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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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돌봄은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다른 점이나 특별한 점을 인식하며,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은 자기 삶이 귀중히 여겨진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사람을 분류할 권리는 없지만 특권이 하나 있다. 바로 각자가 얼마나 고유한지 이해하는 특권이다. 돌보는 사람이 이 고유함에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할 때 아픈 사람의 삶은 의미 있어진다. 나아가 아픈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돌보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면서 돌보는 사람의 인생도 의미 있어진다. 돌봄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이해가 쌍방향으로 일어나야 하듯 돌봄도 대칭을 이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우리는 자신 또한 돌본다. 그렇지 않다면 소진되거나 좌절하고 말 것이다.(80-81쪽)


내가 하는 일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은 이 두 가지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허구한 날 함께 있으면 너도 아파지지 않느냐? 네가 아프면 누가 고치냐? 내 대답은 이 두 가지다. 나도 아프다. 아픈 사람들이 고친다. 내 대답을 들은 뒤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색의학은 부정하겠지만 우울병의 근원적 치유에 숙의는 불가결하다. 숙의의 터전은 공감이다. 공감의 본령은 전염이다. 전염의 경로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연결고리로 환자와 의자의 삶은 함께 짜인다. 함께 짜이는 과정에서 환자와 의자의 삶은 ‘다로 또 같이’ 달라진다. 달라짐, 이것이 다름 아닌 치유다.


치유는 치료와 돌봄을 포괄하는 너른 개념이다. 돌보는 사람을 겸하므로 숙의로 치유하는 의자는 의학 너머 삶을 산다. 의학 너머 삶을 사는 의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끊임없는 깨침의 계기다. 어느 한 깨침에 머무를 수 없다. 머무를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이 고유한 아픔이기 때문이다.


각기 고유한 아픔을 치유하는 일의 성패를 칼 같이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라도 깨침은 일어난다. 아픔의 사람, 사람의 아픔을 마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아픔이므로 즐거울 리 없지만, 웃을 일 구태여 찾지 않아도 삶이 싱그러운 것은 바로 전천후 깨침 때문이다. 전천후 깨침에 뭘 보탠들 사족 아니랴.


60년 남짓한 생의 여정을 돌아보면 참으로 훼절이 많았다. 극단의 고통, 극단의 결핍, 극단의 이별, 극단의 모멸, 극단의 실패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그 훼절을 뚫고 나아가기 위한 저항 또한 극단이었다. 극단들의 어름에서 숙의치유, 그러니까 돌봄의 숙명이 드러나 오늘에 이르렀다. 고유 우주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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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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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은 상실을 불러온다. 상실은 통증처럼 몸 안에서 시작되고, 그 다음엔 밖으로 이동해 나가서 몸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62쪽)

  미래와 과거의 상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의 상실, 평범한 기대의 상실은·······모두 애도되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무엇을 상실하느냐는 각자의 삶과 질병에 따라 다르다. 아픈 사람이 애도하기로 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상실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은 실재하며 존중받아 마땅하다.(66-67쪽)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전문가들은 적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애도가 ‘긍정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병이나 죽음 때문에 애도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 상실이 그저 뒤돌아 나오면 되는 사건인 양 단순하게 다룰 때만 ‘신속한 적응’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실한 무언가를, 상실한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돌봄을 주던 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뒤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68-69쪽)


지난 5월 18일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의 리뷰로 쓴 <슬픔의 ‘슬픔’에서 혁명이 시작된다>는 애도를 왜곡·억압하는 권력의 파렴치보다 애도를 오해하며 허투루 대하는 지식인의 피상성 문제를 지적했다. 애도는 어느새 유행어처럼 되었지만 여전히 그 의미가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채 흘러 다닌다. 이 어두운 실재는 오늘 아서 프랭크의 본문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충분한 애도를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의도에 누가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애도의 내용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애도가 상실한 사람의 삶 전체에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하는 일이라고 한다. 저자가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으므로 내가 쟁에 부친다.


