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보기 전에 잊어버린 학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학교와 교실이 차별과 억압을 ‘익히는(習)’ 곳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가령 한국의 일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노동자의식은 ‘의식적인 노동자의식’일 경우가 많다. ‘단결’, ‘투쟁’이 적힌 조끼를 입고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를 함께 부를 때나 노동자의식을 확인한다. 이와 같은 소수의 노동자들조차 일상을 지배하는 의식은 소시민의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익힘, 즉 ‘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환경과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사람은 어렸을 때 형성된다’라는 교육 금언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의 교육환경과 일상이 이웃에 대한 배려나 인권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 수 있다.

공부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소설책이든 교양서든 책을 읽을라치면 ‘공부 안 하고 뭐 하냐?’라는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책은 안 읽거나 못 읽는 현실, 이것이 우리 학생들의 일상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명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료하다. 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한다. 사람에 관한 학문, 곧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곧 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 사회 안에서 주체적 자아로 살기 위해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주체적 자아를 지향하는 나에게 요구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 뜨기’를 위한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에는 원래 정답이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노동이란 육체노동, 공장노동을 뜻하고 그래서 ‘하지 않는 게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가깝다. 대부분 노동자가 될 학생들이 일찍부터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등수로 줄 세우는 대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글쓰기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이전에 독서와 글쓰기가 사라진 중고등학교의 ‘미친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만큼 자아의 세계가 확장된다.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게 해야 한다. 학생들은 사물과 현상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펼 때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의 ‘국민’은 본디 ‘일제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국민’을 말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불령선인이라 했고 ‘비(非)국민’이라고 불렀다.

첫째 목적이 의식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면, 둘째 목적은 몸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 몸의 통제가 의식을 통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미셸 푸코가 강조한 바 있다. 마지막 셋째 목적은 식민지 중하급 관리자, 즉, 식민지 관리를 위한 마름 양성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출세한’ 사람 대부분이 일제부역자가 되었던 것은 출세하려면 박정희처럼 몸과 정신이 모두 일본인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일본의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한 학교가 군사학교였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학교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학교 건물 구조가 병영 구조와 같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교문 옆 수위실은 위병소고, 운동장은 연병장이고, 구령대는 사열대다. 일제가 망한 뒤에 일제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듯이 민주공화국이 선 뒤에도 일제시대의 학교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봉건사회에서 신의 ‘명령’(order)으로 받아들여졌던 신분‘질서’(order)는 인류 역사상 인간에게 강제된 질서 중에서 가장 무섭고도 강고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공화국은 ‘군주국의 반대’라는 의미만 있을 뿐이고, ‘대통령을 뽑는 것’으로 공화국이 완성된 양 집단 착각에 빠져 있다. 주체도 없고 목표도 없고, 다만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의 개념만 남아 있다. 그것도 실상은 ‘법의 권위’가 아닌 ‘힘과 돈’이 지배하는 국가로.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뜻은 단순명료하다. 자본가는 자본가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본가 의식을 갖고, 노동자, 농민은 노동자, 농민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노동자, 농민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들 중 노동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의식을 가진 극소수의 노동자들도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동자의식을 가진 게 아니다.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지배세력에 의해 의식화되었던 반노동자의식을 ‘반전’시킨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노동자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오늘의 대학에서는 80~90년대와 달리, 소수에게나마 탈의식의 계기를 주었던 선배와 동아리를 만나기 어렵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사회비판적 안목을 갖춘 진보적 의식의 형성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의 정서의 고향인 땅이 사라지는 사회, 다만 투기 대상인 ‘부동산’으로 바뀌는 사회……, 앞으로 우리 농촌도 물질과 경쟁으로 채워진 시간과 공간만 남을 것인가. 그리고 시간의 효율적 안배를 위해 앞당겨 치러내던 설 차례나 추석 성묘마저도 사라져갈 것인가.

나는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는 것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인간의 자발적 반란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때문이라고 전망한다. 자본을 매개로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인간의 반란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가 기어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도 자본주의는 탐욕스런 아집을 계속 부리겠지만 끝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전쟁 수행자들이고 인간 문명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연의 반란은 지배, 피지배 관계를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라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다."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권이 특히 귀기울여야 할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마하트마 간디였다. "신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했던 이는. 신조차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면, 무엇이 인간의 탐욕을 채워줄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공멸뿐인가.

인류가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시기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분명한 것은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 또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태양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확인한 사흘째 날이 바로 12월 25일이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축제일로 기념했다. 나중에 그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태양축제일은 성탄절이 되었고 그것이 유럽 전역으로 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세상에 엽기적인 일이 참 많지만 가장 엽기적인 일은 엽기적인 일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는 목사님들의 행태가 그런 예에 속한다.

인구 중 65퍼센트가 가톨릭이고 2퍼센트가 개신교도로 구성원의 다수가 하느님을 믿는 프랑스는 잘 사는 나라에 속하는데,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에르 신부는 "사람을 굳이 둘로 나누어야 한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군자는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데, 소인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불화한다는 것이다.

볼테르의 말처럼 "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혀야 빛이 난다." 서로 다른 견해가 표현되어 부딪힐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다르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내 견해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도 옳지 못한 행위다.

