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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저항의 말도, 하나의 저항의 몸짓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 동해 바다로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잡으러 가겠다던 젊은이들의 꿈은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국가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것으로 금지되었다.

1968년에 교통사고로 숨진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버드 비숍의 여행기를 영어로 읽다가 득도하듯이 단절된 전통과 만나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는 절창(〈거대한 뿌리〉)을 남겼다.

민주화와 산업화 두 과제에서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서도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은 노동자, 특히 ‘공순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며, 그 강고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선봉들이다.

박정희는 노동자들의 가난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라며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강조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 첫차를 타고 일 나가는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에는 《또 하나의 투쟁》21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공안기관에 잡혀간 뒤 어떻게 조사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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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의 권두언은 대부분 장준하가 썼는데, 1961년 6월호의 무기명 권두언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에서는 5·16을 4월혁명의 연장 선상에서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높이 평가했다. 장면 정권에 깊숙이 개입한 장준하였지만 극우반공주의자로서 학생과 혁신 세력의 통일 논의에 대해 가졌던 불안감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장준하의 뒤를 이어 문익환이, 문익환의 뒤를 이어 백낙청이 한국의 통일운동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이어받았는데, 백낙청은 이때 미국에 유학 중인 홍안의 수재 청년이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유엔총회장에서 열린 세계고교생 토론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가 이름을 떨친 백낙청은 명문 브라운 대학에서 졸업연설을 하여 〈동아일보〉 사회면 톱에 올랐다.

사상사의 첫 출판물은 장준하가 저자이자 발행자였던 《돌베개》였다. 함석헌이 ‘밤중에 우는 장사의 칼’이라 평한 이 책은 청년 장준하가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이 되어 환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그는 이 책의 발문 ‘돌베개에 붙이는 말’에서 "광복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라고 썼다.

고은 시인의 〈그 꽃〉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장준하가 만난 ‘그 꽃’은 채 피지도 못한 채 수유리에 잠들어 있었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 장준하 같은 청년들에게는 대륙으로 가서 ‘탈출’할 길이라도 있었다. 일본군의 마수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안전지대에 도착하지 못했을 때 젊은 장준하는 ‘광막한 중원대륙 수수밭 속에 누워 침 없이 마른입으로’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고 한다. 분단된 조국에 돌아와 50대가 된 장준하에게는 이제 ‘탈출’할 곳도 없었다. 10여 년 전 학생들이 소박한 애국적 정열만 갖고 덮어놓고 통일하고 보자는 식의 환상적인 주장만 펴고 있다고 비판했던 장준하가 이제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장엄히 선언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일을 외치면 꼭 죽였다. 조봉암이 죽었고, 〈민족일보〉 조용수가 죽었고, 사회당의 최백근이 죽었고, 통혁당 사람들이 죽었고, 전략당 사람들이 죽었고, 뒤의 일이지만 인혁당과 남민전 사람들이 죽었다. 분단된 조국에서 참된 민족주의자의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장준하는 1967년도에 이미 ‘대통령의 자격’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국민 29,999,999명이 대통령 될 자격이 있어도 일본군 장교 출신 다카키 마사오만큼은 대통령 될 자격이 없다고 갈파한 바 있다.

양심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은 전혀 다른 기준을 갖지만, 박정희같이 기회주의적 변신을 일삼은 자가 권력을 잡은 사회에서는 양심을 지키는 것이 엄청나게 진보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한다.

장준하는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사상의 보수성을 삶의 진정성과 준엄함으로 극복한 분이다. 장준하의 사상이 진보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대를 산 사람 중에 그보다 더 치열하게 진보적인 삶을 살아낸 분은 없다.

"죽음에서 본 4·19"라는 글에서 장준하는 "혁명은 하늘이 하는 것이며 백성을 시켜서 하는 일이다. 4·19 혁명은 백성이 한 혁명이 아니고 학생들이 한 혁명이었다. 그래서 그 혁명은 완전한 혁명이 되지를 못한 것이다"라고 4월혁명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제 장준하는 통일운동에 나서며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며 "통일 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관여하고, 따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자서전》은 장준하의 죽음을 독재정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던 함석헌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윤보선이나 김대중 같은 정적이나 정치적 위협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와 얼치기 광복군 출신으로 두 차례나 국헌을 짓밟았던 박정희에게, 진짜 광복군 출신이자 진짜 민족주의자 장준하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

가요 〈애모〉가 나오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가 딱 장준하 앞에 선 박정희의 처지였다.

1945년생으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같은 소설을 써서 당시 청년문화의 기수로 꼽히던 최인호는 엘리트와 대중의 이분법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는 "청년문화선언"이란 글에서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 대표되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며 "고전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불평"하지 말고 "대중의 감각이 세련되어가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라. 음악에 몸을 맡기고 종전처럼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격식도 없이 몸을 흔들어대는 춤추는 젊은이들의 감은 눈을 보라. 노름판에 끼어들려면 최소한도 판돈을 대고 덤벼들어야지!"

