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세계문학그림책
윤솜 지음, 신진호 그림, 제인 오스틴 원작 / 고래의숲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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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나 고통, 두려움 없이 항의하거나 설교하는 대신 글을 쓰는 한 여성이 있었다.” _ 버지니아 울프
“여성의 자존감이 제인 오스틴의 발명품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_ 가디언
“햄릿이 영문학의 첫 번째 아들이라면, 엘리자베스 베넷은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다.” _ 로라 제이콥스

작가를 말하다,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제인 오스틴(1775~1817)은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영국 문학가로 인정받는다. 오스틴은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에마』, 『설득』, 『노생거 사원』, 이 6편의 소설로 200년 동안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위력적인 작가다.

스티븐턴 교구 목사의 딸로 태어난 오스틴은 8세 때부터 3년간 기숙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줄곧 집에서 책을 읽으며 독학했다. 12세 때부터 시와 단편 소설, 희곡을 쓰기 시작해, 20세에는 장편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셋집과 친척 집을 옮겨 다니다 오빠의 집이었던 초턴에 정착한 뒤 창작에 전념했다. 오스틴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1817년 42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오스틴은 세밀한 관찰과 비판적인 시선으로 물질 만능주의와 허위의식을 풍자하면서 개인의 도덕의식을 끈질기게 탐구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전쟁, 영국과 프랑스 와의 빈번한 전쟁 등으로 어수선하던 시대에 한적한 시골을 배경으로 청춘 남녀의 연애와 결혼을 그린 오스틴의 작품은 역사의식과 사회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오스틴 생전에 발표된 작품들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사후에는 찰스 디킨스와 조지 엘리엇 등 빅토리아 시대 작가들에게 가려서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오스틴이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다.
20세기 후반에는 수백만 독자들을 몰고 다니며, 영화, 연극, 드라마 등 대중적인 문학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오스틴의 작품들은 영국 소설의 전통을 세운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을 말하다, Pride and Prejudice
『오만과 편견』은 오스틴 스스로도 “너무 가볍고 밝고 반짝여서 그늘이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경쾌한 작품이다. 오스틴이 살던 시대, 결혼을 생각하는 여성들이 마주하는 여러 현실의 문제와 사랑 이라는 복잡다단한 주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꿰뚫는 소설이다. 오스 틴의 작품 중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은 18세기 말 런던 근교의 한적한 시골에 사는 베넷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속물적인 어머니와 무심한 아버지,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딸들의 결혼을 둘러싼 사건이 펼쳐진다. 오스틴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날선 유머 감각, 조롱하는 듯 비판적이고 섬세한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
생기 넘치고 당찬 둘째 딸 엘리자베스와 부유한 집안 출신의 다아 시는 서로를 향한 편견과 오해로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고, 결국 두 사람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며 서로를 향한 사랑을 이루어 간다.
이 작품 역시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지만, 오히려 오스 틴이 그리는 작품 속 시골 사교계는 작가가 속해 있던 시대, 작가가 몸담고 있던 폐쇄적인 사회를 그대로 비춘다. 오스틴은 인물이 품은 속물근성과 배타적인 우월감 등을 세밀한 풍자로 보여 준다.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 엘리자베스의 오만과 다아시의 편견. 오만에 사로 잡히고 편견으로 가득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엘리 자베스가 볼썽사납지 않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던지는 질문이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를 말하다
1. 오스틴의 비혼
결혼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때도 있었지만, 오스틴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오스틴은 21세 때 훗날 아일랜드 대법관이 된 톰 레프토이와 사귀다 헤어졌다.
남자 쪽 집안의 반대로 청혼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27세에는 넓은 토지를 상속받을 남자의 청혼을 받은 다음 날, 결정을 번복했다. 파혼의 이유는 오스틴이 조카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는데, 오스틴은 “사랑 없이 결혼하기보다는 무엇이든 다른 것을 선택 하고 견뎌야 한다.”고 썼다.
2. 오스틴의 유머 감각
오스틴은 계약을 맺고도 원고 출간을 계속 미루는 출판사에 특유의 유머 감각을 동원해 항의했 다고 한다. 출판사에 보낸 편지 마지막에 ‘Mrs. Ashton Dennis’라고 서명한 것이다. 이 서명의 첫자를 연결해 보면 ‘MAD’. 오스틴은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메시 지를 재치 있게 전한 끝에 작품의 판권을 다시 사들여 다른 곳에서 출판했다고 한다.
3. 오스틴의 이름
오스틴은 비밀스러운 작가였다.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했 다. 흥미로운 점은 오스틴의 이름을 숨기고 작품을 발표했지만, 다들 작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 다는 사실이다. 문체의 여신으로 불리는 오스틴 특유의 묘사와 풍자를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 이름을 감추어도 작가의 스타일은 남는다.

