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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의 철학 - 미루는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룰루랄라 제때 해내기 위한 조언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이럴 줄 알았다. 오늘도 정신없이 바빴다. 미리 해놓으면 편리할 것을 한꺼번에 몰아치느라 진땀을 뺀다. 지난 번에 고생했으니 이번에는 안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왜 이럴까.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남들은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나태해진 듯한 모습에 한없이 작아지기도 하고,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 『무계획의 철학』을 읽으며 힘을 얻는다. 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점이 필요한지, 특성을 잘 살려 장점을 뽑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카트린 파시히와 사샤 로보가 공동집필했다. 카트린 파시히는 베를린에 있는 아이디어 및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다년간 대표로 일했다. 웹블로그 '리젠마쉬네'의 편집자이자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그림 온라인 상'을 수상했다. 사샤 로보는 광고기획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 현재 커뮤니케이션 전략 및 브랜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ZIA의 외주 직원이자 웹블로그 '리젠마쉬네'의 책임편집자이기도 하다.
이들의 직업을 보면 이 책을 낼 만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얼핏 든다. 광고기획사, 아이디어, 디자인 등의 단어를 떠올리면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결과물이 좋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이들 직업뿐만 아니라 창조성을 요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 책에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지켜나가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계획으로 일관하지만 일처리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에서는 '다다음주 수요일에도 시간은 있다'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글을 시작한다. 미룬다는 것보다는 어쩐지 듣기 편한 '지연'이라는 말을 쓴다. 지연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게으르고 어리석고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 '내일을 위해 남겨두는'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틀어 'LOBO'라고 이름 붙였다. LOBO는 '라이프 스타일 오브 배드 오거니제이션' 즉 조직화에 형편없는 생활방식의 줄임말이다. (15쪽)
이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던 상황이 바로 이러했기 때문이다. 급히 자료를 작성해서 보내야 했는데, 문서를 인쇄하려고 종이를 찾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다른 할 일이 있는데도 이 책을 읽고 있다. 여러분은 책상을 정리하거나, 급한 연락을 취하거나, 할 일 목록을 작성하거나, 거기에 적힌 일들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문서를 인쇄하려고 종이를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이 책을 읽고 있다. 예전부터 여러 번 읽을 계획을 세웠지만 어쩌다 보니 여태껏 미뤘다. 우리는 여러분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냥 이 책을 읽기 바란다. (48쪽)
왜 이렇게 허둥지둥대며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내 능력이나 취향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일과 계획을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열심히 일해, 더 잘해봐, 더 빨리 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전보다 더, 한 시간 더, 우리의 일은 결코 끝나지 않지" -다프트 펑크
열심히 하다보면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토당토 않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살다보니 알게 된다. 결코 끝나지 않을 일만 산더미같이 쌓이고, 행복은 늘 뒤로 미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유쾌하게 읽었다. 자신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감을 가짐으로써 일처리의 능률을 높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효과를 무시하며 계획의 틀에 넣어버리면 오히려 효과가 반감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LOBO인듯 LOBO아닌 LOBO같은 나에게 이 책은 흥미로웠다. 누구에게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LOBO의 경향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철저히 비-LOBO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들을 잘 모르기에 통과한다. 자신의 LOBO 성향과 이 책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면 호탕하게 웃게 될 것이다. 삶을 진지하게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유쾌하게 바라보게 되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었다. 게으르게 되는 부분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너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도 상관없어. 그런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나아." 이야기해주니 속이 시원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관점을 바꾸면 된다. 내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잘못 조직되었고 잘못 정비된 것이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나 혼자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문제가 달리 보이고 새로운 행동방식에 눈을 뜨게 된다. 자신의 목표와 직업이 과연 자신과 잘 맞는지 새로운 관점에서 의심해봐야 한다. (52쪽)
이 책을 읽으며 LOBO들을 위한 조언 중에서 동의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늘 계획표를 세워놓고 반도 실천하지 못해서 좌절과 죄책감을 느끼던 나에게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