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이다. 한동안 출판물을 쓰느라 집에만 있었더니 먹을 것이 다 떨어졌고, 비누 등의 생활필수품도 없어서 갔다오기로 했다. 아내는 보건소에 다녀온다고 하여 차를 몰고 나가는 길에 내려주고 혼자 영주장에 갔다. 정선장처럼 크고 외지인들이 많이 오는 장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할매 장수들이 많이 나타나 길거리 좌판을 벌리기 때문에, 돌아다녀보면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
[얼마에요?]
[전부해서 2000원]
복잡한 장터를 뚫고 지나가다가 처음 보는 나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요즘 먹을 만한 나물이 있을까 했는데 냄새도 좋고 생김새도 마음에 들었다. 본인이 직접 따서 말려두신 거라며 된장에 무치면 밥도둑이란다. 게다가 비닐봉지 가득 들어가고도 남을 양이 고작 2000원이라니 수지맞은 기분이다.
도로 양편의 좌판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봉지 수가 늘어났다. 고등어, 호박, 고추, 덤으로 얻은 상추 그리고 수제 비누까지 걸어가면 갈수록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양 손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차로 돌아가는데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를 만났다.
[태워다 드릴까요?]
[고맙습니다]
더운 날을 의식해서인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지만 어딘가 몸이 안 좋아보였다. 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제안을 했다. 의외로 선선히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인사까지 한다. 휴전인가 싶어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본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낯빛이..]
[아기를 가졌어요]
[아~축하드립니다. 남편분이 좋아하시겠군요]
[네]
그리고 침묵, 침묵. 제일 사고가 많이 나는 삼거리에서 차를 대기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제야 입을 연다.
[지난번에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에 차를 한 쪽으로 세웠다.
[제 동생에게 여지를 두는 거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수영도 못하는 애가 물에 뛰어 든 거에요. 그날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요.]
얼마 전에 너구리 아가씨가 나를 구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듯 빠르게 덧붙인다.
[그 애는 어리고 철이 없으니 좀 더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분이 냉정하게 행동해야하는 게 맞잖아요. 그게 어려운가요?]
너구리 아가씨가 죽을 뻔 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멍해져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나오질 않아 앞만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곳을 떠나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사라지게 만들지 마시고..]
[제가..있으면 떠난다고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대로는 제 동생만 불쌍할 뿐이에요.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는 사람을 쳐다보느라 어울리는 짝은 찾아보려고도 하질 않으니..]
그 말을 끝으로 차 안은 적막해졌다. 나는 침묵 속에서 운전했다.
[저기 세워주세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학마을과 상석리의 분기점이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내리막길에 누군가 서 있다. 차를 세우고 내리자 그가 다가왔다.
[남편이에요]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걸 지켜보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게 아름답다. 아지랑이 때문에 더운 길이지만 그들은 조금도 덥지 않은 듯 웃으며 간다. 거의 점이 되었을 때야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웃지 않는 아내. 나를 보며 행복해하는 너구리 아가씨. 나는 놓아준다고 하면서도, 친구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물고기를 준다는 핑계로 얼굴을 보러 갔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오지 않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오늘 아가씨의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조만간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또 다른 뭔가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어디도 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 내 눈 앞에 두고, 내가 닿을 수 있는 반경 안에 있게 하려는 이기심. 보내주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않는 게 맞다.
[선배, 제가 아는 분이 학원을 열었는데 강의 좀 맡아주세요. 선배의 출판물 때문에 인지도가 높아서 학생들이 몰릴거에요]
다음날 아침에 출판사 후배의 연락을 받았다. 뜻밖의 말이라 머뭇거리며 통화를 하는데 마당으로 들어오는 너구리 아가씨가 보였다.
[잠시 나올 수 있으세요?]
다시 전화하겠다고 대답한 뒤 끊고 일어났다. 우리는 오후의 무더운 햇살을 피하고 싶어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너구리 아가씨가 잘 다니는 곳인지 앞장서서 걸어간다. 장마비로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더니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그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붕대를 감은 다리에 계속 눈이 간다.
[언니를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장에 다녀오는 데 힘들어 보여서 태워드렸어]
[아기를 가져서 그래요. 그 분은..좀 어떠세요?]
[약초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고맙다고 전해달래. 다리는 괜찮니?]
