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월은 송이버섯의 달이다. 어찌나 실하고 맛난지 자연 송이를 막 캐서 숨을 한번 맡아보면 그 느낌이 평생 간다. 특히 캔지 2-3시간 안에 불에 구워 기름장에 찍어먹으면 쇠고기는 저리가라요, 최고라고 칭송을 받는 뱀고기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의 특급 요리가 된다.

[할베가 요즘 안 보이시네요?]
[버버리야 산에 갔지. 낼이나 되야 올까..]
[산이요?]
[소백산 자락 말이야. 거기가 송이 많기로 최고지]

  할매들은 입맛을 다신다. 이맘때의 자연산 송이는 베테랑  송이꾼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데, 학마을 최고 송이꾼이 바로 버버리 할배다.

[그거 최상품은 몇 십만 원 간다던데요. 돈 많이 버시겠어요]
[버버리는 가을에 돈 벌어 나머지를 놀아]
[버버리 죽고 나면 이제 송이 먹을 일도 없을 꺼구만]
[지난해엔 산삼도 캤어. 아주 실한 게 물건이었지]

  할매들은 새참을 다 드신 후 한 분씩 일어서며 밭일 나갈 채비를 하셨다. 나 역시 출판물 작업을 마저 하려고 같이 길을 나섰다.

[버버리가 학 알도 곧 잘 가져왔는데..]

  청산 할매는 뒷짐을 짓고 엉거주춤한 포즈로 호미를 집어 드시더니 혼잣말을 하셨다.

[그 할베가 학 알도요?]
[권선생도 꽤 해봤잖아. 구들댁 말이 막내가 최고라고 하던데..]
[네..그랬었죠]

  어르신들에게 송이가 최고라면 예전에는 학 알이 아이들의 로망이었다. 계란도 넉넉히 먹기 어렵고 그나마 부치면 어른들에게 먼저 가니 아이들은 알아서 영양보충을 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우리 마을은 학들이 먼저 찾아와 진을 치는 일명 “학나무”들이 많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눈만 돌리면 학이었으니까. 학이 많다는 말은 알도 넘친다는 뜻이다. 보기에는 커도 깨서 먹으면 달걀 맛이 나서 우리는 종종 냄비를 들고 학나무 근처에 집결했다. 먼저 바닥을 살펴본다. 학나무는 어른들이 숭상하는 영험함 때문에 풀 한포기 안 건드리는 지역이라 장딴지까지 올라오는 잡초가 무성했다. 나무에서 알을 낳고 자리를 잡으려던 학이 알을 잘 못 건드려 떨어뜨렸을 때, 운 좋게 풀 위에 떨어지면 깨지지 않으니 그런 것은 말 그대로 거저 얻는 상품이다.

[형욱아, 니가 가봐라~]

  풀을 다 뒤져도 건질 게 없을 때는 직접 학나무를 타야하는데 제일 잽싸기로 유명한 사람이 나다. 하여 대부분 내가 나무를 타고 나머지 아이들은 커다란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대기했다. 학나무는 독한 학 똥 때문에 고사 직전으로 껍질도 벗겨지고 상태가 안 좋아 발을 집고 오르기에 수월하다. 냄비를 머리에 뒤집어 쓴 후 살금살금, 조심조심 다가가는데도 학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다만 높이 날아가지 않고 나무 근처를 맴맴 돌며 소리를 낸다. 수십 마리의 학이 머리 위에서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하면 참 아찔하다. 나는 얼른 학 알을 몇 개 접수하고 내려간다. 냄비에 담아 빨리 사라지면 다행이고, 조금만 늦어 지체하면 학 똥을 덮어쓰거나 달려오신 동네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게 순서다.

[이놈의 자식들~게 서라]

  버버리 할배의 아버지는 학을 지키는 역할도 맡으셔서 우리와 곧잘 달리기를 하셨다. 나는 10번에 7번 정도는 학 똥도, 어른들도 피했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커다란 토란잎을 쓰고 있어도,  떨어지는 똥에 머리를 맞으면 똥독에 며칠을 끙끙대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맛이 바로 학 알이다. 삶아 먹어도, 부쳐 먹어도, 날로 먹어도 그 맛이 참 일품이다.  

  그 시절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학 알이 먹고 싶어졌다. 지금은 “백로 도래지”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먹으면 벌금을 물어야할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지만 한 개쯤 몰래 먹는 것도 추억이 되지 않을까..하는 못된 생각에 냄비와 토란잎을 들고 길을 나섰다. 이미 출판물은 머리 속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기억을 더듬어 학나무를 찾아갔다. 이미 고사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무는 여전히 고사 직전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을 보내며 토란잎을 머리에 동여매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오~역시~]

  가을이라 알이 없을 것을 짐작하며서도 학마을만의 특별함을 믿었다. 둥지에서 학 알을 발견한 순간에 웃음이 나왔다.

[내..내..려..와..하..학..이..시..싫..어..해]

  나무 아래쪽에서 버버리 할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송이를 따오셨는지 채집통을 가로로 맨 채 나를 올려다보신다.

