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학마을의 최고령자 청산 할매보다도 한 참 전이다. 그 때도 이 얼굴이었고 지금도 이 얼굴이다.

[낚시하러 갑시다]

  불판의 쇠고기를 입에 넣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여자는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든다. 얼굴빛이 환해졌다.

[진짜요? 언제?]
[조만간..]

  그때 자리를 비웠던 여자의 전 남편이 돌아와 그들의 대화가 끝났다. 그는 잠시 보였던 웃음을 지워버리고 팔짱을 꼈다. 그것이 평소의 모습이라 전 남편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가보겠다고 일어서며 살짝 그녀를 보았다. 낚시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입이 귀에 걸려있다. 그렇게 웃으니 자신이 그리워하던 그 사람이 맞다.

[물고기들이 돌아왔소]

  그는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저수지를 몇 번이나 갔었다. 지옥의 호수가 이번에는 그 곳에 오리라는 걸 미리 알았기 때문에 나타나면 바로 움직이려고 작은 배도 공수하고 산신들에게 낚싯대와 물통도 받았다. 드디어 비가 쏟아지고 지진이 나면서 호수가 저수지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있는 집 앞 수로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며 말을 건넸다. 대청마루에 있던 여자는 재빠르게 우비를 입고 달려 나왔다. 전 남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보고만 있어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세 사람은 저수지로 갔다. 비가 거세져서 호수를 삼킨 저수지는 수면이 거칠지만 통에 한가득 은빛 물고기가 가득 차도록 낚시를 즐겼다. 전 남편이 엎드려 구역질을 하는 동안 그와 그 여자는 행복한 한 때를 보냈다.

  여자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를 알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다보니 혼자인 게 외로울 때 그 여자를 만났다. 아주 어린 아이여서 기억하지 못해도 자신은 그 덕분에 몇 십 년을 잘 보냈다.

  학마을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 종종 그 여자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사춘기겠구나, 이제 곧 사회인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시간이란 십년 전이나 십년 후나 하루와 같다. 아무 때나 찾아가면 볼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녀가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보겠다는 정도였다. 그렇게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그 여자가 어느 날 학마을에 왔다. 구들댁네 막내 아들의 전 아내로..행운이 마침내 그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항상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들을 위해서만 살다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게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자를 웃게 하고 싶어 제일 좋아한다는 낚시를 제안했고 그 여자와 이렇게 물고기를 맛나게 뜯어먹는 중이다.

[몇 마리 가져다주시게]

  전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부석사 가까이에 사는 너구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이 지금은 망설이고 있지만, 둘이 이어져야 여자도 자유로워진다. 아직 깨닫지는 못하지만 전 남편을 붙잡고 있는 손을 그래야 거둘 수 있다. 정직해지자고 스스로 생각한다. 욕심이 나서 그 둘을 꼭 이어주고 싶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가 떠난다고 한다. 전 남편을 따라 서울로 내일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는 전날 밤부터 도로에 서 있었다. 잠이란 그에게 불필요한 일이니 달이 저물고 해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 그 여자를 태운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저만치서 차가 온다.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빵..소리가 나고 차가 점점 속력을 높인다. 그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죠?]

  가을이 지나고 첫 눈이 올 때가 되었을 쯤 그 여자가 혼자 나타났다. 그동안 몰래 여자가 입원한 병원에 가보았지만, 들어가거나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잘 있으면 다행이다 하면서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왔다.

[나 이제 여기 살 거니까 청소 좀 도와주세요]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잡아끈다. 하여 얼떨결에 같이 대청마루를 청소했다. 부엌도 치워주고 같이 장도 보았다. 그 다음날 묵 파는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더니 그 여자가 좋다고 웃는다.

[우리 사귀어 보지 않을래요?]

  묵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옆에서 말없이 걸어가던 여자가 뜻밖의 말을 한다. 놀라서 진심인지 확인하려고 눈을 쳐다보니 빙그레 웃는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나는..다른 존재인데..상관없소?]
[유한한 인생, 마음이 맞고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런 문제로 포기하기엔 아깝잖아요. 싫으시면 그냥 서울로 갈께요]

  진짜로 여자가 가 버릴까봐 얼른 손을 잡았다. 그를 보면서 여자가 큰 소리로 웃는다, 그 옛날처럼..그제야 자신이 나누어 주고 있는 행운이 어떤 느낌이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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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저는 개인적으로 권선생보다 도토리묵 장수를 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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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foglds 2009-10-1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까지 하루만에 다 읽었어요. 마치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같으면서도 현실이 아닌 일들이 잘 섞여 있어서 여러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번에 먹는 느낌이었어요~

최현진 2009-10-1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한번쯤 일어나면 어떨까..하는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저와 비슷하게 느껴주시니 기쁘네요^^

꿈을이루다 2009-10-1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완결 축하드립니다~다음에 또 다른 글 올리시면 꼭 읽으러 올께요.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최현진 2009-10-17 09:40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이 추우니 감기 조심하세요.

