 주먹구구식으로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강하다. 하지만 세계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체계성과 주도면밀함이 수원 화성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사실적인 것을 중시하고, 구체적이며 정밀한 해답을 찾는 실사구시 정신이 유감없이 구현된 것이다.

화성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기도 하다. 화성은 일부 구릉지를 활용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평지성이다. 평지성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거액을 들여 수십 미터 높이의 견고한 성벽과 넓고 깊은 해자를 파지 않는 한 방어에 취약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산악이라 하는 자연의 방벽을 활용한 산성 중심으로 성을 방위해 왔다. 왜란 때 한양도성과 같은 평지성은 방어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다.

화성은 평지성이면서도 방어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했다. 치성과 돈대, 적대를 요소마다 배치해 적의 이동을 여러 각도에서 감시하고, 입체적인 사격으로 적이 성벽을 뚫지 못하게 한 점은 중국의 성곽 기술을 본뜬 것이다. 암문을 마련해 적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 병력을 이동할 수 있게 한 점은 전통 산성 기술을 쓴 것이다. 그 밖에도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쌓던 전통적 방식 대신 벽돌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적이 화포나 공성 도구를 쓸 때 더 잘 버티도록 하고, 일부 구릉지를 활용하면서 성벽의 경사나 누대의 각도 등을 치밀하게 조정해 방어력을 극대화했다. 쓸모가 있다면 중국의 기술이든 일본의 기술이든 갖다 쓰면서 경제적·안보적 이익을 꾀한 것이다. 이것이 이용후생 아닌가.

화성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다. 왜 멀쩡한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고, 매년 대대적인 능행을 하고, 도시를 새로 만들면서 평지성을 쌓는단 말인가? 오직 효심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기존의 묘소를 더 크고 화려하게 개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랬다면 그만큼 비용도 더 적게 들지 않았을까? 경기 남부의 방위를 더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라면 독성산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급기야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이 대단치 않은 예법 문제 따위에 얽혀 힘을 못 썼다. 힘없는 백성들은 세도가들의 착취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이 되어갔다. 세도가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힘을 갉아먹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이 아니면 누가 이들을 억누르고, 국가와 백성에게 활력을 찾아주겠는가? 정조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온 나라와 온 생명의 주재자)이라 자임하며 ‘조선판 계몽 전제군주’를 꿈꾸고 있었다. 폐단이 누적된 한양에서는 그 꿈을 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듯, 루이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듯, 정조는 화성을 세웠던 것이다. 당파 싸움과 불요불급한 정치 논쟁에서 탈출해, 나라와 백성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를 펴기 위해선 새롭고도 완벽한 무대가 필요했다. 그는 화성을 튼튼하고 실용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게 만들도록 지시했다.

1949년 수원에 일제의 농사 시험장을 개편한 농업기술원이 들어섰다. 이는 훗날 농촌진흥청이 되었고, 2000년대에 수도권 행정기관들을 각 지방으로 분산시킬 때 전주로 내려가기 전까지 수원에 자리했다. 또한 일제 때 수원으로 옮겨진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되었다가 2000년대에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올라갔다.

20명 이상이 사망한 이 만행은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자이자 의학자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가 쓴 『끌 수 없는 불』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정조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과인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중심을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고, 오히려 혜택이 되도록 애쓰며 그리했느니라. 결국 도시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웅장한 건물의 것도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더냐."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수원의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숙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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