청년문화 논쟁에 대해 당시 대표적인 통기타 가수였던 대학생 양희은은 "청바지 가수도 할 말 있다"란 글에서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다"며, 자신들을 "우울하고 가난하게 자란 미운 오리 새끼들"이라고 주장했다.5 그럼에도 그들은 적어도 교육과 문화적인 면에서는 선택받은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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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장을 걷어내는 청천백일의 역사가 여기 있다.
역사의 분화구가 진실을 분출하는 어느 날이 여기 있다.
역사학의 주류에는 고대 사관(史官)의 종적이 여지껏
지워지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옛 정사(正史)와
야사의 불화가 역사학의 토속(土俗)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국 통사의 수구성도 강단사학의 그것으로 굳어져 온 것이다.
이 같은 낭패에 맞서 정사와 야사의 구차한 변별 따위를 가차 없이
뭉개버린 생동의 역사서술이 한홍구 전위사관에서 체현된다.
이번에는 시대모순의 극복을 신열(身熱)의 의지로 구현하는
그의 공덕에 우리는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장하다.
— 고은(시인)

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 한홍구 저

이 책의 목차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잔혹한 시대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되풀이될 수 없는 유신의 잔영이 다시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다. 유신시대를 되돌아보면 지식인의 초라한 몰골만 남는다. 그러기에 유신과 대결하며 자기를 헌신한 선진(先陣)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대상이요, 한국 민주화의 영웅이다.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자유와 인권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희생의 대가다.

정녕 이 세대는 그 선진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누림이 무임승차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유신시대를 부끄럽게 살아온 세대가 용서받을 길이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유신의 야만을 제대로 깨닫고 민주주의를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 교수께 감사한다.

18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집권한 박정희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하필 박근혜가 보고 배운 박정희는 집권 말기의,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불행하게도 박근혜는 집권하자마자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다.

1979년 8월 박정희 정권은 야당인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가 유신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신민당 총재 권한정지 가처분 신청을 통해 야당의 발목을 조였다. 박정희가 총에 맞기 두 달여 전의 일인데, 박근혜 정권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을 청구해 놓았다.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소극으로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말은 역사란 것이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또 무언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달라진 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비극이 두 번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새 세대의 몫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이 책은 이 시대착오의 나날을 견뎌내고 보다 나은 오늘을 누려야 할 젊은 세대들에게 유신시대를 제대로 장송하지 못한 구세대 역사학도가 드리는 미안한 마음이다. 

장준하, 송건호, 리영희 같은 내 청춘의 스승을 떠올리며
2013년 12월 견지동에서

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 한홍구 저

이근안은 홀로 1970년대를 살지 않았다. ‘애국’의 이름으로 ‘예술’ 활동을 했던 수많은 이근안들은 ‘빨갱이 천지’가 된 이 세상을 개탄하는 애국노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높은 곳에서 은밀하게 이근안들의 예술 행위를 후원하고 감상했던 자들은 여전히 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민주화가 된 것도 아니고 안 된 것도 아니고,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한 것도 아니고 청산하지 못한 것도 아닌 채 세월은 흘러갔다. 영남 군벌의 마지막 상속자 노태우가 5년, 박정희·전두환 세력의 품에 안긴 한때의 민주투사 김영삼이 5년,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정희 세력의 일부와 손잡을 수밖에 없었던 김대중이 5년, 과거의 박정희를 청산하고자 했지만 현실의 박정희 후예들과는 끊임없이 타협해야 했던 불행했던 대통령 노무현이 5년, 그리고 박정희식 고도성장 시대의 총아로 등장하여 국가를 완벽하게 사유물화한 이명박이 또 5년 이 나라를 통치하는 사이에 ‘87년 체제’의 생명력은 완전히 바닥이 나버렸다.

원래 유신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전인 《시경》의 대아문왕편(大雅文王篇)에서 문왕의 국정 혁신을 칭송하며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개혁으로) 그 명을 새롭게 했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서경》의 하왕윤정편(夏王胤征篇)에도 하왕의 명으로 윤후가 적을 정벌하러 갈 때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의하여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예전에 물든 더러운 습속을 모두 새로워지도록 해주겠소"(舊染汚俗 咸與維新)라고 한 고사에 함여유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어 조대비가 고종으로 대통을 잇게 하면서 내린 교서에도 함여유신을 강조하여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함여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국무총리 김종필은 차라리 솔직했다. 그는 정부가 굳이 비상조치를 유신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정신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답했다.

몇 시간 뒤 박정희 사진이 박힌 호외를 본 일본 정객들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아냐?"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오노는 비록 총리를 지내지는 못했지만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로, 망언만이 아니라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 떨어지면 ×도 아니다"라는 명언도 남긴 자이다.