펭귄 2009-10-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권선생과 너구리 아가씨가 학마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계속 써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하지 못한 옛날 추억들도 솔솔하니 재미있었는데..아쉬워요.

happy 2009-10-2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열심히 읽던 소설이 끝났군요. 서운하고 섭섭한 기분..그래도 작가님 고생많으셨어요. 항상 건강하시길 바래요.

민지엄마 2009-10-22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라딘이 갈수록 기성 작가들의 장이 되는 것 같아 씁슬합니다. 그래도 작가님 같은 분이 계시니 다행이에요..또 소설 써주실거지요? 새 연재 하시길~즐겁게 읽었습니다.
 

  신학기를 준비하는 2월의 방학이다. 지금은 중3인 아이들만 나와 보충수업을 받는다. 그러나 선생은 돌아가면서 학교를 지켜야 해 전직원이 순번대로 일직을 선다.

[점심 뭐 먹을까요?]

  오늘 같이 근무하는 체육 선생이 물어본다. 아무거나..라고 대답을 한 뒤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하였다. 12월에 눈이 심하게 온 날, 학마을에 다녀온 뒤로는 그날이 그날이다. 반면 아내는 간간히 전화를 해 학마을의 재미나고 기이한 일들을 알려주고 도토리묵 장수와 묵을 팔러 다녔던 일도 자랑한다. 

[감사합니다, 서울중학교 교무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 앞에 놓인 인터폰이 울려서 기계적으로 멘트를 말했다. 몇 일간 전화 업무를 열심히 했더니 핸드폰으로도 이런 말을 한다. 경비실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 학교는 정문에서 엄격하게 통제하기 때문에 외부인이 쉽게 드나들지 못한다. 나는 체육 선생에게 점심이 오면 먼저 먹고 있으라고 일러둔 뒤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봄이면 아름다운 목련이 가득한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 이백 여 미터 떨어져 있는 경비실 쪽을 바라보았다. 빨간 외투를 입고 검은 장화를 신은 사람이 서 있었다.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하얀 가방을 들고 있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등을 보이고 있다가 돌아섰다.

[숨 막혀요] 

  너구리 아가씨임을 확인한 순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꽉 안았다. 작은 키 때문에 내 가슴에 묻혀 갑갑하고 당혹스러운지 벗어나려고 한다. 놓치면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봐 손목을 잡고서야 한 발짝 물러났다. 경비아저씨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나는 목례를 하고는 너구리 아가씨를 잡아당겨 학교 건물로 달려가다시피 걸었다. 종종종종 발소리가 들리고 빠른 내 걸음을 따라 끙끙거리는 게 등 뒤에서 느껴진다. 남교사 휴게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분이..알려주셨어요. 저 좀 앉아도 될까요? 다리가 아파서요]

  한참을 걸어왔다며 다리를 두드린다. 나는 그제야 의자를 내어주고 반대편에 앉았다. 어울리지 않는 하얀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서울은 너무 복잡해요. 잘못 내려서 한참 헤맸거든요. 이런 곳에 살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어요. 아저씨는 어디 사세요? 여기서 멀어요?]
[가까워]
[참, 언니가 아기 나았어요. 여자앤데 얼마나 예쁜지..사진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나중에..]

  쉬지도 않고 떠들어 대다가 사진을 보여준다며 가방을 들썩이자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야 입을 꼭 닫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6개월여 만에 보아서인지 어딘가 어른스러워진 듯하다. 계속 흔들고 있는 다리만 빼면.

[여기 왜 온 거야?]
[아저씨가..그리워서요]

  머리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든다. 눈물이 가득 고여 터질 것 같다.

[아저씨도 나보러 왔었잖아요. 지난번에 눈 내릴 때..동굴에 아저씨 냄새가 남아 있었어요] 

[그래, 갔었어]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그동안 노력했어요, 잊고 살아보려고요. 얼굴도 희미해지고,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요. 혹시라도 아저씨가 아니라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봐 몇 번이나 내 마음을 접으려고 했어요. 그런데도..마음의 소리가 사라지지 않아서..]

  눈물이 빰을 타고 흘러내리자 나는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너구리 아가씨가 잡고 일어서자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껴안았다. 부드럽고 조그마한 느낌.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건 또 뭐가 있다고..]
[하지만..나는..너구리인데..]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 말마따나 유한한 인생에 그녀가 너구리고 내가 사람인 걸 신경 쓰자니 문득 별거 아니게 느껴졌다. 이제야 스스로 만든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느낌이다.