오만과 편견 : 세계문학그림책
제인 오스틴 원작 · 윤솜 저자(글) · 신진호 그림/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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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과 오만은 이따금 같은 말로 쓰이지만 서로 달라.
오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지만,
허영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기 바라느냐의 문제니까.

빙리와 함께 무도회장에 나타난 그의 친구 다아시는 젊고 부유한 신사였다.
춤을 권하는 빙리에게 다아시는 점잖게 대꾸했다.
"여기 숙녀들은 괜찮은 편이지만, 내가 관심 가질 만큼 아름답지는 않아."
엘리자베스는 다아시를 오만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판단하고는 솔직하고 유쾌한 응수로 그를 대했다.
다아시는 생기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매력을 느꼈다.

집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다아시 집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던 장교 위컴은 매력적인 첫인상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방탕하고 무절제한 사람이었다.
위컴은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가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위컴의 거짓말은 다아시를 향한 엘리자베스의 편견을 더욱 두텁게 쌓아 올렸다.

엘리자베스 앞으로 뜻밖의 편지가 도착했다.
다아시로부터 온 편지였다.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게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터놓았다.
다아시는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위컴이 엘리자베스에게 들려준 사건의 진실과 빙리와 제인의 일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다아시의 진심에 엘리자베스는 마음이 흔들렸다.

제인과 빙리는 다시 가까워졌다.
빙리는 제인에게 청혼하고, 제인은 행복해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해 품었던 자신의 편견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다아시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 번 청혼을 거절당한 남자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당당하게 거절했다.
"저 자신의 뜻에 따라 저와 상관없는 사람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행복을 위해 행동하겠습니다."

다아시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발랄하게 대꾸했다.
"확실한 건 당신은 저한테서 좋은 점을 하나도 못 찾았다는 거네요.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런 건 문제 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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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소설가
1907년 황해도 송화 출생, 1944년 사망
일제강점기 하층민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대표적인 여성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 <부자>, <채전>, <지하촌>, <축구전>, <원고료 이백 원> 등의 단편소설과 《어머니와 딸》, 《소금》, 《인간 문제》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계용묵
소설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
출판사 <수선사> 창립
본명은 하태용(河泰鏞)
1904년 평북 선천 출생, 1961년 사망
작품세계에 적극적이지 못한 방관자적인 자세가 그의 문학적 특징이자 한계라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를 비롯해 <청춘도>, <신기루>, <유앵기>, <별을 헨다> 등의 단편소설과 한 권의 수필집 《상아탑(象牙塔)》이 있다.

김남천
소설가, 문학비평가
본명은 효식(孝植)
1911년 평남 성천 출생, 1953년 북한에서 숙청
일본 유학 시절인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동경지회에 가입하였고,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 때 기소되어 2년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1947년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공장신문>, <소년행>, <남매>, <처를 때리고> 등의 단편소설과 《대하》, 《사랑의 수족관》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김유정
소설가
1908년 서울 출생, 1937년 폐결핵으로 요절
주요 작품으로는 데뷔작인 <소낙비>를 비롯해 <노다지>, <봄봄>, <동백꽃>, <따라지>, <만무방>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노자영
시인,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황해도 장연 출생, 1940년 폐병으로 사망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의 몽>, 11월 <파몽>, <낙목>의 시가 연이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처녀의 화환》, 《내 혼이 불탈 때》, 《백공작》 등의 시집과 《청춘의 광야》, 《사랑의 불꽃 : 연애서간집》, 《나의 화환-문예미문서간집》 등의 문집, 그리고 《무한애의 금상》 등의 소설집 등이 있다.

