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사피엔스 내용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진화론, 우생학적 관점에서 인류의 세 가지 혁명을 조명하고 결국 지적 설계로 호모 사피엔스는 초인간으로 대체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볼 수 있다.

(검정: 요약, 파랑: 본문 인용, 초록: 내 생각)

<인지혁명>

250만년전 원시 인류는 동물과 비슷했으며 30만년전부터는 불을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그로 인해음식 살균, 소화 쉬워지고 창자 짧아져 뇌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불을 이용해 신체 한계 뛰어넘을 수 있었다. 10만년전 호모 사피엔스 출현했다.

7만 년 전 인지혁명 시작되어 사피엔스가 두각을 나타내고 호모 속 다른 종 멸종됐다. 뇌 커져서 생각 많이 하면 좋을 것 같다는 건 현대 인류의 착각이다. 뇌는 상당히 고비용 자원이기 때문이다. 직립보행으로 도구 사용 가능해지고 신체 구조가 분만 힘들어졌는데 뇌 커져서 작을 때 빨리 태어나야 해서 이른 출산으로 아기 시절 길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과 사회화 기간 늘어나 오히려 강점이 되었다. 사피엔스 이주하면서 다른 대형동물들 대량으로 멸종 했었는데 이후 농업 확산으로 2번째 대량 멸종, 산업화로 3번째 대량 멸종이 있었다.

사피엔스 성공 요인 언어 때문으로 보인다. 침팬지는 서로 알고 있어야 해서 무리 개체 수 20-50마리 정도로 유지한다. 150명 내외 큰 무리로 확대 가능하게 한 건 뒷담화 이론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핵심인데 집단적 상상 가능해져 공통의 신화로 많은 숫자 모여 협력 가능해졌다.  이러한 인지혁명 후 사피엔스는 객관적 실재와 가상의 실재 속에 살게 되었다.

유전적 혁명은 수십만 년 걸리는데 인지혁명 이래 신화 바꾸면 협력 방식도 바꿀 수 있어 변화 속도 빨라지고 미래 세대에도 전달 가능해졌다. 생물학이 아닌 역사적 서사가 사피엔스 발달 설명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인지혁명인 것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에 의하면 너무 빨리 변화해 현대인 사회적 심리적 특징이 수렵채집 생활에 적응해있다고 한다. 여기 따르면 7만 년 전 인지혁명과 12,000년 전 농업혁명 사이 사피엔스 생활에 대해 알아야 우리 특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석기시대 도구 대부분 나무여서 돌만 남아서 당시 생활 왜곡해서 보게 된다. 현대 수렵채집사회 보고 연구하는 것도 다른 사회 영향, 농사 부적당한 곳에 존재, 각 사회들마다 크게 다르다는 점이 연구 한계 만든다. 고대에도 수렵채집사회는 매우 다양했고 사피엔스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고 매우 다양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논리 전개는 진화 심리학 관점에서 봤을 때 이야기인데 이 가설을 진리인 것처럼 서술했다. 우생학적 관점이 이 책 전반적으로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진화 심리학처럼 우리는 수렵채집인의 마음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게 맞을까? 단순히 생명 보존과 관련된 공통된 부분은 그저 시대를 초월하여 생명 유지에 공통된 부분인데 그것을 수렵채집인 시대 마음이라고 보고 원시적 마음이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수렵채집사회 수십-수백 명 작은 무리였고 교역은 귀중품에 한정되고 대부분 서로 독립적이었다. 평균적 개인은 자기 집단 내에서만 생활하고 평생 보는 사람 몇 백 명 넘지 않았다. 생활 반경 수십 수백 제곱 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도 개인이 직접 접촉하고 생활하는 반경 계산하면 비슷한 것 같다. 수렵채집사회라 부르지만 주로 사냥보다 채집 위주였다.

하지만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게 되었고, ‘바보들을 위한 생태적 지위가 새롭게 생겨났다.

이 문장이야말로 저자가 우생학적 사고를 지녔다는 증거 같다. 파레토의 법칙이라고 일개미를 관찰하다 발견한 법칙 있다. 일개미 20퍼센트만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다. 이 열심히 하는 20퍼센트만 따로 모으면 그 중 또 20 퍼센트만 열심히 일한다. 그럼 엘리트 20퍼센트가 기능해서 나머지 80 퍼센트 바보들의 생태적 지위를 유지해주는 건가? 혹은 그 20퍼센트가 착취당하는 노예 집단인 걸까? 아마 현재 상황에서 기능하는 게 20퍼센트이고 향후 변화에 적용 가능한 가능성까지 포함한 다양성의 풀(pool)까지 합해서 100퍼센트가 되는 것 아닐까? 지금 현재 조건에서의 엘리트가 변화된 조건에서도 엘리트는 아닐 수 있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여유 생산량 생겨서 도태되어야 했을 바보들이 목숨 유지한 게 아니라 그 모든 다양성이 다 필요한 것이다.

저자와 같은 입장에서 보자면 시험관 시술은 해악일까? 몇 세대 혹은 몇 십 세대 후에 인류 존속에 영향 미칠까? 기술적 발전이 아니었으면 이어지지 않았을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게 해서 바보들의 유전자가 이어지게 하는 건가? 만약 몇 십 세대 후 인류 유전자에 실제로 영향 미친다면 현재 기술로 극복 가능한 불임을 치료하지 않는 게 윤리적인가?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가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평균 기대수명 30-40년이나 1년 이내 영아 사망율 높아서 그렇고 이 시기 지나면 60세까지 살 가능성 높고 일부는 80세까지도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면 60세까지 대부분 살았는데 30-40대가 평균이면 1년 이내 죽은 수가 60세까지 살아남은 수와 거의 비슷해야 하지 않나? 수렵채집 사회에 안전과 안정이 정말 있었나? 충분히 걱정 없이 영양 섭취가 가능했나

고대 수렵채집인 애니미즘이 일반적이었는데 동식물, 자연현상 등이 의식, 감정 있고 소통 가능하다 믿고 노래나 춤으로 직접 소통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이런 존재는 국지적이고 전지전능하지 않고 인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신적 부분 사실 알기 어려워 잘 모른다. 사회정치적 체계로 잘 모르고 전쟁이 주였는지 평화가 주였는지도 지금은 잘 모른다. 실생활 어땠는지도 알 수 없다.

<농업혁명>

BC 9500~ 8500년경부터 시작했고 지금 먹는 것도 BC 9500~ 3500년 경 작물화했던 종이다. 농업은 세계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생겼다. AD 1세기쯤 세계 대부분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 향한 도약이라고 생각했으나 시간 흘러서 사람들이 더 총명해졌다는 증거 없고 수렵채집인보다 농부들이 더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말 그랬을까? 수렵채집인은 다음 끼니가 보장되었을까? 생명의 위협을 받는 편이 농부의 노동보다 덜 불만스러웠을까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에 따르면 1 생리적 욕구, 2 안전 욕구, 3 소속과 애정의 욕구, 4 존경 욕구, 5 자아실현 욕구가 있는데 1번부터 순서대로 채우려고 하게 된다. 먹을 것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생명의 위협을 덜 수 있는 농경 사회가 정말 더 불만이었을까?

