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제목과 주요 모티브를 제공하고 그 외의 많은 디테일이 쌓여 촘촘하게 쓰였다. 류보선의 작품해설 '식별 불가능한 세계의 발견과 그 의미'로부터 옮긴다.


다음 링크는 하성란의 이 단편으로 만든 라디오드라마로서 마지막에는 작가와 전화연결도 한다. https://archive.org/details/podcast_jongyeong-radio-dogseosil_0412il-gaereul-derigo-danineun_1000339838799


Lady with the Dog, 1903 - Konstantin Somov - WikiArt.org



겉으로 드러나는 하성란의 소설의 특이점은 여럿이다. 현재형 문체(초기의 경우), 현미경적 묘사, 말하지 않기 혹은 집요한 보여주기, 이름없는 인간들과 이름이 선명한 사물들, 도플갱어 모티브 혹은 분신 모티브, 동명이인 모티브, 그리고 최근에는 맛에 대한 히스테리적 집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P412


하성란의 소설은 특이하게도 서사화에서 인간의 감옥 혹은 죽음을 발견한다. 한 사람의 삶이 과거에 있었던 몇 개의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화되는 순간, 그 순간 그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그만의 비교 불가능하고 대체불가능한 고유성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진다고 믿는다. 서사화란 곧 상징 질서에 집어삼켜지는 과정에 불과하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개인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순종하는 신체로 전락한다. 그런 까닭에 하성란의 소설은 서사화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는 한편 서사화되면서 사라진 희미한 그림자들, 맛들, 아우라들을 복원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다. - P412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나레이션이 없는 흑백화면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역시 이제까지의 하성란 소설이 그러하듯 인간의 개별성 모두를 집어삼키는 상징 질서와의 처절한 쟁투가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덜 말해진 느낌을 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의 문법에 기대어보자면, 적어도 무언가가 하나둘은 더 있어야 한다. - P413


아주 쉽게 사랑이라 획정하여 제도의 틀 안에 포획시키거나 역시 쉽게 획정하여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불행을 안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식별 불가능하고 결정 불가능한 상태를 자신의 감정의 출발점으로 삼아 그 식별 불가능하고 결정 불가능한 그것에 그녀 자신을 맡겨두려 한다. - P414


하성란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하성란의 소설이다. 그런 까닭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말할 바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꼼꼼히 읽어보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어떤 담론이나 이야기에 당연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 각 개인들의 마음의 무늬 혹은 마음의 섬세한 파장들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결코 순종하는 신체들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류보선) - P4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써 오월 두번째날이다. 올해의 1분기가 흘러갔다. 곧 늦봄이 되겠지. 한지민과 정해인이 주연한 드라마 '봄밤'(안판석 연출)을 정주행했다. 어려운 사랑이다.



No Direction · Rachael Yamagata https://youtu.be/to90Ku_xK8s






〈봄밤〉의 이정인(한지민)은 불쌍한 미혼부 유지호(정해인)와 짠내 나는 사랑을 만들어간다. 한국 로맨스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의 직업으로는 처음이지 않을까 싶은데, 유지호는 작은 동네 약국에서 근무하는 약사로 정인과는 약국에서 처음 만난다. 숙취 약을 사러 왔다가 지갑을 안 가져온 바람에 외상을 하게 된 정인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영업이 끝나 불 꺼진 약국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는다. 손님용 간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들은 처음으로 자기 얘기를 꺼낸다.
 
"나 결혼할 사람이 있어요."
"난 아이가 있어요."

우리의 또 다른 ‘서른다섯 살’ 〈봄밤〉의 이정인에게 어울릴 사자성어는 무엇일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바로 자천우지(自天祐之)다. 생명력이 충만한 건 역시 사계절 중 봄이 최고다. 아자, 아자! 내 행복은 내가 직접 만든다. 민정인아, 이제 우리 꽃길만 걷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비나 오캄포가 쓴 '자손'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은 우리가 늘상 체험하고 목격하지만 해결하기는 어렵고 포기하기는 더욱 어려운, 강한 자에게 학대당하는 약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많은 경우가 그렇듯이 이 경우에 그 나쁜 강자는 바로 가족이고 아버지이다. 자식들이 문제를 타개하려고 짜낸 비책이 어떤 부메랑이 되어 본인들에게 돌아오는지까지 이 짧은 소설은 다 보여준다.

House with two stairs, 1960 - Carel Willink - WikiArt.org







아르투로 형이 결혼하고 나서야 나는 형과 다른 방을 쓰게 되었다. 그토록 원했던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건 불행의 시작이었다. 아르투로와 형수(이 말을 할 때면 어색해서 온몸이 얼어붙는다)는 집에서 가장 을씨년스러운 맨 안쪽 방을 사용했고, 나는 거리를 향한, 회반죽과 대리석으로 만든 발코니가 있는 다른 방을 썼다.