[할배~조금만 기다리세요~]

  오케이 사인을 의미하는 손짓을 보내고 학 알 두개를 집어 주머니에 넣은 후 내려왔다.

[한 개 드릴까요?]

  학 알을 꺼내 문지르며 말하는데 버버리 할배는 고개를 흔드신다.

[도..돌..려..줘..]
[청산 할매 말이 가끔 드신다면서요?]
[그..그..건..하..한..개만..]

  학이 돌아왔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깜짝놀라 우리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른 나무 밑에서 숨을 고른 뒤 나는 집으로, 버버리 할배는 정자로 걸어갔다.

[할매~학 알 드세요]

  청산 할매를 찾아 부엌으로 들어가 학 알을 꺼내놓았다.

[지금은 배부른데..나중에 먹을 테니 냉장고에 둬]

  한 개는 청산 할매네 두고 한 개만 가지고 돌아왔다. 바로 해먹을까 하다가 그제서야 출판물이 생각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메일을 열어보니 독촉의 글이 와있다. 꽁지에 불붙은 사람 마냥 한동안 코를 박고 일했다.

[계세요~]

  약간 서늘하다 싶은 가을 밤바람이 불어와 벌써 해가 졌음을 느끼던 차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가니 옷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이 보였다.

[벌써 드셨나요?]
[네?]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주저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인간이 아님을 느꼈다. 학마을 살이 반년이 다 되가니 이렇게 먼저 알기도 한다.

[알을 드셨나해서요]
[아직 안 먹었습니다. 왜요?]

  여인은 크게 안도하는 얼굴로 대청마루에 앉더니 품에서 돈을 꺼냈다.

[남편이 몸이 안 좋아 학 알이 필요해요. 돈을 드릴 테니 팔아주세요]

  얼핏 보아도 제법 많은 돈이다. 학 알이 영험하다거나 뭔가 엄청난 효능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는데 민간요법으로는 꽤 중요한가보다.

[저도 공짜로 얻었으니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만..부군의 병이 무엇이기에 학 알이 필요하신지요?]

  여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고 얼른 입을 막았다. 여인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아..알겠습니다. 그럼 드릴 테니 잠시 기다리세요]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입을 막은 채 웃었다. 남편이 발기부전이라 필요하다고 하니 웃음이 터질 수밖에..학 알이 도움이 될지는 미심쩍지만 가지고 나왔다.

[멍멍]

  장군이가 언제 왔는지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뒤로 넘어지며 학 알을 떨어뜨렸는데 장군이가 입에 물고 수로로 뛰어들었다. 여인은 황망해하다가 쫓아가고 나 역시 부엌문을 잡고 일어나 달려갔다. 장군이는 그 안에서 우리를 쳐다보며 학 알을 깨뜨려 속만 먹고 껍질은 버렸다.

[이럴 수가...]

  여인은 어이가 없는 듯 주저앉았다. 나 역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어 처다만 보았다. 그럼 장군이 놈도 발기부전이었던가? 그래서 자기 동료들이랑 안 놀고 물고기나 잡았던 건가? 1분 정도쯤 흐르자 여인은 체념을 한 듯 일어섰다. 말없이 수로를 건너뛰더니 사라진다. 문득 대청마루에 두고 간 돈이 생각나 돌려줄 요량으로 돈을 집으러 갔더니, 나뭇잎만 한 가득이다.

[너구리야, 그건]
[네?]
[학 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
[흠..하지만 할매에게는 안 왔잖아요]
[권선생하고 내가 같나?]

  어쨌든 청산 할매에게 맡겨둔 학 알은 무사하여 돌 판 위에 구웠다. 마침 버버리 할배가 주고간 자연산 송이도 있어 노릇노릇 구워 기름장에 찍으니 이 아니 좋을쑈냐다.

[장군이 놈은 오늘 호강했네요. 학 알도 먹고..]
[밤새 울겠지, 쯧쯧]

  할매 말에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역시 학 알이 발기부전에 특효약인 게 사실인가 보다. 오늘밤 혼자 보낼 장군이가 불쌍하다는 생각과 함께 할매 앞으로 학 알 프라이를 살짝 옮겨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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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증조부는 고종에게 교지를 받으신 분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재무장관 정도의 자리인데 첩첩산골 출신이니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격이다.

[암~ 권선생네 땅 안 밟고는 시내에 못 간다고 했지]
[구들댁이 좋은 데 시집왔다고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친정이 돈은 없어도 퇴계 이황 선생..그 종손 가문이야]

  구들댁이란 우리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다. 왜 하고 많은 말 중에 구들댁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어르신들은 변함없다. 어머니가 시집올 당시에는 신랑 얼굴 한 번 못 보고 정략결혼을 한 셈인데, 그 결혼의 주목적이었던 많은 논과 밭들이 지금은 한 평도 없다. 이래서 화무십일홍이라는 고사가 맞는 말이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첫 주에 정자에 모인 어르신들이 이런 대화를 하는 이유는 주말에 아버지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시골은 어느 집에 며칟날이 제사고, 며칟날이 누구 생일인지 훤하게 꿰고 있어, 그런 날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므로 다들 그 이야기 중이다.

