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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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연농을 시작했을 때는 단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찾아와서 자연농의 사상을 접하고 배우고, 어떤 사람은 실제로 농사를 시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농 사상을 퍼뜨리기도 하여 조용히 계속 확산되어왔습니다. 이런 전개를 예상하셨습니까?


전혀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의 삶으로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확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제가 그랬듯이 삶은 스스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163쪽)



나 아닌 남이 내 삶을 바꾸는 경우란 없다. 물론이다. 그러나 어떤 인연도 짓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직관으로 내 삶을 바꾸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자신도 농약 때문에 병들었을 때 들은 의사의 말이 한 생각 크게 돌이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현재 삶에 문제가 있음에도 스스로 바꾸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의도적으로 그 길을 고집한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되는 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알아도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모를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누군가 무심히 해준 한마디가 엄청난 변화의 단초로 작용하기도 한다.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말과 스스로 바꿀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말은 양립 가능하다. 자연농의 확산에 관심도 없고, 세상 바꿀 생각도 없다는 말에서 불가피하게 풍겨 나오는 사무라이 또는 소승의 냄새. 그가 아무리 그런 소신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그를 배워간 “어떤 사람은 자연농 사상을 퍼뜨리기도 하여” 사람도 세상도 스스로를 바꾸고 있었다.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無緣衆生不可渡.” 말한 붓다도 40년 이상 세상을 떠돌며 설법을 펼쳤다. 자비심으로 곡진히 말을 건네는 것을 능력 차원에서 다룰 까닭이 없다. 욕망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들은 자가 어찌 하는가는 최종적으로 들은 자 자신의 소관이다. 그러나 말하는 자의 어떠함이 듣는 자에게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불이불일의 종자논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소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경계로 나아가는 일이 깨친 자의 천명이다. 깨친 자의 천명은 개체 너머의 울림이다. 개체 너머 울림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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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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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하나”, “전체”라는 말에 대해서인데,·······‘총체적인“이라는 말과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분 모두를 끌어 모은 것을 전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158쪽)


“불이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현상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는 하나고 일체라는 것입니다.


두 개가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하나. 또는 하나면서 구별하면 두 개.(159쪽)




최근 들어 나는 “종자논리”란 말을 스스로 만들어 쓰고 있다. 이 말은 내가 터할 사유 틀을 구축하려고 애써온 40여 년 세월 동안 겪은 고뇌를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뜨르르한 지식인의 글을 읽고 배우면서 남곤 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그 내용의 탁월함에 놀라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끝내 허탈해했던 이유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특히 서구 유학파들의 글에는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그 허술함을 뭐라 해야 할까. 바로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내가 생각해낸 것이 다름 아닌 종자논리란 말이었다.


종자논리는 사유의 나무로 자라 실천의 열매로 맺히게 될 씨앗인 이치다. 이 종자논리를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길은 사뭇 달라진다. 물론 끝내 자신의 종자논리가 무엇인지, 어디에 구멍이 났는지 모른 채 고급 지식인 행세를 하며 살다 가는 사람도 있다. 아니, 많다. 이 단호함의 근거는 다름 아닌 그들의 글이고 삶이다. 치명적인 예가 바로 라캉이다.


종자논리라고 해서 무슨 특이하고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가령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말한바 “두 개가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하나. 또는 하나면서 구별하면 두 개.” 그러니까 불이불일不二不一 같은 것이다. 동아시아 종자논리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아는 사람도 그 요체 파악에서 보이는 다른 결은 실로 백인백색이다. 완벽하냐는 문제가 안 된다. 매순간 성찰하느냐가 문제다.


불이불일은 전체와 부분(정확히는 개체)의 명제와 결국 같은 것이다. 전체성을 확보하려면 부분의 총합을 넘어서야 한다. 부분의 총합을 넘어서려면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창조되는 경이가 필수불가결하다. 경이를 창조하려면 완전히 쪼개지지도 않고不二 완전히 포개지지도 않는不一 거래를 해야 한다. 이 거래를 일러 화쟁이라 한다. 화쟁하면 일즉다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가 열린다. 라캉과 그 아류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어떤가. 不二不一, 一卽多 多卽一이란 종자논리를 구사하는 과정에서 ‘사무라이’의 냉기가 흐른다. 그 냉기로는 화쟁의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어렵다. 화쟁이 이룩하는 화엄의 전체성에는 온기가 향 맑게 흐른다.