원문 단어를 모른 채 하는 일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긍정”이란 번역이 옳다고 전제하자. 긍정은 부정의 반대말이다. ‘틀리다(그르다)’에 맞서는 ‘맞다(옳다)’의 뜻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맞다’고 평가한다는 말이다. 과연 애도가 ‘맞다’는 평가일까?


아니다. 특정 부분 불균형을 제외하고 저자는 일관되게 질병과 통증과 상실의 발생이 성격 또는 윤리적 판단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애도가 ‘맞다’는 평가라면 ‘맞게 살아온 삶에 왜 이런 상실이 발생했을까?’ 하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은 실증적인 차원을 물리고 심리적 차원을 불러들인다. 이는 저자의 뜻과 배치된다.


생각건대 저자의 전체 논지로 보아 애도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부 평가 없이 그대로 “인정認定”하는 일이라 함이 타당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구별하지 않은 채 현실 자체를 내 삶의 일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애도다. 질병과 통증과 상실을 내 삶에서 분리해내고서는 애도가 성립할 수 없다. 애도 없이는 “다른 편에 있는 삶”에 가 닿을 수 없다. 애도는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삶을 잇는 연속의 고리다. 애도는 질병과 삶, 나와 너,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속의 고리다. 그 연속의 고리는 “인정”이 피워내는 꽃이다. “인정”이 피워내는 꽃은 슬프기 때문에 아름답다.


저자가 미처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번역자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서구 사유가 이런 부분에 취약하며, 그 서구의 자장 안에 있는 우리사회 주류 역시 그렇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세월호사건 유가족은 애도를 금지 또는 유보당한 채 잠 못 이루는데 지겹다 애도 따위 그만하고 적응하라 종용하는 무리가 훤화하고 있다. 촛불이 세월호사건 수괴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감옥에 넣었지만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은 채 1332일째 진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애도 길이 하루빨리 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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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바라보는 동안 그 아름다움은 내 안에서 짧은 시가 되었다.


  나뭇가지 뒤 가로등이

  서리 낀 창 위에

  무늬를 던진다

  유리를 닦지 마라

  사람들이 깨어날라


  ·······이야기되어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형편없는 시구일지는 몰라도 나는 다시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된다고 느낀다.·······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질병과 통증은 삶을 조각내지만, 사는 이유를 모두 빼앗겼다고 혹은 사는 이유가 막 사라질 참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조화를 발견하곤 하며, 그렇기에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58-61쪽)


원문을 보지 못했다. 그냥 그 상태에서 위 번역을 다시 번역한다.


  나뭇가지 따라나선 가로등

  서리 안은 창, 그

  가슴에

  무늬 하나 살포시

  유리 얼룩 그대로, 그대

  곤히 잠자라


뭐, 그냥 유치한 변주다. 구태여 이런 퍼포먼스 하는 까닭이 있다. 내가 꽂힌 지점은 바로 “표현”이다. 나는 표현을 “묘사”라 묘사하고 싶다. 묘사가 더 감각적이다.


더 감각적이란 말은 더 정확하고 더 예술적이란 말이다. 더 정확하고 더 예술적인 묘사를 왜 해야 하나? 그렇게 묘사된 통증은 비상해지기 때문이다. 비상해진 통증은 자기 거점을 지운다. 이것은 역설이며 역설이 아니다. 붓다의 진리며 메시아의 진리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아! 이 도저한 고요, 철저한 균형. 원효 냄새를 맡는다. 바리 살갗을 만진다. 삶의 전경을 본 거다. 그 전경에서 통증을 발효시킨 거다. 비로소 통증은 통증인 거다. 통증으로 말미암아 고립된 에고가 참 나, 그러니까 우리 사이 나로 돌아왔다. 우리 사이 나로 돌아온 것은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술이다. 예술의 비상으로 모든 뮤즈는 치유 신으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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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밤, 조각나는 듯 느끼는 데서 빠져나갈 출구를 발견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창에 비친 풍경과 마주쳤고, 멈춰 섰다. 진정 환영과도 같았다. 창밖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나무 바로 위쪽의 가로등이 나무 그림자를 서리 낀 창문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곳에, 암흑과 고통밖에 없는 듯했던 한밤중의 창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름다움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제자리에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조화로워진다.·······


