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남편의 눈으로 아내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려요. 키도 평균, 외모도 평균, 그 밖에 눈에 띄는 게 없는 평범한 여자.


평범이라는 게 언뜻 듣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느낌일 수 있지만 사람의 모든 부분이 모조리 평균이 된다는 건 굉장한 거에요. 아무리 평범해도 한두개? 두세개 정도는 범위를 벗아난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모든 부분이 평균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굉장히 드문 확률로 나타나는 경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 아내는 정말 보기드문 모든 분야에서 평균인 사람이었을까요?

 

아니오, 이건 그저 남편이 그 사람을 보지 않았던 거에요.

 

피상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특이점조차 보지 않았던 거에요. 마지막 남편의 고백,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는 말에서는 그의 눈으로 보기에 미쳐버린 한 여자를 외면하고 싶다는 책임감의 회피와 처음부터 이 사람을 몰랐다는 깨달음의 중의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철저한 무관심, 아내가 아내로서의 집안일, 요리, 섹스를 한다면 그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조차 서로의 기능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현대사회의 무관심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 이 남편이라고 본다면, 보다 근원적인, 육식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강요된 폭력을 보여주는 건 바로 친정 가족들이에요

 

아버지는 권위적인 가부장적인 성격으로 직접적인 폭력을 보여줘요. 한마디로 직접 때리는 거죠. 어머니는 마음을 때려요.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에 잘 적응한 사위가 보기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에게 한약을 섞어 흑염소란 걸 모르게 하면서 억지로 속어가며 먹이려는 폭력. 그걸 거부하면 자신의 희생과 노고를 들먹이며 가해져오는 마음의 폭력. 친정 가족들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언니가 불러주기 전까지 나오지도 않던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기는 해요. 최소한의 개인적인 관심은 있는 원가족이긴 하지만 그들은 그 개인적인 관심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영혜에게 그들의 폭력에 동참하기를 강요할 뿐이에요. 

 

그동안 영혜(이름을 불러주고 싶었어요. 최소한 저는..그래서 계속 이름을 쓰겠습니다)는 사실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처절하게 거부하고 있는 이 폭력을 자기자신도 잘 휘두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사실이 가장 못견뎠던 부분이기도 하구요. 똑똑했던 예뻐했던 흰 개, 주인집 딸인 영혜를 물어버린 흰 개를 무더웠던 날에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묶어 죽을때까지 끌고 달리게 해요. 처음 끌려가는 개를 보는 어린 영혜는 날 물더니 잘됐다며 지켜봐요. 동네 한바퀴 돌고 온 개는 힘들어하고, 두바퀴, 세바퀴.. 마침내 지칠 때까지 도는 동안 어린 영혜는 집 앞을 지나쳐 가는 개의 모습을 모조리 바라봅니다. 마침내 죽어서 그 피맺힌 눈동자로 실려올때까지. 이 모든 장면에서 영혜의 감정은 맨 처음 한 문장, 날 물더니 잘됐다 라고 표현한 문장 외에는 나오지 않아요. 무심히 지켜볼 뿐이죠. 그리고 나중에는 물린 상처가 나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기를 한 입 먹었다고 고백을 하고는 아니, 사실은 한 그릇 다 먹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무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을까요?


