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해부 - 어떤 사람은 범죄자로 태어난다
에이드리언 레인 지음, 이윤호 옮김 / 흐름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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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를 보면 충격적인 문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범죄자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범죄자로 태어난다니! 범죄는 상황에 따라서 우발적으로 일어나거나, 미리 계획하게 된다면 원한이 있어서 평소부터 분노가 밑바탕을 깔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얼마 전에 읽은 책 『괴물의 심연』을 통해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뇌 구조에 대한 연관성을 살펴본 적은 있는데, 생소했던 그때의 느낌을 이 책을 통해 구체화시키게 되었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좀더 이론적으로 탄탄하고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잘 다듬어진 조각상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각상에 비유하자면, 작품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있더라도 그 작품만 보았을 때에는 손색이 없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뇌,유전자,몸에서 범죄의 원인을 발견한다'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더라도 이 책에서 연구를 진행한 내용을 볼 때에는 흠잡을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에이드리언 레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범죄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접근하는 책으로 폭력에 대해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폭력의 해부』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중요한 논쟁거리, 즉 폭력에 생물학적 근거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폭력이 우리에게 드리우는 어둠의 장막을 걷어붙이고 더 밝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2쪽)

신경범죄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에이드리언 레인이 이 책의 저자이다. '왜 어떤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않는가?'라는 단순한 호기심을 쫓아 35년간 연구해왔다. 사이코패스의 생리를 이해하기 위해 교도소에서 4년간 근무했으며, 폭력범죄자에게 뇌영상 연구를 최초로 적용했다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범죄 분석과 예방을 목표로 신경과학 원리와 뇌촬영기술을 응용하는 신경범죄학을 개척하고 대중화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폭력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범죄의 유전학적 근거, 폭력적인 뇌는 어떻게 오작동하는가, 자율신경계에서 일어나는 일들, 폭력의 신경해부학, 어린 시절의 건강이 끼치는 영향, 영양실조 미량영양소 정신건강, 생물사회적퍼즐, 범죄 치료, 법률적 영향, 폭력의 미래' 등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주'와 '찾아보기'만 하더라도 거의 1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기에 관련 연구자들에게 학술적인 밑바탕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좀더 깊이 알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관련 논문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근거로 폭력의 생물학적 관련성에 대해 논리적으로 풀어나간다. 폭력과 범죄에 생물학적 근거가 있다는 증거를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진화에서 유전자까지, 중추신경계 기능에서 자율신경 기능까지, 다방면으로 진행한 연구의 핵심을 이 책을 통해 보게 된다. 특히 이 책에서 6장 '살인자로 태어난 사람들: 어린 시절의 건강이 끼치는 영향'과 7장 '폭력의 조리법: 영양실조, 미량영양소, 정신건강'의 내용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태아로 있을 때부터 어린 시절, 성장의 전 과정을 통해 신체적인 부분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게 되는데, 뇌의 사진과 도표 등 구체적인 연구 자료가 담겨있어서 눈길을 끈다. 생선을 먹는 양과 폭력의 관련성에 대한 이야기도 처음에는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생선기름 전문가 조 히벨른이 매년 생선 소비량과 살인율을 기록한 연구 수치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와 '세계 해산물 소비량과 살인율의 관계' 도표로 보게 되니 좀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가 신경범죄학과 얽힌 신경윤리학의 쟁점들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 그리고 혁신적인 임상적 신경과학 연구 결과를 현명하고 신중하게 공공정책과 통합하는 것이 미래 폭력 예방의 성공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폭력에 대한 공중보건 관점의 접근을 더욱 발전시킨다는 것은 진실로 더 건강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능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을 이해하고 내일을 변화시키고, 다음 세대를 위한 더 안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에 관해 공개적이고 솔직한 논의를 함으로써 대중은 미래의 발전에 대비하고, 미래의 폭력 예방을 원활하게 성공시킬 것이다. (568쪽)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기서 밝히는 이론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자는 것보다는 이런 견해도 있다는 포용력을 필요로 한다. 저자도 폭력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우리가 절대 지식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논증하며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서 다룬 과학적 견해의 일부는 저자의 개인적 관점이 덧붙어 변질되고, 모든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증 연구에서 오류의 경계에 서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 폭력 예방을 위해 생물학적인 부분에서 여기에 제기된 쟁점들을 논의하며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점들에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과학적이고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련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인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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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 2 - 『삼국유사』에서 『꿈의 해석』까지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 2
최효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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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일 것이다. 서울대 권장도서 목록을 훑어본 적이 있다.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읽어보겠다고 생각만 했고 그대로 몇 년이 흘렀다. 사실 서울대학생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인문고전 100선을 독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의욕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하루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책만 읽더라도 이 방대한 책을 읽어나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권장도서는 권장하는 것이지 꼭 다 읽어보라는 뜻은 아닐 테니까 부담은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궁금하다. 어떤 책들이 인문고전의 100선으로 뽑혀서 읽어보도록 권유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해 그 의문을 풀어본다. 이 책을 읽으며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을 접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는 전 3권으로 출간 예정인데, 이번에 두 번째 책이 나왔다. 표지를 보면 '다 읽지 않아도 인문고전의 핵심을 파악하는 시리즈'라는 글이 있다. 일종의 써머리같은 책이다.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에 요점정리 잘하는 친구의 노트를 빌려서 공부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역할을 한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대략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인문고전 공부의 방대한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입문자에게 가이드라인이 되는 책이다. 한 권에 인문고전 100권에 대한 이야기가 다 들어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당연히 방대한 분량의 책을 한 권으로 담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이번에 읽은 2권에서는 『삼국유사』에서『꿈의 해석』까지 동서양 인문학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 2』에서는 서울대 권장도서 21선 지눌의 『보조법어』에서 서울대 권장도서 60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까지를 다룬다. 큰 틀에서 그 책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또한 각 장의 끝에는 간략하게나마 다양한 출판사의 책에 대해 특징을 짚어주기에 소개된 책을 읽어본다면 어떤 책을 선택할지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적어도 저자가 추천하는 책으로 읽어보면 실패부담이 적고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권장도서를 모두 순서대로 읽기는 힘들지만,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다면 저자가 권하는 책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을 인문고전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특징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 그 중 나는 3번에 해당되는 독자로서 이 책의 유용함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인문고전 읽기를 결심했으나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거나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라면 이 책이 다른 책을 읽기 전에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방향키가 될 것이다.' 이 책으로 인문고전의 모든 것을 알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하지만 인문고전 공부의 방향을 잡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될 것이기에 이 책의 효율성을 인정한다. 적어도 이 책에서 짚어주는 내용 정도는 알고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한다면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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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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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잔잔한 이 느낌을 조금 더 누리고 싶다. 이 책을 읽는 시간동안 내 머릿속에는 구체적인 영상들이 아른거린다. 얼마 전 여행하면서 보았던 단수이의 거리, 타이베이의 밤 풍경, 스쿠터가 빼곡히 주차된 공간 등 희미해진 기억을 떠올려본다. 여행 사진에 담겨있는 컷에 생기를 불어넣고, 이어질 듯 말 듯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까지 살짝 양념을 더한다. 깔끔하고 담백하다. 이 책의 저자 요시다 슈이치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이 책을 되도록 오랫동안 읽게 된 이유였다. 어느 누구의 에피소드도 소홀하지 않았다. 은은한 향이 나는 듯한 소설이다. 