노천명
한국의 대표 여류시인
1912년 황해도 장연군 출생, 1957년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사망
본명은 노기선이나 어릴 때 홍역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천명(天命)‘으로 개명하였다.
진명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시절인 1932년 《신동아》에 <밤의 찬미>, <단상> 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친일 시를 쓰는 등 그녀의 문학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 다수의 시를 남겼으며, 특히 대표 작품인 <사슴>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방정환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1899년 서울 출생, 1931년 신장염으로 사망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였고, 1923년 3월 한국 최초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으며, 1928년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어린이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귀먹은 집오리>, <동생을 찾아서>, <까치옷>, <만년 사쓰>, <양초 도깨비>, <사랑의 선물> 등이 있다.

심훈
영화인, 소설가, 독립운동가
본명은 심대섭
호는 해풍(海風)
1901년 서울 출생,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
대표작으로 농촌 계몽소설 《상록수》를 꼽는다.
그 밖에 <독백>, <그날이 오면> 등의 시와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의 장편소설, 그리고 <황공의 최후>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이병각
시인, 기자
1910년 경북 영양 출생, 1941년 결핵으로 사망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가 해체된 1935년 무렵부터 타계할 때까지 6년 동안 다수의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연모>,  <소녀> 등의 시가 있다.

채만식
기자, 소설가, 극작가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
1902년 전북 옥구군 출생, 1950년 폐결핵으로 사망
역사적, 사회적인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적인 작품을 주로 쓴 사실주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미스터 방> 등의 단편소설과 《탁류》, 《태평천하》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그는 광복 이후에 자전적 소설인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반성하였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채만식을 일제시대 친일 행위자로 결정하였다.

최서해
소설가
본명은 학송(鶴松)
호는 서해(曙海)
1901년 함북 성진 출생, 1932년에 32세의 나이에 요절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처녀작인 <토혈>, 데뷔작인 <고국>을 비롯해 주요 작품으로는 <탈출기>, <박돌의 죽음>, <홍염> 등의 단편소설과 유일한 장편 소설인 《호외 시대》가 있으며, 어릴 적부터 가난했던 삶은 그의 문학에 근간을 이룬다.

허민
시인, 소설가
본명은 허종(許宗)
1914년 경상남도 사천 출생, 1943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
1936년 12월 《매일신보》 공모에 단편소설 <구룡산(九龍山)>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율화촌(栗花村)>, <해수도(海水圖)>, <봄과 님이>, <아픈 다리> 등의 시가 있으며, <사장(射場)>, <어산금(魚山琴)>, <석이(石茸)>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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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김소월의 「접동새」

어느 산골 마을에 아홉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둔 사람이 있었다. 아들만 아홉 명 낳은 끝에 뒤늦게 고명딸을 본 부부는 물론 오빠들도 여동생을 끔찍이 귀여워했다. 산에 약초를 캐거나 나무를 하러 가면 막내 여동생을 생각하며 산딸기나 으름, 개암, 다래 따위 열매를 꼭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

예쁘기가 꼭 맑은 물에 똑 떨어진 새빨간 앵두 같아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앵두’라고 불렀다.

부엌에 들어가면 꼭 어머니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듯 혼잣말을 했다.

그날도 그랬다. 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와 혼잣말을 했다.

"어머니, 오늘은 감자밥을 지을까요, 옥수수밥을 지을까요?"

그러자 부뚜막 뒤쪽에서 커다란 쥐가 한 마리 조르르 나와 딸을 빤히 바라보더니 감자가 든 이남박을 툭툭 건드리는 것이었다. 딸은 왠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쥐로 환생하여 자기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죽으러 가는 년이 그건 먹어서 뭘 해."

아버지는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내리치며 갈 길을 재촉했다.

"아버지, 돌아가시는 길에 배나무가 죽었으면, 앵두가 다 떨어졌으면, 으름덩굴이 시들었으면 내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아세요."