청와대 대변인 김성진은 1) 범국민적 차원에서 여야를 초월 2) 유신이념이 투철한 인사 3) 국가관이 투철한 각계각층의 직능대표 4) 전문지식을 대의정치에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신진 및 중견 인사 5) 농촌개발과 지역사회 발전에 모범이 되는 새마을 지도자 6) 국민교육에 헌신한 교육계 지도자 7) 성실하고 능력 있는 각급 여성 지도자 등을 후보자로 정했다고 밝혔다.

후보의 선정은 청와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공화당이 각각 추천한 인물들을 비서실이 통합 정리하여 유력 인사 100여 명의 명단을 작성한 뒤 박정희가 직접 낙점했다고 한다.

루소가 일반의지는 대표될 수 없고 인민의 대의원은 인민의 사용인에 지나지 않으며 일반의지의 대표자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은 유신체제에서는 통용될 수 없었다. 유신체제에서는 박정희의 뜻이 곧 일반의지였다.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던 그때 김지하는 〈1974년 1월〉이라는 시를 썼다.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겁먹은 얼굴"로 그는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했다.

4시 30분에 시작된 그 새벽의 연쇄살인극은 4시간 반 만에 끝났다.

문세광 역시 김대중의 연설 녹음을 열 번 넘게 반복 청취할 정도로 김대중 구출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박정희 1인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 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서 자신은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유서에 썼다.

5·16 이후 최측근에서 박정희를 떠받치던 윤필용, 이후락, 박종규가 차례로 물러났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차지철과 김재규였다. 유신체제 몰락의 인적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육영수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프랑스에 유학 가 있던 23세의 박근혜였다.

1917년생 박정희의 나이는 58세, 1~2년쯤 지난 뒤 새장가를 들었어야 할 나이였으나 본인은 아직 시집보내지 않은 딸들이 있다는 이유로, 주변의 권력자들은 새로운 대통령 부인의 탄생으로 인한 권력지형의 변화에 대한 우려로 박정희의 재혼을 적극 추진하지 않았다.

뒷날 김재규는 법정에서 박정희를 쏘게 된 요인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인간 박정희에게, 나아가 박정희 체제에 육영수의 빈자리는 참으로 컸다.

그렇게 떠나간 장준하 선생의 묘소를 37년 만에 이장하면서 그분의 유골이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름 6센티미터의 원형 함몰, 숨이 턱 막혔다.

중국 전선에 투입된 장준하는 1944년 7월 동료 넷과 함께 부대를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안후이(안휘) 성 린취안(임천)에 도착했다.

1945년 11월 23일 장준하는 백범을 모시고 귀국하여 경교장에서 백범의 비서로 일했다. 광복군 참모장으로 이승만 정권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은 백범의 비서로 있던 장준하를 데려다 자신이 조직한 민족청년단의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으로 삼았다.

6,000리 길을 걸어온 수십 명의 젊은이가 한꺼번에 당도하니 임시정부의 노인들은 감격했다. 백범도 떨리는 목소리로 일제의 폭압 밑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다 일본사람 된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다 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답사에 나선 장준하도 본인과 청중이 모두 울음바다가 돼 연설을 마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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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장을 걷어내는 청천백일의 역사가 여기 있다. 역사의 분화구가 진실을 분출하는 어느 날이 여기 있다. 역사학의 주류에는 고대 사관(史官)의 종적이 여지껏 지워지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옛 정사(正史)와 야사의 불화가 역사학의 토속(土俗)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국 통사의 수구성도 강단사학의 그것으로 굳어져 온 것이다. 이 같은 낭패에 맞서 정사와 야사의 구차한 변별 따위를 가차 없이 뭉개버린 생동의 역사서술이 한홍구 전위사관에서 체현된다. 이번에는 시대모순의 극복을 신열(身熱)의 의지로 구현하는 그의 공덕에 우리는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장하다.
— 고은(시인)

이 책의 목차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잔혹한 시대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되풀이될 수 없는 유신의 잔영이 다시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다. 유신시대를 되돌아보면 지식인의 초라한 몰골만 남는다. 그러기에 유신과 대결하며 자기를 헌신한 선진(先陣)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대상이요, 한국 민주화의 영웅이다.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자유와 인권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희생의 대가다. 정녕 이 세대는 그 선진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누림이 무임승차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유신시대를 부끄럽게 살아온 세대가 용서받을 길이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유신의 야만을 제대로 깨닫고 민주주의를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 교수께 감사한다.
-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소극으로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말은 역사란 것이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또 무언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달라진 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비극이 두 번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새 세대의 몫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이 책은 이 시대착오의 나날을 견뎌내고 보다 나은 오늘을 누려야 할 젊은 세대들에게 유신시대를 제대로 장송하지 못한 구세대 역사학도가 드리는 미안한 마음이다. 

장준하, 송건호, 리영희 같은 내 청춘의 스승을 떠올리며
2013년 12월 견지동에서

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 한홍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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