농업혁명으로 만든 여분의 식량은 더 나은 식사와 여유시간을 만들기보다 인구폭발과 엘리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부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악한 식사 했다며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 사기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DNA 복사본은 늘렸지만 개인에게는 덫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수렵채집 시대 인구수를 과연 피임으로 조절했을까 아니면 높은 사망률로 조정되었을까? 저자의 의견과 달리 후자였을 가능성 높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농경사회 1/320세 전 사망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인지혁명 파트에 기술된 수렵채집인 기대수명 계산한 것 보면 숫자 상으로 그럼 수렵채집 시대에는 절반 정도가 1세 이전 사망했어야 한다. 또한 DNA copy가 늘어났다는 것 자체가 해당 종이 살기 좋아졌다는 증거 아닐까? 요즘 기술 발달로 수고와 시간 절약해도 더 느긋한 삶 살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으로 수렵에서 농경으로 오게 된 것도 좋아진 게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우리는 더 나빠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술의 발달로 더 여유 있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건 생긴 여유 시간에 더 멀리 깊게 보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농경이 개인으로서는 더 힘든데 자기들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없어서 농경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수렵채집인은 전체적 결과 파악하는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피임으로 인구수 조절했을까? 아마 그렇게 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도 죽어버려서 조정된 것이지. 농경시대 열심히 일했지만 아이들 숫자 더 늘어날 것 내다보지 못했다는 주장도 그렇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수렵채집 시대와 비슷하게 낳았어도 더 많이 살아남았을 테니까. 그러니 인구수 증가는 이전 시대에 잘 했던 인구수 조절을 못하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영아 사망률이 낮아져서, 보다 많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서 그랬다고 봐야 한다. 농업혁명으로 이미 인구가 늘어나버려서 수렵채집으로 못 돌아가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전체를 보지 못한다면 그냥 개인이 수렵으로 가고 싶으면 전체야 굶든 말든 수렵으로 가지 않았을까? 어차피 전체 못 보니까. 수렵채집이 당시에 확실히 더 좋아 보였다면 전체적인 인구수 증가 상관 없이 농경 버리고 수렵채집으로 돌아가는 개인이 늘어나 수렵채집이 계속 되었을 것이다.

식물이 사피엔스 길들였다는 주장과 곡물이 제공하는 탄수화물이 가장 이상적인 영양소가 아니라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동의한다고 진리인 건 아니다. 저자와 나는 동시대 문명 공유하니 공통적으로 넘어가게 되는 오류도 있을 수 있다. 저자와 내 의견 다를 때 내 쪽에 오류가 있다면 인정하고 수정해야 한다. 그게 과학이니까. 그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되지 않는 길이니까.

수렵채집인 무리는 먹을 것 없으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 되니 좋다는 주장은 동의하지 않는다. 동물은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루틴 벗어나지 않는다. 위험하니까. 벗어날 때에는 어쩔 수 없어서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는 것이다. 지금 현대 관점에서 보면 농경시대 일하느라 힘든 게 커 보이지만, 농업의 그 안정성, 계획 가능한 미래, 모여 살아서 천적에 대처 가능한 안전성은 그 당시 무엇보다 달콤하지 않았을까? 농민이 쉽게 옮길 수 없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 수렵인이 안정적이 되어서 정착이 가능했다는 표현이 수렵-농업 과도기에 보다 맞는 표현 아닐까? 수렵인 다양한 활동 했겠지. 그게 참으로 즐거운 레저 활동이었을까? 지금도 남의 돈 벌어먹기 치사하고 힘든데, 남의 생명 뜯어먹는 건 쉬웠을까? 그리고 수렵인 건강했겠지. 안 그럼 이미 죽었을테니까. 농부는 최후까지 터전 버티려는 경향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터전 옮기는 건 수렵채집인이든 농부든 현대 사회인이든 다 힘들다. 현대는 회사가 무척 많으니 여차하면 옮기면 된다는 소리와 비슷할 것 같다.

농업혁명으로 넘어가게 된 이유에 대한 추측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치품의 함정이다. 인류가 좀 더 편한 생활 추구해서 막강한 변화의 힘이 생겼고, 다들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세상 변화시켰다는 가설이다. 하나의 가설로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의식적으로 삶을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란 가설도 있다 BC 9500년 수렵채집인이 만든 거대 구조물 있는데 종교나 이데올로기로 대규모 협력 가능했고, 사원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 공급하기 위해 농업혁명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다.

목축도 생겨서 가축은 진화적으로 성공, DNA copy는 폭증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물이 되었고 인간도 사회 압박 받아 고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진화적 성공, DNA copy 수량 증가와 개체의 고통간의 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농경사회로의 진입과 동물의 가축화를 비슷하게 보이게 기술하고 있으나 결정적 차이 있다. 자의인가 타의인가. 인류 집단의 선택이니 개인은 타의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농업과 목축 둘 다 인간의 편의가 목적이다.

농업혁명으로 인류가 급격하고 빠르게 증가했다. 공간은 축소되고 시간은 확장되었다. , 영역은 좁아지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수렵채집인은 걱정 없었다고 하는데 대처방안이 없으니 닥치면 그냥 죽어야해서 그랬다. 걱정보다는 위협, 두려움을 느꼈다. 농경시대에는 대비하면 살 희망 생기니 대비를 잘 못 할까봐 걱정이 시작되었다. 농사 스트레스 영향으로 대규모 정치사회 체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인간의 안정된 미래 대신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현했고, 대다수는 연명할 것만 남았다.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 되었다.

전쟁과 혁명은 식량부족 때문이 아니라 아직 대규모 협력 본능이 진화 못해서 그런다는 주장도 있다. 진화적으로 큰 공동체 이루는 생물로는 개미나 꿀벌이 있는데 이들 사회는 유전자에 부호화 되어 안정적이다. 이들 사회는 군집이 하나의 단위라서 위에서 생각하면 나머지 몸통은 따르는 구조이다. 사피엔스의 사회는 가상의 것이라 의식적 노력 필요하다고 한다. 긴 시간 진화한 것이 반드시 선인가? 개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개미에게는 이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생각은 위에서 하는 것이니 개체는 그저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니 갈등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유전자 부호화된 사회가 이상적인가? 부호화 되어 안정적이라는 건 모든 구성원이 동의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게 없어서 생기는 갈등은 악인가? 불편은 발명의 아버지, 갈등은, 서로 다른 의견은, 민주주의는, 유전자의 다양성은,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는, 이 모든 다름은 우리 문화를 이루었고, 환경 변화에 적응 가능한 새로운 다양성을 탄생하게 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적극 수용한 문화는 융성했고, 정답을 제시하고 그에 맞추려 다른 다양성을 거부한 문화는 쇠퇴했다. 갈등은 짧은 시간 진화에 따른 부적응의 산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문화적 진화를 이루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그걸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하니까. 진화의 경우 갈등이 아니라 적자생존이 동력이 된다. 부적합한 개체와 종을 죽여버림으로써 맞는 방향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찾아나간다. 그것이 갈등보다 선한가?

유전자에 새겨진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 협력망은 ‘상상 속의 질서’가 필요했고 대부분 압제와 착취에 적합했다. 제국들 협력망 모두 공통의 신화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상상 속의 질서’였다. BC 1776년 함무라비 법전과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 평등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창조사상과 연결된다. 우리가 믿는 건 진리라서가 아니라 효과적으로 협력 가능하고 나은 사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사회를 긍정하는 함무라비 법전도 평등 선언하는 미국 독립선언문과 완전 반대 내용이지만 같은 역할 했다. 상상의 질서 유지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대부분 폭력과 강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순수하게 폭력만으로 유지하기는 힘들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사회 피라미드 꼭대기는 진짜로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뇌의 한계 극복한 건 문자 기록이다. BC 3500년 ~ 3000년 수메르에서 문자 발명했는데 역사상 최초 문서는 경제 문서였다. 정보 기록하는 방법은 유전자 – 뇌 – 문서 순으로 발달했다. 최신일수록 기록 속도와 변화 속도가 빠르다. BC 3000-2500년 사이 수메르 문자체계는 완전한 문자체계인 쐐기 문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 상형문자, BC 1200년 중국, BC 1000-500년 중미에서 완전한 문자체계 발달했다. 기록을 위해서는 문자 외에도 조직화 방법, 복제수단, 검색법, 다룰 줄 아는 사서가 필요하다. 또한 숫자라는 불완전한 문자 체계인 아라비아 숫자 9세기 인도에서 발명됐다. 불완전한 문자 체계이지만 세계의 지배 언어가 되었다. 최근 컴퓨터 2진법 문자체계도 생겨났다. 인공지능 분야는 이진부호에 기반 둔 새로운 종류 지능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뇌 자체가 이진법, 양자컴퓨터 기법 모두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냅스가 연결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 이진법, 전류가 흐르는 전자는 양자역학의 영역, 모두 우리 뇌에서 쓰이는 경로인 게 아닐까?