[내가 머뭇거릴 때도..물러설 때도..넌 최선을 다했어. 게다가 이렇게 날 찾아올 만큼 용감한데 뭘 두려워하니?]
[사실은 왜 왔냐고..가라고 할까봐..밖에서 한참 서성거렸어요]

  너구리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련의 새 눈이 올라오는 게 이제 곧 봄이다.

[잘 왔어. 보고 싶었다] 

  내가 일주일 뒤에 짐을 주섬주섬 싸는 데 가만히 보고 있던 너구리 아가씨가 그러지 말라며 매달린다. 본인의 말로는 여기가 재미있으니 괜찮다고 하는데, 밤에 달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이게 아니다 싶었다. 나는 서울에도, 학마을에도 살 수 있지만 너구리 아가씨는 학마을에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녀가 행복해지는 삶이다. 이 곳에 계속 있으면, 나를 배려한다고 그리워도 말 안하고 가슴에 묻을 것이다. 그런 부분이 우울증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폐하게 만드는 법이다.

[학마을에 안가도 되는데..]
[아니야. 그리로 가자]
[아저씨 일은 여기에 있잖아요]
[그만 뒀어]
[네?]
[지금 가장 중요한건 나와 너니까..]

   학교를 그만두고 집도 내놓고 가뿐하게 나섰다. 말은 그리했어도 학마을에 가는 게 좋은지 그녀는 연신 싱글벙글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같이 지낼 수 있는지, 무엇을 하며 먹고 살지, 그녀의 언니와 청산 할매는 어떻게 설득해야할지 모르는 것 투성이다. 고난의 가시밭길이 되겠지만 이렇게 선택한 이상 달려야지 별수 없다. 도착점에 가면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학마을은 기이한 곳이고, 나 역시 기이한 인연으로 그곳에 다시 돌아가니 안 될 것이 또 무어냐고 생각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손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게 잘 될 것이다. 파이팅! 그녀를 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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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학마을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외전이 하나 있어요. 도토리묵 장수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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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사람 2009-10-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즐겁게 읽었습니다. 매일 부지런히 글을 올려주셔서 고생많으셨어요~도토리묵 장수에 대한 나머지 글 기다릴께요^^

최현진 2009-10-13 16: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우주바다 2009-10-1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바빠 건너뛰다 들어왔더니 -마지막회-라는 글만 읽히네요..마지막글은 눈물이 날만큼 애잔한데..너구리아가씨와의 학마을이야기도 계속 듣고 싶은데 어쩌죠...작가님의 이름 계속 기억하고 있을께요..언젠가 다시 글 올리시겠죠..기다리고 있을께요..간간히 그곳 소식 들려주세요..그동안 고생하셧습니다..항상 건강하세요..그리고 행복하세요 ^-^

최현진 2009-10-13 16:19   좋아요 0 | URL
다음 글을 준비하고 있어요..새 연재 시작하면 놀러오세요^^

yo! 2009-10-13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회부터 봤어요! 호기심이 생겨서 1회부터 읽어야겠어요^^;(후진입니다~하하)

최현진 2009-10-13 16:19   좋아요 0 | URL
후진..ㅎㅎㅎ. 하긴 제 글이 각각 따로 봐도 크게 무리가 없으니..감사합니다.
 

  첫 눈이 내린다. 토요일이라 일찍 하교하는 모습을 창에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발이 날렸다. 눈을 본 아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팔짝팔짝 뛴다. 강아지를 한 부대는 모아놓은 듯 서로 부딪히고 넘어지며 눈을 즐긴다.

[저런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귀여워요. 애들은 역시 애들다워야..]

  옆자리의 강선생이 커피 잔을 건네주며 한마디 한다. 

[선배~오늘 나랑 술 한 잔 할래요? 부장한테 왕창 깨졌어요]

  출판사 후배가 전화 너머에서 심통을 부린다. 내가 원룸으로 옮긴 후부터는 종종 들르더니 오늘은 술을 가져 오겠다고 한다. 나 역시 술 한 잔이 그리워 그러라고 하자 후배가 들고 온 비닐봉지에서 막걸리가 나왔다.

[너 원래 이런 거 안 마시잖아]
[예전에는 먹고 나면 두통이 심했는데..요즘은 제법 괜찮더라고요. 다음날 속도 편하고. 그래서 즐겨 마셔요]

  밥그릇에 찰방찰방하게 따라주는 걸 보니 슈퍼 주인 할매의 씨껍데기 막걸리가 생각났다. 한 입 마셔보니 맛도 그만 못하다.

[형수님은 이제 좀 괜찮으세요?]
[퇴원했어, 엊그제. 학마을로 내려갔지]
[이젠 좀 살만하시겠어요]
[내가 언제는 죽겠다고 했나]
[말은 안하지만 얼굴에 다 쓰여 있었죠]

  나는 말없이 막걸리를 한잔 더 들이켰다.