[음복 음식은 뭐 담을까요?]
[문어랑 전 정도만 돌려. 지금이야 먹을 게 없어서 기다리는 게 아니니까]

  낮에 내려온 둘째네는 내가 사다 논 재료로 부지런히 제수 음식을 마련하여 12시가 땡치자 제사상을 차렸다. 예전처럼 거창하게 많이 준비하지는 못하고 기본적인 나물, 수산물, 과일 등등이다. 그래도 힘든지 둘째네는 피곤한 기색이다.  

  음복 음식은 내가 돌린다. 어느 집에 누가 있고, 어느 집이 비었는지 전부 꿰고 있는 내가 오밤중에 심부름하기엔 적합하니까. 그래서 새벽달을 보면서 커다란 쟁반에 음식 접시를 들고 길을 나섰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 형들이랑 음복 음식을 들고 돌아다니던 일이 생각난다. 그 때는 지금보다 집들이 더 많아 칠형제가 각각 나누어 가지 않으면 빨리 돌아오지 못할 정도여서 특히 막내인 나는 잽싸게 뛰어 다녔다. 제사를 지내는 때가 아니면 일 년 내내 동태전이나 문어는 맛볼 수  없으니 형들이 먼저와 다 먹어버리지 못하게, 또한 친구들에게 싸가지고 가서 자랑 할 몫을 챙기려면 빨리 집에 도착해야한다.

[전 하나만 줘~]

  어리기 때문에 더 잘 보였는지는 몰라도 항상 음복 음식을 달라는 이상한 존재들이 따라다녔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 마음에 쳐다보지도 않고 전을 휙 반대쪽으로 던지면 바람이 불면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고 이어 웃음 소리와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전 하나만 줘~]

  청산 할매네를 지나 버버리 할배에게 가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다고 해야 할까, 우습다고 해야 할까, 그 목소리 덕분에 미묘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급한 일도 없어 고개를 돌려 마주보았다.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어딘가 균형이 부족한 듯해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종종 나타나는 그 아가씨가 보기에 좋다.

[이거나 먹어라~]

  나는 잘 만들어진 동태전을 숲으로 던졌다.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는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한 듯 엎드려 뛰어갔다. 그런 놈들을 몇 명쯤 만나며 마을 입구에 있는 슈퍼 주인 할매네까지 모두 음식을 돌렸다.

[삼촌, 시골이 좋아요?]
[음..나쁘지 않아]
[나도 여기 와서 살까요?]

  이제 6살이 되는 조카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한 때는 연못이 있었던 마당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별이 많은지 이곳이 정녕 대한민국인가 싶은 마음을 조카도 느꼈나보다. 아름다운 하늘을 한참 보고 있자니 조카가 무릎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만약 내가 결혼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런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다. 사방에서 풀벌레 소리가 난다. 조용조용, 시끌시끌. 교향곡을 만들 듯이 높낮이와 장단이 존재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딱 좋은 이 밤이 계속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자니 갑자기 안개가 몰려온다. 향을 피운 것처럼 스멀스멀 퍼지는 것이 수로도 보이지 않고 바로 옆집도 가렸다. 마치 나와 조카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듯 느껴진다.

[뗑그랑..뗑그랑]

  멀리서 희미하게 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뒤이어 따라온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들었던 구슬픈 앓는 소리도 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보았던 꽃상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보..여보..나는 이제 어떻해요. 나 어떻게 살아요]
[구들댁~정신 차려. 애들 생각해야지]

  꽃상여가 한 발씩 천천히 가는 동안 젊은 시절의 어머니가 뛰어와 붙잡고 매달렸다. 가지 말라는 듯, 목 놓아 우셨다. 지금보다는 젊은 청산 할매가 어머니를 붙잡고 떼어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게다가 꽃상여 역시 가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한스러운지 집 앞에 선 채로 부르르 흔들린다.

[어서 가서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리시게]

  내 옆에서 도토리묵 장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안개가 가득하여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그의 목소리다. 나는 조카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어머니도, 청산 할매도, 상여를 진 남자들도 모두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오랜만이에요. 제가 벌써 35살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나이랑 같네요]

  이제는 내가 지킬 테니 쉬시라는 말과 함께 꽃상여 안으로 팔을 넣어 관을 어루만졌다. 관은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크게 들썩이더니 점차 가라앉았다. 마침내 관이 조용해지자 앞잡이가 다시 종을 울린다.

[가세~가세~북망산이 저 곳이니~]

  상여를 맨 남자들의 소리가락이 꽃상여의 움직임과 함께 천천히 사라져갔다. 오열하던 어머니도, 젊은 시절의 청산 할매도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삼촌, 뭐해요?]

  언제 깨어났는지 조카가 내 팔을 잡아 당겼다. 눈가를 닦으며 보니 안개도 다 사라져 여전히 칠흑의 밤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꽃상여는 제삿날이면 이곳을 지났는데 그동안은 우리가 없어 달래주지 못하여 만날 때까지 되돌아 온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와 같은 35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상여를 만났다는 내 무심함에 눈물이 솟구친다. 너무 어려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친구에게는 맛있는 음식 안 준다며 자랑하고 돌아다녔다. 그런 내가 오늘에야 우리를 두고 떠나지 못하던 아버지의 슬픔을 알았다.