농업혁명 후 상상의 질서와 문자체계로 생물학적 본능도 없이 대규모 협력망 만들었으나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라고 서술한다. 과연 유전자에 새겨진 갈등 없는 사회가 문화로 빚어진 갈등 있는 사회보다 선한가 하는 문제는 앞에서 이야기 했고, 여기서는 그에 따른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모든 차별은 허구에 뿌리 두는데 자신의 뿌리가 허구라는 걸 부인하고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는 공통점 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 위계질서는 자연스럽고 정당한데 다른 기준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현대 인종차별은 반대하는데 빈부는 인정하는 것이 하나의 예시이다. 인간사회에 상상의 위계질서와 불공정 차별이 필요한 듯도 싶다. 위계 질서는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인간의 생존에 차별과 스트레스가 필수였다는 내용이 나왔었는데 어쩐지 그 내용이 떠올랐다.

사회적 차별에 능력도 영향 주지만 대부분 재능에는 육성과 개발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외된 계층이면 능력 있어도 성공 가능성이 적다. 경제 역시 비공식적 유리천장을 만든다. 위계질서 대부분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되는데 이후 여러 집단들 이해관계로 고착되게 된다.

유전적 우월성이 사회적 열등성 되기도 한다. 유럽인보다 아프리카인이 황열병 안 걸려 농장 노동이 가능했고 노예에 투자가 몰리게 되었다. 미국에서 노예제 불법화한 건 사회가 자발적으로 노예제 추방한 역사상 최초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건 미국인이 도덕적이라서 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생기니 노동자와 소비자가 필요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러나 노예 해방 후에도 인종차별적 신화는 유지되었다. 흑인들은 해방돼도 좋은 직업 못 가지고, 그러면 환경 나빠 능력 개발 힘들고, 다시 나쁜 직업 가지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전적으로 정말 열등한 게 아닌가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더불어 미의 기준도 백인 기준이 되어 상상의 위계질서 강화되었다.    

한편 성차별은 다른 차별과 달리 독특하다. 상상의 질서 다 다르지만 모든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위계질서가 성별이다. 남녀는 실제 생물학적으로 다르다. 출산은 여성의 일이다. 이에 따라 남성성 여성성 이야기 하지만 대체로 생물학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명한 근거는 없고 문화적인 것이다. 남자는 XY 유전자와 생물학적 속성 지닌 사피엔스가 아니라 사회가 상상하는 특정한 자리에 맞는 존재이다. 농업혁명 이후 대부분 남자를 높게 평가하는 부계사회가 되었으나 왜 그런지 이유 모른다. 이에 대한 가설 3 가지가 있다.

근력 때문이라는 가설이 첫 번째인데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은 다르다는 점이 문제점이다. 두번 째 가설은 남성의 지배가 공격성의 결과라는 가설이다. 그러나 전쟁 승리 열쇠는 동맹 구하고 적군 마음 읽는 능력인데 여성이 이런 능력은 더 우월하지 않느냐는 저자의 주장이 있다. 그런데 남녀의 뇌에는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해 사고방식 미묘한 차이 있다. 적군이 대다수가 남성이라면 여성보다 남성이 더 섬세하게 읽고 대응할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적 유전자가 후대에 더 잘 이어졌을 것이라는 가설은 동물 사례에서 보면 반례가 많다는 문제점이 있다.

<인류의 통합>

대규모 협력 가능하게 하는 인공적 본능 네트워크가 문화인데 모순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내적 모순 있고 이건 모든 문화 공통 핵심이어서 이에 관한 용어도 있다. 바로 인지 부조화다. 이걸 중재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만들어진다. 모순은 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이고 문화의 엔진으로 창의성과 활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역사는 작고 단순한 문화들 점차 뭉쳐 크고 복잡한 문명으로 변해왔다. 오늘날 여러 생활방식 있고 서로 논쟁하고 싸우지만 사용하는 개념과 무기 동일하다. ‘고유’가 외부 영향 없는 고대 지역전통이라면 오늘날 지구상 고유문화 없다고 봐야 한다. 다 서로 영향 받기 때문이다 (민속 요리 대부분 원산지가 다른 나라다)

종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 질서 후보 세 가지로 화폐, 제국, 종교가 있다.

돈은 어떻게 신과 왕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물물교환은 제한된 물품만 가능해 대부분 돈 개발했다. 현재 화폐 90 퍼센트 이상은 컴퓨터 서버에만 존재한다. 신뢰가 돈 만드는 원자재이다. 따라서 금융 시스템은 정치, 사회,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국경 문화 초월하는 단일 화폐권역의 등장으로 지구 전체를 단일 경제권역으로 통합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이 금에 대한 믿음은 공유하는 이유로 두 지역이 무역으로 연결되면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평준화된다. 따라서 상대방 화폐도 이쪽에서도 가치가 생기게 된다. 종교는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한다면, 돈은 다른 사람이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돈은 보편적 전환성, 신뢰 있어야 한다. 전통, 친밀한 관계, 인간 가치 부식시키고 수요 공급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한다는 어두운 면 있다.

제국은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 지닌 상당히 떨어진 지역 거주하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민을 지배한다. 문화의 다양성과 영토의 탄력성이 제국의 독특한 특징이며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 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현대인 대부분은 제국의 후예이다.

제국 건설, 유지에는 전쟁, 노예화, 국외 추방, 대량학살 등 악랄한 방법 필요하다. 그러나 제국 엘리트는 그 이익을 인류 발전에도 이용했다. 인류의 문화적 성취 중 상당수가 피정복민 착취 덕에 생겼고 제국은 작은 문화들 융합해 큰 문화 만드는데 기여했다. 황제에게 대단히 유용했기에 표준화도 시행했다. 자기네 문화가 피정복자에게 더 큰 이익 된다고 주장했으며 복속시킨 민족에게서 많은 것 흡수해 혼성 문명 되었다. 제국을 악당으로 몰고 싶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문화는 제국 유산인데 제국이 정의상 나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제국 유산만 도려낼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늘날 인도인 중에서 민주주의, 영어, 철도망, 사법제도, 크리켓, 차가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며 여기서 벗어나자고 국민투표를 요구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이 옛 지배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 아닐까?

결과가 좋으면 동기와 과정은 선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 결과는 반드시 그 과정이어야만 얻을 수 있었는가? 제국의 유산이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해서 그걸 비난하면 안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절대선이 아니니까. 나쁜 건 나쁜 것이다. 의도치 않게 그 결과 중 좋은 점이 생겼다 하더라도.

원인이 된 악과 그 결과물로 얻어진 것을 동일시하지 말자. 철도망과 제국주의는 다른 것이다. 특정 부분은 식민시대의 잔재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과, 그게 인도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는 건 다른 이야기이다. 식민지배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부분을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겨우 얻어내야 했다. 도둑질 해서 빵 먹은 게 살이 되어서 분리할 수 없고, 살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니 도둑질은 정당하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빵과 그로 인해 신체 일부가 된 살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빵을 훔친 행위, 그 과정의 비윤리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옛 지배자들이 좋은 것을 남겨줬으니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사상은 깡패가 때려서 도망쳤는데, 도망치느라 달리기를 해서 그만큼 건강해졌으니 고마워하라는 소리 같다. 현재의 모습은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제국주의가 폭력이었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게 과거로부터 배우기 위함이라면, 이득을 줄 수 있으니 식민지배를 하는 것도 악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게 아니라, 잊지 말고 기억하고 그런 폭력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줘야 한다.

우리 눈앞에서 형성되고 있는 지구제국은 특정 국가나 인종 집단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옛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 이 제국은 다인종 엘리트가 통치하며, 공통의 문화와 이익에 의해 지탱된다.