[근데 왜 형수님은 선배의 시골로 가신거에요?]
[거기..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호]

  후배는 눈치가 빠르게도 알아들었다는 콧소리를 냈다. 아내는 지난주에 병원을 퇴원했다.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내려간다고 비행기 흉내를 냈다. 영주에는 비행기가 안 뜬다고 대답하자 옆구리를 한대 친다. 아내와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웃었다.

[이제야 진짜 당신을 놓아주고 새 출발 하네요]
[그동안은 뭐 붙잡기나 했어?]
[없잖아 그런 게 있었죠. 이제야 말이지만 그 아가씨랑 약탕기 앞에 있을 때 당신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더 다가가지 말라고요]

  이제야 그녀가 친구가 되자고 한 이유를 알게 되자 마음이 아리다.

[안 보고 싶어요, 그 아가씨?]
[응]
[멀었다, 멀었어]

  아내는 코미디언의 말투를 흉내 내더니 택시를 불러 세웠다. 타기 직전에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그렇게 아내를 보내주고 나는 서울에 혼자 남았다.

[선배, 무슨 생각해요?]
[아..아무것도..뭐라고 말했니?]
[책 하나 더 쓰라고요. 선배가 은근히 글재주가 있어요. 학생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아요. 선배 책을 선정하는 학교도 많고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이거 네 덕에 발견했네]
[그럼 크게 한 턱 쏘세요!]

  술이 부족하다며 후배는 후다닥 나가 막걸리를 세 병 더 사왔다. 모두 비우고 나니 졸음이 몰려와 후배가 가는지 확인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눈이 내린다. 내가 살던 집 마당에도, 수로 앞에도, 저수지에도. 하얗게 눈이 싸여간다. 청산 할매가 장군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마당 어디쯤엔가 서 있다. 대청마루에서 울음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너구리 아가씨가 무릎을 양 팔로 감싸고 앉아 운다. 눈이 점점 더 쌓여간다. 대청마루 근처까지 올라오고, 좀 더 있으니 너구리 아가씨의 무릎까지 도달한다. 그리고도 계속 내린다. 마침내 그녀의 모습과 집이 완전히 눈 속에 잠겼다. 울음소리는 눈을 뚫고 들려온다. 그 애달픈 소리에 나도 눈물이 흐른다. 차가워진 뺨에 체온보다 더 높은 눈물이 느껴진다.

  몸부림을 치다 눈을 떠보니 창밖은 아직도 눈이 내린다. 기상특보인가 하는 게, 켜져 있는 티비에서 연신 떠들어댄다. 경상북도에는 눈이 엄청나게 내려서 고립된 마을이 많다고 말한다. 너구리 아가씨의 동굴은 괜찮을까 조바심이 난다. 학마을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눈 때문인지 연결되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잠바를 입고 지갑과 핸드폰만 들고 나섰다. 버스터미널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려가야 하는데 갑자기 지연되거나 취소된 버스들 때문에 웅성거린다. 나는 영주행을 알아보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안동까지는 간다고 하여 무조건 표를 끊고 올라탔다. 안동에서부터는 택시를 타던지 그것도 어려우면 걸으면 된다. 예전에도 눈 속을 걸었으니 두 번째는 두렵지 않은 법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 안에는 계속 라디오 소리가 울렸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기상에 대한 안내와 당부의 말, 도로의 사정이 실시간으로 내 귀에 들어온다. 아내의 핸드폰은 여전히 불통이다. 따뜻한 차 안의 열기에 깜박 잠이 들었다. 여러 가지 골치 아프고 복잡한 꿈만 꾸다보니 목도 뻣뻣하고 몸도 불편하다.

[안동 버스터미널입니다] 

  기사의 말대로 차창 너머에 반짝이는 터미널 건물이 보였다. 한밤중이지만 오고가는 사람들과 도착하는 버스들 때문에 환하다. 시내로 연결되는 반대편 문으로 나서니 눈발이 엄청나다. 동장군이 제대로 납시었는지 땅은 얼어붙었고 하늘은 여전히 눈을 쏟아 붙는다. 택시를 잡아타자는 생각에 정류장으로 뛰었다.

[영주 갑시다]
[영주 어디요?]
[학마을..그럼 영주 시내라도..부탁드립니다]

  기사가 고개를 흔들어 시내로 최종 합의를 보고 의자에 등을 붙였다. 조심스럽게 주행한다. 마치 자전거로 영주까지 가는 듯하다. 언제 도착하려나 싶어 나도 모르게 손을 주물럭거렸다.