“총체적”은 “전체”를 의미하는 “whol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whole”은 건강을 의미하는 “health”나 치유를 의미하는 “healing”의 “heal”과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200쪽)


화엄은 치유다. 치유를 입에 올리면서 냉기를 배설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종자논리부터 확인할 일이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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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생”, “생물 다양성”, “삶을 얻는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모두 소중한말인데, 자칫하면 “죽이고 있다.”, “생명을 받고 있다.”는 측면을 은폐할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죽이고 있다.”는 것에 시선을 주면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보이고 살아 있는 것의 의미가 갑자기 무거워집니다.(148쪽)



함께 삶을 꾀하고 북돋워 풍요롭게 얻고 다양하게 펼친다는 생각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실천에 참여하는 일은 우리 가슴을 더욱 벅차게 한다. 이것은 삶 전체 진실의 절반이 채 안 된다.


산 자의 삶은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에 터한다. 다른 많은 생명의 주검 위에서야 내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야젓할 것이다. 우리 삶은 그 목숨 값에 걸맞은 사유와 실천으로 평화로울 것이다. 이것이 전체 진실의 절반 이상이다.


조금 더 생각을 펼쳐본다. 쌀 한 톨, 파 한 뿌리만 우리에게 그 생명을 바치는 것 아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 사회정치적으로 핍박 받는 사람, 장애로 차별받는 사람,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이들 모두 그렇지 않은 다수에게 목 길게 늘이고 엎드려 산다. 그 목숨 값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풍요를 누린다.


다른 생명을 죽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마음 자세는, 그러므로 고마움이다. 고마움이 족함을 아는 마음을 부른다. 족함을 알면 탐욕은 도리어 성가시다. 제 호주머니에 마구 우겨넣기를 거절하는 순간, 아, 이 홀가분함이여.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온 오십 줄 제자가 어느 날 술좌석에서 정색하고 묻는다. “선생님은 아무리 흔쾌히 웃으셔도 왜 제겐 그 끝이 무겁게 느껴질까요?” 내가 답한다. “응, 내 웃음은 누군가의 울음 값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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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3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4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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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많은 젊은이들은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듯합니다.


이는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뜻이지요. 기본 생활에서 벗어났으므로 무엇이 기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27-128쪽)



먹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진릿값이 1인 명제에 해당한다. 역은 어떤가. 범속한 형식논리에서 보면 진릿값은 1일 수 없다. 정색하고 생각한다. 먹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먹는다는 것은 좁은 의미의 사食현상을 넘어선다. 사食는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먹는다는 것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과 느낌을 공유하는 것, 다른 생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그러니까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관계 형성의 한 측면 모두를 아우른다.


아니다. 이런 사유는 통념적인 것이다. 진실은 거꾸로다. 음식이라는 게 본디 다른 생명이므로 최초·근본의 생명 현상은 사食현상이다. 나머지가 오히려 변주며 은유다.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야말로 진릿값 1을 지닌다.


너무 많이, 너무 맛있게,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 먹어서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 속에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말이 부분집합으로 들어 있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현상에는 인간 삶의 무의미 말고 다른 무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더 무섭고 깊은 어둠, 더 큰 멸절의 블랙홀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수도 있다.


먹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삶과 그 조건의 일부가 아니다. 기본이되 기본 너머다. 우리 운명 전체를 움켜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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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0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2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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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농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아슬아슬한 선을 보여줍니다. 채집에서 재배로 이행하면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른 생명을 죽여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재배와 채집은 같지만, 재배를 통해 어디까지 인간의 것으로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의 대답이 바로 자연농입니다.(122쪽)·······살기 위해 죽여서 먹는 행위는 아름답고 엄숙한 행위입니다.(125쪽)


아, ‘꼰대’가 되어 가나보다, 하다가도 이내 그 생각을 거둔다. TV 채널마다 먹는 이야기 아니면 도무지 할 말이 없다는 듯 떠들어대는 꼴을 보고서야 어찌 돌아서지 않으랴.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생존의 기본인 먹는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일시적 범람이려니 해둔 세월이 너무 길다. 갈수록 먹을 것에 집착하는 추세다. 배를 채우는 먹기에서 곧 바로 향락적인 먹기로 넘어간 풍경이다.


먹는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림과 죽임의 경계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외길에서 불가피하게 치르는 제의이자 축연이다. 이 비대칭의 대칭이 지닌 뜻을 망각하고 향락으로 빠져버린 오늘의 우리 농업과 식문화는 그 자체로 위중한 질병이다. 포르노다.


포르노는 아름답지 않다. 포르노는 엄숙하지 않다. 아름답고 엄숙한 농업, 아름답고 엄숙한 식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일 때만 성립한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짓고 먹을까, 결정할 때 영양도 맛도 생명을 살리는 균형점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 중용의 밭에서 낸 중용의 음식으로 중용의 식사를 하기 위해 탐욕의 손을 거둬들이는 일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급진적radical이고 근본적radical인 혁명이다.


너무 많이 먹으려 너무 많이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너무 맛있게 먹으려 너무 잔혹하게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너무 쉽게 먹으려 너무 무심코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너무 함부로 먹으려 너무 무례히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아슬아슬한 선” 위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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