기묘하게 지금의 글로벌화와 예전 제국을 같은 명칭으로 묶고 있다. 그리고 예전 제국들도 과연 모두 동일한가? 고대 잉카제국과 자본주의 발달 이후 식민 지배하는 대영제국은 같은가? 공통점 두 가지를 드는데 그것만 같으면 같은 제국이니 비슷하다고 보는가? 그것만 같으면 제국이니 제국이라는 것 자체가 heterogenous group 아닐까. 이 문장은 글로벌화는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는 것이니 그걸 제국으로 불러 과거 제국에 대한 나쁜 감정을 희석시키겠다는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종교란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이다. 서로 다른 넓은 영역 아우르려면 추가적 두 가지 속성 필요한데 이것은 보편적, 선교적 특성이다. 이 특성을 가진 종교로 기독교 외에 불교, 이슬람교가 있다.

농업혁명이 동식물을 소유물로 끌어내렸다. 양떼 통제하고 싶지만 통제력 제한되어서 여기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게 신의 기원이 되었다는 게 지배적 이론이다. 고대 신화 많은 부분이 동식물 지배 대가로 신들에게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교역망 확대되자 넓은 범위 아우르는 권위 지닌 존재 필요해졌고 이에 따라 다신교 출현했다. 애니미즘에서 인간이 세상 사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였다면 다신교에서는 인간 지위 격상되었다. (내용 중 일신교 박해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 자신의 객관성과 제국을 옹호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졌다.)

유대교 ‘지역적 일신론’ 단계였는데 기독교와 함께 비약적 돌파구가 생겼다.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 2천년간 일신론자들은 모든 경쟁상대를 폭력적으로 말살해서 자신들 힘 강화하려고 노력했으며 오늘날 동아시아 제외한 타지역은 대부분 유일신 충실히 믿고 세계 정치질서 또한 유일신적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일신교 내 다신교 살아남았고 기독교 성자들, 성인 중 과거 다신교 신이 남은 경우도 있다. (일신교는 악의 문제가 해결 어려운데 이신론자는 질서를 설명하기 어렵다.)

신 섬기지 않고 자연법칙 믿는 불교도 있다. 번뇌 원인은 사람 마음이 행동하는 패턴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 고통 없고, 집착 없애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 99퍼센트는 열반 도달 못하고 세속적 성취 추구하며 부처들과 보살들로 구성된 만신전 발전시켰다.

지난 3백년은 자연법칙 종교 고려하면 치열한 종교전쟁 시대였다. 이 종교들은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 칭하지만 종교를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규범과 가치의 체계라고 본다면 종교라 할 수 있다. 일신교나 대중불교 못지않게 혼합적이다. 유신론적 종교는 신을 숭배하는데 인본주의적 종교는 사피엔스를 숭배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성’ 정의에 따라 3개로 나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로 개개인 내면이 세상에 의미 부여한다.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은 인권이며 일신론적 신앙에 근거 둔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인간성’이 집단적인 것이라 믿으며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 신성하다고 본다. 평등을 추구하고 이 역시 일신론 토대 위에 세워졌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유일하게 전통적 일신론 속박에서 벗어났다. 국가 사회주의(나치)와 우생학이 속한다.

생물학자들이 나치 인종이론 근거 적다고 폭로했으나 인종차별주의가 사라진 건 과학적 연구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발전이 더 강력한 원인이었다. 백인 우월주의 1960년대까지 미국 주류였으며 우수한 자들만 번식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나치 이후 진화론적 인본주의 금기 시 되었다. 생물학적 사피엔스 업그레이드 옹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요즘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초인간 만들기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생명과학 간극 커지고 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전통 기독교 영혼 존재 신앙에서 나왔으나 과학은 영혼 발견 못했다.

그런데 영혼과 신의 존재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유일한 근거인가? 아니다. Perception happens in the brain. 우리 각각은 모두 하나의 우주이다. 저마다의 우주에 살고 있다. 그러니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또 인공지능을 극한까지 연구하면 인간과 같은 지성체가 탄생할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인간은 만들어진 것인가 그냥 자연발생인 것인가? 신경세포도 전기로 연결되니 비유기물이지만 전기로 연결되는 방식을 동일하게 하면 ai도 지성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지성체는 하나님이 빚은 게 아니라 그냥 자연발생인가 생각하다 문득 왜 자연발생이면 가치가 없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서 신이 부여한 권한이 인권이라는데, 자연발생이어도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그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개체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의미란 주관적인 것이니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나 의미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의미나 가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유기물 지성체가 탄생한다면 그도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존중해야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 아닐까?

Self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된다는 것” 책을 읽고 보니 self라는 일인칭 시점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 뇌의 환상이라는 내용이었다. 원소기호로 표시되는 물질적 존재로 존재하지 않아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self가 스스로를 의식하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는 있는 것 아닐까? 스프링 양쪽을 잡고 손으로 치면서 공놀이를 할 수 있다. 이 때 치는 건 파동이므로 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놀이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가?   

역사 방향은 대체로 다수 작은 문화가 큰 문화로, 마지막으로 하나의 전 지구적 사회로 이행한다. 그러나 최종 결과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사후 깨달음의 오류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는데 사후 깨달음으로는 명백해 보여도 당시 시점으로 보면 왜 그랬는지 명백하지 않은 현상이다. 게다가 역사는 2단계 카오스(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여서 역사 연구는 미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이나 필연적인 게 아니란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진정으로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개념도 18세기에서야 생겨난 개념이라고 한다. 지금 당연한 게 늘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

문화를 인간을 숙주로 하는 정신적 감염으로 보는 밈이라는 개념이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숙주인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데 뛰어난 문화라고 본다. 이렇게 문화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상당히 우생학적, 진화론으로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대인이라서 지니는 태생학적 한계를 지적당한 트라우마라도 있는 걸까? 기독교 박해에 대한 의견이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의견으로 자신은 중립적이고 생태학적인 견지를 지니고 있다고, 유대인이라는 징체성으로부터 벗어나있다고 외치고 있는 느낌이다.

<과학혁명>

1500년경부터 과학혁명으로 스스로 능력 증가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과거에는 능력 고정되거나 퇴화된다고 봤다. 과학 진보하려면 연구 외에도 정치와 경제의 상호강화가 필요하다.

과학이 전통지식과 다른 점은 무지를 인정하고, 관찰과 수학 중심이며, 새 힘의 획득에 대해 생각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무지 혹은 과거 신념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대규모 협력에 도움 되던 신화도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규모 협력, 정치사회적 질서 유지하려는 현대의 노력으로 과학이론을 절대이론으로 선포하거나 과학과 무관한 절대 진리에 따라 사는 두 가지 노력이 있다. 현대 사회질서 지탱해준 요인 중 하나는 기술과 과학적 연구방법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 자체도 진화록적인 역사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지식이 진리인가보다 힘을 주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문장이 있었는데,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 자체가 구진리의 방식 아닐까? 진짜 맞는 진리가 존재하는데 이게 그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니 연역법이다. 방식 자체가 귀납이라고 해서 진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다. 저 문장에서는 어쩐지 유용성 추구는 진리 추구에 비해 낮은 단계를 추구한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홍익인간. 쓰임 추구가 진리 추구보다 수준이 낮은가? 그렇지 않다. 쓰여지려면 정확하고 예측 가능하게 해야 하니 진리에 가까워야 하고, 진리에 가까워야 더 유용하다.

과학과 기술이 관련 맺은 건 최근이고 과거에는 대부분 새로운 기술은 학자가 아니라 교육 못 받은 기술자가 만들었다. 오늘날 전쟁은 과학의 산물이지만 과거 전쟁은 로마군 같은 경우 패배자가 오히려 기술 우월하기도 했고 고대 중국도 화약 폭죽으로나 사용했다. 화약 발명 6백년 지나서야 대포가 전쟁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는데 시간 오래 걸린 이유는 새 군사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때라서 그랬다. (그런데 철기시대, 청동기 시대는 기술이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과거라고 무조건 기술이 전쟁과 무관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는 대부분 진보 믿지 않았는데 무지의 인정, 과학의 발견이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진정한 진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랭클린의 피뢰침으로 신들 무장해제 시켰고, 가난도 기술적 문제라고 봤다. 실제로 사회적 가난과 생물학적 가난 중 후자는 대부분 옛말 되었다. 죽음도 도전하는 중으로 길가메시 프로젝트 진행되고 있다.

