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희: 염정아, 이쁘다숨겨줘재워줘먹여줘몸줘왜가니, 니가.잘가라. 이 바보야오현우: 지진희, 바보. 지진아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왠지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
여자란 정말 열이 받을 정도로 양식이 풍부하다 ― 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꽃병 파편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매끈한 여행용 가방이었다. 스티커도 붙어 있지 않고 이름표도 없다. 간신히 ‘샘소나이트’라는 메이커 이름을 읽었을 뿐이다.
채워져 있는 것은 전부 일만 엔짜리 지폐였다. 세로로 세 줄, 가로로 다섯 줄. 다발이지만 돈띠는 없고 고무밴드로 묶여 있다.
"이렇게 되다니, 취하지라도 않았으면 있을 수 없어."
아침에 일어나 모르는 남자와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둘 다 나란히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해 낼 수 없어진데다 팔에는 묘한 번호가 적혀 있고 또한 한 사람은 죽을 것같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그것을 그녀는 ‘부끄럽다’고 한 것이다.
근육질의 팔꿈치 바로 안쪽에 숫자와 기호가 늘어서 있다. ‘Level 7 M ―175 ― a’
두 사람은 거울에 비친 듯이 같은 자세, 같은 안색으로 마주했다. 그녀도 또한 입을 벌리고 파자마 차림에 맨발로 바닥에 서 있다. 일단 그가 말했다.
파자마 아래에 속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을 지금 알아차린 것이다.
비행기머리에 프로펠러가연자간 풍차보다더 빨리 돈다.땅에서 오를 때보다하늘에 높이 떠서는빠르지 못하다숨결이 찬 모양이야.비행기는새처럼 나래를펄럭거리지 못한다그리고, 늘 ―소리를 지른다.숨이 찬가 봐. - P35
가을밤궂은비 나리는‘ 가을밤벌거숭이 그대로잠자리에서 뛰쳐나와마루에 쭈그리고 서서아인 양하고솨---- 오줌을 쏘오.1. 나리는: 내리는. - P36
봄우리 애기는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고양이는부뚜막에서 가릉가릉애기 바람이나뭇가지에 소올소올아저씨 햇님이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 P37
개눈 위에서개가꽃을 그리며뛰오. - P38
편지누나!이 겨울에도눈이 가득히 왔습니다.흰 봉투에눈을 한 줌 넣고글씨도 쓰지 말고우표도 붙이지 말고말쑥하게 그대로편지를 부칠까요누나 가신 나라엔눈이 아니 온다기에. - P39
눈눈이새하얗게 와서,눈이새물새물하오. - P40
황혼이 바다가 되어하루도 검푸른 물결에흐느적 잠기고... 잠기고...저 웬 검은 고기 떼가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꼬.낙엽이 된 해초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서창(西窓)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설움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방바닥에 나뒹구오... 뒹구오...1. 너어는: 깨무는. - P41
만돌이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전봇대 있는 데서돌재기 다섯 개를 주웠습니다.전봇대를 겨누고돌 첫 개를 뿌렸습니다.-딱 -두 개째 뿌렸습니다.-아뿔싸-세 개째 뿌렸습니다.-딱-네 개째 뿌렸습니다.-아뿔싸-다섯 개째 뿌렸습니다.-딱-다섯 개에 세 개... - P43
그만하면 되었다.내일 시험,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허양 육십 점이다.볼거 있나 공차러 가자.그 이튿날 만돌이는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흰 종이를 바쳤을까요.그렇잖으면 정말육십 점을 맞았을까요. - P44
달밤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여원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누가 있어만 싶던 묘지엔 아무도 없고,정적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푹 젖었다. - P45
그 여자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먼저 떨어졌습니다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지나던 손님이 집어 갔습니다. - P49
비애호젓한 세기의 달을 따라알 듯 모를 듯한 데로 거닐과저!아닌 밤중에 튀기듯이잠자리를 뛰쳐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사람의 심사는 외로우려니아-이 젊은이는피라미드처럼 슬프구나 - P50
산협의 오후내 노래는 오히려섧은‘ 산울림.골짜기 길에떨어진 그림자는너무나 슬프구나.오후의 명상은아 졸려.1. 섧은: 서러운. - P52
유언훤한 방에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이 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평생 외롭던 아버지의 운명(殞命),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외딴집에 개가 짖고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 P53
"당시 일제의 증오의 대상이 된 연희전문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때에민족 운동의 본산인 연희동산을 찾아오는 이들은다 제각기 뜻이 있어 온 젊은이들이었다." - P55
"동주와 자주 거닐던 연세동산의 산길들, 특히 청송대의 소리길들, 산 밑 잔디밭, 그의 보금자리요시작(詩)의 산실인 기숙사의 천장이 낮은 다락방, 이 모두가 동주의 눈길과 소리가 어린 곳이었고 그의 시의 만상의 원천이었다."-유영, 연희전문학교 동기, 전 연세대학교 교수 - P55
"이화여전 구내의 협성교회에 다니며, 케이블 목사 보인이 지도하던 영어성서반에 참석하기도 한다. 윤동주는 이 합동 성서반원에 속하는 이화여전 여학생 중 한 사람을 묵묵히 좋아했다고 한다."-친구 정병욱 - P55
새로운 길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 내일도...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