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야철신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러나 그냥 들어가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은 조금 열려진 문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와 들여다보기 수월했다. 안은 여느 사당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정면에는 여러 신들이 그려져 있고 그 바로 앞에 위패가 3단으로 놓여있으며, 그 앞에 입구를 종이로 봉한 단지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틈으로는 그 종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정확히 읽을 수가 없다. 안에 아무도 없어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천장에는 긴 줄들이 가득 매어져 그 위에 알 수 없는 글이 적힌 종이들이 흔들린다.   

 

[모두 요괴들입니다] 

 

갑자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본 여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종이들이? ]
[네. 이름이 적혀져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 여기에 봉해져 요괴들은 사당 주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왜? 이들이 다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켰어?]  

 

 여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개중에는 그런 것들도 있지만..대부분은 주인님의 필요에 의해 잡혀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내일..모두 사멸될 것입니다]  

 

 사당은 문이 열려있지 않아 바람이 불 곳이 없는데 종이들이 흔들린다. 팔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 많은 요괴들을 모두 없앤다?]
[네]
[혹시..혹시..팔색조 때문에 그래?]  

 

 아까 들었던 대화가 생각나 물어보니 여인은 무응답으로 종이만을 처다보았다. 아마도 내 추측에 대한 대답인듯하다.  

 

[왜? 왜? 그래야하지? ]
[여기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하등한 요괴들. 그들을 사당에 묶은 것은 팔색조를 탄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멸될 때 내 뿜는 원념이 수천, 수만 개가 모여야 팔색조에게 그 기가 전해져 알이 깨지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들어냅니다. 오래전에...한 마리가 그렇게 태어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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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이 잡듯이 뒤져도 냄새만 머리가 울리도록 느껴질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의 교신도 끊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승님께 도움을 청하는 게 다다. 

나무에서 내려와 재빠르게 뛰어 주민자치센터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 후 아까 그 아름다운 안내 아가씨에게서 휴대폰을 빌렸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라] 

그 아가씨의 눈치를 보며 소곤소곤 말하니 안 듣는 척 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의식해 나는 꼭 해야 할 말 몇 마디만 했고, 스승님은 내가 혼자 움직이면 위험하다며 기다리라고 말한 뒤 끊었다.  

[커피 한 잔 줄까요?] 

내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복도를 왔다 갔다 하자 그녀가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물 좀 주세요] 

그녀는 뱀파이어 중에서도 우아함을 무기로 하는지 바람을 일으키며 탕비실에 다녀왔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저런 사소한 게 눈에 들어오다니..나는 정말 구제불능이다. 한 숨을 쉬며 그녀가 건네준 물을  마셨다. 

[브라이언이 온데요?]
[누구요? 브..뭐?]
[참, 여긴 한국이지. 뭐라고 하더라..하여간 머리가 약간 웨이브지고, 눈 크고, 코 오똑한..]
[아~스승님! 왜 궁금하신데요?]
[아는 사이라서..그냥..] 

그녀는 나와 대화 한 이래 최초로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스승님을 좋아하나? 그리고 보니 스승님을 브라이언이라고 불렀다. 

[브라이언이 스승님의 진짜 이름인가요?]
[뱀파이어는 이름이 많아요. 살아온 세월만큼 있다고 할까..]
[왜요?]
[한 곳에서 오래 살면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외모를 의심하니까 주기적으로 이사를 해요. 만약에 나라를 바꾸는 거면 이름도 그 나라에 맞게 바꿔야죠. 뭐, 간혹 죽어도 한 이름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스승님이었다.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약간 붕 떴고, 헝클어졌지만 그 모습 역시 매력이 넘쳤다. 그녀도 그런 생각인지 나랑 표정이 비슷했다. 스승님은 그녀를 아는지 인사 한마디를 한 후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녀가 현관문에 매달려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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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야철신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뒤에서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내가 옷을 받아들었는데도 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하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자 피에 젓은 옷을 건내받고는 말 없이 사라졌다. 그 후로 저녁때까지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밤이 되어 곳곳에 등불이 켜졌다. 낮과는 다르게 새들의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훨씬 시원해졌다. 뭔가 움직여 공기를 정화한 느낌이다. 계속 방 안에만 있기도 답답하여 사당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채와는 다르게 사당 근처는 등불이 하나도 없었다. 약한 달빛 만이 쓸쓸히 비출뿐 전제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다. 나는 정자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어떻게 될거 같아?]
[내일 저녁에 팔색조를 깨우기 위해서 제를 올릴 예정인가봐]
[오호..]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쪽에서 들려왔다.  

[그럼..다 죽는거야?]
[아마도. 이번엔 더 큰 힘이 필요하니까] 

대화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살그머니 나무들 쪽으로 다가갔다. 내 머리보다 조금 위에 있는 가지에는 외눈박이 요괴와 뿔이 두 개 달린 요괴가 서로 마주보며 걸터앉아 있었다. 손에는 부엌에서 가져왔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꼬치구이가 들려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으억! 인간이다~] 

둘은 깜짝 놀랐는지 두 손을 번쩍 들어보이고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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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건  
 

 

[문제가 생겼어! 빨리 나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할 그 놈이 내 머리 속으로 다급한 말을 전했다.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아니요] 

번개처럼 휘갈겨 써서 종이를 다 매꾼 뒤 그의 손에 얹어주고는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간 후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장애 수당에 주민 수당까지 합쳐서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안 그러면 굶어죽어요! 계좌이체 아시죠?] 