"접동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새의 울음소리였다. 그 새의 입안이 핏덩이라도 토해내듯 새빨갰다.

"아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가. 죄 없는 딸을 죽인 몹쓸 아비가 되었구나."

아버지는 산배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딸의 고무신 한 짝을 주워들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억울하게 죽어 접동새가 된 여동생은 해질녘이면 아홉 명의 오빠들이 살고 있는 집의 울밖 나무에 날아와 앉아 ‘접동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아홉오라범 접동’ 하며 울었다. 밤새 피 토하듯 울고는 새벽닭이 울면 날아갔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에 사는 한 젊은이가 과거를 보기 위해 괴나리 봇짐을 지고 집을 떠났다. 한양까지 가려면 화천읍 냉경지 나루를 건너 용암리와 삼화리 마을을 지나 용화산을 넘어야 했다. 용화산은 경치 좋기로 유명하였지만 그만큼 험하기도 한 곳이었다.

"이 시각에 산을 오르다니. 산에서는 날이 쉬이 저문다오. 곧 어두워질 텐데 도로 내려갔다가 내일 날 밝는 대로 산을 넘는 게 좋을 거요."
산에서 내려오던 나무꾼이 걱정스레 만류했으나 젊은이는 귀담아듣지 않고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젊은이와 무사는 마당바위로 내려갔다. 구렁이의 주검을 거두어 잘 묻어주고 두 번 절하는 예로써 장사지냈다.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든, 인간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그들의 질서나 계율이 어떠하든, 자신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 죄스럽고 가슴 아팠던 것이다. 또한 천년을 기다려 이무기가 되고 또 천년을 기다려 용이 되고자 했으나 끝내 하늘에 오르지 못한 구렁이의 원과 한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어느 마을에 일손 빠르기로 소문이 자자한 처녀가 있었다. 빠르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누에씨를 받아 키워서 고치를 짓고, 그 고치를 삶아서 명주실을 잣고, 그 명주실로 옷감을 짜 물감 들이고 말려, 옷 한 벌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반나절이었다.

대체로 손이 빠르면 솜씨가 거칠게 마련인데 그야말로 천의무봉, 흠 하나 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공짜로 여덟 칸 번듯한 기와집이 생기고. 그 너른 삼천 평 논의 모내기를 반나절에 끝내고 온 집안의 벼룩들을 말끔히 소탕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배 먹고 이 닦기! 손 안 대고 코 푸는 땡 잡는 일! 내일은 또 어떤 재주를 가진 녀석이 내 집 문을 두드리려는고? 꿈속에서도 주인 영감은 흐뭇하고 흐뭇하여 빙긋빙긋 웃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서 가장 손이 빠른 처녀는 생명의 은인이자 세상에서 가장 발이 빠른 총각과 결혼하여 오래오래 잘살았다.

어려서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던 어린 김응하는 임진왜란 중 여덟 살 난 동생을 등에 업고 피란길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던 시절이었다. 3년 동안이나 유랑하는 무리를 따라다니며 얻어먹고 지내던 소년 응하는 왜병이 물러가자 고향인 철원에 돌아와 사촌형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잔치가 들었나? 제사가 들었나? 운 좋으면 오늘밤 음식을 걸판지게 얻어먹겠는걸.’

"오늘밤 우리집에 저 산속 보타사의 도적떼가 오기로 되어 있소. 그들 눈에 띄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참화를 당하게 될 터이니 다른 집으로 가보시오."

7년 동안이나 계속된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온 나라가 전장터가 되었던지라 그 땅과 사람살이의 황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먹고살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거지가 되거나 무리지어 도둑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도둑떼가 온다구요? 그것 참 잘되었습니다. 내가 다 막아드릴 테니 저녁밥이나 두둑이 먹여주시오."

"공연한 객기로 젊은 목숨을 잃지 말고 일찌감치 피할 도리나 하시오."

"주인장, 아무 걱정 마시오. 내가 오늘밤 그 못된 놈을 박살내겠소. 오늘 대접받은 밥값을 톡톡히 치러드리겠소. 아무 염려 마시고 술이나 한 동이 갖다주시오."