과학도 자금 지원 있어야 개발 가능한데 이 지원은 정치, 경제, 종교적 목적에 도움이 된다고 누군가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떻게 작동할지는 과학이 답하고,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가는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답한다. 이 둘과 제휴해야 과학 번성 가능하다. 지난 5백년간 가장 주요한 엔진 두 가지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있었다. (제임스 웹은 아폴로 계획 당시 NASA 국장으로 정치적 비난 막아주고 예산 따와서 아폴로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의 이름을 딴 망원경이다.)

과학혁명과 제국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로 탐사대 수집한 정보는 정치 군사적 가치가 뚜렷했다. 군대 보호 받은 과학탐사대, 소수 과학자가 따라 붙은 군사원정대. 당시 탐사대는 둘 다 해당했다. 무지를 인정하고 새 지식이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기 희망했다는 점에서 식물 찾는 식물학자와 식민지 찾는 장교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전 제국주의는 권력과 부 원했다면,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새 영토, 새 지식 찾아 떠났다. 18-19세기 주요 군사탐험대 대부분 과학자 태웠다.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과학 지식 발견이었다. (목적이 지식의 발견이라고 함으로써 대부분 사람들에게서 정복에 대한 명분이 있다고 느끼게 했다. 죄책감이 아니라 의무로 느끼게 했다. 자신이 악이라고 느끼면 제약이 있었을 텐데 선이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더 장려되지 않았을까?) 무지 인정 안 한 콜럼버스는 중세인이고, 최초의 근대인은 무지를 인정한 아메리고 베스푸치라서 그 이름을 따 아메리카 대륙이 되었다. 아메리카 발견은 전통보다 지금 관찰결과 선호하라고 가르쳐주게 되었다.

유럽이 미 대륙 정복한 건 아시아 강대국들이 관심 없어서였다. 유럽에서 군사-산업-과학체 꽃 핀 후 프랑스, 독일, 미국은 따라갔는데 중국 뒤쳐진 이유. 러시아, 이탈리아, 호주 따라갔는데 페르시아, 이집트, 오토만은 격차 줄이기 실패한 이유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구조가 달라서이다. 신화 공유한 나라들은 따라갔는데 근대과학과 제국주의 덕분이었다.

유럽 국가들과 아시아 강대국들의 신화 차이는 우월한 것인가 상이한 것인가? 뒤쳐져서 못 받아들인 것인가 달라서 안 받아들인 것인가? 후자라고 생각하지만 닫힌 계로 다른 것을 안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뒤쳐지게 만들었을 수 있겠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처럼 다른 문화들을 포용하는 문화는 번성한다. 그런데 이건 문화 자체의 우열이었다기보다 문화의 나이 차이 아니었을까? 아시아는 이미 번성하고 오래되어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 했고, 유럽은 신생이라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과학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함께 더욱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되는 시너지가 되었을 것 같다.

과학은 제국주의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영국 장교가 고대 문자 연구하거나 인도유럽어족 발견하기도 했다. 정복자들이 연구해 원주민보다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지식은 유용하기도 하지만 과학이 제국에게 이데올로기적 정당성 부여하기도 했다. 새 지식 추구는 선이라는 정당성을 주어서 피지배 민족 이롭게 하고 진보의 혜택 준다는 정당성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이 착취 사업이 아닌 이타적 프로젝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백인의 짐’이라 표현하는 이런 신화는 물론 거짓이라고 종종 폭로되었다. 제국을 압제와 착취로 표현하거나 백인의 짐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둘 다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선악 판단 불가하다. (여기서 또다시 저자는 제국에 대해 중립 입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짜 중립인가?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저자는 제국을 옹호함으로써 중립적으로 보이길 원하고 있으므로 제국 옹호하는 것 자체도 중립적으로 보이기 위해 나쁜 면을 일부러 언급한 것일까?)

자본주의에서 90퍼센트는 실제 화폐가 없다. 신뢰가 세계의 돈 대부분을 뒷받침한다. 과거에도 신용 거래 있었으나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 믿지 않아서 신용 크게 확장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파이 자르는 법 다양해도 크기 커지지 않으니 돈 많이 버는 것은 남의 것을 차지하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신용은 오늘 파이와 내일 파이 간 차이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진보 개념생겼다. 진보는 무지 인정하고 연구에 투자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그럼 전체 파이가 커지니 남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아도 나는 부자 될 수 있다. 전체 파이 커질 수 있다는 믿음이 혁명이 되었다.

민간 기업 수익 증대는 공동체 부와 번영 늘리게 되었다. 개인 수익 늘리려는 이기적 욕구가 공동체 부의 기반이 된다는 스미스의 주장은 탐욕이 선한 것이며 내가 부자가 되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한 것이다. 이기주의가 곧 이타주의가 된 셈이다. 경제를 ‘윈-윈 상황’으로 생각하라고 하는 스미스는 부와 도덕간의 전통적 대립 부정하고 부자에게 천국의 문 열어주었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은 새 윤리 등장인데 이것은 이윤은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한다는 윤리이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부 구별하는데 자본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이다. 점차 경제적 교리 넘어서 경제성장이 최고의 선, 혹은 그 대용품 된다는 믿음이 되었다. 정의와 자유, 행복이 경제성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경제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의 믿음은 과학 덕분인데 새 발견이나 장치가 경제 거품 터지기 전 또 무언가 새로운 건수 올릴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 비유럽 제국들 세운 건 관료 엘리트와 군사 엘리트였기 때문에 세금이나 약탈로 자금 조달했다. 유럽에서는 상인과 은행가가 지배 엘리트여서 정복에 필요한 자금 투자로 마련했다.

신용대출 – 자금 공급 – 새 발견 - 식민지 – 수익 제공 – 신뢰 형성 – 더 많은 신용대출

그러나 탐사는 불확실한 사업이어서 위험 줄이기 위해 합자회사를 만들었고 복잡한 금융 시스템 발달해 효과적 자금 공급 가능해졌다. 네덜란드 세계 제국 건설했는데 그 비결은 신용에 있었다. 정부가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건설했다. 1800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국유화, 1858년 영국의 인도 국유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구 정부는 자본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되어갔는데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투자자 이익 위해 치러진 전쟁 더 있고 전쟁 자체가 재화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의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전쟁 자금은 런던 주식거래소에서 반군 공채 발행으로 충당되었다. 그리스 자유와 함께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 기계 발명 등 요인 뿐 아니라 체제 변화나 해외 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에도 영향 받는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이다.

시장 자체만으로는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보호 못하니 법 만들고 집행해서 신뢰 보장하는 건 정치체제가 할 일이다. 18세기 내내 노예무역 투자 연간 수익률 6퍼센트로 엄청난 돈벌이였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하게 얻어지거나 분배되도록 보장 못하기 때문에 성장이 최고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제약 없으면 그 성장은 쉽게 파국이 된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 살해했다.

