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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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이 부정적인 감정들을 외면하지 말고 뚫어지게 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는 선생님이 말씀을 너무 쉽게 하시는 것 같아 좀 화가 났었어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겠다고 애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내려고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데, 그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라는 거지? 그 감정들을 어떻게 바라보라는 거지?’

  그걸 마주했다가는 무너질 것 같았어요.·······


참사 나고 2년 정도는 너무 힘들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의사 선생님 말씀을 이해하겠더라고요. 두려운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느끼게 됐어요.(38~39쪽-성호 누나 박보나)


두려움은 인간이 드러내는 병리적 감정의 범주증상이다. 이 증상은 분리에서 기원한다. 분리의 장벽을 깨뜨려 신성한 재통합을 이루기 위한 첫 망치질은 두려움 마주하기다. 마주하면 두려움의 실재the Real를 알 수 있다.


성호 누나 박보나에게, 마주하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성호의 상실인가? 성호를 상실하게 한 사건인가? 사건에 휘말리면서 겪은 참혹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정들인가? 그럼에도 살아지고 또 살아내야 하는 모진 생인가? 사건을 일으키고 속이고 조작하고 능멸하면서 킬킬대는 불의한 권력집단, 비정한 사회인가? 불의한 권력집단, 비정한 사회 앞에서 또렷이 의식되는 천명인가?


필경 이 모두일 것이다. 이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실체로 느꼈을 것이다. 그 거대한 실체가 외부에서 자신을 향해 덮쳐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면하지 않고 뚫어지게 보려면 그 거대한 실체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거짓 실체를 간파하려면 낱낱이 결결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낱낱이 결결이 들여다보려면 그것을 방해하는 통속한 해석·평가를 중지해야 한다. 통속한 해석·평가를 중지하려면 스스로 물어야 한다. 물음은 ‘과연 그런가?’ 하는 반성에서 시작해 ‘대체 무엇인가?’ 하는 정체 추궁으로 가야 한다. 정체를 들키면 악마는 사라진다.


악마가 사라지면 진실이 하나둘 불을 밝힌다. 성호가 없는 세상에서 박보나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삶이 어떻게 향기로운지, 그 향기가 어떻게 사위로 번지는지, 번지고 번져서 세상에 어떻게 성호가 부활하는지 환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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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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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밖에 나갔을 때는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조차도 밉더라고요.·······세상 사람들이 다 가해자 같았어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나의 슬픔을 즐기는 것 같고.......

  아니, 사실은 부러웠어요. 옆집에서 나는 라면 냄새도 부러웠어요.·······


  그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꽉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더라고요.·······

  지금 내 마음에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여요. 슬픈 일이 눈에 보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게 좋아 보이기도 하고요.(36쪽-김호연 엄마 유희순)


놀랍다. 슬픔을 관통함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깨달음의 과정을 표현하는 말들이 평범한 가운데 참으로 정확하고 섬세하다. 엄밀한 과학이며 수승한 미학이다. 깊은 치유는 결곡하고 아름답다.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조차도” 미운 심사, 그 분노는 얼마나 강고한 것이랴. “옆집에서 나는 라면 냄새도” 부러운 심사, 그 비탄은 얼마나 견결한 것이랴. 그 누가 변화를 꿈꿀 수 있으랴.


변화를 가져다준 “시간”은 슬픔을 관통하며 걸어온 김호연 엄마 유희순의 동선이 창조한 상호작용 과정 자체다. 이 상호작용은 소식이 되고 에너지가 되어 그 “꽉 닫혔던 마음”을 열어갔다.


마음을 열면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진실의 전체성에 터할 수 있다. 전체 진실에 터하면 “슬픈 일이 눈에 보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게 좋아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 것이 진리다. 행복뿐인 세상에 진리 없듯 슬픔뿐인 세상에도 진리 없다. 행복은 행복으로서 슬픔은 슬픔으로서 각각 우리 생을 구성한다. 행복은 슬픔 덕분이고 슬픔은 행복 덕분이다.