[네. 별거 아닌데..언니가 붕대까지 감아줬네요]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을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생각 중인데 너구리 아가씨가 용감하게 먼저 나선다.
[언니가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지래 짐작하고 그러는 거예요. 제가 좀 야무지지 못하니까 걱정을 많이 해요]
그녀는 손바닥을 보며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에게서 도자기를 처음 받았을 때..그 아름다움에 반했었어요. 불빛에 비출 때면 같은 건데도 매일 다른 색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죠. 연적도, 벼루도, 호리병도..아저씨는 저에게 그런 느낌이었어요. 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 궁금해지는 사람]
너구리 아가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눈물이 흐르지 않지만 가득 고여 있는 게 보인다. 그녀와 나 사이에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그녀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 있다가 너구리 아가씨를 껴안았다. 잠시 그대로 있기를 바랬는데 놀랐는지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잠깐만..이대로 있자]
나는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움직임과 나뭇잎들의 속삭임, 작은 새들의 재잘거림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숨결과 부드러운 살의 감촉을 마음에 새겼다.
[여긴 참 이상한 곳이에요. 어떻게 제가 사람의 모습을 할 수 있는지, 사람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 신기해요. 도토리묵 장수도, 청산 할매도 모두가 나를 두려워하질 않아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상처를 다시 치료해주었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내 행동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린다. 지저분해진 붕대를 버리고 옆에 앉았다.
[이 곳에서 사는 게 행복하니?]
[네. 학마을이 너무 좋아요]
[그렇구나]
[아저씨도..여기가 좋지요?]
[응]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그들이 사라지겠다고 한 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나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너구리라는 걸 잊은 적 없으니..저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녀가 수로를 넘어 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 멍하게 앉아 있다가 냉장고에 있던 막걸리 3병을 꺼내 모두 비웠다. 학마을 초입에 있는 다리로 걸어가 흘러가는 개울물을 바라보는데 언제 왔는지 도토리묵 장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가장 첫 번째인지 생각해보시게. 아내인지..너구리 아가씨인지..모든 건 자신이 얼마만큼의 의미부여를 하는지에 달린 것이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멀어져 간다.
그녀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전 아내이지만 세상에 아무도 없어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사람을 떠나지 못한다. 우리는 평행선 위에 있는 셈이다. 시간이 지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나도 그녀도 자신이 없다. 그럴 수 있을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후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학마을에 내가 있으면 그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며, 더불어 나도 그녀를 붙들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선택할 수 없는 나로부터 너구리 아가씨가 자유로워질 수 있게..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사람과 어울려 사는 삶의 터전인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최선이다.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놓아줘야 하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질 못했어, 예쁜 너를 볼 때면 내 이기심이 자꾸만 붙잡게 해서.. 널 더 이상은 불행하게 만들 순 없으니 물러나야겠다]
[저는..저는..행복한데..그냥 이대로는 안 되는 건가요? 아저씨 옆에 있기만 할게요]
[여기서 멈추는 게 좋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날 생각하던 마음도 사라질 거야. 너에게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다 잊혀질테니까]
[이렇게 그만둘 만큼..저에게..조금도 마음이 없나요?]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없으니까..]
너구리 아가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의 흐느낌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나는 그녀를 안아준 뒤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긴 채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왔다. 너구리 아가씨의 울음소리가 내내 등 뒤에서 들렸다.
다음 날 나는 아내에게 서울로 가자고 말했다. 집 안을 정리하여 살림살이를 창고에 넣고 다락을 잠갔다. 누군가 내려와 살 사람이 생긴다면 사용할 수 있도록 비닐로 덮어 두었다. 아내는 내가 정리하는 동안 대청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원하는 거예요?]
[응]
마지막 밤을 자고 울산댁네 장 닭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청산 할매는 보기 싫으시다며 어제 밤에 작별 인사를 하셨다.
[언제든 다시 오시게]
다른 어르신들은 이른 새벽부터 정자에 나와 기다리신다. 차를 운전하여 서서히 마을을 빠져나가 아직 열리지 않은 슈퍼를 지나 도로에 들어섰다.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도토리묵 장수가 보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하여 차를 세우지 않고 빵..소리만 내고 지나쳤다. 모두에게 인사를 다 마쳤다는 생각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아내는 학마을을 기억하려는 듯이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