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대신 폭력의 주체가 되고, 구성원들 사이에 "당신은 몸을 소유한다"의 명제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지 못한 사회에서 힘은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최소한의 상식’이라는 법에 호소하지만, 이 땅에서 법은 오랫동안 표트르 크로폿킨의 말처럼 ‘힘센 자의 권리’에 가까웠다.

고객 신분일 때는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판매원의 친절이나 환대는 자발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밥벌이가 강요한 것이므로 그 친절과 환대는 다른 자리에서 폭력의 양상으로 전화될 수 있다.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고 했다. 폭력은 즉각적이든 지연되든 연쇄반응처럼 폭력을 낳는다.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 corpus). 라틴어로 "당신은 몸을 소유한다"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인권의 역사상 획기적인 인신보호령(1679년, 영국)으로 자리 잡혔다.

폭력은 "남이 당신에게 행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당신 또한 남에게 행하지 말라" "남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당신도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황금률을 어긴 행위다. 이 황금률을 지켜야 한다.

얻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머릿속이 차라리 비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나는 회의한다)"가 없는 채 지배 세력이 선별한 생각(=고집)을 정답으로 주입받았기 때문에,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회의할 줄 모르고 그것을 막무가내로 고집하는, 완성된 존재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한국의 대다수 피지배 대중이 보여주고 있는 서글픈 자화상이다.

남을 설득하려고 해본 사람은 안다. 설득되지 않는다는 점을. 완성 단계에 이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설득하기는 어렵고 선동하기가 쉬운 사회다.

설득이 남의 기존 생각을 수정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선동은 남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강화, 증폭시키는 일이다.

어빙 재니스 교수에 따르면 집단사고는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의 경향"을 말한다.

집단사고는 낙관론으로 집단의 눈을 멀게 하는 현상으로서 외부를 향해서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취하게 이끈다고 한다.

사회운동의 세 가지 축으로 "조직하라, 학습하라, 설득하라(선전, 홍보하라)"를 꼽는데, 조합원이든 단체 회원이든 회의하는 자아가 아니므로 학습도 하지 않고 설득도 하지 않으니 남은 것은 ‘조직’뿐이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이든 진보정치운동 조직체든 알량한 내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조직원을 동원하는 것이 운동의 주된 내용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이 성숙하거나 고양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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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 호러 × 제주 로컬은 재미있다
빗물 외 지음 / 빚은책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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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이야기 <곶>

이야기 자체는 나름 재밌다. 자연주의

제주~서귀포간 516도로공사에 얽힌 이야기
516도로는 제주 최초의 국도다.
11번국도, 제주도가 특별자치도가 되면서 1131번 지방도로 강등.
1960년대 건설부 (이리)호남국토건설국 또는 이리, 부산, 영남국토 건설국으로 소속을 달리한 제주축항 사무소 에서 공사, 이후 제주축항사무소가(확실지않다) 제주지방국토관리청으로 승격해서 유지관리하다 2006년 제주도로 이관.

작가는 배경지식이 부족하다.
소설이라고 우기면 어쩔수 없다.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보시오

한국도로공사는 고속국도 건설 유지관리,
지방국토관리청은 일반국도 건설 유지관리

제주도엔 고속국도(유료도로)가 있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웬 한국도로공사에서 제주~서귀포간 도로공사를 하는가?
한국도로공사는 1969년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69년 8월이다. 9년전부터 한국도로공사에서 제주~서귀포간 도로공사를 하고있단다.
그리고, 현장소장이 한국도로공사 배지를 차고있다? 감독이라면 모를까.