  질병에 얼굴이 있다면 그 가로등 불빛의 아름다움이 질병의 얼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밤에 창문에서 본 것은 질병의 얼굴이 아니었다. 진통제 약효를 뚫고 나온 통증이 악몽을 만들어냈을 때 악몽 속에서 질병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 밤의 창문은 신화도 상징도 아니었다. 창문은 오로지 창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통증 속에 있었지만 통증이 나를 그 자리로 데려갔기에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조화가 다시 돌아왔다.(58-59쪽)


무엇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과 그 마음이 몸에 미치는 파장은 우리 삶에서 과연 무엇인가?


풍경은 전에도 있었다. 풍경은 전에도 보았다.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늘 거기서 보았던 풍경이 홀연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어떨 때인가?


여전히 통증 속에 있었지만 통증이 나를 그 자리로 데려갔기에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의인법을 소거하고 간명하게 말하면, 통증이 전환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재앙은 특별한 순간, 즉 전환의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278쪽)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출산을 예로 들며 이런 양의 피드백 과정은 정체 국면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산모가 신체 일부를 잘라낼 때와 똑같은 극한의 진통을 겪어내면서 새 생명을 낳는 이치는 아서 프랭크가 진통제도 뚫고 나오는 암의 통증을 겪어내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그대로 적용된다.


아름다움의 발견은 무슨 전환을 가져왔나?


조화가 다시 돌아왔다.


단절에서 연속이 복원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지상至上의 전환이다. 지상의 전환이 아름다움의 감각에서 오다니. 아름다움이란 그러니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름다움이란 실체가 있어 전환의 에너지가 전해진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풍경 속의 나무와 가로등, 그리고 창문이 있어 전환의 구조가 세워진 것이 아니다. 통증에 극진히 주의를 기울였을 때 전환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아름다움은 소식이다. 그 소식을 듣고 아픈 사람은 돌아갈 길을 찾는다. 돌아갈 길 위에 선 사람에게 소식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라는 품은 너르고 다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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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에는 얼굴이 없다. 통증은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통증은 바로 내 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내 몸이다. 통증은 몸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몸이지, 외부에 있는 어떤 신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통증과 씨름하는 일은 몸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몸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통증을 전부 내 몸 안에 있는 내 것으로만 본다면 몸 안에 고립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고립은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건강할 때 몸은 질서정연하고 주위 환경에 조응하며, 몸 부위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작동한다.·······

조화란 한밤중 다른 사람들이 잘 때 함께 자고 함께 휴식하는 것이다.(54-55쪽)


내 병은 통증을 밤과 연결했다. 종양이 몸을 장악하면서 통증은 정신을 장악했다. 통증이 빚어낸 고립과 외로움은 어둠 속에서 더 커진다. 아픈 사람이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한밤중, 통증 속에 있는 사람의 세계는 더는 하나로 붙어 있지 못하고 조각나 떨어져 나온다.(53쪽)


추방당하는 듯 아픈 사람이 겪는 경험은 통증과 함께 시작한다.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만 통증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수 있다. 이 감각을 회복하려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55쪽)


