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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잔잔한 이 느낌을 조금 더 누리고 싶다. 이 책을 읽는 시간동안 내 머릿속에는 구체적인 영상들이 아른거린다. 얼마 전 여행하면서 보았던 단수이의 거리, 타이베이의 밤 풍경, 스쿠터가 빼곡히 주차된 공간 등 희미해진 기억을 떠올려본다. 여행 사진에 담겨있는 컷에 생기를 불어넣고, 이어질 듯 말 듯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까지 살짝 양념을 더한다. 깔끔하고 담백하다. 이 책의 저자 요시다 슈이치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이 책을 되도록 오랫동안 읽게 된 이유였다. 어느 누구의 에피소드도 소홀하지 않았다. 은은한 향이 나는 듯한 소설이다.
이 책에서 뒷이야기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다다 하루카와 료렌하오의 인연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연인들'에 걸맞는 사이는 아니지만, 앞으로 연인이 될 것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이들은 서로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오랜 세월 그리워했다. 이들의 인연은 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료렌하오는 다다 하루카가 학생 때 타이완에 놀러 와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다. 길을 물어보느라 우연히 만났고, 다음 날 단수이에서 함께 여행을 했다. 단 하루의 동행이다. 다음 날 헤어질 때 연락처를 받았고 귀국하자마자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다시 타이베이에 갔지만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료렌하오의 본명도 모르고 영어이름 에릭만을 가지고 그를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고베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료렌하오는 일본에 와서 봉사활동을 했고, 타이중 지진이 났을 때 하루카가 타이완을 찾았다. 하지만 둘은 오랜 시간 어긋나게 된다. 인연이 어긋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 대해 고양이를 매개로 펼치는 이야기에 마음이 동요한다.
길을 잃은 고양이는 아니지만, 멀리 찾으러 나가면 고양이는 집 근처로 돌아오고, 집에서 기다리면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주인을 찾으러 멀리 떠난다. (278쪽)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그 마음을 누르며 일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한순간의 만남 이외에는 어긋나버릴 수밖에 없는 인연도 있다. 하루카의 마음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설령 똑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그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단수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파트를 찾던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렌하오가 찾았던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찾았던 그가 여기로 와줬으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은 역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그였고, 그가 찾아내지 못한 나일 뿐이다. (404쪽)
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타이완에서 재회한다. 주변 사람들 덕분에 연결이 된 것이다.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는 것이고, 인연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구 년 만에 재회하는 장면에서 하루카가 시간을 리본에 빗대어 생각하는 장면에서는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인연이 어제 헤어진 듯 다시 만나는 순간은 시간의 리본을 잘라내어 이어붙인 듯한 느낌일 것이다.
구 년이라는 세월이 도려내져서 구 년 전과 지금이 잇닿은 것 같았다. 시간이 만약 리본 같은 것이라면 구 년의 길이를 잘라내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인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도려낸 구 년의 리본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카는 무심코 발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두 사람의 발밑에 잘라낸 리본이 떨어져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하루카는 크게 휘젓는 에릭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착각이라는 건 알지만 에릭이 그 손에 리본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카는 하늘하늘 흔들리는 리본의 다른 한쪽 끝을 잡으려고 반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흔들리는 리본은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247쪽)
어긋난 시간은 많은 것을 달리하는 것일까. 하루카에게는 시게유키라는 애인이 있었다. 타이완에 가 있는 동안 우울증에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미 이들의 관계는 한참 전에 마무리되었어야 하지만 인연의 끈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하루카는 엉겁결에 달려가서 시게유키를 끌어안았다. 부둥켜안으면 시게유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 마음을, 자신이 시게유키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시게유키에게, 아니 시게유키의 가면을 쓴 누군가에게 들켜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274쪽)
이 책의 제목이 '타이베이의 연인'이 아니라 '연인들'이 된 것은 하루카와 료렌하오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랑 이야기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하야마 가쓰이치로는 나카노 다케오가 요코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 한마디로 갈라놓았는데 타이완 고속철도 건설로 다시 만나볼 기회를 마련하였다. 첸웨이즈와 창메이친의 사랑 이야기도 이 책 속에 담겨있다. 하지만 하루카와 료렌하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마음이 가장 요동친다. 그들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짐작해본다. 과거의 마음은 과거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들은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멀지만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오랜 추억의 끈을 강렬하게 잡고 있다.
결국 구 년 전의 추억은 구 년 전의 추억일 뿐이다. 구 년간 계속 생각했다는 것은 구 년 전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일 뿐 결코 지금의 마음은 아니다. (290쪽)
문자를 주고받을 때마다 처음 만났던 그날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건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시작된 게 없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373쪽)
"십 년 전에 하루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느낀 감정은 사랑이라고 줄곧 생각했어. 그런데 마침내 이렇게 십 년 만에 같이 있어보니 자신이 없어지네. 하루카를 잊을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하루카랑 함께 보냈던 그 하루를 잊을 수 없었던 건지." (392쪽)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영상미였다. 이 소설 속의 글을 읽다보면 타이베이의 거리가 떠오른다. 그곳의 분위기와 냄새까지도 살아나게 한다. 흑백화면을 컬러로 색칠해주고 생생하게 3D화면으로 눈앞에 펼쳐낸다. 타이완의 거리를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주인공이 된다. 여행 중 만난 누군가를 몇 년 만에 떠올리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짧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햇빛 좋은 날 아침에 바라본 바다의 잔잔한 물결을 닮은 책이다. 은은한 채색에 아득하게 보이는 수채화같은 소설이다. 8월의 마지막을 이 책과 함께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