김호연 엄마 유희순이 빚은 진리다. 416공동체 엄마 유희순이 빚은 진리는 권력이 강탈한 행복, 권력이 강요한 슬픔을 직면한다. 되찾고 되돌리는 네트워킹운동을 창조한다. 놀랍고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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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한테서 손편지와 카네이션 센티드 카드를 받았다. 편지를 읽으면서 아비로서 미안한 마음을 어찌 전할까 생각했다. 내년 어린이날, 상처받았을 '어린' 딸에게 주는 손편지를 써야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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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에 겨울옷을 다 버렸어요. 겨울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살게 되더라고요. 그냥저냥 지내다가도 갑자기 세영이가 예쁜 짓 하던 게 떠오르면 하··· 미쳐버려요. (울음을 삼키며) 뭐 하러 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이제는 사는 게 의미가 없죠.(35쪽-세영 아빠 한재창)


회사도 그만두었다. 교회도 나가지 않는다. 대인관계도 다 내동댕이쳤다. 이윽고 사는 의미마저 느끼지 못한다. 마침내 세영 아빠 한재창은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빼앗겼다. 빼앗긴 것 가운데 맨 마지막, 사는 의미를 구성한 존재는 다름 아닌 딸 세영이었다. 세영이를 빼앗김으로써 한재창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 아니, 찬찬히 죽임 당했다. 죽음 한가운데서 한재창은 오늘 어버이날을 맞는다. 카네이션 가슴에 달아줄 세영이를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못한다. 죽임 당하는 세영이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처절히 부서진 마음조차 돌아보지 못한다. 못내 미안할 따름이다. 이렇게 아비는 어버이날 또 한 번 죽임 당한다. 더 이상 이렇게 죽음으로 오늘이 오면 안 된다. 진실이 밝혀지고 범죄자가 심판되면 내년 어버이날 한재창은 조금이나마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으려나. 부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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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 분들이 항상 억울하다고 말씀하실 때도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 애는 살아서 왔으니까. 살아서 온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했어요. 그런데 이런 삶을 사는 거잖아요. 죄인처럼 숨죽이고, 남들이 알까봐 쉬쉬하고·······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리 아이는 평범하게 살았을 거잖아요. 평생 친구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을 갖고 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 고통으로 자기 허벅지를 베고 손목을 긋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너무 억울해요.(31쪽)


가족을 잃지 않고는 그 마음 모르는 거라지만 우리 마음도 아무도 몰라요.

  아이가 뜬금없이 울 때마다 생각해요.

  ‘아직도 세월호 안에서 나오지 못했구나. 아직도 갇혀 있구나.’(32쪽-생존학생 이시원 엄마 문석연)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416 직후부터 상당한 기간 동안 생존학생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에 거의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아마 나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심지어 가족도 그랬으니 말이다. 다만, 마음을 치유하는 의자인 내가 여느 사람들과 같은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다.


그들은, 특히 생존학생들은 여전히 공포와 불안,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 고통으로 자기 허벅지를 베고 손목을 긋는”다. “뜬금없이 울”고는 한다. “아직도 세월호 안에·······갇혀” 산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그래도 죽은 것보다는 감사한 일이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그들 “마음도 아무도” 모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통속한 논리로 삶과 죽음의 우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사악한 권력이 쳐 놓은 덫에 걸려 허덕이다 비참하게 죽는다는 점에서 그날 죽임당한 아이들과 지금 서서히 죽임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다를 리 없다. 생물학적 목숨 부지하는 시간의 연장이 대체 얼마나 어떻게 축복이란 말인가.


살아 있기에 더 긴 시간 동안 겪어야 하는 아이들의 참혹한 고통을 살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이 맹렬한 물질적 진실로 들이닥친다.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하기 전에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허벅지를 베고 손목을 그어서 살아 있는 것인가?


416은 개인의 생사 넘어 체제 문제다. 그 체제에서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생사는 하나다. 죽음은 장엄으로 산 사람과 일치되고, 삶은 숭고로 죽은 사람과 일치된다. 산 사람은 죽음의 행간을 채우고, 죽은 사람은 삶의 행간을 채운다. 채워진 진실은 시간을 궤멸시키고 채워진 진리는 공간을 붕괴시킨다. 해원의 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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