[손님, 포기하시죠. 못 넘어 가겠습니다]

  영주 시내를 지나 운 좋게도 부석사 근처까지 왔다 싶었는데 굽이굽이 고개 앞에서 결국 택시가 멈추었다. 저런 곳은 위험하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돈을 꺼내 건네주고는 내렸다. 바람이 매섭고 눈이 화살처럼 떨어진다. 택시 기사가 뒤에서 뭐라고 하지만 어차피 잘 들리지도 않아 모른 척 하고 고개를 걸어갔다. 이렇게 걷자니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를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아내에 대한 어정쩡한 마음과 너구리 아가씨에 대한 인정할 수 없는 감정 사이에서 시간만 흘려 보내며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그녀를 버렸다. 그렇게 서울에 왔으면 잘 살아야 하는데 아내가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도..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 동안에도..정리는 커녕 그리움만 깊어졌다.

  후회와 자책으로 멍하니 걷다보니 굽이굽이 언덕길과 내리막길을 지나 학마을이 보인다. 초입에 도달했을 때 다리는 이미 눈에 쌓여 흔적도 없다. 다만 지금은 너구리 아가씨를 확인하는 게 먼저라 다리로 들어서는 대신 지름길을 찾아 도로를 계속 내려갔다. 길이 자취를 감추어 이런 날은 인가로 내려오는 동물들을 막고자 옹노를 설치해놓은 어르신들이 있을지 모른다. 동물들은 자신이 다니던 길로만 다니기 때문이다. 눈이 쌓여도 우직하게 다닌다. 어쩌면 너구리 아가씨도 그렇게 돌아다닐지 모른다.

  부석사를 지나 동굴이 있는 쯤에 도착했다. 벌써 새벽녘이 되었는지 회색빛 구름 속이 차츰 밝아온다. 의외로 이번에는 동굴을 한 번에 찾았다. 입구가 훤하게 보일 정도로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가가서 확인했더니 동굴은 바로 앞까지 눈이 쌓여 있고, 안은 비어 아무 것도 없었다. 너구리 아가씨가 살지 않았던 듯 먼지만이 켜켜이 앉아 내가 들어서는 순간 확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녀가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돌아보면 항상 있던 그 곳에서 손을 흔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만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멋대로의 상상이었을 뿐,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 나왔다.

[아저씨는..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 궁금해지는 사람이에요]

  그 날의 그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마음은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같은 곳을 볼 수 있다. 바라본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너구리 아가씨는 항상 나를 보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마음 안에 아내에 대한 연민이 있고, 걱정을 핑계로 그 손을 놓지 못하는 걸 이해했다. 또한 너구리 아가씨에게 끌려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그녀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도망치는 비겁함도 탓탓지 않았다. 사람인 나보다 더 깊고 푸르다.

  눈을 해치고 집에 도착하니 다락에 두었던 화로가 대청마루에 나와 있고 아내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묘하게 생긴 판초 모양의 윗옷을 걸쳤다.

[어쩐 일이에요, 연락도 없이?]
[전화가 안돼서..별 일 없는 거야?]
[아..]

  그녀는 이 동네가 연락두절 상태라고 설명한다. 다른 할매네도 전부 그런 상황이라 대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찾아왔단다. 나는 따뜻한 화롯가에 앉아 눈 쌓인 마당과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도토리묵 장수를 만난다고 장화를 신고 가버려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요즘 매일이 행복하다. 사람과 있는 게 더 없이 좋고, 학마을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단다. 언제 우울증을 앓았는지도 까마득하다며 활달하게 웃는다. 도토리묵 장수가 과연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더니 그녀는 상관없다고 덧붙인다. 마음이 맞고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런 문제로 포기하기엔 아깝지 않냐며.. 아내가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말을 곱씹었다.

  나는 다음 날 영주까지 걸어가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탔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조용히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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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윤 2009-10-1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보내주었지만..마음은 어쩌지 못하는 게 사람이죠..이제사 인정을 하다니..권선생과 아가씨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립 중학교에 원서를 넣어두었지만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가망성이 별로 없다. 아내는 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학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돌봐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내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들어서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게 전부다.

[직장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같이 있어요]
[그래도 될까?]

  서울에 도착해 장모님이 남겨주신 집에 데려다주었더니 남은 방을 쓰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내와 나는 학마을에서 같이 지내면서 확실히 편해졌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

[병원에서는 뭐래?]
[입원하래요]
[그럴래?]

  주말 밤에 학원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아내가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다녀온 일을 감정 없이 이야기 한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원에 대한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우리..학마을 가면 안 돼요?]
[왜?]
[거기..참 좋았어요]

  그녀가 그곳에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약간은 이상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며 기이하기까지 한 곳인데 놀라고 거부하는 대신 그리워한다.

[가고 싶다면..보내줄게]
[당신은 안가고요?]
[나는 가고 싶지 않아]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돌아온 뒤로는 술을 마셔야 잠이 든다. 맨 정신으로 자면 꿈이 끊임없이 이어져 잔 것 같지가 않다.

[요즘 술이 늘었어요]
[이렇게 마시고 자면 숙면에 좋아서..]

