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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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말해서 음모론은 인간이 그 복잡한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조종한다고 볼 만큼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대개 반증 불가능한 음모론은 실증적 호소라기보다 심리적 호소에 훨씬 더 가깝다. 음모론은 우리의 원초적 분노를 이용하고, 그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아 비난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사악한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수많은 혁명가들이 과두제를 전복하면서 깨달았듯이, 우리는 증오 대상을 잘못 잡고 있다.(115-116쪽)


우리는 세계 파괴에 연루되는 일을 최소화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사회에 사는 것만으로 세상의 악에 기여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된 자급자족의 계획공동체를 갈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사회악에서 결백함을 증명하려는 개인적 욕망은 백 평도 넘는 주택에 설치한 태양열전지판과도 같은 일종의 물신fetish이다.(114쪽)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우리의 이데올로기, 신념체계, 무의식의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마치 음모처럼 보이는 동시발생의 그물망·······이다. 말하자면 음모를 꾸미는 사람 없는 음모며, 모두가 하수인이지만 하수인을 부리는 사람은 없·······다.(115쪽) 진짜 범인·······, 막후에서 엘리트층을 조종하는 진짜 지배자는 바로 화폐시스템 자체다.(116쪽)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음모론에 휩쓸리는 따위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러면 음모론을 일축하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음모론과 의문 사이에서 많은 지식인이 국가범죄·사회악의 방조범으로 전락한다. 음모론의 곡절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허다한 음모론의 전범典範은 거대유일신교다. 창조신 관념이야말로 음모론의 핵심이다. 국가, 남성가부장, 성인,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들이 모두 창조신에 빙의되어 크고 작은 음모의 정상에 군림한다. 대한민국이라면 영남, 삼성, 조·중·동, 개신교, 판검사, 사학재단, 서울대, 육사를 아우르는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음모의 정상에 자리 한다. 음모가 아니고서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모는 실재다.


음모는 분리문명 시대에서 필연이다. 분리문명 시대의 분리는 상하 분리다. 상하 분리의 목적은 수탈적 지배다. 수탈적 지배는 음모 없이 불가능하다. 음모론은 실제 음모 여부를 가지고 나이브하게 논해서는 안 되는 주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음모론을 물리치는 실질적 이유를 톺아볼 필요가 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현대문명을 변혁하려 할 때 취해서는 안 되는 두 극단을 경계한다. 하나는 음모론에 이용당하는 세속 혁명이다. 다른 하나는 “완전히 고립된 자급자족의 계획공동체”다. 양자는 모두 분리를 전제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후자는 음모론과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음모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분리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아무리 완벽주의를 시도해도 헛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찌 하면 음모를 돌파할 수 있나? 분리문명의 세상에는 부단히 음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음모란 없다고 못 박는 것은 분리문명의 화폐시스템이 펼치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동시발생의 그물망·······이다. 말하자면 음모를 꾸미는 사람 없는 음모며, 모두가 하수인이지만 하수인을 부리는 사람은 없·······다. 진짜 범인·······, 막후에서 엘리트층을 조종하는 진짜 지배자는 바로 화폐시스템 자체다.”라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말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동시발생의 그물망과 화폐시스템은 전혀 다른 말이다. 전자는 구성 개체(n)의 상호작용(n!)으로 실재하는 사건이며 n 하나하나와 분리되지 않는 전체적 실재다. 후자는 개체 구성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실체다. 만일 진짜 지배자로서 화폐시스템 자체를 범주 개념으로 삼는다면 이 논의는 분리 문명을 넘어서지 못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기독교의 거대유일신 그림자 안에 도로 갇히고 만다. 도로 음모론에 갇힐 때는 이중으로 갇힌다. 음모가 없다는 음모론.


음모가 없다는 음모론을 꿰뚫으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동시발생의 그물망, 정확히는 비인과적 상호작용의 네트워킹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 네트워킹에서는 진짜 지배자와 하수인을 분리할 근거가 없다. 화폐시스템 자체는 그럼 누가 변모시키나, 라고 물을 필요도 없다. 음모론이 말하는 음모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 완벽한 음모가 없다고 해서, 전지전능한 조종자가 없다고 해서 음모를 부정하는 자들처럼 거대유일신을 부정한답시고 무신론에 빠져버리는 유의 오류에 가담할 이유도 없다.