[그냥..아버지 생각을 했어]
[삼촌도 아빠가 있어요?]
[그럼..있지, 너처럼]
[어디 있어요?]

  나는 말없이 하늘을 가리켰다. 6살 조카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내 품에 안겼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니 작게 속삭인다.

[우리 아빠 빌려줄까요?]
[왜?]
[삼촌, 지금 외롭잖아요]

  뼈가 사무치고 등골이 하얗게 탈색할 정도로 내 깊은 마음이 외로워하고 있음을 이제야 느꼈다. 이 작은 아이도 아는 것을 이제야..
  오늘 밤엔 아버지 꿈을 꾸고 싶다. 만나면 안아달라고 해야겠다. 

----------- 

글쓴이의 한마디: 최근에는 꽃상여 보기가 참 어려워요. 작년에 우연히 한 시골에서 보긴 했는데.. 화려함이 많이 줄었습니다. (사진출처: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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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술 2009-09-07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때때로 외롭다는 걸 모르다가..누군가의 지적으로 알게될때가 생깁니다...주인공도 그렇군요
 

  눈이 까무룩 감겨 방에도 못 들어가고 대청마루에 엎어졌다. 수면제를 탄 듯 스르르 몸에 수마가 밀려온다. 머릿속에는 해야 할 출판물과 잡초 좀 뽑고 싶다는 생각들이 지나가는데 몸은 이미 수면 상태라 손끝하나 안 움직인다. 희안하게도 정신만 또렷하다고 할까. 이게 과연 잠든 건지 아닌 건지 신기하다.

[멍멍 멍멍]

  귓가에 장군이 소리가 들린다. 한 쪽 눈만 간신이 떠서 쳐다보니 이 녀석은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연못 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고 노는 라 정신이 없다. 뭐, 먹지만 않으면야 별 일 없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싶어 웃고 말았다.

[어이~]

  나를 부르는 지, 장군이를 부르는 지 모호한 소리가 들린다. 봄에는 도토리묵 장수였다가 여름에는 개 장수가 된 남자였다. 그는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호숫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다. 이제 가을이 다가오니 물고기 낚시꾼으로 변신하나보다. 그는 낚시에도 특기가 있는지 은색 물고기들이 계속 잡혀 올라온다. 아무리 물 반, 고기 반이라도 넣는 족족 바로 무는 건 신통한 일이다. 낚싯줄에 걸려 하늘로 날아오르는 물고기가 달빛에 반사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그 멋진 광경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몸이 서서히 풀리는지 손이랑 발이 움직여진다. 대청마루에 반듯이 앉아 팔 다리를 주무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 세상이 무섭지 않은지 호수 옆에 장작을 쌓아놓고는 낚은 물고기들을 굽는다. 노릇노릇 앞뒤로 보기 좋게 구워지는 게 겨울엔 생선구이 장사를 해도 대박으로 돈을 벌겠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개 장수일은 언제까지 해요?]
[음..다음 주 정도까지만..]
[그럼 그 다음엔?]
[글쎄..아직 모르겠소]

  그가 한 입 가득 살점을 뜯어먹으며 대답을 하니 안 그래도 짧은 대화가 더 짧아졌다. 나는 먹기가 겁나 그저 바라보았다.

[저도 먹고 싶어요]

  아가씨가 수로를 훌쩍 넘어 다가왔다. 도토리묵 장수는 놀라지도, 쫓아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 마당의 주인이 자신인 듯 행동하니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건 먹으면 배탈 나는데..]
[집에 개망초 잎 말린 게 있으니 괜찮아요]

  둘 다 걱정 없다는 듯이 열심히 먹는다. 양동이 가득 든 물고기가 차례로 구워지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어릴 적 먹던 구운 뱀만큼이나 냄새가 유혹적이고 매력적이다. 바람이 내 쪽으로 불어오면서 그 냄새가 코를 찌른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멍멍 하는 소리에 고개를 반대로 돌려보니 어느 결에 장군이도 신나게 먹는 게 청산 할매가 또 농을 하셨지 싶다. 먹어 탈이 날 것이면 장군이가 저렇게 덤비겠는가. 

[사람이 먹기엔 안 좋은데..]

  도토리묵 장수는 마치 자신은 사람이 아닌 양 한마디 한다. 나는 손에 든 노릇한 물고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 입 베어 물었다. 어차피 백수인 거 병원에 가도 좋으니 일단 먹고 보자는 마음도 조금 들었고, 사실 그 보다는 배고프다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아아, 이 맛은 처음이다.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어머니도 이런 생선 구이는 못했다. 대체 어떤 물고기이기에 이런 맛이 나는 걸까..말 그대로 먹고 죽어도 좋을 맛이다. 야들야들한 살점 또한 입 안에서 씹을 필요도 없게 살살 녹아내린다. 만약 할매 말을 듣고 안 먹었다면 나는 이런 맛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죽을 뻔 했다. 하여 먹고 또 먹고..먹고 또 먹고..도토리묵 장수는 계속 물고기를 잡고, 아가씨는 굽고, 나와 장군이는 먹었다. 새벽이 오도록 우리는 신나게 먹었다.