 

이 책에서 뒷이야기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다다 하루카와 료렌하오의 인연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연인들'에 걸맞는 사이는 아니지만, 앞으로 연인이 될 것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이들은 서로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오랜 세월 그리워했다. 이들의 인연은 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료렌하오는 다다 하루카가 학생 때 타이완에 놀러 와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다. 길을 물어보느라 우연히 만났고, 다음 날 단수이에서 함께 여행을 했다. 단 하루의 동행이다. 다음 날 헤어질 때 연락처를 받았고 귀국하자마자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다시 타이베이에 갔지만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료렌하오의 본명도 모르고 영어이름 에릭만을 가지고 그를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고베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료렌하오는 일본에 와서 봉사활동을 했고, 타이중 지진이 났을 때 하루카가 타이완을 찾았다. 하지만 둘은 오랜 시간 어긋나게 된다. 인연이 어긋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 대해 고양이를 매개로 펼치는 이야기에 마음이 동요한다.

길을 잃은 고양이는 아니지만, 멀리 찾으러 나가면 고양이는 집 근처로 돌아오고, 집에서 기다리면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주인을 찾으러 멀리 떠난다. (278쪽)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그 마음을 누르며 일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한순간의 만남 이외에는 어긋나버릴 수밖에 없는 인연도 있다. 하루카의 마음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설령 똑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그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단수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파트를 찾던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렌하오가 찾았던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찾았던 그가 여기로 와줬으면 좋을 텐데 하고.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은 역시 내가 찾아내지 못한 그였고, 그가 찾아내지 못한 나일 뿐이다. (404쪽)

 

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타이완에서 재회한다. 주변 사람들 덕분에 연결이 된 것이다.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는 것이고, 인연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구 년 만에 재회하는 장면에서 하루카가 시간을 리본에 빗대어 생각하는 장면에서는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인연이 어제 헤어진 듯 다시 만나는 순간은 시간의 리본을 잘라내어 이어붙인 듯한 느낌일 것이다.