인간은 편함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특히 정의와 진실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요구한다. 일상에서 사회문제, 정의와 진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소수가 한국사회에서는 극소수에 가깝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마르크스는 "자유 언론의 일차적 조건은 산업이 아니어야 한다는 데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문이 미디어산업의 하나로 머물 때, 누가 소유하고 있나에 따라 신문의 지향이 규정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68년 혁명의 열정이 아직 살아 있던 때 민중 주체 신문인 〈해방LIBERATION〉지를 탄생시키는 데 산파역을 했던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언론은 생존 수단이 존재 이유를 훼손하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해방〉지는 로스차일드가의 소유가 되었다. 체 게바라가 상업주의의 아이콘이 되었듯이 〈해방〉이 재벌 가문에 포획된 것이다.

한겨레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구되는 긴장의 크기를 가늠케 한다. 한겨레 구성원들이 다른 언론계 종사자들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박봉을 감내하는 것은, 그것이 자유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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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 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책머리에 중에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존재인 양 착각하기도 하지만, 일찍이 칸트가 지적했듯이 ‘생각하는 바에 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다.

스피노자가 강조했듯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스피노자가 강조했듯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고집하고 쉽게 버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 라고.

"사람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적 동물, 합리적 동물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이처럼 우리 몸은 건강하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 자각증세를 보여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해주지만 우리 생각은 그렇지 않다. 너무 늦어서 탈이지만 그래도 종내는 자각증세를 보이는 암보다도 더 지독해서 그릇된 생각, 그래서 내 삶을 그르칠 수 있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에도 자각증세가 없다. 자각증세는커녕 그 생각을 고집한다. 생각의 성질이 그와 같다.

내 안에 생각을 집어넣는 실제 주체인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춰 나가면서 기존에 형성된 생각을 끊임없이 수정하여 나의 주체성을 확장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인도, 내 삶의 진정한 주인도 되기 어렵다.

1) 폭넓은 독서 2) 열린 자세의 토론 3) 직접 견문 4) 성찰

내게 ‘폭넓은 독서’란 이런 의미다.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 중 책을 남긴 사람의 생각을 내가 ‘주체’적으로 참조하는 것".

내게 ‘열린 자세의 토론’이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을 열린 자세로 참조하려고 ‘주체’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또 ‘직접 견문’이란 "오감을 가진 주체로서 다양한 경험과 여행 등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직접 보고 겪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찰’이란 "폭넓은 독서와, 열린 토론, 그리고 직접 견문을 통해 만나는 뭇 생각들이 소우주와 같은 나의 의식세계 안에서 서로 다투고 비벼지고 종합되고 정리되는 과정"을 뜻한다.

스페인의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지극히 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옥에 하나의 창이 나 있다. 놀랍게도 이 창은 모든 세계와 만나게 해준다. 바로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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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그동안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 새롭게 작성한 글, 강연 원고를 정리한 글을 묶은, 그야말로 잡문집이다.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이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시금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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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자살하지 않았어.‘
사진을 자세히 보니 엄마가 웃고 있었다. - P201

어제 자정쯤, M산의 A고개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가던 젊은이가 즉사하였습니다. 혼자 스포츠카를 타고 주행하던 중 갑자기 출현한 야생동물을 피하다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뉴스를 보던 딸아이가 놀란 눈을 뜨고 나에게 물어다.
"엄마, 혼자라니……. 뒤에 타고 있던 할아버지는 - P206

부적이라도 붙여야 하는지 물었는데, 점쟁이는 조만간에 복덩이 하나가 저절로 들어와 그 여자 귀신을 쫓아낼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엄마가 묻자 점쟁이는 "하잖아보여도 그놈은 저승사자가 키우는 것이니 잘 대해줘"라고 했다.는 것이다. - P233

신기하게도 우리 집에 흰 강아지가 들어오고이상한 일들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나날이 갚아나가고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흰강아지는 몇 년을 더 우리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P233

쉿!
절대 알려고 하지 마!
상상하지도 마!

무료한 일상에 오싹한 균열을 일으키는 기묘한 이야기들을 마주하는 순간,
당신의 무의식 어딘가에 잠재해 있는 공포체험의 욕망이 되살아난다.

누구나 한 번은 상상해봤을 일상의 공포! 그래서 더욱 소름 돋는 이야기
당신의 머릿속에 아찔한 여운을 남겨줄 44가지의 공포특급

만원 버스 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여고생
여름밤 서바이벌게임에 나선 대학생들
어두운 교실에서 비행기를 찾고 있는 소년
밀폐된 연습실 거울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청년들
깊은 밤 빈 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노인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짖어대는 반려견
수해가 휩쓸고 간 마을을 수색하는 군인들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심야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머, 보영아! 너 왜 전화 안 받아 걱정했잖아!"
"별일 없었니? 저 버스, 집에 올 때 네가 타고 다니는 자아니었어?"
"응? 무슨 버스요?"
뉴스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강다리 교각이 하나 무너져 상판이 강에 빠져 있었다. 그 상판에는 버스와 승용차, 트럭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그 버스는 바로 내가 타고 오던 버스였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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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 점이나 미신을 잘 믿는 편이야. 고모도 점쟁이고.
고등학교 때 우리 집 앞에 강이 있었는데, 사람이 자꾸 빠져 죽어서 고모가 굿을 한 적이 있어. 근데 굿을 하고 나서 고모가나한테 그러더라. 개울이나 강에서 사람 시체 보면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물귀신은 지상에서 죽은 귀신과는 달리 하늘로 못 올라가는데,
자기 자리를 채워놓으면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자기가 궁지에 빠졌을 때 다른 사람까지 끌고 들어가는 사람을 ‘물귀신‘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했다.
소방관은 최종적으로 실종처리 되었다. 해마다 그 동네에서는 익사사고가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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