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 있는 어린 영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이라 상상해봤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에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해요.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 아마도 처음에는 개가 혼나는 것이 고소했던 어린 영혜가 점점 강도가 심해지는 폭력, 사회적으로 정당하고 영혜 자신도 가담해야 하는 폭력을 보고 처음에는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느꼈겠지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그 장면을 그리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리고 아픈 것이 낫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입 먹었다는 변명도, 그렇게 변명한 이후에 아니 사실은 한그릇을 다먹었다고,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고 토해내는 고해성사도 없었겠지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면 그게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고 콕 찝어 이야기 하지는 않았을테니까. 하지만 그 사회적으로 용인된, 같이 가담해야 하는 강요된 폭력 앞에서 영혜는 감정을 죽여야 했을 겁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의 죽음, 아마도 최소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에서의 죽음은 바로 부정,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는 두려움에 대한 부정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어서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요. 다만 저 밑바닥의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을 뿐. 육식이, 고기가, 살과 피는 모두 소화되어 없어져도 영혼만은 남아 목구멍에 걸려있던 것처럼 영혜의 감정도 살아남아 무의식 속에서 언젠가는 솟아오르기 위해 웅크리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영혜에게 더 끔찍했던 것은, 사실은 자신도 그 폭력을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나온 꿈에서 영혜는 자신 안의 폭력성을 마주합니다. 바로 핏구덩이에 비친 소름끼치는 낯선 자신의 모습으로.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강요된 사회의 폭력이라고 해도 그 사회는 인간 하나 하나가 만들어낸 집단. 무리가 되어 더욱 강해지고 공고해지고 세련되어 지긴 했지만 그 안에는 우리 자신 하나 하나의 폭력성이 녹아들어가 있게 마련이고 그 안에는 영혜 자신의 폭력성도 있었던 겁니다. 꿈에서 영혜가 먹었던 날고기는 누가 억지로 먹인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먹은 겁니다. 그 폭력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원하는 폭력성도 공존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고, 그래서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결심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도 해칠 수 없는 유방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고기를 먹지않는 채식, 그 폭력성을 대표하는 육식에 대한 반대의 폭력인 채식이 영혜 자신도 갉아먹은 것이라고 봐요. 그 자신도 가해자이며 내밀한 내면에는 그 폭력성을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도 있기 때문에.

 

난, 고기를 안 먹어요


눈물이 날 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투명한 영혼을 보니 '적과 흑'에서의 줄리앙 소렐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잘 지내기 위해 하는 약간의 거짓 섞인 행동인 '예의' 조차도 위선으로 바라보던 그 투명한 영혼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는 자기 자신일 수가 없어서 산골 속 어느 동굴 안에서 "그리고 난 자유다"라고 토해내던 음성이 겹쳐 들려서 아릿한 마음의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남편은 영혜가 '예의'바르게 감사하지만 먹을 수 없다 라고 돌려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더이상 사회의 거짓과 폭력을 묵인하고 그에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난, 고기를 안 먹어요.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새를 먹는 영혜의 모습이 나옵니다. 원래 싫어하던, 그녀에게는 평화의 상징인 유방을 보이지 않게 덮고 있던 브래지어도 없이, 상의까지 모두 벗은 채. 그러면서 묻지요. "... 그러면 안돼?" 영혜는 세상을 향해 묻고 싶었던 겁니다. 폭력성을 버리면 안되냐고 (유방의 노출). 그리고 비꼽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폭력이 바로 이거라고 (새를 잡아먹기).

 


영혜역시 무관심하고 폭력적입니다. 친정 가족이 불러주어서 영혜의 이름을 알기는 하지만 남편 역시 이름이 없습니다. 육식의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그 반대의 폭력인 채식을 합니다. 화해가 아닌 반대쪽에서의 폭력. 이 사회의 폭력에 대해 저항하지만 그 자신의 폭력성의 한계로 화해가 아닌 반대방향의 폭력을 택해버린 영혜. 어쩐지 원죄가 떠오르는, 인간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

 

너무나 강렬한 느낌에 그걸 토해내지 않고는 도저히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었던 채식주의자 파트를 뒤로 하고 더 강렬하다는 몽고반점 파트로 들어갔어요. 대충 불륜 관련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도대체 어떤 강렬함을 담고 있을까요?