1908년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 탐욕에 어느 정도 고삐 생겼는데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여전히 불평등하다. 자본주의가 불평등하다는 비판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 운영할 수 있는 세계 창조했으니 어차피 대안 없다는 입장이 있고, 혹은 더 기다리면 파이 더 커지게 되어 모두에게 더 두꺼운 조각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1914년에 비해 2014년 평균적 인간 생활수준은 나아졌다.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원자재와 에너지 필요한데 조만간 다 고갈되지 않을까? 현대 경제 성장은 미래 신뢰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본주의자들이 이윤을 생산에 재투자 할 의사 충만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에 에너지와 원자재 필요한데 유한하다. 둘 중 하나 부족해 경제성장 느려질 위험 생기면 늘 과학적, 기술적 연구에 투자가 흘러갔다. 새로운 것의 발견과 발명으로 인간의 돈과 교환 가능한 것들이 증가할 것이라는 믿음이 신용의 바탕이 된다. 이 시기에는 진리였으나 요즘은 plateau인게 아닐까? 그래프의 상승 부분일 때 extrapoliate 해서 무한한 진보라는 상상을 했는데 이제는 그래프가 달라지는 걸까? 그래서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월급은 올라야 하고 물가도 오르니 실물경제는 그대로인데 인간의 돈만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돈으로 교환 가능한 것들은 두 가지 잣대를 하나로 측정하고 있다. 생필품 교환과 가치인정 차원의 의미가 모두 돈 한가지라 조정이 힘들다. 이 둘을 분리하면 현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줄다리기 하는 부분의 보다 나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산업혁명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과거 에너지 전환 장치는 사람과 동물뿐이어서 거의 모든 인간활동의 핵심은 근력이었고, 에너지원은 식물, 태양에너지였다. 인류 역사는 두 가지 주요 주기, 식물 성장 주기와 태양에너지 변화 주기에 지배 받았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다. 9세기 중국에서 화약 발명됐고 1700년경 영국 증기기관 발명되었다. 1825년 증기기관차가 발명되면서 기계 엔진이 에너지 변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얻게 되었다. 내연 기관 발명해 운송수단 혁명 가져오고 석유를 액체 정치권력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전기는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 핵심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고 유일한 한계가 무지라는 것 보여줬다. 화석연교 고갈되어도 태양 에너지 훨씬 많다. 에너지 효율 높이는 연구에서 원자재 부족도 해결할 수 있었다. 알루미늄 1820년대 발견됐고, 1860년대 금보다 귀했다. 1차 세계대전 화약 원료 초석 부족했으나 프리츠 하버가 공기에서 암모니아 생성 공정 발견했다.

산업혁명으로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되고, 생산성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농업에서 가장 크게 느껴졌으며 제2차 농업혁명이 되었다. 동식물까지 기계화됐는데 대서양 노예무역이나 현대 동물산업 둘 다 악의가 아니라 무관심이 기반이었다. 기계화된 농작물 재배법과 산업적 가축사육법은 농업 생산량과 식재료 양 급증시켜 현대 사회경제 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이걸 읽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치킨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배양육. 다시 과학이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줄 것인가?)

농업 산업화로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할 인력이 도시로 몰려 도시 산업혁명 가능해졌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급이 수요 넘어서 누가 살 것인가 하는 문제 발생했다. (지대넓얕 내용이 떠올랐다. 제국주의의 시작. 식민지가 값싼 인력과 새로운 소비자 공급하게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 위해 생산량 늘리고 그것을 누군가 사야 한다. 역사 통틀어 대부분 결핍 속에 살아서 검약이 표어였는데 소비지상주의는 재화 용역 소비하는 것 긍정적으로 본다. 이제 우리는 실제로 필요하지 않는 상품 무수히 사들이는 훌륭한 소비자이다. (천 개의 파랑. 발달된 기술로 이동의 자유가 생기지만 배제된 그룹은 오히려 이동의 제한이 생겼다. 그리고 물건의 소유로 계층을 나누게 되었다. 이 물건들은 필요해서 생긴 걸까 생겨서 필요해진 걸까?)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부자는 투자하라, 나머지는 구매하라. 역사 중 윤리는 대부분 못 지키는 것이었으나 현대 윤리는 대부분 잘 지킨다.

이것은 그 신자들이 요청 받은 그대로를 실제로 행하는 역사상 최초의 종교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대가로 정말 천국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야 TV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오늘날 사피엔스 3억톤, 가축들 합하면 7억톤인데 야생동물 1억톤 안된다. 미래 사피엔스는 원자재, 에너지원 손에 넣되 자연 서식지 파괴하고 대부분 종 멸종할지도 모른다. 생태적 혼란은 사피엔스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지도 모른다.

전통농업 리듬이 산업의 획일적이고 정밀한 스케줄로 대체되었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 붕괴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리 대신 차지해 개인이 되도록 요구했다. 실제로 서로 모르는데 안다고 상상하는 공동체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국가가 만든 국민과 시장이 만든 소비 공동체이다. 즉, 소비지상주의와 민족주의이다. 현존하는 국가 대부분은 산업혁명 이후에야 진화했고 최근 몇 십 년간 국가 공동체는 소비자 집단에 의해 점점 빛 잃어왔다. 소비 공동체, 예를 들어 팬클럽 같은 공동체는 소비가 정체성의 중추이다. 전통적으로 사회질서는 고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2세기 동안 변화 속도 빨라서 사회질서가 동적이고 가변적 속성 가지게 됐다. 오늘날 집단 전체보다 개인 고통에 쉽게 공감한다.

1945년 이래 국가 간 폭력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 유럽 제국 붕괴했는데 이전 제국들과 달리 평화로운 조기 은퇴였다. 간디 비폭력주의 칭송 중 일부는 대영제국에게 돌아가야 한다. 영국 철수는 평화와 질서의 모범이었다. (여기서도 저자는 제국 옹호한다. 과거 제국과 달리 평화로운 은퇴가 가능했던 건 윤리적이라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서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 그랬던 것 아닐까?) 제국 소멸 이후 독립국가들 전쟁에 관심 없다. 1945년 이래 UN 승인 독립국가 사라진 곳 없고 전쟁은 국지적인 일부를 제외하면 더 이상 일반적인 현상 아니다. (전쟁으로 영토 확장하면 신뢰 잃어 돈을 못 번다. 그러니 전쟁보다 평화로운 상거래가 이득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 분쟁은 내전과 쿠데타이다. 진정한 평화는 전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이런 의미 평화는 과거에는 없었다. 전쟁 상상할 수 없던 시대 과거에는 없었다. 오늘날 진정한 평화 존재한다.

이런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으로 전쟁 대가 매우 커진 것을 들 수 있다. 전쟁 비용 늘고 이익 작아졌다. 오늘날 부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 노하우인데 무력으로 정복 힘들다. 소수 국제적 전면전이 구식 물질적 재화가 부의 척도인 지역에서 벌어진다. 반대로 평화 수익성 좋아졌다.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 변동이 있어 오늘날은 평화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초의 시대이다. 또한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으로 국가들 독립성 약화됐다. 한 나라가 일방적 전쟁 일으킬 가능성 줄어든 것이다.

지난 5백 년 혁명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아니라면 모든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연구 없었지만 사람이 역사를 향해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행복이 가장 궁극적인 가치인가?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우리가 현대의 개인주의의 렌즈를 끼고 있기 때문 아닐까? 각 개체의 행복 추구가 당연하게 느껴지는데 이건 지금의 우리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였다. 이성덕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더 행복하다면, 우리는 문명을 포기해 행복을 늘려야 하는 걸까?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 떠올랐다. 자유로 인한 선택권은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에 괴롭다. 자유 대신 선택을 포기하고 누군가 대신 정해주는 걸 따라가는 안정감을 선택해 독재 정치의 기반을 지지하는 민중도 있었다. 스포츠와 영화 같은 쾌락으로 대중의 행복을 만족시켜주는 독재가 그럼 고통을 안겨주는 민주주의 보다 좋은가? 민주주의가 선하다는 건 단지 실제 해보니 이쪽이 행복을 더 많이 안겨주기 때문인가?)

대부분 역사 진행되면서 인간 능력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그럼 중세보다 우리가 더 행복할 것인데 이런 진보적 설명 설득력 없다. (이런 성장형 모델을 믿는 것도 지금의 우리이기 때문 아닐까? 늘 성장하는 게 맞는 건가? 변화는 맞는 것 같은데 과연 성장하는 쪽으로 방향성이 있는가?)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로 능력과 행복 사이에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교조적이다. 중도 입장도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스스로 능력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 배웠다. 그러나 이 또한 과도한 단순화라고 보는게 낙관적 평가 표본 기간 너무 짧다. 최근 몇 십 년이 인류에게 전대미문 황금시대였지만 역사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뀐 건지 일시적인지 모른다. 지난 반세기 짤막한 황금시대가 미래 파국 씨 심는 시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동물 운명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 성공이라 자축 가능하다.