비인과적 상호작용의 네트워킹은 신성과 타락 어느 한쪽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지 않다. 생성·변화·소멸해가는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인간들의 정치경제학적 역관계를 따라 다른 결과 겹이 형성되는 것이 사실이다. 시스템이 막후에서 엘리트층을 조종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은 신께서 섭리하신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음모론을 “실증적 호소라기보다 심리적 호소”(115쪽)라고 비판하기 전에 ‘실증적 호소라기보다 정치적 계산’으로 음모를 부정하는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그 저항이 네트워킹에서 신성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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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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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옛것을 뿌리 뽑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것을 창조하는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혁명은 이미 시도해 왔지만 구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매번 같은 결과를 낳았다. 신성한 경제는 전적으로 다른 혁명이며,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런 혁명에서 패자는 자지가 패자임을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106쪽)


“승리한 사상이 비판적 요소를 포기하고 수단이 되어 기존 질서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자기의지와는 반대로 예전에 선택했던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아도르노의 이 말은 “이미 시도해 왔지만 구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매번 같은 결과를 낳았다”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귀납 언어를 명징한 연역 언어로 바꾸어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거듭해서 일어났을까? 왜 이런 일은 거듭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상대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대방을 닮게 되어 있다. 얼핏 들으면 수사rhetoric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이지만 일상의 경험에서도 이 말은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마음 치유에서도 이 말은 주의 깊게 적용된다. 엄밀하게는, 닮는 것이 아니라 본디부터 자기한테도 있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A와 non A로 나뉘어 전선이 형성 되지만, 전선이 붕괴되면 상대의 것으로만 분류되던 속성이 자기 것으로 표면화되기 마련이다. 정치적 혁명 국면에서는 혁명으로 일어선 자가 혁명으로 넘어진 자와 같은 짓을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고 보면 “옛것을 뿌리 뽑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것을 창조하는 혁명” 자체가 당최 성립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짓을 인간이 되풀이해온 이치를 따져보자.


A를 뿌리 뽑고 non A를 창조하는 일은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1. A와 non A는 완전히 분리된다. 2. A 없이 non A만으로도 세계가 구성된다.


형식논리에서 이 두 전제는 이의의 여지없이 성립한다. non A가 진리일 때 A는 비 진리다. 비 진리는 비존재다. 아니. 비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형식논리를 만들어 구사해온 역사는 그렇게 만들기 위해 진리를 구사해온 역사다. 진리 구사를 선교라 하든 혁명이라 하든 교육이라 하든, 비 진리를 박멸해 진리만이 충만한 세계로 만들고자 한 분투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분투 결과, 비 진리의 자리에 대신 진리가 가득 채워졌던가. 그럴 리가. S극을 제거한 N극만의 자석이 있나. 파동을 제거한 입자만의 빛이 있나. 관념이 실재를 구축驅逐한 곳에 무성히 자란 진리는 폭력일 뿐이다. 실재로서 진리는 논리 폭력 너머 비대칭의 대칭구조가 자발적으로 부서지는 운동이다. 변화를 추동하는 쪽이 상대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변모시키는 것”이다. 상대는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변화의 흐름에 감응하는 것이다. 감응이 감응을 낳는다. 참된 혁명은 감응이 공명해가는 과정이다.


이 정도면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의중을 깊이 들여다본 셈인데, 뭔가 개운치 않다. 왜 그럴까? 숱한 혁명 이론, 특히 마르크스 사상과 같은 고급담론에 대한 이해·태도 여하와 무관하게 우리가 현실에서 공유하고 있는 ‘혁명 감정’과 간극을 느끼기 때문이다. 당장 이런 의문부터 든다. “변화를 거부하면 제거해야 하지 않나?” 우리 눈앞에서 그런 꼴을 너무도 많이 보아온 터라 이 의문은 내려놓기 쉽지 않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말은 이를테면 범주적이다. 특정 개인·정당·언론·종교·기업·권력기관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양승태·자유한국당·조중동·개신교·삼성·떡검 따위를 몰아내는 일은 변모의 반대말이 아니다. 이들을 몰아내는 일은 구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들을 철저히 처절히 몰아내는 일이야말로 그들이 속한 사회분야를 변모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들을 깨알같이 챙겨 몰아내야 우리사회 전체가 변모된다. 변모는 성찰하는 주체에게서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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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부도덕한 것은 돈이 당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토지에 임대료가 붙듯이 돈에는 이자가 붙는다. 돈은 공유자원의 시체다. 한때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순수한 형태의 재산으로 변한 모든 것들의 체현이다.(91쪽)