제주지방국토관리청은 1961년 10월 이리지방국토건설국 소속으로 설치된 제주축항사무소로 시작하였다. 제주축항사무소는 1962년 1월 부산지방국토건설국 제주축항사무소, 1962년 2월 영남지방국토건설국 제주축항사무소를 거쳐 1963년 9월 건설부 영남국토건설국 소속 제주축항사무소로 변경되었다. 이후 제주축항사무소는 1973년 12월 제주개발특별건설국으로 변경되었다가 1974년 6월 [지방건설관서직제]에 의해 제주특별건설국으로 기관명칭을 변경하였다. 제주특별건설국은 1975년 6월 제주지방국토관리청으로 승격되었다가 1979년 6월 [지방건설관서직제]에 의해 제주개발건설사무소로 변경되었다. 제주개발건설사무소는 1994년 12월 건설부 소속에서 건설교통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가 2001년 7월 14일 [건설교통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에 의해 제주지방국토관리청으로 승격되었다. 제주지방국토관리청은 2006년 6월 폐지되었다. 주요업무는 제주개발사업의 조사·측량·설계 및 시행, 제주도안 국도의 유지 및 관리, 건설공사 품질관리 및 각종 공사 및 용역 관리 등에 관하 사무를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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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매슬로라는 심리학자에 따르면 인간은 다섯 단계의 욕망을 가진다. 식욕과 성욕 등 생리적 욕망(1단계), 안전에 대한 욕망(2단계), 소속감과 애정 욕망(3단계), 권력과 명예 욕망(4단계),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망(5단계)으로 단계화되어 있고, 낮은 단계의 욕망이 충족되어야 높은 단계의 욕망을 추구한다고 한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서로 다른 만큼 다양한 결을 가진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다른 무엇보다 이 자유에의 의지를 되찾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데 있다.

소박한 자유인은 거창하지 않은, 소박한 자아실현으로 만족할 줄 알며 특히 생존 조건을 소박한 수준에서 멈출 줄 아는 사람이다. 물질적 소유에서는 물론, 이웃과 연대하려는 열정에서 비롯된 자아실현에서조차 그것이 지나친 욕망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절제할 줄 아는 소박한 자유인, 이것이 고결함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자유여.

근대 공화국의 보편적 개념 규정이 "자유로운 시민들이(주체), 공동선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로서(목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수단) 국가"

각 개인들의 자유로운 주체화와 사회 민주화는 줄탁동기(啐啄同機)의 줄탁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병아리가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껍데기 안쪽을 쪼는 것이 ‘줄’이고, 어미 닭이 바깥에서 알을 쪼아 새끼의 부화를 도와주는 것이 ‘탁’이라고 할 때, 개인의 자유를 세우는 것은 줄, 사회 민주화는 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병아리가 껍데기 안쪽을 쪼는 줄이 어미 닭의 탁에 우선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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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과 공포로 쌓아 올린 세계,
미쓰다 월드의 불온한 매력서늘한 괴담과 절묘한 미스터리의기묘하고 아름다운 융합!
스토리콜렉터 미쓰다 신조 컬렉션

앙화 : 어떤어떤 일로 인하여 생기는 재난中
“자네와 나에게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엽기적인 자의 피다.˝
자살한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녹음한 테이프
‘그것을 접한 자들에게 일어나는 괴이한 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읽는 동안 철썩 들러붙을지 모를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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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가 말하는 홍세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을 맡고 있다. 회사원, 관광안내원, 택시기사에 이어 신문기자와 소수파 진보정당의 대표를 거쳐, 급기야 은행장의 직함까지 갖게 되었다. 주식도 없고 스톡옵션도 없는,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장일 것이다.

결 : 거칢에 대하여 | 홍세화 저

난민 생활 20년 뒤 귀국이 가능해졌을 때 파리를 좌우로 나누며 흐르는 센 강변에서 소박한 다짐이 있었다. 우연의 산물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없었더라면 센 강변에서 배회하다가 소멸했을 존재의 자리에서 사물과 현상을 보고 글을 쓰겠노라는 다짐이었다. 내 딴에 그것은 자유인의 선언이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베스트셀러에 속했고 나의 형편을 다르게 했다. 그 책으로 나는 보잘것없지만 상징자본까지 갖게 되었고 언론고시를 치르지 않고 언론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인 선언은 나를 지킬 만한 물적 조건을 갖게 된 자로서 오랫동안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던 나 자신에 대한 연대의 표시이기도 했다.