구 년이라는 세월이 도려내져서 구 년 전과 지금이 잇닿은 것 같았다. 시간이 만약 리본 같은 것이라면 구 년의 길이를 잘라내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인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도려낸 구 년의 리본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카는 무심코 발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두 사람의 발밑에 잘라낸 리본이 떨어져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하루카는 크게 휘젓는 에릭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착각이라는 건 알지만 에릭이 그 손에 리본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카는 하늘하늘 흔들리는 리본의 다른 한쪽 끝을 잡으려고 반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흔들리는 리본은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247쪽)

 

어긋난 시간은 많은 것을 달리하는 것일까. 하루카에게는 시게유키라는 애인이 있었다. 타이완에 가 있는 동안 우울증에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미 이들의 관계는 한참 전에 마무리되었어야 하지만 인연의 끈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하루카는 엉겁결에 달려가서 시게유키를 끌어안았다. 부둥켜안으면 시게유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 마음을, 자신이 시게유키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시게유키에게, 아니 시게유키의 가면을 쓴 누군가에게 들켜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274쪽)

 

이 책의 제목이 '타이베이의 연인'이 아니라 '연인들'이 된 것은 하루카와 료렌하오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사랑 이야기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하야마 가쓰이치로는 나카노 다케오가 요코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 한마디로 갈라놓았는데 타이완 고속철도 건설로 다시 만나볼 기회를 마련하였다. 첸웨이즈와 창메이친의 사랑 이야기도 이 책 속에 담겨있다. 하지만 하루카와 료렌하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마음이 가장 요동친다. 그들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짐작해본다. 과거의 마음은 과거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들은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멀지만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오랜 추억의 끈을 강렬하게 잡고 있다.

결국 구 년 전의 추억은 구 년 전의 추억일 뿐이다. 구 년간 계속 생각했다는 것은 구 년 전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일 뿐 결코 지금의 마음은 아니다. (290쪽)

 

문자를 주고받을 때마다 처음 만났던 그날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건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시작된 게 없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373쪽)

 

"십 년 전에 하루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느낀 감정은 사랑이라고 줄곧 생각했어. 그런데 마침내 이렇게 십 년 만에 같이 있어보니 자신이 없어지네. 하루카를 잊을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하루카랑 함께 보냈던 그 하루를 잊을 수 없었던 건지." (392쪽)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영상미였다. 이 소설 속의 글을 읽다보면 타이베이의 거리가 떠오른다. 그곳의 분위기와 냄새까지도 살아나게 한다. 흑백화면을 컬러로 색칠해주고 생생하게 3D화면으로 눈앞에 펼쳐낸다. 타이완의 거리를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주인공이 된다. 여행 중 만난 누군가를 몇 년 만에 떠올리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짧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햇빛 좋은 날 아침에 바라본 바다의 잔잔한 물결을 닮은 책이다. 은은한 채색에 아득하게 보이는 수채화같은 소설이다. 8월의 마지막을 이 책과 함께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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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섹시해지는 정리의 감각 - 잡동사니에서 탈출한 수집광들의 노하우
브렌다 에버디언.에릭 리들 지음, 신용우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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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정리정돈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정리 하는 맛을 들였다. 정리에 효율을 높이고 마음가짐이 제대로 되기 때문이다. 왜 정리를 해야할지 내 마음을 먼저 설득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좀처럼 버리지 못해 정리를 하려고 해도 늘 제자리걸음이었던 나에게 변화를 준 것은 책이었다. 그래도 우리 주변에 잡동사니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보다. 이 책에서도 말한다. 정리는 완벽이 아니라 완료라고. 어쨌든 주기적으로 개운한 마음을 갖고자 정리를 하기로 했다. 무더위는 지나갔고 이제 가을맞이 대청소를 한 번 할 법한 날씨가 되었다. 이번에는 이 책 『주변이 섹시해지는 정리의 감각』을 읽으며 주변을 가다듬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동안 책의 도움을 받으며 정리정돈에 박차를 가했지만, 여전히 어딘가에는 정리를 다음으로 미루어두고 외면하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 있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말이다.

남는 방에 물건을 대충 숨겨놓은 채 문을 닫아버리고, 10년 전에 이사했는데도 아직도 정리 못한 짐이 남아있는 우리들을 위한 잡동사니 정리법

손님이 온다고 하면 물건들을 대충 숨겨놓고 결국 잊어버리고 있기도 하고, 언젠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버리지도 못하며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그런 물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잡동사니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주변이 섹시해지게 될까? 이 책을 읽으며 하나씩 짚어보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언젠가 필요할 것같은 물건은 대부분 삶에 방해가 된다. 그리고 이를 잡동사니라고 부른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정말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갈 때 발에 걸리는 것들 말이다. (19쪽)

이 책에서는 잡동사니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나눈다. 그 다섯 가지는 물질적인 잡동사니, 정신적인 잡동사니, 디지털 잡동사니, 시간의 잡동사니, 감각적 잡동사니이다. 단순히 물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어떻게 정리할지 조언해준다.