  아내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1-2시간 정도만 얼굴을 보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별일 없었는지 안부를 묻고 나면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게 되어 어느 쪽이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안녕을 고한다.

  나는 술을 좀 더 마시려고 냉장고를 뒤졌다. 아내가 사다두었는지 냉장고 구석에 비름나물이 보인다.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냉장고 문을 닫았다. 예전에는 기억력이 좋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소소한 일상도, 자라면서의 다양한 경험들도 다 아이들에게 이야기꺼리가 되고 동료들이나 친구들과의 대화 소재가 됐는데, 요즘은 그런 기억들이 싫다. 더 정확히는 최근의 일들이 그대로 생생히 남아 있는 게 부담스럽다. 한 달이 지나도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따뜻했던 온기와 한 숨 쉴 때 가슴의 움직임까지..언제쯤이면 잊을 수 있을까.

  생각지도 않았던 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그 학교에 있는 선배가 빨리 서류를 내보라며 재촉했다. 이력서를 쓰면서도 내가 학교 복귀를 정말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의욕이 나질 않는데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한심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정신 없이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서류를 접수하러 선배의 중학교를 방문하였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네. 좀 어두워진 것 같기도 하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선배님도 저도 변하죠]
[넌 왠지 안 그럴 거 같았어]

  서류 접수와 면접 후에 선배의 얼굴을 보려고 잠시 기다리니 배가 제법 나온 사람이 걸어왔다. 처음에는 선배인지 몰랐는데 웃을 때 보여주는 특이한 미소 때문에 알아보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인지 살이 많이 쪘다. 잘 안 움직이는 교사들의 특성 탓이다. 학교를 그만 두지 않았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운동장 한편에 앉아 축구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학교는 전 구역이 금연이라 골초 선배도 담배를 만지기만 할 뿐 피지 않는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세월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다들 많이 변했죠?]
[그럼. 살기가 빡빡하니까 이젠 만나도 좀 그래]
[선배는..결혼 하셨어요?]
[아니. 그보다 너 이혼한지 꽤 됐다는 소릴 들었는데 사실이야?]
[네]
[나야 이젠 나이가 이러니 못 한다손 치고, 너는 왜 그러고 있니?]

  그는 내 기억에 항상 직선적이었다. 출판사 후배처럼 물어보고 싶은 말을 빙글빙글 돌리지 않고 머뭇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 나와는 다르니까..

  그를 만나고 다시 학원으로 들어가 그날의 강의를 준비하다보니 가슴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 들었다. 그곳으로 내 안의 뭔가가 새어나간다.

[거울은 보고 다녀요?]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서 무릎을 양 팔로 껴안고 있다.

[아침 마다 나가기 전에..왜?]
[몸은 움직이는 데 표정이 없어요. 나 힘들어..그런다고요. 이럴거면 차라리 당신이 시골로 가는 게 좋겠어요]
[알았어. 미안하다]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스스로한테 미안해야지]

  웬일인지 아내가 또박또박 말을 많이 한다. 여전히 무릎을 감싸 앉은 자세지만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나보다 더 편해 보인다.

[다음 주에 입원할 거예요]
[그래]
[이 집..세 줄 거구요]
[알았어. 나갈 곳 알아볼게. 그동안 고마웠어]

  우리의 대화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아내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먼저 들어갔다. 아내가 자기 갈 길을 찾는 것처럼 나도 그 학교가 되면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눈을 떠야겠다. 스스로에게 이 이상 더 초라해지지 않게..

  다음 주 월요일에 연락이 왔다. 선배 덕분인지 1학년 3반 담임과 함께 2-3학년 교과를 맡았다. 그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고 짐을 옮긴 후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것까지 도와주다보니 한 주가 빨리 가버렸다. 

[이번엔 꼭 다 낳아서 도토리묵 장수를 만나러 갈거에요]
[왜?]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처음 당신이랑 알게 되었을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에요]
[처음? 우리가 어땠지?]
[사람들이 원조교제라고 놀렸잖아요. 그래도 좋다고 매일 같이 다녔는데..이젠 기억이 안나나봐~]

  첫 근무를 하게 된 후 한 달이 지나서 아내를 찾아갔다. 우리는 병원 벤치에 앉아 가을 바람을 쏘이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한 결 밝아진 표정으로 재잘재잘 말을 한다.

  아내가 도토리묵 장수를 생각하고 있음에 놀랐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느라 빵..소리를 낼 때 아내가 돌아본 건 학마을이 아니라 도토리묵 장수였음을 이제야 알았다. 아내는 확실하게 내게서 벗어났다. 그녀는 목표가 생겼다며 어떻게 치료에 전념하고 언제쯤 나가서 돌아갈 것인지 한참을 떠들었다. 목소리 톤이 예전보다 높아진 게 그녀의 뜻대로 될 것 같다. 우울증의 바다에서 그녀는 등대를 발견했고 그것이 부럽다. 나는 아직도 표류하는 기분인데,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먼저 빠져나오니 존경스럽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원에 들렀다. 은행잎이 가득 떨어져 있어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숲 속을 마실 다니는 기분이다. 게다가 다람쥐인지 청솔모인지가 나무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걸 우연히 보았다. 대도시에 그런 동물이 있다는 게 놀라워서 한 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잘 지내니?]

