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마을에는 어르신들의 99%가 여성이다. 나를 제외하면 버버리 할배가 유일한 남자이고, 없어선 안 되는 분이다. 송이, 석청, 산삼, 학알 등을 계절에 맞춰 가져오시니 학마을 분들이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게 버버리 할배 덕이다.
[이 꽃은 이름이 뭔가요?]
[꽃무릇이야. 상사화라고도 하지]
할배와 석청을 따러 갔다 오는 길에 진홍색의 꽃밭을 만나 몇 개 가져왔다. 야생화를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나 키우고 싶어 뿌리째 캐오느라 애먹었다. 그래도 심어놓고 보니 매력적이다. 진홍색의 꽃송이가 줄기 끝에 달렸고, 꽃잎은 심하다싶게 뒤로 젖혀져 볼수록 기이하면서도 아름답다. 청산 할매는 석청을 맛있게 드시면서 말씀하셨다.
[권선생, 오늘 부터는 해지면 밖에 나오지 마시게]
[왜요?]
할매가 뭐라고 대답하시는데 정확히 들리지 않는다. 다시 물어보려고 하니 바쁘시다며 사라지셨다.
시골은 도시보다 계절이 조금 앞서는 느낌이다. 도시라면 아직은 여름의 따뜻함이 가득 남아 있을 텐데, 학마을은 아침 저녁으로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할매가 나다니지 말라고 하셨지만 바람 쏘이고 싶은 유혹이 뭉클뭉클하다. 하여 부엉이 소리가 들리는 밤이 되자 참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선배..오랜만이에요]
[수진이?]
[네. 술 한 잔 하고 싶은데..주실 수 있으세요?]
이 늦은 밤에, 첩첩산골 학마을에, 3년 전에 죽은 후배가 버젓이 나타나니 안 놀래면 정상이 아니다. 수진이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지금 내 앞에는 평소에 보던 고운 옷차림으로 다소곳이 서 있다. 게다가 술이라고는 한 잔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청하니 더 당황스러웠다.
[술 한 잔 마시면 원이 없을 것 같은데..이렇게 세워두실 건가요?]
자세히 얼굴을 보았지만 무섭거나 요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그저 슬프고 배고픈 표정이다. 잘 알던 후배이고 죽은 게 안타까워 술 한 잔의 인심이 뭐 어렵냐..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넌방은 불꺼진지 오래라 조금 소리가 난들 나올 것 같지 않아 대청마루에 작은 상을 펴고 김치에 막걸리를 내왔다. 내 기억 속의 수진이는 한 잔만 마셔도 바로 곯아떨어지는 소녀였는데 한 병을 다 마시도록 술꾼처럼 캬..소리를 내며 벌컥벌컥 들이킨다. 어찌나 잘 마시는지 냉장고의 막걸리 4병을 싹 비웠다.
[여기서 잔거에요? 술 마시고?]
울산댁네 장 닭의 시끄러운 기상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굴러다니는 막걸리병이랑 바닥에 떨어진 김치 조각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는 아내. 퉁퉁 부은 느낌이라 거울을 보니 학마을에서 제일 얼굴이 크신 슈퍼 주인 할매보다도 더 부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번으로 끝나질 않는다. 수진이를 만난 다음날 밤에는 어머니가 오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친하지는 않았으나 한 때 동료였던 사람까지-물론 죽었다, 교통사고로-찾아와 술을 청한다. 덕분에 아침이면 얼굴이 대보름달이다.
[요즘은 막걸리 먹으러 왜 안 와? 권선생 못 보니까 심심한데..]
세제가 떨어져 사러 갔더니 슈퍼 주인 할매가 한 마디 하신다.
[밤마다 술 먹는데 낮에까지 마시면 버버리 할배처럼 술꾼 되게요]
[버버리는 먹어야 일할 힘이 나니까 그런 거고]
버버리 할배는 낮에도 술, 밤에도 술이시다. 얼마 전에 석청을 따러 위험한 바위 위를 걸어갈 때도 술을 드신 상태라 조마조마했었다. 내가 그렇게 마셨다면 몸 가누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할배는 기운차게 잘 가신다, 바위 위를 펄펄 나시면서. 덕분에 우리 부엌 귀퉁이에는 석청꿀을 담은 항아리가 존재한다. 3년간 잘 숙성하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귀한 물건은 없다고 하시니 욕심이 생겨 흐뭇하게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다음날 그 맛이 궁금해 할배를 조르니 숨겨두신 항아리를 보여주신다. 뚜껑을 연 순간 꼭 된장처럼 불순물이 가득 떠있어 실망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먹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할배는 내 마음을 아시는지 씩 웃으시고는 국자로 불순물을 밀었다. 그 순간 와..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불순물 밑에 검정에 가까운 진한 갈색 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약..이..야..우리..어..매..가..]