눈을 동그랗게 뜬 직원은 폭풍같이 몰아치는 내 말에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어 가장 빠르다고 할 만한 속도로 현관문을 열고 주민자치센터를 빠져나왔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머리 속으로 어디 있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풀 밭..나무 밑에..]
[어느 나무? 나무가 한두 개야? 똑바로 말해!]
[커다란 나무, 그 옆에 벤치가 있어]
[내가 들어갔던 건물에서 어느 쪽이야?]
[왼..쪽..조금..더..가면..] 

그의 말이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뭔가 아주 잘못 된 것 같아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나는 건물에서 왼쪽으로 돌자마자 길을 빠르게 걸었다. 벤치와 인접해 있는 나무 주변을 눈으로 스캔하며 경보를 하듯 움직였다. 이렇게 나무와 벤치의 조합을 찾다보니 왜 그리 똑같은 게 많은지 속이 탄다. 그를 불러도 이제는 아무 대꾸가 없어 입 안의 침이 바짝 말랐다. 10 그루 정도를 지나자 넓은 풀밭이 나타났다. 그 주변으로 벤치와 커다란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아까 냄새가 지독하다고 짜증을 부렸던 그 향수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가 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 나는 손에 잔뜩 배인 땀을 청바지에 닦으며 풀밭 주변에 쳐진 줄을 넘어갔다. 

[들어가면 안 되는데..]  

공을 가지고 놀 던 아이 중 한 명이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옆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부모인지 벌떡 일어났지만 내가 노려보자 공포를 느끼고는 아이를 불러 다른 곳으로 갔다. 풀밭에선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제법 큰 규모인데 이정도로 느껴지면 고양이로 변하기 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많다.   

[야! 내 말 들려?]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많고 내가 뭐하나 멈춰 서서 보는 구경꾼까지 있어 머리 속으로만 외치려니 두통이 스멀스멀 잠식해온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두운 풀 밭에 왠 여자가 엎드려 움직이니 희한하다고 생각하는지 점차 멈추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늘었다. 그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반대편까지 샅샅이 킁킁거리며 훑었다. 

내가 들어온 방향에서 왼쪽 끝부분에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가 두꺼운 가지를 축 늘어트리고 바람에 간간히 은행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밑에 있는 벤치에 내가 빌려준 백합무늬 파자마가 있었다. 두 손으로 집어 올리니 여기저기 찢겼다. 모양새로 보아 날카로운 손톱으로 박박 긁혔다. 벤치 아래에도, 나무 밑에도, 심지어는 나무 위에도 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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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기 전에 돌아와라] 

스승님은 잠시 우리를 보다가 그렇게 마무리를 하시고 지나갔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멍해졌다. 스승님은 나에게 마음이 없는 게 분명하다. 티비에서 보면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고 하던데..스승님은 조금도 그런 티가 안 난다. 완전 무관심이다.  

[야! 정신 차려]
[어? 응]
[누구냐?]
[스승님]
[너..학교 다녀?]
[아니. 뱀파이어가 된 직후에 날 보살펴주고 가르쳐주셨어. 그래서 스승님이라고 불러]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그가 끄덕였다. 나는 기분이 축 쳐져 돈이고 뭐고 다 귀찮아졌다. 그러나 집에서 새로운 피를 가져오길 기다리는 아줌마와 배고프다고 떠들어대는 멍청한 위 때문에 가서 받아야만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힘겹게 내딛어 뱀파이어 주민자치센터가 코앞에 보일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그도 웬일인지 조용히 따라왔다.
 



뱀파이어 주민센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현재는 20층짜리 건물인데 최근 리모델링을 하여 미래형 건물로 탈바꿈했다. 멀리서보면 대기업 건물처럼 번쩍이는 자재를 붙였고, 중간 중간에는 구멍을 뻥 뚫어놓아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한강 둔치에 놀러오면 꼭 이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지금처럼 밤이 되면 빨강, 파랑 네온사인이 휙휙 건물 외관을 쳇바퀴 돌듯이 지나가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환호성이 나온다. 솔직히 저런데 쓸 돈 있으면 나같이 최하층 뱀파이어에게 수당이나 더 올려주면 좋겠다. 

[여기서 기다릴까?] 

내가 계단을 올라가려고 발을 내딛는데 그가 말했다. 뒤돌아보니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아 한강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는 멘트를 날려주었다. 그가 사람들이 가득한 곳으로 가는 걸 잠시 본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곳의 문은 인간들에게는 열리지 않는다. 문손잡이에 뱀파이어 인식 시스템이 붙어있어 그들이 손을 대면 문이 잠겨있는 걸로 느껴지게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문을 밀자 매끄럽게 열리며 클래식 음악이 나를 반겨주었다.  

[몇 층에 볼일이 있으신가요?] 

눈 튀어나오게 아름다운 여자 뱀파이어가 민망할만한 길이의 짧은 치마를 입고 서서 인사를 했다. 12층 복지과라고 중얼거리자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고 그녀는 밖에 서 있는데 오늘 내가 입고 온 옷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웅크렸다. 장애 수당 받으러 가는데 차려입고 가기도 뭣하고, 직원과 말이 잘 되면 주민 수당도 한꺼번에 탈 예정이라 최하 빈민층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너덜너덜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니 그녀의 미소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12층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문이 열렸다. 항상 얼굴을 보지만 이름이 외워지지 않는 담당자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시영씨, 반갑습니다]
[아..네..안녕하세요] 

쭈뻣쭈뻣 그를 따라 방문객 전용 창구로 가 장애 수당 청구 서류를 작성하고자 펜을 들었다. 고개를 들어 곁눈질을 하니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어서 하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검정 사인펜의 뒤꽁무니를 잘근잘근 씹으며 칸을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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