지하철역에서 내려 한의원으로 오는 길목에 중학교가 하나 있다. 8년째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느낀 변화 하나. 화장한 여학생들이 처음에는 눈에 띌 정도였으나 지금은 그 반대라는 점이다. 많은 풍조가 일본을 통해 들어오거니와 일본 여학생들은 지진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화장을 한단다. 이쯤 되면 상황은 엄중하다. 시체가 밉게 보이면 안 된다는 게 이유이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이 화장하는 것 자체가 무슨 윤리적 쟁점 따위를 머금고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여학생들이 화장으로 자신의 ‘값어치’를 매긴다는 데 있다. 이것은 화폐 포르노money porn 사회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가능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만든다. 각기 지닌 고유한 생명을 박탈해서 시체로 만들어 거래한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를테면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 은밀한 살해다. 화장에 내몰리는 여학생들은 예쁜 얼굴 이외에 그 어떤 가치로도 존재할 수 없도록 화폐화된 시체다. 더불어 자유롭게 누리던 영성, 미학, 그리고 사회적 네트워킹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오늘 아침, 유난히 성숙해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짙은 화장 향을 풍기며 지나간다. 마치 성인 여성이 교복을 입은 듯 그려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곧 이어 슬픔 같은 무엇이 들이닥쳤다. 어른으로서 느끼는 미안함, 무력감도 질척거리며 뒤따라 왔다. 오늘 이 사회는 화장할 수밖에 없는 여학생에게 무엇일까? 저 여학생이 나 같은 어른이 되었을 때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돈의 힘은 죽음의 힘”(103쪽)이라는 진실이 자신에게만큼은 해당되지 않을 거라 믿고 우리는 빌라도의 물그릇에 손을 씻는다. 그 깨끗해진 손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사람이 있다. “돈이 당신을 위해 일하는 것”에서 자유로운 당신은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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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재산이 ‘합법적’으로 이전된 경로를 따라 그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보자. 결국 최초의 소유주는 그것을 그냥 가져간 사람이며, ‘우리 것’ 혹은 ‘신의 것’의 영역에서 ‘내 것’의 영역으로 분리시킨 사람이다. 그런 일은 대개 강제로 이루어졌다.(77쪽)


이야기인즉슨 합법적 재산의 기원은 강도질이었다는 거다. 간단히 뒤집으면, 강도질을 합법화한 질서가 지금 세상이라는 이야기다. 강도질의 합법화에 권력의 압제가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것’ 혹은 ‘신의 것’의 영역에서 ‘내 것’의 영역으로 분리시킨” 일대사건이 어찌 외부 조건의 변화만으로 수용되겠는가. 분리는 내적 근원을 지닌다.


내적 근원의 본질은 인간 의식이다. 인간 의식의 요체는 자아 통찰이다. 자아 통찰은 비-자아와 금을 그으며 일어나는 경계사건이다. 분리는 인간에게 불가피한 사실Sein 또는 불가결한 당위Sollen다. 자타 분리의 연장으로서 “재산 개념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74쪽)이자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사유재산 그 자체가 아니라 사유재산에서 비롯하는 부당한 이득”(80쪽)이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 자타 분리는 국소적이며 잠정적이다. 국소적이며 잠정적인 자타 분리에서 발원하므로 완전히 배타적이고 매매·상속이 보장된 사유재산은 이치상 성립할 수 없다. 전체와 궁극에서 너도 땅도 나와 연속된 몸이다. 몸에서 떼어내고도 길이 살 수 있는 무엇 하나만 제시하라. 사유재산을 길이 인정해주마. 사유재산은 국소적이며 잠정적으로, 특히 부당한 이득을 일으키지 않는 한에서 허락한다.


현실은 얼마나 아득한가. 상위 1%가 전국 개인 토지의 57%를, 상위 10%가 97.6%를 소유한 대한민국 상황은 모든 논의를 물색없는 것으로 만든다. 토지 소유 제도를 혁파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누진세 제도만이라도 철저히 시행해야 한다. 토지소유 불평등은 모든 불평등의 토대다. 핵심 자산은 건드리지 못한 채, 소득 문제만 만지작거리는 관료들의 행태를 보라. 현실은 얼마나 참담한가.