할배는 어렸을 때부터 천식이 심했는데 3년 숙성의 석청을 매일 먹으면서 싹 나았다고 하신다. 할배가 준 석청 그릇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너구리 아가씨가 수로 앞에서 기다리는 게 보였다.
[꿀이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멀리서부터 냄새가 다가오잖아요. 진짜 맛있겠다]
입맛을 다시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그릇을 내밀었다.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서 또 다시 감탄사. 음식이란 자고로 맛있게 음미하면 그걸 보는 이 또한 군침이 도는 법이다. 하여 우리는 수로 앞에 서서 석청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저는요?]
아내를 잊고 있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우리를 봤는지 모르겠으나 찌푸린 표정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하다. 너구리 아가씨와 있으면 아내를 잊어버리니 이런 미안한 일이 생긴다.
[오늘 밤에도 술 마실 건가요?]
[글쎄..아마도 그렇겠지]
[얼굴이 안 좋은데..그러다가 큰일 나겠어요]
내가 봐도 요즘 말이 아니다. 술에 절어서 몸에 술 냄새를 달고 다닌다.
[할매, 저 좀 살려주세요]
[꽃무릇 때문인기라]
[네?]
[그 녀석이 죽은 이들을 끌고 오니 마음 약한 권선생이 술 안주고 배기나]
[그럼..꽃을 싹 뽑아버리면 되겠네요]
[꽃무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한번 뿌리 내린 곳에는 계속 자라거든. 그 꽃이 활짝 피면 술 한 잔 청하는 망령들이 나타나서 지옥꽃이라고 부르는거야. 그걸 이쁘다고 가져온 게 잘못이지]
절망적인 기분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어서는데 비오는 날 꽃들을 마당 한 가운데로 옮겨 심으라고 하신다.
할매와 이야기한 뒤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았고, 밤손님만 매일 나타났다. 어젯밤에는 황주 할매의 어머니까지 만났다. 막걸리의 “막” 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는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써 비가 내린다.
[여기면 될까요?]
[그래]
나와 아내는 우비를 입고 꽃무릇을 옮겨 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파고 한 사람은 심고 손발이 척척 맞는다. 비는 점점 세지고 꽃무릇을 다 옮겨 심을 때쯤엔 수로를 정비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학마을의 불도 다 꺼질 때쯤에야 마당 한 가운데에 꽃무릇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뭘 해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고 하셨어]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으로 꽃무릇을 내려다보지만 칠흑의 어둠이라 붉디붉은 꽃잎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저기쯤에 피어있겠구나 짐작할 뿐이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는데 하늘이 번쩍한다. 이어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깜짝 놀라 창에서 떨어졌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다시 들리는 천둥소리. 이번엔 귀청이 찢어질 것 같다. 아마도 이 근처인 듯 하다. 숨을 몰아쉬는데 번개가 떨어졌다, 그것도 우리 마당에..지진만큼이나 놀라운 상황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청산 할매가 나가보지 말라고 하신 게 천둥번개 때문이라면 어떻게 아신 걸까?
[꽃무릇이 부른거야]
[네?]
[비가 오는 날이면 꽃무릇은 번개를 불러. 그걸 맞아야 꽃이 지거든]
[그래요?]
이불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지 환하게 밝은 아침이었다.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더니 꽃무릇이 있었던 자리가 엉망이다. 청산 할매와 아내가 그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왜 꽃무릇이 사찰에 많은 줄 아나?]
[...]
[부처님이 망령들을 위로하시려고 꽃무릇을 모으시는 거야. 그들을 축복하시면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거든. 미물도 다 쓸모가 있는 걸 그분은 아시는 거지. 나무관세음보살]
할매의 말처럼 내가 가져온 꽃무릇들은 산 속 사찰의 뒷마당 쪽에 군락을 이루었었다. 이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세상에 대해 배워야한다. 그래도 덕분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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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 마디: 꽃무릇입니다. 절에 가시면 꼭 찾아보세요. 이 꽃이 있는 절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