세월은 또 흘렀고 적잖은 선배와 동료들이 세상을 떠났다. 나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으로 이끈 고교 동창생 박석률도 3년 전에 세상을 떴다. 모진 고문과 오랜 수감생활을 겪었던 그는 끝내 이 세상의 광영과는 티끌만치의 인연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나오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라는 문장이 자주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던 덕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김학철 선생은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인간답게 살려거든 그에 맞서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간디는 거의 한 세기 전에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회악으로 일곱 가지를 꼽았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헌신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그가 꼽은 일곱 가지 사회악은 이 땅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을 조금은 더 정의로운 세상, 조금은 더 자유가 확장되고 약동하는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게 우리 삶의 중요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끝내 철들지 못한 것도, 그래서 글이 섬세하지 못한 것도, 그런 안간힘에서 비롯되었다고 변명하는 것까지.

빅토르 위고가 소설 『93년』에서 "혁명의 절대성 위에 인간의 절대성이 있다"고 말했던 것은, 인간과 사회를 위한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 자체에 인간과 사회를 배반할 인자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과거에는 노예들 중 소수가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오늘 ‘멋진 신세계’의 노예들은 대부분 계속 노예로 편하게 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편하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 앞에서 자유의 참된 의미는 점점 더 힘을 잃고 있다.

이 거친 글은, 감히 말하건대, 한국 사회라는 산(山)에서 내려오는 한 선배가 산에 오르는 젊은 후배와 만났다고 가정하여, 누구의 어법을 빌려 다시 또 감히 말하건대, ‘조금 더 낫게’ 패배하는 자유인이 되게 하고 싶은 안간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령 그 후배가 소수도 아닌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남이 당신의 몸에 함부로 범접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당신 또한 남의 몸에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 모든 사람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몸에는 생명과 정신이깃들어 있다.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 모든 어린이와 모든 학생, 모든 노인의몸을 존중하라. 완력이 약하다고 여성, 어린이, 노인의 몸에 폭력을 가하는것은 어떤 사연이 있든 그 자체로 야만이다. 모든 장애인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체육 선수들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성소수자와 이성애자의 몸을, 모든노동자의 몸을,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이주노동자의 몸, 모든 이주여성의 몸, 모든 난민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재소자의 몸을 존중하라. 그리하여 모든 내 가족의 몸을, 모든 이웃의 몸을 존중하라. 이것이 자유와 인권의 출발점이며 조건인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corpus) 정신이다.

‘짓다’라는 우리말 동사는 흥미롭다.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는다’고 써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가 모두 ‘짓다’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된다.

우리 각자에게도 잘 지어야 할 게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한번 태어난 존재인 나, 나를 잘 지어야 한다. ‘나를 어떤 존재로 지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부단히 던져야 한다. 나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나를 잘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과 비교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우리 학교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데 익숙하게 만든다. 남보다 우월한 나를 추구한다면, 내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남이 된다. 그런 삶에서는 나를 짓는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통해 통찰했던 것은 ‘악의 평범성’이 "사유하지 않는"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강조했듯이, 자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까지만 인정된다.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적극적 자유가 전제(專制)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힘센 자의 적극적 자유 행사가 많은 사람의 소극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질’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소극적 자유도 누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겠습니까?"

"괜찮지.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겠다."

우리는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가난하면 즐거울 수 없고 부유하면 예를 좋아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 나를 고결하게 짓는 자유의 길은 과거보다 더 절차탁마를 요구하고 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사단’, 즉 맹자에 따르면 인간의 조건이며, 퇴계(이황)나 고봉(기대승) 선생에 따르면 인간에게 선함을 발현케 하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출세하려면 멀리해야 하는 가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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