어느 날 형이 길 잃은 개 한 마리를 주워와서는 덤터기를 쓰지 않으려고 나에게 선물했다. 개를 옷장 뒤에 숨겼지만 짖어대는 바람에 곧 들통나고 말았다. 라부엘로는 정확한 조준 솜씨와 나의 무력함을 입증이라도 하듯 총알 한 방으로 개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나에게 개가 잠자던 곳을 혓바닥으로 핥게 했다.- 자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가입한 전자도서관에 베케트의 '고도우를 기다리며'라고 있다. 박영사 2001년 12월 출간으로서 전자책은 2004년 3월 날짜이다. 이 전자책이 유통되고 있지는 않다. 역자는 원로 영문학자 홍복유 박사머리말 날짜가 무려 1969년! 뒤에 심지어 1958년에 쓴 역자후기가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출판돼 나온 것이 1958년 11월이었다. 그 때에는 독자의 반응이 기대에 어긋났고, 책은 절판이 되어 오늘날까지 11년이 경과하였다. 그 동안 젊은 학도들이 이 책을 꾸준히 찾기는 했으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베케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고 보니, 사방에서 이 책을 찾고 출판사의 권유에 못 이겨, 다시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베케트가 재음미·재검토되어서 독자들이 참된 인간의 모습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의 만족이 없을 것이다.] 출처:머리말 * 제목은 '고도우'지만 본문은 '고도'로 표기되어 있다.


[베케트(Beckett)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1945년에 불어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2막의 희비극은 불어로 원명이 “En Attendant Godot”인데 그가 친히 영어로 번역해서 Waiting for Godot라고 한 것이다. 


이 짧은 연극이 처음으로 상연된 것은 1952∼3년에 프랑스 Paris의 바빌론 극장(Theatre de Babylone)에서였다. 그것이 영국 London에서도 상연되었고, 내가 이 연극을 본 것은 1956년 5월 미국 New York에 있는 Golden Theatre에서였다.] 출처: 역자후기


지금도 읽을 수 있는 문예출판사판이 바로 이 홍복유 박사의 번역이다. [1953년 1월 초연한 이래 현대 연극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희곡 작품으로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뉴욕과 런던에서 현재까지도 꾸준히 공연이 이뤄지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1969년 초연한 이후 40년이 넘게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베케트 자신이 영어로 펴낸 《Waiting for Godot》(1953)를 텍스트로 삼아 우리말로 번역한 이 책은 실제 무대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현장감이 살아 있어 약속된 희망의 등불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지만 포기할 수 없는 현대인의 절망적인 운명이 잘 드러나 있다.] 출처: 문예출판사 '고도를 기다리며' 책 소개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불어로 먼저 쓰고 직접 영어로 옮겼는데 두 원고가 같지 않다고 한다. 베케트 본인에게는 이 작업이 번역이 아니라 언어를 바꿔 다시 쓰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므로 불문학자가 번역한 불어판과 영문학자가 번역한 영어판 둘 다 존재하는 것이 정당하고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문예출판사 책 소개에도 그리 나오지만 우리 나라에서의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은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탄 1969년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공연했다는 보도가 있는데, 그 때 '고도우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홍복유 역본으로 했다고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국내 첫 공연은 1961년 입력 2006. 5. 4. ](경향신문) https://v.daum.net/v/20060504210109458?f=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커상 수상 작가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편이 실린 작품집이라기에 이 책으로부터 이 분이 쓴 것을 읽고 또 이 분이 고르고 해설을 붙인 딴 작가의 것도 읽었다. 근데 리디아 데이비스가 쓴 소설보다 그녀가 고른 소설이 더 맘에 들고 데이비스의 해설도 참 좋다! 멋진 작품, 멋진 해설, 훌륭한 앙상블. 물론 내 개취. 





볼스의 기이하고 반쯤은 세속적이지 않은, 상태가 나쁜 여자 주인공들은 당연히 작가 자신이 겪어온 고통스러운 삶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볼스는 알코올중독과 이전의 뇌졸중으로 약해진 상태로 에미 무어의 일기를 쓴 직후인 1973년 5월, 쉰여섯의 나이에 스페인의 한 병원에서 종종 화려하거나 이국적이었던 보헤미안의 삶을 마감했다.

조울증과 주기적으로 재발했던 혹독한 창작 슬럼프로부터 힘겹게 얻어낸 글쓰기에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볼스의 작품에 담겨 있다. 이미 오래전인 1967년, 현대시의 거장 존 애시버리는 볼스를 가리켜 "모든 언어를 망라해 가장 세련된 현대 소설가"라고 했다. 볼스는 수많은 동시대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최고의 작가로 여겨지지만, 여전히 지독할 만큼 평가절하되었다. (화자, 서술, 유머 모든 것이 명징하다 - 리디아 데이비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