이번 파트의 주인공은 영혜의 형부입니다. 예술가라는 그는 생활력 강한 영혜 언니 덕분에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이전 편에서 영혜 남편이 변변치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했었던 바로 그 사람이죠. 예술가, 천상의 이미지와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자,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자. 그리고 언제나 저너머의 이상 세계로 날아가기를 꿈 꾸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이미지를 꿈꾸었죠. 아내에게 몽고반점에 대해 들은 이후 자신에게 떠오른 욕망에 당황하며, 자신이 그동안 자유로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예술로 표현해내는 것에 무한정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깨닫지 조차 못했던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이 세상이 구속하고 있는 모든 억압을 파헤쳐볼 예정이고 이번엔 성적 욕망을 건드려볼 참인 걸까요? 작가는 선정적인 소재로 온갖 억압의 코드를 한 번 뒤흔들어 볼 생각인 걸까요? 일단 더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영혜의 몽고반점에서 떠올린 것은 꽃이에요. 식물이죠. 도대체 왜 그것을 떠올렸을까 궁금해하며 읽어나가다 이 문장을 마주쳤습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아...몽고반점이란 연결고리가 이어주는 것은 식물, 그리고 태고의 기억이었습니다. 광합성을 하는 초록 엽록소의 색상. 광합성이야말로 식물과 동물을 나누는 근원적인 것이었습니다. 육식은 눈에 보이는 폭력이지만 채식 역시 어쩔 수 없이 폭력적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육식이라면, 움직이지는 않지만 역시 살아있는 것인 식물을 먹는 것이 채식이니까요.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서 먹어야만 하는 동물로서는 근원적인 평화는 얻을 수 없었던 겁니다. 오로지 광합성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식물만이 순수한 비폭력, 평화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근원적인 원죄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대비되는,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관계와 독립되어 '혼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식물. 그리고 그 핵심인 광합성. 그 광합성의 흔적이 태고의 것처럼 남아있다는 건 머나먼 옛날에는 우리도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었다는, 혹은 최소한 그 식물과 같은 기원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영혜는 다시 식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겁니다. 햇살 아래에 광합성을 하며, 더이상 먹는다는 폭력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또 하나. 몽고반점 자체는 성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다고 위의 문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요. 이 성적 욕망은 그럼 영혜 개인에 대한 사랑이나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합일이지요. 첫 번째 파트, 채식주의자에서 남겨놓았던 육식과 평화의 갈등. 화해가 아닌 반대의 폭력을 택했던 육식과 채식의 갈등이 이번 파트에서는 화해를 시도하려고 했던 겁니다. 흔히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같이 이야기 됩니다. 성적 결합과 죽음의 체험은 근원적으로 유사한 것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여성과 남성의 결합과 합일, 그 개인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가는 바로 그 경계면에서 이루어지는 죽음과 유사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양 극단의 합일을 의미하기에 고대 종교에서도 이 땅과 하늘을 연결하기 위해 제물의 생명을 바치는, 죽음-타나토스를 이용한 제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성적인 코드가 금기시 되기에 드러내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에로스 역시 비슷하게 하늘의 이상과 맞닿기 위한 제의로 이용됩니다. 어쩐지 영혜를 향한 주인공의 성적 욕망은 바로 그러한 제의, 탄트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탄트라는 밀교, 숨겨진 비의, 스승의 안내 없이는 제대로 된 길로 합일에 이르기는 커녕 미쳐버리거나 파멸할 수 있는 위험한 에너지. 과연 스승도, 이끌어주는 지침 하나도 없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향과의 합일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이 탄트라는 성공적으로 두 세계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들이 배우지도 않은 탄트라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고반점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집단 무의식에 접촉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고대부터 현재, 미래를 통틀어 모든 지식이 흐르고 있다는 아카식 레코드, 그 집단 무의식에 이끌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수행할 수 있었던 탄트라는 아마도 이 지점까지였을 것 같습니다

이 이미지는 절정도 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반복되어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비디오를 끈 채, 이제는 탄트라가 아닌 그저 육체의 성적 욕망에 이끌린 '불륜'을 하게 된 것이겠죠. 그리고 바로 영혜의 언니가 나타나면서 소설은 이제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지침도 없이 수행된 유사 탄트라는 합일을 이루는 대신, 거부하고 싶던 육식, 아니 먹는다는 행위의 동물의 세계를 부숴버리고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장은 영혜의 언니에게로 옮겨집니다.

언니는 착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 잘 적응해서 살고 있습니다. 만일 동생과 남편의 극단적인 일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이면 따위는 바라볼 일 없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을 스스로 감당하며 착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갔을 겁니다.

