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키우는 사학에서 투명하게 경영하기 위해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하는 것이 나라 망할 일이라는 말인가? 21세기 벽두에 거리를 방황하는 유신공주를 보며, 40여 년 전에 사립학교법을 처음 제정하여 사학을 법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 박정희도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혀를 차지 않았을까?

새만금 사업 등은 나라가 들썩일 만큼 규모가 큰 사업이다. 하지만 국방부가 벌이는 사업을 보면 하나하나가 새만금보다 규모가 크다. 시민들이 참여하고 감시해야만 한다. 국방은 군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국방의 의무가 있다. 시민들은 관심과 감시로 국방에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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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국가 대한민국
아직도 대한민국은 병영국가다
아니, 더 강화된 병영국가다.

병역준비역

뭐 이런 개뼉다귀 같은게 생겼나

우리때도 없었던 병역준비역이란게 있다.
첨 들어봤다.
고3. 아들놈에게 통지서가 왔다.
깜짝놀랐다.
이런게 있었나. 아! ㅆ ㅂ
고3. 수험생들에게 심난하게 이런걸 보내고 싶은가
병무청 열일한다.

아내는 나보고 대신 다녀오란다.

그래, 다시 한번 삽질해보자.

나, 삽질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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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넘게 해오던 연재를 그만두는데 소회가 없을 수 없다. 인터넷 서평을 통해서건 직접 만나서 들은 이야기건 『대한민국史』를 읽은 독자들의 반응에서 가장 흔하게 접한 것은 분노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읽은 어떤 시인의 말처럼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산다는 것이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는 일제의 강점, 분단, 전쟁, 그리고 독재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망의 역사가 아닌 희망의 역사이다.

미국 유학 시절, 한 미국인 사회주의자와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을 피해 군대에 입대했고 한국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일생을 바꾸어놓는 사건을 만났다. 꿈꾸듯 그는 말했다. "너 그거 아니? 전쟁이 끝나고 겨우 7년밖에 지나지 않았어. 7년. 길거리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거든. 그런데 청년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세상을 바꿔버렸어." 그 경이로움! 그는 갓 스물, 자신이 한국에서 목도한 민중의 힘이 30년 뒤 쉰 살이 넘은 자신으로 하여금 시애틀의 구석에서 유인물을 돌리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가 갖고 있는 이 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한국전쟁의 학살에서 끈질기게 다시 일어나, 5ㆍ16군사반란과 유신의 동토를 녹이고, 광주학살의 절망과 슬픔을 딛고 여기까지 온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의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더 어렵던 시절을 돌이키며 신발을 고쳐 신는다.

2006년 11월
한홍구
대한민국사 4 | 한홍구

김옥균이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이광린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김옥균 등은 "대원군이야말로 쇄국에 대한 생각만 바꾸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옥균 등을 키워낸 박규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고종의 리더십에 실망한 박규수는 고종이 군주로서 갖춰야 할 리더십을 키우는 것보다 쇄국과 개화에 대한 대원군의 견해를 바꾸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울 때의 평양감사가 바로 박규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박규수는 쇄국정책에서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그의 사랑방은 개화파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했다.

『성경』, 『노자도덕경』, 『수호지』, 『코란』, 『신곡』, 『데카메론』, 『군주론』, 『유토피아』, 『천로역정』, 『법의 정신』, 『에밀』, 『상식』,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적과 흑』, 『종의 기원』, 『죄와 벌』, 『톰 아저씨의 오두막』, 『곤충기』, 『인형의 집』, 『아큐정전』, 『의사 지바고』, 『무기여 잘 있거라』, 『수용소군도』…….
너무나 유명한 이 책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유명 대학의 신입생 권장도서 목록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 책들?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들의 진짜 공통점은 한때 어떤 이유로든 금서의 목록에 올랐다는 점이다.

역사의 진보란 늘 기성의 권위에 대한 비판과 도전에서 비롯됐다. 세상을 바꾼 책들이란 대개 한 번쯤 금서의 반열에 올랐다가 이제는 고전이 된 책들이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금서는 역시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인데, 이 책은 처음에는 판매금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시위하다 잡혀온 학생들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눈을 뜨게 되었다고 진술한 덕에, 1979년에 뒤늦게 판매금지 도서가 되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과거가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고통이 피해자가 당한 고통보다 크지는 않다. 지금 고백이 필요한 정말 중요한 이유는 고백이 치료약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통에 허덕이며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당신이 하는 고백은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다. 억만금을 보상금으로 준다고 해도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가해자의 고백으로 치유될 수 있다.