물질적 요인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 정신적 요인도 행복에 영향 끼친다. 그러니 행복을 재보려면 주관적 안녕도 측정해야 한다. 지난 2세기 동안 물질적 조건 개선된 것 가족과 공동체 붕괴로 상쇄되었을 가능성 높다. 행복은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수천 년 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 알고 있었다. 인간의 기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 기대를 타인의 물질적 조건에 끼워 넣으려는 경향이 있어서 행복 연구 힘들다. 과거 사람들 물질적 조건에 현재 기대를 끼워 넣어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기대에 의해 결정되면 대중 매체와 광고 산업이 만족 저장고 고갈시키는 중일 것이다.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 타고난다. 생화학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범위 설정하고, 행복에 관한 조건이 그 범위 안에서 변동하게 한다. 행복 생물학적 접근 맞다면 역사 별로 안 중요하다. 기업가가 중세 농부보다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물질이 아니라 세로토닌이 행복 결정하기 때문이다. 실질적 중요성 지닌 역사적 진전은 오직 하나, 진정한 행복 열쇠가 생화학 시스템이라는 걸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멋진 신세계’ 소설에서 행복이 최고 가치였는데, ‘소마’라는 약 복용해서 행복을 찾았다. 모든 사람이 항상 행복하다. 그런데 왜 문제인가? 행복과 쾌감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불쾌한 순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 총합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 큰 차이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 체계이다.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행복은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가? (삶의 의미를 개인의 행복에서 찾는다는 것, 개개인의 행복 척도를 역사 발전의 척도로 본다는 것 자체가 개인주의적 인본주의,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같다)

우리 시대 지배적 종교가 자유주의이며 개인의 주관적 기분 신성시한다. 장 자크 루소는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선이고, 내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악이다”라고 표현했다. 역사상 대부분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선함, 아름다움, 당위에 객관적 척도 존재한다고 말하며 보통 사람의 느낌이나 선호는 신뢰 안 했다. 유전자 이론에서 DNA는 덧없는 기쁨을 이용해 사람들 유혹하고 자기 손아귀에 넣는다. 대부분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 다른 접근법 취한다.

불교는 행복 문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대부분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하는데 감정은 계속 변화하는 일시적 상태일 뿐이다. 번뇌의 근원은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감정 영원하지 않음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 멈춰야 한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수도승과 연금술사가 욕망을 조절하는 방법은 정반대다. 수도승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연금술사는 욕망을 모두 채움으로써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 한다) 감정에 대한 추구 멈추면, 있는 그대로 감정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에 도달한다. 서구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 통찰을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꿨는데 완전히 거꾸로 받아들였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생물학자 주장과 일치하나 부처 가르침과 반대 방향이었다.

사피엔스가 자연선택의 법칙 깨고 지적 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에두아르도 카츠는 2000년 녹색 형광 토끼 알바를 만들었다. 지적 설계의 산물이다. 지적 설계 방법 세 가지로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물공학을 들 수 있다.

생명공학. 3만 년 전 인류는 다른 종 결합하는 상상했다. 오늘날 실제로 가능한데 유전공학에 윤리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쟁점이 제기됐다. 현재 유전공학 잠재력 중 일부만 활용한다. 어떤 종의 개체 형태뿐 아니라 사회구조도 유전적으로 조작 가능하지 않을까? 보다 나은 사피엔스 설계해서 초인간 만들기에 기술적 장애는 없는 것 같다. 윤리적, 정치적 반대가 장애다. 그래서 연구 속도 느리다. 유전자 조작한다고 멸종하진 않지만 더 이상 사피엔스 아니게 될 수는 있다.

생체공학. 현재 진정한 사이보그 되려는 경계선 서있다(곤충 사이보그, 상어 사이보그는 이미 있다). 사피엔스도 사이보그로 변하는 중이다. 현재 가장 혁명적인 건 뇌와 컴퓨터 직접 연결 시도하는 것이다. 뇌와 컴퓨터 직접 연결하면, 여러 개 뇌 연결하면, 뇌 인터넷 만들면, 뇌가 집단적 기억은행에 직접 접속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비유기물 공학. 완전히 무생물적 존재 제작하는 것이다. 유전적 프로그래밍 유전자 진화 모방하려 노력한다. 뇌를 컴퓨터에 백업해서 실행한다는 아이디어도 있는데 그렇게 한다면 노트북은 사피엔스처럼 생각하고 느낄까? 그럼 그건 당신인가? (여기에는 순수하게 전기적 연결로 뇌 복사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세포막 수준 전위 변화를 단순히 0과 1로 환원 가능한지부터 호르몬의 영향이라던가 우리가 알 지 못하는 다른 생화학적 부분에서의 뇌의 작용에 대해서는 현재 수준에서 복사가 불가능하다) 디지털 마음 창조해서 자아의식, 의식, 기억 갖추면 인격체일까? 그걸 삭제하면 살인일까? 2005년 시작된 Blue Brain Project는 인간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게 목표이다.

점점 더 많은 영역이 전통 방식 벗어나 재검토 대상이 된다. 의학지식 진보에 따라 새로운 윤리적 난제 대두될 것이다. DNA 프라이버시나 길가메시 프로젝트 같은 예시가 있다. 각국 헌법은 구성원에게 공평한 의학적 치료 제공, 건강 유지하는데 동의한다. 의료가 질병 예방과 치료 문제면 문제 없었다. 그러나 그 영역이 인간 능력 강화라면 어떻게 될까? 미래 기술 진정한 잠재력은 호모 사피엔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단순히 수송 수단, 무기뿐 아니라 우리 감정과 욕망도 기술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의 후계자들은 신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우생학적, 진화론적 미래상인 것 같다. 그리고 과연 그게 본질적으로 얼마나 달라질지는 봐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 우리를 비교해봐도 사는 방식이 달라져 사고방식 달라지긴 하지만 여전히 사피엔스다. 초음파, 로봇수술 기구가 생겨났지만 그 기술의 발전은 편리한 도구가 되었고 우리가 보다 정교하고 정확하게 진단하고 수술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 시대 노예제도가 문화 번영의 기초였다. 인공지능이 그 역할을 해준다면, 노동과 등가교환되는 자본주의 체계가 아니라 필수품 교환과 가치 축적이 분리되는 경제 구조가 뒷받침 되면, 인류는 다시 문화 번영의 새시대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기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변형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사람들은 ‘인간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인간 강화’ 문제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종류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과학 프로젝트들 유지될 것이다. 불멸을 향한 탐구, 길가메시 프로젝트와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사람들을 죽음에서 해방하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그 과정에서 인류의 건강에 도움을 줌으로써 과학의 모든 일 정당화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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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만난 책! 소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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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된다는 것 - 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아닐 세스 지음, 장혜인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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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궁금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나라는 건 대체 뭘까?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홀린 듯 서평단을 신청하게 되었다. 과연 이 안에서 내가 된다는 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관점으로 의식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지식이 없어서 처음 접하기에 친절한 책은 아니었다. 첫 부분을 읽으면서는 뇌에 쥐가 나는 심정으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읽어야했다. 이 책은 4 파트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의식의 수준에 대해, 2부는 의식하는 내용에 대해, 3부는 자기자신, self라는 감각에 대해, 4부는 인간 외 그 밖의 의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1, 2부를 마칠 때까지 새로운 정보와 단어를 집어넣느라 뇌가 쥐어짜지는 느낌이었다면 3부 부터는 조금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설명을 정리해주기도 하고 나름의 농담도 던지는데 초반에는 그 농담에 웃을 여력이 없었다면 중후반부터는 좀 익숙해지면서 저자의 농담을 같이 즐길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직접적으로 던지는 대신, 이 책은 의식과 나라는 감각에 대해 세세하게 분해해서 그 구성성분을 다룸으로써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의식과 각성, 신체 소유권에 대한 감각과 일인칭 시점으로 경험하는 나라는 감각, 개인의 정체성으로서 느끼는 나라는 감각 등을 세분하여 생각해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궁금해했던 건 일인칭 시점으로서의 나라는 감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된다는 것에는 그 밖에도 다양한 속성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최선의 추측을 통해 제어된 환각 속에 살고 있다는 저자의 이론은 의식을 단순히 물질과 분리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현실에 뿌리가 연결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세계가 존재하고 우리가 투명한 창을 통해 그걸 인식하는 게 아니라 추측을 통해 제어된 환각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라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감각 또한 내부로 향한 제어된 환각이라는 관점은 의식이라는 것, 나라는 것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아직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여기 나온 이론도 아직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의식에 대해 보다 깊게 탐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하는 지금 이 시대, 과연 의식도 그 비밀의 베일을 벗게 될까? 앞으로의 일이 더욱 기대된다. 