막을 수 없었을까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막을 수는 없었을까 고민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봅니다. 바삐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는 결코 보지 않았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동생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찬찬히 살펴보며 그 자신의 성실성, 책임감,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나갈 수 있게 해주는 그 미덕의 뿌리가 사실은 비겁함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지친 어머니 대신 끓여드렸던 술국은 맏딸의 책임감이기도 했지만 그대신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생존의 방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그녀의 삶, 아니 생존의 맨 얼굴은 가혹합니다. 내면의 자아와 분리되어 버린 현실의 자아는 닦아줄 수 조차 없는, 피눈물을 흘리는 본연의 자아를 꿈에서 마주합니다. 그러다가 하혈을 하게 되고 혹시나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되면서 좀 더 깊숙히 마주하게 된 스스로의 삶.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남편과의 부부관계, 그것은 치욕과 고통이었습니다. 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마주한 스스로의 삶은 그저 견뎌왔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 그녀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었고 다시 살아갈 날들이 기한 없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겁니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책임을 견뎌내야 할 '생존'이었으니까요.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그녀 역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싶던 때가 있었습니다. 문득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때, 자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죽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을 등지기 위해 산으로 갑니다. 자신 앞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탈출구, 죽음을 향해. 그러나 여섯 살 난 지우의 엄마인 그녀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입원비를 대야 했고, 누군가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그래서 견뎌야 했던 겁니다. 지우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언니로서, 딸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닌 무수한 얼굴들로서 그녀는 생존해가야 했던 겁니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문에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정신을 놓아버린 동생과 현실에서 도망쳐버린 남편, 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이 책임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신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건 다만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지니고 있는 문제이고 누가 그 자리에 서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나무 불꽃, 이 파트의 제목이자 전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개념을 이미지화한 느낌인 나무불꽃이 등장합니다. 그 새파란 불길은 하늘로 높이 치솟아 있습니다. 그것은 수직선입니다. 광합성으로 홀로 고고히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필요도, 서로에게 책임을 질 필요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이상인 하늘을 향해 타오르면 됩니다. 홀로 스스로의 삶을 수직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반면 이 사회에 적응해서 사회인으로서의 미덕을 지니고 묵묵히 생존하고 있는 그녀의 삶은 수평적입니다. 수평으로 수평으로 뻗어서 얽히고 설킨 관계들. 지고 이고 나가야 할 책임들. 본래의 이상인 수직선의 삶은 없이,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는 가로선으로만 생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삶의 무게에 무너지지 않고, 그녀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워준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고, 그녀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꿈에서 본 내면의 자아는 더이상 울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미소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무심히 그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본연의 자아를 더이상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두 세계의 거대한 합일이 보입니다. 아니, 합일까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두 세계는 묵묵히 공존할 수 있게 됩니다. 관계를 통해 살아가야 하는 동물의 한계를 지고, 그 책임이 지워주는 무게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아마도 수직선상으로 저 새파란 나무 불꽃처럼 위로 위로 올라간다면 미소짓게 될 얼굴을, 그러나 지금은 웃고 있지 않는 얼굴을 바라봅니다. 가로선을 모두 놓아버리고 달아나버린 두 사람처럼 달아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가로줄을 모두 똑바로 짊어진 채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채식이라는 반대 방향의 폭력으로도, 무의식적 본능에 이끌려 행했던 유사 탄트라로도 도달할 수 없었던 두 세계의 공존의 가능성에 도달합니다. 묵묵히 일상의 책임을 짊어진 채, 가로선의 책임감을 외면하지 않고, 수직선 상에 있는 본연의 자신도 똑바로 직시했던 그녀였기에 마침내 그 수많은 수평선의 교차점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수직선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쪽 세계가 부서져버린 동생에게 속삭입니다.


...... 이건 말이야.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 ......


이 수없이 많은 책임과 관계의 가로줄. 사실 우리가 이 꿈에서 깨어나면 이게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가로줄에 얽메여 보이지 않았던 나만의 세로줄이, 이 꿈에서 깨어나면 선명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꿈에서 깨어난 이후의 일로 미루어 두고 지금은 현실의 책임을 지고 살아나갑니다.


무언가 굉장한 일탈로 시작되었던 강렬한 느낌이 이 부분에서 어쩐지 빛이 바래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강렬한 인상의 꿈과 채식,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진행되었던 소설의 마무리가 결국은 일상의 책임을 다하면서 본연의 자신을 잃지 말자? 너무 건전한 것 같기도 하고 일상이라는 것에 묻혀 빛바랜 느낌도 들고... 웬지 모르게 그토록 찾아다니던 파랑새를 집에서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소설의 마무리가 빛바랜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일상이라는 것의 무서움일 겁니다. 어떠한 빛나는 보석도 일상이 되면 그 빛은 바래기 마련이고 그 굉장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상이라는 것의 굉장한 힘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 관계에서의 책임을 다하면서 동시에 수직선의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두 세계가 아직 합일이 되지는 않았지만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사실 그 어떤 개념보다도 강렬하고 굉장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도 바로 그 일상에 젖어있기에 감탄이나 강렬한 느낌이 줄어들었을 뿐.