  학마을이라면 마지막으로 힘내어 잘 익으라고 햇볕이 논밭에 강하게 내리쪼이고 있을 것이다. 그녀도 즐겁고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학마을의 그 햇빛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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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2009-10-1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조마조마하면서 읽었어요. 줄다리기 같은 느낌이라서요..잘 지내니..이 말 참 슬프네요.
 

   장날이다. 한동안 출판물을 쓰느라 집에만 있었더니 먹을 것이 다 떨어졌고, 비누 등의 생활필수품도 없어서 갔다오기로 했다. 아내는 보건소에 다녀온다고 하여 차를 몰고 나가는 길에 내려주고 혼자 영주장에 갔다. 정선장처럼 크고 외지인들이 많이 오는 장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할매 장수들이 많이 나타나 길거리 좌판을 벌리기 때문에, 돌아다녀보면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

[얼마에요?]
[전부해서 2000원]

  복잡한 장터를 뚫고 지나가다가 처음 보는 나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요즘 먹을 만한 나물이 있을까 했는데 냄새도 좋고 생김새도 마음에 들었다. 본인이 직접 따서 말려두신 거라며 된장에 무치면 밥도둑이란다. 게다가 비닐봉지 가득 들어가고도 남을 양이 고작 2000원이라니 수지맞은 기분이다.

  도로 양편의 좌판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봉지 수가 늘어났다. 고등어, 호박, 고추, 덤으로 얻은 상추 그리고 수제 비누까지 걸어가면 갈수록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양 손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차로 돌아가는데 너구리 아가씨의 언니를 만났다.

[태워다 드릴까요?]
[고맙습니다]

  더운 날을 의식해서인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지만 어딘가 몸이 안 좋아보였다. 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제안을 했다. 의외로 선선히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인사까지 한다. 휴전인가 싶어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본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낯빛이..]
[아기를 가졌어요]
[아~축하드립니다. 남편분이 좋아하시겠군요]
[네]

  그리고 침묵, 침묵. 제일 사고가 많이 나는 삼거리에서 차를 대기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제야 입을 연다.

[지난번에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에 차를 한 쪽으로 세웠다.

[제 동생에게 여지를 두는 거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수영도 못하는 애가 물에 뛰어 든 거에요. 그날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요.]

  얼마 전에 너구리 아가씨가 나를 구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듯 빠르게 덧붙인다.

[그 애는 어리고 철이 없으니 좀 더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분이 냉정하게 행동해야하는 게 맞잖아요. 그게 어려운가요?]

  너구리 아가씨가 죽을 뻔 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멍해져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나오질 않아 앞만 바라보자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곳을 떠나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사라지게 만들지 마시고..]
[제가..있으면 떠난다고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대로는 제 동생만 불쌍할 뿐이에요.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는 사람을 쳐다보느라 어울리는 짝은 찾아보려고도 하질 않으니..]

 그 말을 끝으로 차 안은 적막해졌다. 나는 침묵 속에서 운전했다.

[저기 세워주세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학마을과 상석리의 분기점이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내리막길에 누군가 서 있다. 차를 세우고 내리자 그가 다가왔다.

[남편이에요]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걸 지켜보았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게 아름답다. 아지랑이 때문에 더운 길이지만 그들은 조금도 덥지 않은 듯 웃으며 간다. 거의 점이 되었을 때야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웃지 않는 아내. 나를 보며 행복해하는 너구리 아가씨. 나는 놓아준다고 하면서도, 친구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물고기를 준다는 핑계로 얼굴을 보러 갔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오지 않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오늘 아가씨의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조만간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또 다른 뭔가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어디도 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 내 눈 앞에 두고, 내가 닿을 수 있는 반경 안에 있게 하려는 이기심. 보내주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않는 게 맞다.

[선배, 제가 아는 분이 학원을 열었는데 강의 좀 맡아주세요. 선배의 출판물 때문에 인지도가 높아서 학생들이 몰릴거에요] 

  다음날 아침에 출판사 후배의 연락을 받았다. 뜻밖의 말이라 머뭇거리며 통화를 하는데 마당으로 들어오는 너구리 아가씨가 보였다.

[잠시 나올 수 있으세요?]

  다시 전화하겠다고 대답한 뒤 끊고 일어났다. 우리는 오후의 무더운 햇살을 피하고 싶어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너구리 아가씨가 잘 다니는 곳인지 앞장서서 걸어간다. 장마비로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더니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그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붕대를 감은 다리에 계속 눈이 간다.