"천하절색이라더니 천하장사일세. 버들잎처럼 나긋나긋 야들야들하다더니 순 거짓뿌랭일세. 무겁기는 어찌 이리 무거운고. 아이구, 이년아, 좀 살살 때려라. 아무리 매 끝에 정든다 해도 다짜고짜 주먹질이라니, 너는 귀한 양반집 규수라면서 서방님 맞이하는 예법을 이렇게 배웠느냐.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구 나 죽네, 마달이 죽네."

"염려 마십시오. 도둑놈들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고 마달이 놈에게 잡혀간 조카따님의 몸종도 찾아오고 스님들에게 절도 찾아주겠소."

"제게는 분에 넘치는 규수입니다. 주인장 뜻이 그러하시다 해도 아가씨는 어찌 생각할는지요?"

"제 뜻이 바로 아가씨의 뜻입니다."

"아가씨는 서울 재상집에서 귀하게 자라난 몸이나 나는 시골의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오늘 이와 같이 부부의 연분을 맺는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는 일인 것 같소."

"이 모든 일이 다 하늘의 뜻이 아닙니까? 하물며 도적에게 죽게 된 이 몸을 구해주신 은혜는 일생을 두고도 다 갚지 못할까 하옵니다."

김응하 장군(1580~1619)은 조선조 14대 임금인 선조 시대에 태어나 15대 광해군 때 활약한 장군이다.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두루 중요한 직책을 거쳤다. 광해군 10년, 중국 명나라에서 만주 남쪽의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좌영장으로 만주에 출정하였다.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육만 명의 적과 맞서 싸우다가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전사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충무라 한다.

강원도 춘천에서 동북간 약 이십 킬로미터 지점, 지금은 소양댐 물속에 잠긴 북산면 내평리라는 곳에 눈이 화등잔같이 크고 키가 구척장신인 한 총각이 살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이웃 동네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홀로 된 아버지를 봉양하고 누이동생을 거두었다. 우직하고 부지런한 총각은 열심히 일했다. 초가삼간이나마 반듯하게 짓고 예쁘고 알뜰하고 마음 착한 색시를 얻어 아버지를 잘 모시고 싶었다.

끙끙 앓으면서도 끝내 산삼을 캐지 못한 아쉬움으로 한숨만 쉬던 아버지는 한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머리맡에서 임종을 지키는 아들에게 슬픈 유언을 남겼다.

"얘야, 착하고 부지런한 네가 부모를 잘못 만나 배우지 못하고 제대로 입고 먹지도 못하였구나. 이승에서의 지난날이야 돌이킬 수 없다만 내 죽어 혼이라도 네 앞길을 지켜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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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처럼 넓은 못에는 조각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물을 어찌 건널꼬.
아내의 입속 탄식이 채 끝나기도 전
강아지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저 강아지만 따라가면 된다고 했거늘!
아내는 용기를 내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옛사람들의 소박한 삶 속에 깃든 꿈과 소망, 슬픔과 그리움, 열망 들은 지금 이곳, 우리들의 삶에도 웅숭깊게 배어 있다. 그것이 생로병사로 조건 지어진 우리의 삶이 부박하기만 하거나 단색 판화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랬는데……. 그렇게 되었다지 뭐야……. 끝없는 이야기, 이야기들.

이야기들을 교훈이나 풍자, 해학, 한恨 등의 단어로 분석하고 풀이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고 그다지 의미 있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명은 유한해도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인생은 저마다 고유하게 빚어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승해지는 이즈음 앞서 살아간 사람들, 그들의 시대와 세상이 한결 애틋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삶을 찬가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단둘이 살아가는 남매가 있었다. 누나인 윤옥과 남동생 윤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김새며 나이에 비해 헌칠하고 늘씬한 체격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윤호 역시 누나를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다. 불과 세 살 위였지만 윤옥은 생각이 깊고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웠다. 윤옥은 일하러 나가면서 가끔 윤호에게 ‘오늘은 강가에 나가 놀지 말라’거나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이르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에는 동네 아이들 중 누군가 강물에 빠지거나 산에서 뱀에 물려 죽는 일이 일어났다.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내가 너를 삼 년 동안 이대로 놓아두겠다. 삼 년 후 돌아와 다시 살려내겠다."