또한 그녀는 용감합니다. 무언가 좋은 것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길에 스스로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 길을 가야하기에 걸어가는 용기. 동생이나 남편처럼 파격적인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일상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걸어나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용감하고 대단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일상을 짊어지고 묵묵히 일상을 살아나가는 대단한 그녀는 바로 우리들 자신인 것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온 세상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린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호기심에 집어들었던 책의 도입부에서 한 남자가 차 안 운전석에서 갑자기 눈이 멀어버렸다.

눈이 안보여 하고 외치는 남자와 혼란스러워지는 도로. 녹색 신호로 바뀐 차도에서 정지한 차 때문에 성난 다른 운전자들로 시끄러운 도로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위화감이 들어 책 속으로 빠져들다 말고 나와서 바라보았다.

뭔가 기묘한 느낌. 마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아아, 말따옴표가 없구나!


청각을 박탈당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대화 내용이 없거나 소리에 관한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금 많은 편에 속할 정도.

하지만 따옴표로 분리되지 않은 문장은 마치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봐서 머리 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느낌을 주었다.

사실 눈이 멀거나 귀가 먹는다고 해서 세상의 빛과 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지하지 못 할 뿐이지.

마찬가지로 책에는 대화도 있고 소리를 묘사하는 문장도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결국, 시각을 박탈당한 세상을 청각을 박탈당한 채 바라보았다.


눈먼 자가 소수였을 때에는 사람들은 눈뜬 자의 기준을 따랐다.

눈을 떠야 가질 수 있는 예의, 문화, 조직 등등.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름조차 잃어버린 눈먼 자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도록

눈뜬 자들은 그들을 격리시켰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들이 눈뜬 자들이었을까?

같은 인간인데도 병에 옮지 않기 위해 격리하고, 억압하고, 마침내 죽이는 것까지 거침없이 저질러버린 그들이

과연 눈뜬 자였을까?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리고 이제는 눈뜬 자의 기준은 사라져버린다.

오직 남아있는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

본격적인 비인간화가 나타난다.

본문에 나온 말처럼 실명했기 때문에 인간으로써의 그들은 죽은 것이다.

사랑, 예의, 문화와 같은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눈먼 자들에게는 필요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눈을 뜨고 있었던 의사의 아내가 마지막에 읊조린 말처럼,

사실은 모두 이미 눈이 멀어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 이 시대에, 익명성에 파묻혀 각자의 이름을 잃어가고,

예의와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우리들은 과연 눈이 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흘러가는 이야기로 눈먼 자 중에서 가장 눈먼 자는 볼 수 있으나 보지 않는 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아마 책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지.


그러나 모든 사람이 눈먼 자가 되었을 때에도 의사의 아내는 끝까지 시력을 잃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이끌어준다.

모든 인간적인 가치가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자신도 결국 눈이 보여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사람으로 살아낸다.

역자의 번역 후기에서는 이렇게 남아있는 의사의 아내가 바로 현대사회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도 또 하나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청각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눈뜬 자의 시각으로 기술하는 것을 읽는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눈뜬 자의 입장에서 눈먼 자들을 바라본다.

눈먼 자의 속마음을 기술하는 문장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의 경우 책을 끝마치고 난 이후 되돌아보면

거의 대부분 의사의 아내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읽었다.

모조리 눈이 먼 세상에서 홀로 눈 뜬 사람.

미쳐 버린 세상 속에서 혼자 미치지 않은 사람.

이 사회가 인간성을 상실해간다는 말은 많이 듣지만

'내'가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나서는 사람은 그다지 본 적이 없다.

우리 모두가 나머지는 눈이 멀어버린 세상에서

혼자 눈을 뜨고 있는 각자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의사의 아내는 희망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자신은 눈을 뜨고 있다고 착각하는 독자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지하철에서 눈이 안보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며 눈을 감고 걸어보았다.