 

물건은 어디서 생겨날까? 뭐, 하루아침에 생겨난 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묘하게 웃음 지은 부분이다. 분명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닌데, 주변에는 차곡차곡 매일매일의 시간, 나도 모르게 쌓인 물건들로 가득하다. 이것을 하루 중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서 정리를 할 것인지, 시간을 내서 한꺼번에 날을 잡아 정리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사실 잡동사니에 둘러싸여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정말 아까운 일이다. 물건보다 사람이 중요한 법이니까.

 

인생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핑계는 넘쳐나고 어떤 일은 미뤄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차고 청소나 옷장 정리를 미루고 어떻게 보관할지 결정하는 것도 미룬다. 누구나 그렇다. 그리고 잡동사니와 함께 살아간다. (56쪽)

이렇게 이야기하니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부담감은 덜어놓을 수 있다. 살다보면 정리정돈은 중요한 일이라기보다는 피치 못할 과정이다. 매일같이 매달려서 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은 정리정돈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잡는 데에 도움을 준다. 잡동사니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큰 테두리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와준다. 가볍게 읽고 정리에 돌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정리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하고 '그래도 정리하지 않을 것인가?' 질문을 던져준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어도 잡동사니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이제 버릴 것은 버리고 삶을 낭비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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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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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을 주기적으로 찾아 읽게 되는 것은 글쓰기의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정리할 필요성도 느끼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글쓰기 방법 중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배우고 싶기도 하다. '이윤기'하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고,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글쓰기'책이라는 점에서 제목이 강렬하게 어필해왔다. 이 책을 통해 이윤기가 이야기하는 글쓰기를 접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작가의 이름을 딴 '이윤기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성 있고 맛깔 나는 문체를 가진 작가. 누구나 이윤기를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 중 하나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책 날개에 있는 소개를 보며 그가 소설가이자 번역가, 신화전문가라는 점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나중으로 미룬 신화에 관한 책들을 뒤로 하고라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말을 맛깔스럽게 표현해서 조르바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도 전혀 저속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번역가이다.

 

이 책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신문에 기고한 글이나 다른 책에 실렸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글쓰기를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번역가로서, 소설가로서, 글쓰기를 어떻게 대하고 글을 써왔는지 그의 인생을 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마다 다양한 문체를 지니고 있고 표현 방법도 제각각이니 어떻게 글을 쓰는 것이 정답인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정리가 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해준다.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아무래도 번역가의 거장으로서 번역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한 부분이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 뒷이야기는 번역된 책을 읽기만 한 독자로서는 번역가의 고뇌를 함께할 수 있었다. 한 권의 번역서가 탄생하기까지, 그리고 탄생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찬사와 질책 속에서 방황하리라는 것을 이 책을 보며 구체화하게 된다.

잡초 없는 뜰은 없다는 말이 있다. 없으면 좋겠지만 뜰 가꾸는 자에게 잡초는 숙명이다. 문화의 번역자들에게는 오독과 오역 또한 숙명이다. 내 뜰로 들어와 잡초를 뽑아주는 것은 고맙지만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은 문화 번역 현장을 전쟁터로 만들 뿐, 도움 되는 바가 적다. (112쪽)

 

글쓰기에 관해서 생각하게 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글쓰기의 대가가 되면 글은 오히려 술술 풀리기 힘들겠구나, 생각된다. 고된 노동과 퇴고를 거쳐 독자들의 눈앞에 놓인 글이기에 쉽게 읽히기도 하고 마음에 파장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써서, 복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송고하는 과정에서 날려버리는 경험을 나는 여러 차례 했다. 원고가 짧을 경우에는 별로 큰일이 아니지만 긴 원고일 경우에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그래서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해놓고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 '원고 날려먹기'와 '원고 다시쓰기'의 끔찍한 경험으로부터 해방된, 완벽한 무풍지대에는 있지 못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나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날려먹기'와 '다시 쓰기'의 아픈 경험과 관련이 있다. 글이 술술 풀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술술 풀린 글, 글쓰기의 고된 노동을 거의 면제받은 듯한 글로써 나는 호평을 받아본 적이 없다. (87쪽)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원하는 바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읽으면 그 안에서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이끌어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말에 대한 그의 생각도,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정답인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인 것이니, 이 책을 통해 소설가이자 번역가였던 한 사람을 읽는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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