(서평단 당첨되어 작성했습니다. 멋진 책 읽을 수 있는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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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두꺼운 벽돌책! 그래서 잘랐습니다! ㅎㅎㅎ 저희가 읽은 여러 가지 벽돌책 소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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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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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모든 것은 의미가 없고 혼돈만이 유일한 지배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허무함에 빠진다. 모든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유를 아버지에게 주었지만 주인공에게는 뿌리를 어딘가에 내릴 수 없는 혼돈 그 자체를 준 것이다. 그러던 중 혼돈 속에서 좌절에도 불구하고 질서를 찾아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답을 찾아보려고, 혼돈 뿐인 세상에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찾아보려고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파고들게 된다.

9% 숨어있는 보잘 것 없는 것들

어린 시절 데이비드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들꽃에 관심을 가졌다. 아무도 무엇인지 신경쓰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나는 잡초. 마침내 그 이름을 알아냈을 때 그 라틴어로 된 이름은 승리의 선언 같았다. 모르던 미지의 혼돈으로부터 이름을 알고 질서를 부여한, 손 안에 움켜쥔 통제의 승리감. 데이비드가 가지고 있었던 수집의 습관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온다. 박탈이나 상실 후에 심해지기도 한다는데 수집할 때 무한한 힘의 환상을 주기도 한다고 한다.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끄집어내어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는 느낌인 걸까.

데이비드의 스승이었던 아가시는 자연을, 이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인류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 그건 과학이라기보다는 종교이고 신념이었다. 생물의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고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면 창조주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 속에서 인간은 완벽한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고 그 밑에 있는 어류나 다른 동물들은 인간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가 상기시켜 주는 존재라고 보았다. 데이비드 역시 그 믿음을 그대로 전수받았다. 다만 완벽한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하는 건창조주가 아니라 자연 법칙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다. 이런 견해에서 유전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로 작용했고 사람들을 볼 때에도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데이비드의 삶에도 여러 역경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는 절망하지 않는 불굴의 낙천성을 보여줬다. 이것을 낙천성의 방패라고 설명하는데 그래도 지진으로 그가 지금까지 일궈온 모든 질서가 혼돈으로 처박히는 일은 가장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이라면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우주가 혼돈이 지배자라는 걸 선언하는 메시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했을 역경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이 혼돈에 맞서서 바늘로 이름을 물고기 자체에 꿰매버린다. 그토록 암울한 상황에서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며 주인공은 데이비드의 여러 가지 책들을 더 많이 살펴본다. 그리고 하나의 거짓말을 찾아낸다.

43%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마약이나 약물이 인간의 정신을 잘못된 낙천성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던 데이비드. 향정신성 약물은 사실이 아닌데 긍정적인 쪽으로 보게 해서 인간을 망친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은 자기 기만이므로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작 절망 속에서 그가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똑같은 자기 기만이었다. 만일 데이비드도 이러한 자기 기만으로 도움을 받았다면 이건 정말 나쁜 것이라고 볼 수 있나 싶어서 주인공은 더 찾아본다. 오래 전에는 자기 기만은 나쁘다고 했으나 긍정적 착각이라는 용어를 쓰며 유익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스토리 에디팅또는 리프레이밍기법으로 적정한 수준 자기기만 좋다고 치료에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만은 단기적 혜택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는 비용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 착각 지수가 높으면 자기 손으로 혼돈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데 데이비드 역시 그랬던 건 아닐까.

데이비드는 스탠포드 부부가 만든 스탠포드 대학의 초기 총장이 되는데 여러 가지 정황 상 스탠포드 부인의 죽음에 데이비드가 관여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나온다.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는 안식처인 아오스타 마을에 대한 데이비드의 입장도 충격적이다. 그는 이 마을을 인간 퇴화의 현장으로 보았다. 본래 생존하지 못할 “부적합자”가 생존하여 유전자를 남기게 되면 인류는 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치의 이야기로 생각했던 우생학. 그 기원이 사실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의 믿음이 이렇게 엇나갈 수도 있구나 싶어 섬찟했다.

유전과 진화에 관한 책으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는 인류라는 종이 발전하려면 열등한 부적합자의 유전자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떠한 종이 환경 변화에 버티게 해주는 것은 변이이다.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해야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민들레 원칙.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장은 하잘 것 없어 보여도 변화된 상황에서는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열등해 보이는 무언가가 부적합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우생학은 이미 과학이 아닌 종교였다. 과학은 스스로 틀릴 가능성을 열어둔다. 반증이 나오면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 과학이다. 데이비드의 경우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도 인류가 정점에 있는 진화의 사다리 이론을 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혼돈 속에서 그를 질서 속에 있을 수 있도록 지켜준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우생학적 관점을 유지한다. 그에게 부적합자를 불임화 하는 수술을 합법화 하는 일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이었을 것이다. 숨어있던 보잘 것 없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던 소년은 인류를 발전시킬 자연의 사다리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를 보호하는 낙천성의 방패로 부적합자를 말살하려는 차가운 우생학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주인공은 부적합자로 판정되어 수용소에 갇혀있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본다. 불임화 수술까지 받았던 애나와 수술은 받지 않았지만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메리. 그 둘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데이비드로부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려던 주인공은 그의 삶에서 답을 찾지 못했다. 대신 애나와 메리, 이들에게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지 질문한다.

71% 그 때 메리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지!”

생각 없이 농담으로 던져진 대답. 그렇지만 고민하지 않고 바로 튀어나온 답이었기에 진실했고 그것이 정답이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주는 작은 그물망. 남들에게는 대단치 않아 보여도 그들에게는 그 작은 연결 하나 하나가 이 땅에 그들을 붙들어주는 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민들레 법칙을 떠올리며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는 이 작고 사소한 그물망 하나 하나가 소중한 것이라고. 이건 자기 기만이 아닌 진실이라고. 우리는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작은 점일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중요하다고. 그건 그랬다. 의미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니 누구에게 의미있는 것인가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는 것이다.

72%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이렇게 주인공은 아버지의 무의미에 대해 반박할 말을 찾아내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평생 우생학자로 살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 결말을 알려준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전쟁을 반대하던 데이비드. 우수한 자들은 전쟁터로 가고, 부적합자들만 남아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게 되니 전쟁은 일어나면 안된다고 주장했던 그는 국제 평화상도 받아서 그야말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의 반격이 있었다. 그건 바로 물고기,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과학이 발달하면서 유전자도 연구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생물의 분류를 그저 비슷한 모양이 아닌 보다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밝혀진 사실, 어류라는 종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물 속에 살기 때문에 형태학적으로 닮았을 뿐,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생물이 어류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지만 단일 종으로서의 어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물을 분류하여 자연의 사다리를 신념처럼 믿었던 데이비드의 세계가 존재 근거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75%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라고 헤더는 말했다. “그런데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 별이 떠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틀리다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늘에 박혀있는 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지동설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였을 때, 사람들은 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렌즈는 완전하지 않다. 그리하여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 하나를 포기하면 더 큰 세상을, 진짜에 더 가까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가지고 있던 틀을 깨고 스스로를 정확하게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삶과 행복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당연히 이성애자라고 생각한 틀을 깨고 본인이 양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아 여성인 주인공이 여성인 파트너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는 것이라는 게 아직 틀을 깨지 못한 내게는 충격이긴 했다.

85%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그래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유연하게 하고 우리 사고를 틀 속에 가두는 허구의 사다리를 부수려는 노력과 그걸 표현한 문장은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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