세 발자국 걷고 나니 분명 감기 전에 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어딘가 부딪힐까 두려워 눈을 뜨고 말았다.

눈을 뜬 상태에서는 눈먼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만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먼자처럼 보인다.

남을 이해하려면, 다른 사람과 교류하려면 눈을 감고 걸어보아야 한다.

부딪힐 거라는 두려움에도 참고, 그 상태의 그 두려움을 느끼며 걸어보아야 한다.

나만의 기준만을 고집하며 홀로 눈을 뜨고 있는 것은 보여도 보지 않는 가장 눈먼 자일 뿐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던 것 같다.

더불어 지금 나는 눈을 뜨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봐야겠다.

최소한 가장 눈먼 자가 되지 않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칼의 노래김훈 선생님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던가. 자기도 모르게 그 비슷한 문체가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서문을 읽어서 그랬던가. 초반의 글은 어색하고도 민망한 느낌이 있었다. 외과의사가 작가의 탈을 쓰고 어쭙지 않은 문장으로 문장가의 흉내를 내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서문에 나온 김훈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의사의 글쓰기와 전문 작가의 글쓰기는 다를 수 밖에 없다하지만 초반의 글은 전문작가의 문장을 흉내 내느라 어색해져서 글쓴이의 진심이, 진짜 상황이 충분히 녹아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중간부터 글쓴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술 도구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나열하며 그에 대한 느낌을 말하면서부터였던가. 점차 작가의 문체가 들떠 있는 느낌이 사라지고 진짜 이야기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초반의 이야기에서는 글쓴이가 그저 밥벌이로 이 길을 택했음을, 타인에 의해 아직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그저 계속할 뿐이라는 그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증외상이라는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분야에 투신한 그가 드라마처럼 멋진 사명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었는데, 단순히 밥벌이로 이리 저리 가다 그쪽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대한 실망감. 그에 대한 반감이 공연한 문체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나는 있어야 할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분수에 넘치는 끼니를 원한 적이 없다. 빈 그릇에 채워지는 것을 채워지는 대로 먹었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밥을 벌어먹는 것만으로도 허덕였다. 어쩌면 나의 허기는 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끼니를 채워도 가시지 않는지도 몰랐다.

 (골든아워1. p425)

 

그랬구나. 사실은 그저 밥벌이가 아니었던 거다. 그저 누군가 끝내 주지 않기에 했던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있는 힘껏 해봐도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호해주는 방어기제 보호막을 치기 위해 이건 밥벌이라고 계속 되뇌었는지도 모른다. 일생의 사명을 못 이루어 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애써 이건 그저 어쩔 수 없이 하는 밥벌이라는 가짜 변명으로 덮어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밥벌이라면 밥을 먹으면 그만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끼니를 채워도 가시지 않는 허기, 바로 그 허기는 대한민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중증외상센터를 세우고 싶다는 꿈, 그리하여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죽지 않도록 만들고 싶다는 바로 그 꿈에 대한 허기였을 것이다.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에서 한국에 중증외상센터를 만들기. 글쓴이 전에 딱 한 명이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저히 그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접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화석 같은 진료 기록이 있어서 다시 한번 중증외상센터를 세워보려고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진행형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된 시스템을 세우지는 못할 가능성을 더 크게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에 시도한 기록을 화석처럼 남긴다면, 먼 훗날 누군가는 정말 제대로 된 중증외상센터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읽었다.

 