[언니를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장에 다녀오는 데 힘들어 보여서 태워드렸어]
[아기를 가져서 그래요. 그 분은..좀 어떠세요?]
[약초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고맙다고 전해달래. 다리는 괜찮니?]
[네. 별거 아닌데..언니가 붕대까지 감아줬네요]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을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생각 중인데 너구리 아가씨가 용감하게 먼저 나선다.

[언니가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지래 짐작하고 그러는 거예요. 제가 좀 야무지지 못하니까 걱정을 많이 해요]

  그녀는 손바닥을 보며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에게서 도자기를 처음 받았을 때..그 아름다움에 반했었어요. 불빛에 비출 때면 같은 건데도 매일 다른 색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죠. 연적도, 벼루도, 호리병도..아저씨는 저에게 그런 느낌이었어요. 볼 때마다 새로운 사람. 궁금해지는 사람]

  너구리 아가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눈물이 흐르지 않지만 가득 고여 있는 게 보인다. 그녀와 나 사이에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그녀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 있다가 너구리 아가씨를 껴안았다. 잠시 그대로 있기를 바랬는데 놀랐는지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잠깐만..이대로 있자]

  나는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움직임과 나뭇잎들의 속삭임, 작은 새들의 재잘거림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숨결과 부드러운 살의 감촉을 마음에 새겼다.

[여긴 참 이상한 곳이에요. 어떻게 제가 사람의 모습을 할 수 있는지, 사람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 신기해요. 도토리묵 장수도, 청산 할매도 모두가 나를 두려워하질 않아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상처를 다시 치료해주었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내 행동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린다. 지저분해진 붕대를 버리고 옆에 앉았다.

[이 곳에서 사는 게 행복하니?]
[네. 학마을이 너무 좋아요]
[그렇구나]
[아저씨도..여기가 좋지요?]
[응]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그들이 사라지겠다고 한 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나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너구리라는 걸 잊은 적 없으니..저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녀가 수로를 넘어 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 멍하게 앉아 있다가 냉장고에 있던 막걸리 3병을 꺼내 모두 비웠다. 학마을 초입에 있는 다리로 걸어가 흘러가는 개울물을 바라보는데 언제 왔는지 도토리묵 장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가장 첫 번째인지 생각해보시게. 아내인지..너구리 아가씨인지..모든 건 자신이 얼마만큼의 의미부여를 하는지에 달린 것이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멀어져 간다.

  그녀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전 아내이지만 세상에 아무도 없어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사람을 떠나지 못한다. 우리는 평행선 위에 있는 셈이다. 시간이 지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나도 그녀도 자신이 없다. 그럴 수 있을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후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학마을에 내가 있으면 그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며, 더불어 나도 그녀를 붙들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선택할 수 없는 나로부터 너구리 아가씨가 자유로워질 수 있게..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사람과 어울려 사는 삶의 터전인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최선이다.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놓아줘야 하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질 못했어, 예쁜 너를 볼 때면 내 이기심이 자꾸만 붙잡게 해서.. 널 더 이상은 불행하게 만들 순 없으니 물러나야겠다]
[저는..저는..행복한데..그냥 이대로는 안 되는 건가요? 아저씨 옆에 있기만 할게요]
[여기서 멈추는 게 좋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날 생각하던 마음도 사라질 거야. 너에게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다 잊혀질테니까]   
[이렇게 그만둘 만큼..저에게..조금도 마음이 없나요?]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없으니까..]

  너구리 아가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의 흐느낌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나는 그녀를 안아준 뒤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긴 채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왔다. 너구리 아가씨의 울음소리가 내내 등 뒤에서 들렸다.

  다음 날 나는 아내에게 서울로 가자고 말했다. 집 안을 정리하여 살림살이를 창고에 넣고 다락을 잠갔다. 누군가 내려와 살 사람이 생긴다면 사용할 수 있도록 비닐로 덮어 두었다. 아내는 내가 정리하는 동안 대청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원하는 거예요?]
[응] 

  마지막 밤을 자고 울산댁네 장 닭의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청산 할매는 보기 싫으시다며 어제 밤에 작별 인사를 하셨다.

[언제든 다시 오시게]

  다른 어르신들은 이른 새벽부터 정자에 나와 기다리신다. 차를 운전하여 서서히 마을을 빠져나가 아직 열리지 않은 슈퍼를 지나 도로에 들어섰다.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도토리묵 장수가 보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하여 차를 세우지 않고 빵..소리만 내고 지나쳤다. 모두에게 인사를 다 마쳤다는 생각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아내는 학마을을 기억하려는 듯이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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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figjekd 2009-10-0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국 권선생은 그런 선택을 했군요..진작에 똑바로 했으면 좋을텐데..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