[멍멍 멍멍]

  갑자기 장군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짓는다. 그와 동시에 땅이 울렸다. 지진이다. 이번엔 이 근처가 진원지인지 제법 세다. 도토리묵 장수와 아가씨는 서둘러 가버렸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연못을 바라보니 물이 출렁인다. 물고기들은 우리가 다 잡아먹어 텅 비었지만 수면은 여전히 은색 빛이 가득하다. 무섭게 자라 있던 풀들이 꺾이고 연못의 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조금씩 빠진다.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뱃속이 아파온다.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려다가 그 나마도 못 움직일 정도로 심각하게 아프고 당겨 마당에서 바지를 내렸다. 새벽이라 아무도 없으니 다행이다. 뽕뽕..하나씩 둘씩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변태라서가 아니라 뱃속을에서 나오는 배설물의 소리가 이상하여 왠지 배설물스럽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멍멍 멍멍]

  장군이는 여전히 짓는다. 그것들은 내가 밤새 먹은 은색 물고기였다. 전혀 소화가 되지 않은 채, 입으로 조각조각 들어간 것들이 장을 거치며 다시 합체를 하였는지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 심지어는 파닥거리기도 한다. 장군이는 갑자기 물고기들을 물더니 사라지고 있는 연못에 넣어주었다. 나도 얼른 옷을 추켜 입고는 같이 물고기를 던져 넣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태가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했지]

  겨우 다 보내고 연못마저 사라진 뒤에야 그대로 주저앉아 땀을 닦았다. 조용히 다가오셔서 씨껍데기 막걸리 한 사발을 내미는 청산 할매.

[그 놈들은 먹어봤자 배앓이만 하다가 도로 나와]
[할매는 어떻게 아세요? 드셔보셨어요?]
[살다보면 다 아는 법이야, 내 나이가 몇인데.. 꼭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남]

  할매는 내 잔을 뺏어 시원하게 한 잔 들이키고는 장군이와 함께 돌아가셨다. 아침 햇살이 이제는 맨땅이 된 마당을 환하게 비춘다. 안개도 걷혔고 다른 때처럼 잡초들도 제자리를 찾은 모습이 반가워서 잠시 동안은 뽑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뭐든지 항상 있는 것 보다는 없어졌다가 찾았을 때 더 소중한 법이니까. 빙그레 웃으며 돌아서는 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선배~밤 새 배가 아파서 고생하다가 설사를 얼마나 했는지..변기 안 막힌 게 다행이에요]

  운좋게 물고기 재생산 경험은 하지 않았나보다. 다음에 오면 맛있는 것을 대접해주겠다고 말한 뒤 통화를 마쳤다. 저 멀리서 아저씨~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괜찮았는지 물어보아야지..하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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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이상한 느낌에 깼다. 방안이 더워서 죽부인을 끌어안고 대청마루에서 자고 있는데 바닥이 울렸다. 지진이다. 아주 심하지는 않으나 무시하기도 어렵게 흔들리니 내가 사는 곳이 불안전한 지구의 한 귀퉁이가 맞다. 잠시 동안 땅의 울림이 계속되다 마침내 멈추었을 때 마당에 호수가 생겼다. 놀랍게도 작은 연못이다.

[진도 3이었데요. 소백산 근처에서 발원했다는 데 별일 없으세요?]

   아침 일찍 도착한 후배가 라디오에서 들었다면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는 대청마루에 앉자마자 누런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 건네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선배네 집은 멋지네요. 운치도 있고. 이런 연못이 있다는 말 안했잖아요]
[아..그게..]

   이 사태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멋있기는 하다. 마당은 잡초들의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금 원상복귀가 된데다가 나무들도 색색의 모습이고 그 한가운데에 약간은 묘한 느낌이 드는 연못이 동그랗게 있어 마치 무릉도원 같다. 게다가 호수 안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물고기들이 뛰어놀아 반짝반짝 수면이 빛난다.

  후배는 다른 지인들의 소식을 전부 전한 뒤, 계약서에 사인을 받고는 바로 갔다. 내 손에는 계약금이 적힌 수표가 있다. 운칠기삼..그것이 이번엔 돈과 더불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운 연못까지 데려왔다. 아아, 과연 언제까지 이 운이 가려나. 진짜 로또를 살까보다.

[저 세상 것들이 왔구먼]
[네?]

  청산 할매는 구경 와서 연못을 바라보시더니 쯧쯧 혀를 차셨다. 할매는 여러 가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전부 어디서 배우신 건지 그런 학교가 있으면 나도 다니고 싶다.

[권선생은 인기도 많아. 이리 맨날 온갖 놈들이 따라다니기도 어려운 법인데..]

  할매의 표현에 따르면 이 호수는 지진으로 지옥인지 천당인지의 문이 열려 우리 세계로 넘어온 것이란다. 하여 본 적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이지만, 그 안에 있는 건 맛있어보여도 먹어서는 안 되다고 하신다. 생각해보니 내가 음식 좀 먹여 보내려고 부엌에 들어갔다 나오니, 후배가 연못가에 앉아 안을 들여다보다가 쩝쩝 소리를 내며 입을 닦았다. 그냥 두어도 될까 걱정된다.