빈곤이 사회의 기조로 자리 잡고 있던 육칠십 년대 서울 산동네,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복작대며 사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적당히 눈치 봐가며 옷 갈아입는 일는 기본이고, 부부는 그 와중에 사랑을 나누기도 해야 했다. 책상커녕 방바닥에 엎드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조차 녹록치 않았다. 초등학생은 공부 부담이 덜했으니 그나마 놀아가며 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 시험 땐 여간 속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가족이 잠든 이후 한쪽 구석에 삼십 촉 백열등에 갓을 씌워 빛을 가둔 뒤 둥근 밥상 다리를 접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시험공부를 하곤 했다. 가족의 평안히 잠든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두 가지 상반된 생각에 휘말렸다. 먼저 죄책감부터 달려들었다. 높은 성적 받아올 때 좋아는 하면서도 팥쥐 엄마는 시험 내내 전기요금 이야기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뒤 이어 고립감이 들이닥쳤다. 깊은 밤에 홀로 불을 밝힌 채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란 얼마나 아뜩한 일이었던가. 추운 겨울에는 유난히 더했다.


하물며 통증임에랴. 홀로 통증에 시달리며 앓는 일은 참으로 막막한 일이다. 아무리 함께 통증을 느끼는 일이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아파서 몸부림치는 바로 그 옆에서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 아픈 사람이 느끼는 야속함을 공박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이 잘못한 것 또한 전혀 없다. 함께 경험할 수 없는 일에 함께 엎어져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두고 결코 사랑이니 도리니 할 수는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서로 닿지 못하거나 어긋나는 일은 안타까움 그 이상이다. 이런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다.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이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온 가족이 밤잠 자지 않으며 함께 지킨다고 해서 통증이 없어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부질없다고 해서 “추방”으로까지 느낄 수 있는 아픈 사람 상태를 마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췌론의 여지가 없다. 이 모순을 어찌 할까? 일단 통증의 실재를 인정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없애야 한다는 목표를 내려놓고 문제를 더 넓은 맥락에서 살피는 거다. 맥락을 넓힐 때 열리는 길이 바로 해소다. 해소란 문제를 있는 그대로 품어 안고서 더는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데 문제 삼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통증을 느낌의 “일부”이게 하면 된다.


고립 상태에서는 통증이 느낌의 “전부”다. 느낌의 전부인 통증은 그 고립된 삶 전체를 부숴버린다. 고립된 채 삶 전체가 결딴나는 것을 막으려면 삶의 맥락을 넓혀야 한다. 맥락을 넓히는 것은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영역의 확장은 고립의 확장일 뿐이다. 고립을 무한히 확장해도 고립은 고립으로 남는다. 고립을 뚫으려면 단단한 경계를 정조준 해야 한다. 단단한 경계에 금을 내는 일이 바로 맥락 넓히기의 시작이다. 금은 틈의 계기다. 틈만 내면 고립을 뚫고 나올 수 있다. 허위단심 터서 나왔는데 허공이면 어찌 할까? 걱정할 거 없다. 경계 밖은 어디나 누군가의 알뜰한 영역이니까.


누군가의 영역에 벌거숭이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픈 사람은 자기 경계 안, 그러니까 고립된 자기 영역에 똬리 틀고 앉은 통증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통증이 일부로 느껴진다는 거다. 일부가 된 통증에 매달려 애면글면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통증보다 더 큰, 더 넓은 맥락의 삶을 끌어안아야 하지 않겠는가. 넓은 맥락에서 다시 느끼면 통증은 더 이상 치명적이지 않다. 치명적 통증이란, 실은 고립이 키운 거대 허깨비다. 아무리 거대해도 허깨비는 끝내 허깨비다. 허깨비 저주 따위가 파리 목숨 하난들 가져가겠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는 통증을 어느 누가 알겠냐며 스스로 고립된다. 또 많은 사람들은 통증에 지레 겁먹고 아예 마비의 길을 택한다. 이를 기화로 백색의학은 진통기술 팔아 떼돈을 번다. 진통기술은 분리 이데올로기 또는 타락문명의 아편이다. 아편을 버릴 때가 왔다. 우리는 이제 “조화롭게 통일”된 삶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떨어져 나온 사람과 자연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빗장을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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