고백하면 바보가 되고 고백을 거부한 자는 떵떵거리고 사는 이 땅에 윤동주라는 청년이 잠깐 다녀갔다. 그의 절절한 시 한 수.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지금 이 땅에서 고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윤동주의 ‘참회록’을 고백을 하지 말라는 말로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늘 떨리고, 늘 서투를 수밖에 없는 고백. 그러나 나는 지난 시기의 국가폭력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기 당대의 부정적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는 길은 스스로 고백하는 것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최초로 학술논문에서 한국의 국립묘지 문제를 비판적 시각으로 고찰한 김종엽에 따르면, "전몰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그들을 기념하는 전몰자 숭배를 조직함으로써 국가는 국가의 토대가 바로 군대이며 희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전파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요구될 동원과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상징적 지배를 이룩한다"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수십 명의 인명을 희생하는 것도, 국가가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신화를 만드는 작업이다. 전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이 멀리 한국이나 베트남의 전장에서 수십 년 전에 희생된 자국 병사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데 열심인 것은, 미국이 앞으로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심란한 모습이기도 하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변하고 있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이 장기 집권을 하더니, 그 최고 권력이 40년을 뛰어넘어 1917년생 육군소장 박정희에게 갔다. 박정희가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더니, 그 권력을 다시 1931년, 1932년생 육군소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고는 거꾸로 1927년생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더니, 1926년생 김대중이 그 자리를 이었다. 그리고 20년을 뛰어 1946년생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군사독재 30년이 지속되고 거기에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맞선 양 김씨의 시대가 그만큼 오래가더니, 2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뒤엎은 4·19세대를 건너뛴 것이다.

유시민 군을 남겨두고 통금이 다 되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긴급 뉴스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건 역사에서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보게 될 때면, 광주학살의 전야에 그 넓은 관악캠퍼스의 불 꺼진 학생회관에 홀로 남은 유시민을 떠올렸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의 그는 다가오는 캐터필러의 굉음을 들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역사가 무서운 것은, 역사를 이끌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뒤에 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즐겁게 힘을 보태어 뒤에서 수레를 밀고 가면 원로가 될 수 있고, 자기가 계속 끌겠다고 앞에서 막아서면 수레에 깔릴 뿐이다.

지금, 그 시절에 꿈꾸던 좋은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때 차마 꿈꾸지 못하던 무언가가 돼버린 사람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때 같이 싸우던 사람들과 함께 꾸던 꿈은 어디로 간 것일까? 20대의 꿈을 그대로 실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 되기 위한 발판으로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 차지하게 된 자리의 힘을 동원해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위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 5부 |
왜곡된 역사의 고리를 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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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1일 칠레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향해 "두 나라 정치 관계가 정체와 곤란을 겪게 된 최대 장애 요인은 일본 지도자의 야스쿠니 참배"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야스쿠니에서 죽음은 슬픔이나 상실감의 대상이 아니다.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이 여러 시간에 걸친 초혼식을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까지 한 것은 이런 의식이 군국 일본의 전쟁 동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지하에서 천황의 은혜를 경건히 떠받들고, 유족은 자신의 아들이나 형제를 야스쿠니에서 신으로 모셔주는 천황의 은혜를 입은 광영에 감읍하여 부형의 전사를 기뻐하고, 일반 국민은 또 다른 전쟁에 천황과 제국 일본을 위해 죽기를 기약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야스쿠니신사를 통해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이 끌어내려 한 분위기였다.

침략국가가 일으킨 잘못된 전쟁에 가해자로 동원돼 죽음을 강요당한 전사자들을 ‘영령’으로 칭송하는 일은, 고이즈미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위헌 아시아소송 원고단 단장 스가하라 류겐이 잘 지적한 것처럼, 국가의 전쟁범죄를 정당화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전사자를 이용하는 일로서 전사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이곳에서 신이 되어버린 죽음은 자연스럽지 않다. 슬픔도 상실감도,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다짐도 ‘죽음을 죽여버린 공간’인 야스쿠니신사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남쪽 사회 내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단 하룻밤이라도 한데서 새워본 적이 없는 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단 한 번도 발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샌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 항일투사 김일성에 대한 폄하는 곧 1930년대 후반 이래의 우리의 항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폄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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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재오는 "우리가 한나라당에 없었다면 한나라당이 지금 야당으로서 모습을 갖췄겠는가" 하고 자신 있게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불행은 어렵게 들여온 양자마다 족족 불임이 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힘과 돈이면 무엇이든 되던 시대에 그 동네 밭의 토양 자체가 너무나 오염된 탓일 것이다.

특히 자기들이 열심히 운동하던 유신 시절에 고시 공부해서 판사가 되고 변호사 개업해서 돈 벌다가 뒤늦게 지방에서 운동을 한 노무현에게 졌다는 것은 운동권 핵심을 자부하는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이런 증세는 노무현과 같이 꼬마 민주당을 했던 박계동이 오히려 가장 심한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젊은 날의 이런저런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그때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다. 어렸을 때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조선일보> 기자가 되고 싶었던 것. 그리고 후배들에게 인생 저렇게 살지 말라고 말해줘야 할 반면교사가 되어버린 이재오를 배우고 싶은 선생님으로, 김문수를 닮고 싶은 선배로 생각했던 것. 그런 꿈이 이루어졌으면 어떡할 뻔했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곤두선다.

원전의 공부도, 사회과학 공부도 역사가 길지 않았다. 현대사 연구는 광주를 거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놀라운 학구열과 첨예한 의식을 가진 어린 학생들, 그러나 복잡한 세상은 희미한 원전 복사본에 사회과학 서적 몇 권 읽은 지식으로 분석하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다. 좌파 중에도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생각은 보수적이지만 도저한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우파도 있다. 자신들이야말로 지금도 진짜 주체사상파라고 우기는 뉴라이트들을 위해 주체사상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품성’이 중요한 것이다.

뉴라이트들이 옛 동료들을 향해 사상 고백을 하라고 을러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 뉴라이트 문제,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사상식으로 얘기하면 품성의 문제이고, 우리의 일상의 말로 바꾼다면 ‘싸가지’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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