[그냥 둬]

   할매의 간단한 말에 마음이 상했다. 그래도 그 후배는 나를 생각해 일을 가져다 준 은인인데 이런 문제를 만들었다는 게 미안하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저 세상의 것을 먹을 리도 없는데..이런 저런 생각에 두통이 몰려왔다.

[참으면 심해지니까 이 약 먹어]

  할매는 항상 가지고 다니시는지 타이레놀 한 알을 손에 꼭 쥐어주고는 돌아가셨다. 갈수록 깊어지는 통증에 냉큼 먹고는 호숫가에 앉았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한 번만 더 지진이 생기면 이게 사라지지 않을까싶다. 사실 이미 이치에 맞는 않는 일이니 새삼 제대로 되겠냐는 자조적인 마음도 들지만..

[아저씨~]

  수로 너머에 지난번의 그 아가씨가 나타났다. 대꾸하기도 귀찮아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가도 되요?]

  하기사 이제 뭐가 더 문제가 되겠냐 싶어 들어오라고 손짓 했다.

[무슨 일로 왔니? 청산 할매한테 들키면 일 날 텐데..]
[냄새가 나서요. 저거..맛있겠네요]

  아가씨는 해맑은 얼굴로 반짝이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입맛을 다셨다. 연못에는 여전히 은색의 물고기들이 텀벙거린다. 나는 둔한건지 맛있겠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안 드는데 후배나 이 아가씨는 그런가보다. 정말 먹고 싶다는 표정이다.

[저거 먹으면 큰일 난데. 단념해]
[에이..]   

  아가씨는 여전히 입맛을 다시다가 연못 탐방에 나섰다. 조그만 연못에 탐방이라는 말도 참 멋하지만 그럴 정도로 시시각각 주변이 변하는 중이다. 겨우 몇 시간 지났는데 처음 보는 풀들이 자라난다.

[저건 닭의장풀이고, 그 옆에는 사위질빵이에요]
[진짜 그런 이름의 풀이 있어?]
[그럼요. 아름다운 대자연에 뭔들 없겠어요. 근데 이건 내가 붙인 게 아니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에요. 저렇게 아름다운 애들한테 닭의장풀이랑 사위질빵이라니...좀 그렇잖아요. 쯧쯧]

  닭의장풀이라는 작명이 누구 솜씨인지 참 웃기다. 얼핏 보면 파란 꽃잎이 꼭 제비꽃 같아 보이는데 희화하자면 장 닭의 벼슬이 양 옆으로 발라당 누웠다. 사위질빵 꽃은 특이하달 것도 없는 흰색인데 일반적인 꽃잎 사이에 길쭉길쭉하니 무채를 썰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나도 아는 개망초다. 다른 것들은 기억 못해도 이 풀의 이름은 잊지 못하는 것이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재미있는 유래를 알려주셨다. 본래 개망초는 우리나라 풀이 아니라 외국의 곡류에 섞여 들어와 번식하게 되었는데 논과 밭에서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나 화가 난 농부가 개망초를 집어던지면서 “망할 놈의 풀”이라고 말한 데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셨다. 맞는 건지는 모르지만 각인이 된 듯 몇 십 년이 흘렀는데도 생각 난다.

[너, 개망초에 대해서도 알아?]
[그럼요. 감기, 위염, 장염, 설사에 특효약이에요. 아주 좋은 약초죠]
[넌 참 묘한 데가 있어. 사람도 아니면서..]
[그래서 아저씨가 절 마음에 들어하시는 거잖아요]

  아가씨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메아리가 치듯 연못 주변으로 소리가 흘러다닌다. 거참 무릉도원도 아닌데 이건 또 웬 안개인지..정말 우리 집 마당이 어디로 가려는 걸까 걱정 된다.

[아저씨~그냥 즐기세요. 다 하늘의 뜻인데..어쩌겠어요, 연못을 가지는 것도 아저씨만의 복인가 보죠. 도시에선 돈 주고 만든다던데..]

  내 표정이 별로였는지 그런 위로를 하고는 뽀르르 사라졌다. 이어 청산 할매가 나타났다. 그 아가씨는 겁나지 않는 듯 행동해도 실상 할매가 싫은 것이다.

[자꾸 이상한 것들을 불러들이지 말아]
[그냥들 오네요. 휴]
[기운 내. 젊은 사람이 요깟 일에 코 빠져서야..권선생~]
[뭔데요?]
[쓸데없는 음식은 먹지 말아]

  이 미스터리 호수는 밤이 되어서도 사라질 기미가 없다. 오히려 첨보는 벌레들까지 날아오니 조만간 밀림이 되지 싶다. 풀이 엄청 자라 무릎께를 살짝 넘는다.