재산이 도둑질이라면, 사유재산권을 보호하는 법은 범죄를 영속시키는 제도다.·······그런 법이·······도둑들 스스로 만든 것이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80쪽) 단군 이래 최악의 도둑놈인 이명박이 스스로를 이렇게 보호하지 않았던가. “나는 도덕적으로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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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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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와 내 것의 논리에 갇힌 채, 분리된 자아와 자아의 연장, 즉 돈과 재산을 지키고 확대함으로써 잃어버린 부의 작은 일부라도 회복하려고 애쓴다. 자아를 경제적으로 확대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대신 육체적 자아를 확대한다. 이는 빈곤층의 비만율이 불균형적으로 더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쇼핑, 돈, 취득에 대한 중독도 근본 원인은 음식 중독과 같다. 그 모든 중독이 외로움, 즉 본래 자아 대부분과 분리된 채, 간신히 존재하는 고통에서 비롯한 것이다.(74쪽)


유대와 감사의 마음이 커질수록 소유 충동은 줄어든다. 내 노동력이 실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만드는 것도 실은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그런 깨달음 속에서는, 내가 존재하도록 도와주고 삶이라는 선물을 허락해준 모두에게 내가 만든 것을 나누어주고 싶어진다.(76쪽)


소유 충동은 결핍의식에서 온다. 남이 가져서 내 것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새로 가지거나 이미 가진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싶다. 소유 충동은 상실의식에서 온다. 남이 내 것을 가져가서 없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되찾아오고 싶다.


그렇다 치자. 그렇게 소유하고 확대하면 결핍과 상실이 해결되나? 그럴 리가. 왜 그런가? 결핍·상실의식은 분리에서 왔는데 분리를 놔두고 그 프레임 안에서 치고받으니 되지 않는다. 분리 프레임을 깨야 한다. 남의 것, 끝내는 남 자체를 빼앗거나 없애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남의 것: 내 것, 남: 나의 분리를 허물면 해소될 일이다.


분리를 허무는 기초가 “유대와 감사의 마음”이다. “삶이라는 선물”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기 삶을 선물로 “모두에게” 기꺼이 나누어줄 때, 분리는 허물어진다. 분리가 허물어진 땅에 소유 충동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간결한 이치다. 이치를 구현하는 현실은 간결하지 않다.


이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자아를 경제적으로 확대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대신 육체적 자아를 확대한다. 이는 빈곤층의 비만율이 불균형적으로 더 높은 이유 중 하나다.


경제적 자아 확대와 육체적 자아 확대는 같은 자아 확대라는 말을 쓰지만 전혀 다르다. 수단 없는 사람들, 빈곤층이란 말에 이미 함축되어 있듯, 전자는 지배의 기반이 되고 후자는 피지배의 근거가 된다. 현실로 존재하는 계급문제를 환기시키는 말이 아니라면 육체적 자아 확대란 표현은 기만이거나 조롱이다. 게다가,


쇼핑, 돈, 취득에 대한 중독도 근본 원인은 음식 중독과 같다.


이 말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빈곤층 비만을 음식 중독과 연결한 점. 설혹 비만의 원인이 음식이라 하더라도 가령 값싼 정크푸드 섭취 등에 따른 영양 불균형 같은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중독이라 규정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둘째, 쇼핑, 돈, 취득에 대한 중독과 음식 중독의 차이를 간과한 것. 설혹 중독의 원인이 같다 하더라도 부유층이 쇼핑, 돈, 취득에 중독되는 것과 빈곤층이 음식에 중독되는 것을 ‘근본’이란 말로 묶어 하나로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중독이 외로움, 즉 본래 자아 대부분과 분리된 채, 간신히 존재하는 고통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더라도 부유층의 고통과 빈곤층의 고통이 어찌 같겠나.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이런 나이브함은 사유와 실천의 주체를 보편화한다. 주체의 보편화는 결국 주체의 실종을 낳는다.


지금의 위기는 우리가 아는 식의 문명이 끝나간다는 징후이며, 지금보다 더 유연하고 포괄적인 자아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 상태로 회복되려는 징후다.”(75쪽)


징후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분위기다. 징후는 천시다. 인사, 곧 사람의 실천이 없으면 서로 열어주어 변화를 일으키지天時人事兩相催 못한다. 징후를 읽은 자리마다 다른 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결의 실천을 해야 한다. 30번째 희생자가 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해야 할 일, 해고를 저지른 회사가 해야 할 일, 그리고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각기 다르다. 뭉개면 안 된다. 분명히 해야 한다. 서야 할 자리에 서야 한다.



대한문 쌍차 분향소 설치를 방해하는 매판독재분단교 신도들. 징후 뒤로 숨을 수 없다는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징후의 낙관은 가장 아픈 사람들의 피맺힌 유대와 감사로써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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