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천은당 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서 엄한 취조를 받았던 일이 있었어요."

긴다이치 코스케는 깜짝 놀라 양손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사실 몇 번인가 수정된 천은당 사건 범인의 몽타주 사진은 아버지와 꼭 닮았어요.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었어요. 하지만……하지만…… 경찰이 아버지에게 눈을 돌린 계기는 그 때문이 아니에요. 누군가 아버지를 경찰에 밀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군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저 알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 집 사람인 게 분명하다는 거죠. 같은 저택에 살고 있는, 츠바키, 신구, 다마무시 세 가족 중 누군가가 틀림없다는 말이에요."

아무렴 귀족의 몸인데, 비참하기 그지없는 대사건의 용의자로 주목받다니!

그는 거기서 몰락해 가는 계급의 잔혹한 운명을 뇌리에 아로새겼고, 뱃속이 납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미네코야, 이 집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그놈이 날 밀고했어, 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 부인을 처음 본 순간, 뭐랄까 몸 안이 근질근질해지는 것 같은 불건전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키코는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은 조화와 같은 아름다움이다. 그림에 그린 미인처럼 덧없는 것이었다. 아키코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 웃는 얼굴은 빛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하도록 학습한 것 같은 웃는 법이다. 아키코의 눈동자가 코스케 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훨씬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눈매였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어제 미네코가 한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굉장히 감정이 예민한 사람이에요. 바로 암시에 걸려버리거든요.

"저도 잘 모르지만 아버지의 의도는 전후의 세태를 가리키는 거 아닐까요. 전후의 이 엉망진창인 세상…… 아버지는 그것이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부는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 아닐까요."

쇼와 22년 9월 30일.

아자부 롯폰기에 있는 츠바키 히데스케 자작의 저택에서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발견된 것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 흔히 그렇듯 묘하게 찌무룩한, 그러잖아도 기분이 가라앉게 만드는 잿빛으로 흐려진 아침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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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등장인물

츠바키 가문
츠바키 히데스케(椿英輔) _ 플루트 연주자, 자작 (43세)
아키코 _ 히데스케의 처 (40세)
미네코 _ 히데스케의 무남독녀 (19세)
시노(信乃) _ 아키코의 유모 (62~3세)
미시마 도타로(三島東太瞿) _ 히데스케의 옛 친구 아들 (23~4세)
다네(種) _ 하녀 (23~4세)
메가 주스케(目賀重亮) _ 아키코의 주치의 (52-3세)

신구 가문
신구 도시히코(新宮利彦) _ 아키코의 오빠, 자작 (43세)
하나코(華子) _ 도시히코의 처 (40세 전후)
가즈히코(一彦) _ 도시히코의 외아들 (21세)

다마무시 가문
다마무시 기미마루 _ 도시히코와 아키코의 외외종조부, 백작 (70세 전후)
기쿠에(菊江) _ 다마무시 백작의 첩 (23~4세)

경시청, 탐정
도도로키(等ヶ力) _ 도쿄 경시청 경부
데가와(出川) _ 도쿄 경시청 형사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 _ 명탐정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 요코미조 세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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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내게 숨긴 채 쉽사리 밝히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긴다이치 코스케 역시 이 사건 전체를 덮고 있는 구제할 길 없는 어두움, 저주스런 인간관계, 혹은 무시무시한 증오와 원념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리라.

등장인물

츠바키 가문
츠바키 히데스케(椿英輔) _ 플루트 연주자, 자작 (43세)
아키코 _ 히데스케의 처 (40세)
미네코 _ 히데스케의 무남독녀 (19세)
시노(信乃) _ 아키코의 유모 (62~3세)
미시마 도타로(三島東太瞿) _ 히데스케의 옛 친구 아들 (23~4세)
다네(種) _ 하녀 (23~4세)
메가 주스케(目賀重亮) _ 아키코의 주치의 (52-3세)

신구 가문
신구 도시히코(新宮利彦) _ 아키코의 오빠, 자작 (43세)
하나코(華子) _ 도시히코의 처 (40세 전후)
가즈히코(一彦) _ 도시히코의 외아들 (21세)

다마무시 가문
다마무시 기미마루 _ 도시히코와 아키코의 외외종조부, 백작 (70세 전후)
기쿠에(菊江) _ 다마무시 백작의 첩 (23~4세)

경시청, 탐정
도도로키(等ヶ力) _ 도쿄 경시청 경부
데가와(出川) _ 도쿄 경시청 형사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 _ 명탐정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 요코미조 세이시

액년: 재앙이 일어난다고 하는 해. 남자는 25, 42세, 여자는 19, 33세를 가리킨다.

더욱이 크레센도(점점 강하게) 부분의 광기에 이르러서는 흡사 어둔 밤하늘을 배회하는 유령의 원념과 저주에 가득 찬 절규를 듣는 것 같아서 아무리 음치인 나라도 모골이 송연해지고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초 후 무서운 지옥의 두루마리가 펼쳐졌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사양(斜陽)》*은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사양족이라든가 사양계급 같은 말은 이 사건의 경우 쓰이지 않았으나 만약 《사양》이 이미 나왔더라면 분명 이것은 사양계급이란 말을 쓴 첫 번째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언젠가 복수하러 오는 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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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붓을 쥐고 이 무서운 이야기의 첫 장을 쓰려고 하기에 이르러, 나는 새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다. 이 무서운 사건을 활자화해 발표하는 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도 음침한 사건이고 저주와 증오에 가득 차 있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줄 만한 구석이 털끝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본래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 중에 뒷맛이 개운한 작품은 적은 게 당연할지 모르겠으나, 이 사건은 너무나 그 점이 극단적이어서 우려되는 것이다. 그 점은 긴다이치 코스케도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소재를 내게 제공하기까지 그는 적잖이 주저하고 망설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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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아파서 문재야, 나 엎드려 있거든? 
지금 힘들어. 조금있다 전화하자.
그렇게 침을 맞고 약을 사서 들고 오는데, 
전화기에 ‘김훈‘이라는 이름이 떴다.
왜?
아파서 죽게 생겼냐?
내가그래, 문재가 전화해서 김용택이 
죽게 생겨 병원에 있다고 하던데?
잉?
아냐. 허리 아파 침 맞고 있다고 했는데.
그놈 새끼, 또 뻥친 거구나. 아프지 마.
조금 후에 문재의 전화가 왔다.
내가 용택이 형 죽겠다고 했더니, 
훈이 형이 막 엉엉 울었어. 
형, 아프지 마!
웃음이 나왔지만, 내내 웃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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