문득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떠올랐다. 여왕개미의 첫 일개미. 맨 처음 여왕개미가 혼자 새로운 개미집을 짓기 위해 정착했을 때, 여왕개미는 움직일 수 없어서 자기가 낳은 알을 먹었다. 그래서 체력을 회복한 후 낳은 알 중 하나의 알만 골라 키우고 나머지 알을 먹여서 키워 애벌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애벌레도 도저히 더 키울 수 없어 다시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체력이 더 보강된 여왕개미는 새롭게 알을 낳으며 다시 한 번 하나의 알을 키우기 위해 나머지 알들로 그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를 먹이며 드디어 첫 일개미를 키워내는데 성공했다. 첫 일개미는 비록 간신히 일개미로 성장한 셈이라 비실거리는 개미였지만 여왕개미를 위해 먹이를 나를 수 있는 진짜 일개미였다. 그 덕분에 먹이를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된 여왕개미는 이제 건강한 알을 낳아 건강한 일개미를 키워낼 수 있게 되고 이렇게 새로운 개미 왕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글쓴이는 여왕개미가 키우는 중인 첫 일개미인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에 중증외상센터라는 전에 없던 시스템이 정착하기 위해 키워지는 중인 일개미. 아니, 아직 제대로 된 개미는 태어나지 않았으니 애벌레인가. 수많은 희생과 노력 속에 간신히 자라나고는 있지만 아직 비실거리는 개미로도 키워지지 못한 애벌레. 이번에는 결국 먹혀버리고 먼 훗날 화석 같은 진료 기록을 가지고 또 다른 일개미가 다시 도전을 해야만 하게 될지, 혹은 이번에는 비실거리지만 확실한 일개미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아직도 더 진행되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헬리콥터는 바람과 함께 주위 모든 것들을 깎아내며 그 반동으로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고정익 기체와 달리 글라이더 비행이 불가하므로 힘들어도 버텨서 항력을 얻지 못하면 곧장 추락한다. 어쩌면 나도 중증외상센터도 헬리콥터가 바람을 깎아 나아가듯, 내 동료들을 깎아가며 여기까지 밀어붙여왔는지도 모른다.

(골든아워2. p300)

 

시스템의 부재는 개인의 희생을 부른다. 공적인 사업이 필요한 것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증외상센터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 구역만을 대상으로 하면 발생빈도가 낮거나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인력과 기술, 자원이 집약적으로 모여있어야만 사람을 살리 수 있는 구조. 그것을 대비해 시설과 인력을 확충해놓는 것은 개인이나 사적인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중증외상센터는 공적으로 구축된 시스템이 없는 중에 오로지 구성원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버텨나가는 중인 것 같다. 헬리콥터를 띄우기 위해 깎여나가는 바람처럼 중증외상센터를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땀과 눈물들이 깎여나가는 중인 것이다. 중증외상센터도, 그 밖에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시스템 자체의 오류를 지닌 채 개인의 희생으로 기름칠 치며 삐걱거리고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헬리콥터 소음에 관한 민원이 나온 부분에서는 부끄러웠다. 그리고 화도 났다. 사실 오밤중에 헬기 소리가 나면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시간 당장 사람을 살리기 위한 일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민원을 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제대로 홍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일 분 일 초가 급한 응급 환자를 이송할 때 헬기 소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홍보. 그나마 이번에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책이 나와서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생명과 직결된 일에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는 개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소음은 싫지만 타당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오밤중에 헬리콥터 소리가 나면 무작정 투덜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이 고맙다. 그런데 이건 공적으로 중증외상센터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글쓴이 개인이 낸 책일 뿐이다. 결국 알리는 일을 또 개인이 했다는 점에서 또다시 시스템의 부재가 느껴진다. .. 국민의 의식의 변화를 위한 홍보와 교육도 또다시 개인이 했구나. 시스템의 부재가 시리도록 춥게 다가온다.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골든아워 1권 책 표지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어보게 된 것도 어쩐지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한 책은 아닌 것 같다. 글쓴이의 상황이 의사로서 일반적으로 겪는 상황이 아니고, 아직도 제대로 궤도에 오르지 못한 시스템을 만드는 미완의 이야기는 동기 부여에 적합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다만 의사를 꿈꾸는 아이들 말고 이 책은 그냥 모두가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비록 중증외상센터 말고도 손봐야 할 일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지 않도록 하는 일,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은 우리 사회가 먼저 팔 걷고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애벌레에서 제대로 된 일개미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중증외상센터의 기록이 화석이 되지 않기를. 한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중증외상센터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일, 부디 끝까지 완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등 5학년, 초등 2학년 아이들이 함께 뽑은 올해의 책입니다. 아이들이 읽다가 좋은 책은 엄마에게도 추천해주고 있는데요. 이 책은 감동적이라며 둘 다 강추하는 책이에요. 진정한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되길 바라며 올해의 책으로 ˝안내견 탄실이˝ 소개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