[권선생, 고생하네]
[이거 씨껍데기 막걸리야, 속 탈 때 한잔 들이켜]

  마을 어르신들이 전부 마실 오셨다. 그분들 중 누구도 이 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대사건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도대체 학마을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놀랄까. 새삼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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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 닭의장풀과 사위질빵 꽃 사진이에요(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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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을 설치하려고 신청했다. 과연 이 마을에서 인터넷이 가능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기사가 와서 확인해준다고 하니 기대하는 마음이 뭉클뭉클하다. 소백산에 둘러싸인 학마을은 전기랑 수도 빼고는 핸드폰도 뚝뚝 끊어질 정도로 이래저래 어려운 곳이라 인터넷은 언감생심이었고, 또 금방 돌아갈 생각에 짐도 제대로 가져오질 안았다. 하지만 몇 달을 살아보니 학마을이 마음에 드는데다가 어쩌면 일자리가 생길 것 같아 아예 이곳에 눌어붙자고 결정했다. 그것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영주 시내의 초고속 인터넷 대리점에 전화를 건 이유다.

[권선생, 이제 진짜 선생님이구먼]
[아직 결정 안 났어요]
[이 근방에 권선생 같은 이가 또 어디 있다고.. 꼭 될 테니 걱정 말고 기다려봐. 내 술이나 한잔 받으시게]

  슈퍼 주인 할매는 응원의 말씀을 하시며 새로 나온 막걸리를 따라주셨다. 씨껍데기 막걸리라고 부석 양조장에서 첫 생산한 제품이다. 한 입 쭉 들이켰더니 시원하고 쌉싸래한 맛이 위까지 전달돼 행복하다.

[할매, 이거 아주 좋아요]
[버버리도 그러더만. 그 양반이 좋다고하면 진짜 좋은 거야]

  우리는 더위를 피한다는 핑계로 유유자적 놀며 씨껍데기 막걸리를 두 병 마셨다. 기분도 좋고 약간의 취기도 더해져 나는 슬렁슬렁 밭 사이를 걸어 다녔다. 지난주에 영주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응시 해두었는데 아직 답변이 없다. 진짜 슈퍼 주인 할매 말대로 이 근방에 나만한 선생이 없다면 되겠지만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모르니 100% 장담도 어렵다. 해서 나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나날이다.

[뭐하세요?]
[깻잎 장아찌 할라고]

  정자 밑 시원한 그늘에서 청산 할매가 빨간 고무 대야를 놓고 일을 하시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또 다른 대야에는 한가득 물이 담겼고 그 옆에는 막 딴 깻잎이 포대자루로 한 가득이다.

[할매, 실이랑 바늘은 왜요? 옷 수선하시려고요?]
[아니. 깻잎 꼬매려고]
[네?]
[권선생은 서울서 살아 모르겠네. 여기는 깻잎 장아찌를 이렇게 해]

  청산 할매는 깻잎을 20장 정도씩 집은 후 명주실을 낀 바늘을 두 번 통과 시켰다. 단단히 묶어 이로 자르니 마치 문방구에서 파는 종이 다발 같아보였다.

[소금물에 잘 담가두면 숨이 푹 죽고 나중에 꺼낼 때도 일일이 펼 필요 없어서 좋아]

  아, 이런 것이 선조의 지혜다. 혼자 하시는 폼이 언제 끝나실까 싶게 많아 결국 나도 앉아서 깻잎 꿰매기에 동참하였다. 잠시 후에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늘어나더니 결국 8명의 거대 모임으로 변신했다. 어느 분이 가져오셨는지 씨껍데기 막걸리도 같이 마시며 농도 주고받으니 시간이 참 빨리 갔다. 나는 술의 힘을 빌어 깻잎과 물이 가득 담긴 대야를 번쩍 들고 일어나 청산 할매네 마당에 가져다주었다.

[할매, 이걸로 끝이에요?]
[아니~ 닷새 후에 화장해야지]
[화장?]
[깻잎을 뭔 맛으로 그냥 먹어. 여자들처럼 얼굴에 양념칠 해야지]

  청산 할매의 유머는 확실히 고차원이다, 마을에서 제일 젊은 내가 못 따라 갈 정도니..나는 큰 소리로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 날이 한 여름이라고 어찌나 더운지 매일 등목을 해야 한다. 나도 이제는 살이 타서 살짝 구릿빛으로 가고 있으니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믿을까 싶다. 등목을 한 차례하고 대청마루에 죽부인을 안고 누웠다. 대나무의 찬 기운과 함께 잠이 솔솔 몰려온다.

[따르르르릉..따르르르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오랜만에 울린다.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았다. 교사 임용에 떨어졌다고 누군가가 전해준다, 그것도 매우 친절하게. 알았다는 말로 웅얼거리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바로 잠으로 빠져들었다.     

[운칠기삼이야. 더 좋은 일 생길라고 그러는 거니까 기다려봐]

  저녁을 얻어먹으러 청산 할매네 가서 결과를 알려드렸더니 그렇게 말을 하신다. 운칠기삼이라..시골 학교 교사 임용도 그런 게 필요할 줄은 몰랐다. 부적이라도 쓸 걸 그랬나.

[부적 같은 거 믿을라치면 차라리 산신한테 빌지]
[아~산신..]