윤옥은 죽은 동생을 깨끗이 씻겨 잠재우듯 이불 속에 곱게 눕혔다. 그런 후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댕기머리를 올려 무명수건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영락없이 총각의 모습이었다. 방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간단한 봇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라오아돌고입몸고입혼라나아살여자은죽(죽은 자여 살아나라. 혼 입고 몸 입고 돌아오라.)"

그러자 궤가 스르르 열렸다. 궤 안에는 빨간꽃 하얀꽃 노란꽃 세 송이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이랍니다. 빨간꽃은 살살이꽃, 흰꽃은 뼈살이꽃, 노란꽃은 숨살이꽃입니다."

아내는 윤옥이 그것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재빨리 궤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궤는 언제 열렸었느냐는 듯 감쪽같이 닫혔다.

"누님, 제가 아주 오래 잠을 잤지요?"

"이제 내가 살던 대감 집으로 떠나거라. 너는 이제부터 그 집의 사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는 이렇게 똑같이 닮았으니 그 집에서도 네가 나인 줄 알 것이다. 부디 잘살거라. 그러나 내외간의 정에만 매여 혼자 남은 이 누이를 잊으면 안 된다. 내년 이날, 복숭아꽃이 필 때 꼭 날 보러 오너라. 나는 널 보듯이 네 옷을 지으면서 기다리마."

때는 봄이었다. 마당 귀퉁이, 해묵은 복숭아나무 가지에는 분홍빛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느 봄날, 아내와 후원의 연못가를 거닐던 윤호는 연못물에 하르르하르르 떨어져내리는 복숭아 꽃잎을 보며 문득 까닭 모르게 찌르르 가슴이 저려왔다. 그 애달픈 연분홍빛이 그대로 마음에 물드는 것 같았다.

날이 밝을 무렵, 절에서 새벽 예불 종소리가 뎅뎅 울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윤옥이, 앉은 자리에서 구렁이가 되어 방고래 속으로 스르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강원도 시골 마을에 아들 삼형제를 둔 부부가 살았다. 비록 살림은 넉넉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예쁜 딸이 하나쯤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딸이 하나 있으면 빨강치마 노랑저고리를 입혀 매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할 텐데……."

구렁아 구렁아 혓바닥을 내놓아라.
구렁아 구렁아 네 허물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토막토막 잘라서 구워먹어버리겠다.

동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와 집에 돌팔매질을 하고는 잽싸게 달아났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집은 점점 외톨이로 적막해졌다.

"네가 이제 고기맛을 들였으니 목숨 가진 것들이 네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 뱀의 사는 길이 서로 다르니 이제 이 집을 떠나거라. 그것만이 너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이다. 언젠가는 허물을 벗고 사람이 되어 돌아오거라."

그런데 어쩐 일로 셋째딸이 구렁이에게 시집을 가겠노라고 하는 게 아닌가.

"네가 미쳤구나. 구렁이와 혼사를 맺은 집 딸을 누가 데려가겠니? 너 때문에 우린 시집도 못 가게 생겼다. 제발 마음을 돌려라."

"어떻게 시집을 가든 다 제 복대로 사는 법이다. 비록 구렁이 남편일지라도 네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좋은 날을 주실 것이다."

자신의 경솔한 언행 탓에 벌어진 일인지라 주인 영감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 제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과거를 보러 떠나려 하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뱀 허물을 잘 간직하고 있으시오. 딱히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을 할 수는 없지만 저기 서 있는 미루나무가 집 쪽으로 다가오는 듯이 보이면 내가 집으로 오고 있는 것이고 멀어지면 내가 오던 발길을 돌려 다시 떠나는 것으로 아시오."

"이젠 되었소. 내가 이제야 완전한 사람이 되었소. 뱀 허물을 태워버렸기에 사람 세상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물속 세상에 있게 되었던 거요. 이렇게 당신이 찾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소. 이제 당신의 손을 잡고 사람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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