  봄에 갔었던 허물어진 사당이 기억났다. 한 때는 그곳에서 자식들 시험이나, 병수발에 지친 아낙들이 매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나름 효험이 좋다고 하는 데 이제는 찾는 이가 없어서 황폐하다.

[거기 다 무너졌던데요]
[그래도 기도 빨은 좋아]
[할매는 불교 신자면서 산신한테 기도해요?]
[종교는 차별하면 안되지]
[그럼..교회는요?]
[게도 가봤어]
[성당은요?]
[응]
[신은 다 똑같은 건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 싸우는 거지]

  할매의 신앙심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주적인 포용력을 지니신 분이라 대범하고 강단 있으신 것이리라. 결국 부적은 없었던 일로 하고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일이 지나 깻잎을 화장해야할 날이다. 청산 할매는 오전 밭일을 마치고는 나를 부르셨다. 할 일도 없는 백수에게 여자 일, 남자 일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을 고쳐먹고 마당에 들어섰다. 부지런한 할매는 깻잎을 건져내는 중이다.

[엇!]
[왜?]
[개구리에요!]

  깻잎을 꺼내는데 뭔가가 톡 손바닥 위로 올라섰다. 보니 푸른색의 개구리다. 우리가 어릴 때는 거의 매일 잡아 구워 먹었던 바로 그 개구리였다. 청산 할매는 개구리를 잡아 수로로 던졌다. 한 번에 퐁당. 농구를 하셔도 잘하시겠다.

[권선생 그거 아나?]
[네?]
[저 개구리야말로 운칠기삼일세]

  깻잎을 다 꺼내 바짝 물을 빼라고 하셔서 베보자기에 싼 뒤 발로 밟았다. 그 사이 청산 할매는 대량의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하신다. 간장이 졸아드는 냄새를 맡으며 옆에서 오도카니 지켜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저 놈은 본래 소금물에 오래 있으면 죽을텐데, 빨리 발견해서 살지 않았나. 게다가 내 덕에 맑은 수로로 이사했으니 운칠기삼이지] 

[아..그러네요]

  그제야 청산 할매의 운칠기삼이 뭔지 알겠다. 작은 미물도 저렇게 운을 타고 나는데..하는 생각에 기운이 빠져 조용히 물어보았다.

[할매..저는 어때요?]
[권선생?]
[네. 학교 떨어진 게 운칠기삼일까 해서요]
[글쎄..그건 모르지. 사람이랑 미물이랑 같나]

  할매는 새벽이 될 때까지 깻잎 화장을 시키셨다. 12시가 넘으니 허리가 뻣뻣하여 크게 기지개를 켜는데 깻잎을 담은 그릇을 건네주며 한마디 하신다.

[나도 운칠기삼인기라. 권선생이 이렇게 일도 도와주고~ 수월하다 이거지]

  진짜 나만 빼고는 모두 운칠기삼인거 같아서 기분이 더 나빠졌다. 내가 힘들여 바른 깻잎 장아찌를 몇 장 먹고는 냉장고에 잘 넣은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인터넷 설치 기사가 왔다. 그의 말로는 보건소에 전용선이 들어오니까 그걸 끌어다 쓰면 어렵지 않다고 한다. 다만 거리 비례로 설치비가 드니 문제다. 좀 더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한 뒤 돌려보냈다. 현재까지 돈은 한 푼도 못 벌고 살살 까먹고 있으니 그리 헤프게 주기엔 좀 부담스럽다. 인터넷 없이 사는 게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까 생각중이다. 학마을이 아무리 좋아도 뼈 속 어딘가는 대도시의 편리함이 배어있으니까. 이럴 때 로또라도 한 방 날려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서울에서 종종 보던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이런 저런 안부 인사 후에 시골에서 유유자적 선비 흉내를 낸다고 했더니 책을 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한다. 그는 중고등학교 학습지 출판사에 다니는데 개정 교과서용 출판물이 필요하단다. 이게 웬일이냐 싶어 덥석 물었다. 다음 주 초에 계약서를 가지고 오겠다고 한 말을 뒤로 우리의 통화가 끝났다. 이것이 진정한 운칠기삼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학교가 되었으면 다니느라 바빠서 학마을에 관심이 줄어들 것이고, 그럼 청산 할매는 혼자 힘들게 일을 해야 하고, 더불어 더 이상 장군이도 구해줄 수 없다. 모두에게 좋은 운칠기삼이 이루어지려고 교사 임용에서 떨어진 것이라 결론지으니 어이 안 좋을 수 있겠는가. 해서 다음 날 권선생 주최 씨껍데기 막걸리 잔치를 열어 어르신들을 마당에 모셨다. 불판에 자들자글 구워지는 쇠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으시던 청산 할매가 나에게 속삭이신다.

[내 말이 맞지?]
[네, 할매. 운.칠.기.삼!]

  때마침 지나가던 도토리묵 장수도 얻어먹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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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 씨껍데기 막걸리..마셔보면 막걸리 중에 최고입니다! 특히 울릉도 나리분지에    서 파는 게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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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하루 2009-09-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씨겁데기 막걸리..마셔보고 싶군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