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에 가면 추사의 향을 달리 맡을 수 있는 편액을 둘 만난다. 



<판전>



<영산전>



위 것은 추사가 죽기 사흘 전에 남긴 유작이다. 추사체를 머금되 훌쩍 넘어 스스럼없이 네오테니에서 노니는 절정고수의 무애 자재함으로 신비감마저 군더더기 감정 같이 느껴지게 한다. 사찰에 걸릴 편액임을 알면서 병중에 썼다는 말을 굳이 남긴 까닭은 알 길 없으되 아마 이조차도 경계 너머 마음 아닐까 싶다. 


아래 것은 추사의 제자 추금秋琴 강위姜瑋의 문인이었던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의 글씨다. 추사체에 대한 초보적 기억만으로도 이 글씨에서 추사를 떠올릴 수 있다. 그 눈으로 보면 판전 글씨보다 잘 쓴 글씨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그러면 판전 글씨처럼 써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아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보편일 수 없다. 자신의 지향과 삶의 조건이 만나는 시공에서 지극함으로 각기 인연을 지을 따름이다. 추사는 추사의, 백련은 백련의 마음 다함에서 노닌다. 나는 내 마음 다함에서 노닌다. 이번은 영산전 앞에 오래 머문다. 이 머묾이 그저 스쳐갈 작은 우연이라면 그게 고마운 만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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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생기 없는 삶은 면밀히 들여다볼 가치가 없습니다.(78쪽)


Simon McEwen이 2017년 10월 2일에 쓴 “The unexamined life if surely worth living, but is the unlived life worth examining?”이란 글 전문을 인용한다.


Recently, I feel I’ve achieved a state of personal authenticity. I’ve obtained a sense of clarity of my own values, goals, and opinions and have achieved a healthy distance from the effects of negative external opinions and have steered off the path towards becoming a product of our culture. In a recent article, I discussed my admiration for authenticity and in it, highlighted the importance of self-knowledge and dove deeper into the echoes of Socrates words “An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I’m keen to challenge myself on this statement. I recently finished a great book by Daniel Klein titled ‘Every Time I Find the Meaning of Life, They Change it’. A Harvard philosophy graduate and as a life-long philosopher he has explored the full range of ideologies adopted by thinkers across time. What I really enjoyed about this book was its simple structure. It was based on pithies which Daniel collected throughout periods in his life. He laid out each pithy, discussed the time he recorded it, and then went on to explore that thought in the present moment. One of the many pithies Daniel recorded is a polar-opposite counter question to Socrates’ quote mentioned above. Adam Phillips, British psychoanalyst and philosopher said, “The unexamined life if surely worth living, but is the unlived life worth examining?”


I don’t think it’s a stretch to say that the modern man has an innate fondness for avoiding living in the present. We are so preoccupied with the lives we have not lived that we forget about appreciating the one we actually have. We have many reliable cognitive abilities to drift away from the present by fantasying “What next?” or the clincher, “What might have been?” Phillips argues that “We think we know more about the experience we don’t have than the experiences we do have.” This “unlived life” of our imagination becomes our tormentor as it heightens in clarity and significance over our present life. Phillips continues, “And what was not possible becomes the story of our lives… Our lives become a protracted mourning for, an endless trauma about, the lives we are unable to live.”


We trap ourselves in the vicious cognitive distortion of playing the “What if” game, a deeply ungratifying way to live and certainly not a way in which one can nurture a positive attitude toward the life we now have and have lived. It is on the other end of the spectrum of a life of gratitude for simply being alive. Phillips makes us question our fundamental philosophies and notion of ‘self-actualisation’:“I don’t want to say self-knowledge is useless. But we need to know when self-knowledge is genuinely useful and when it isn’t. There are some situations where the struggle to ‘know’ about an experience is a distraction from the experience itself.”


I still believe a purposeful acquisition of self-knowledge is an essential act required for individuals to obtain a sense of clarity and comfort necessary to navigate and handle the impermanence of life. However, I do agree that there is a line which can be easily crossed, if not carefully considered, which distracts us from the present moment and brings us no benefit; ultimately resulting in loss of time, a likely increase in personal torment, all for the acquisition of superfluous information.


Simon McEwen에 따르면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고, “The unexamined life if surely worth living, but is the unlived life worth examining?”은 여기에 Adam Phillips가 거꾸로 제기한 의문이다. 파커 J. 파머가 그 사실을 알고 평서문으로 바꿔 인용한 것인지, 스스로 이렇게 정리한 것인지 알 수 없으되, 이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 문제를 이렇게까지 거론하는 까닭은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이란 번역문구와 “생기 없는”이란 번역문구의 뜻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Simon McEwen의 논지에 기본적인 동의를 한다고 전제할 때, unexamined는 “self-knowledge”와 unlived는 “self-actualisation”과 평행이다.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 특히 “생기 없는”은 오역에 가깝다. “생기 없는”이라고 번역한 unlived는 말 그대로 “have not lived”(Simon McEwen)다. 위 본문의 뜻은 아마 이 정도지 싶다.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살아내지 않은 삶은 성찰할 가치가 없다.”


스스로를 살아낸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우선순위에 놓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상하고 가정하고 평가해서 만든 내러티브에 정신을 파느라 삶의 몸/물질적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아니 근원적인 문제다. 삶은 내 몸에서 시작해 네 몸으로 건너가는 사건이다. 마음은 이 사건을 온전하게 하려고 인간에게 부가된 무엇이다. 인간이 인간이란 종적 집착을 놓아버린다면 마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야말로 무심히 신의 길을 간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면, 스스로를 온전히 살아내는 삶은 차마 성찰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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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소식을 하나 드리자면, 고통은 죽음 아닌 생명을 가져다주는 무언가로도 변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고통 받아온 사람들·······은 서서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갑니다. 그런 상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더 성숙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 타인의 슬픔과 기쁨에 더 마음을 쓸 수 있는 역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입니다. 한데 그들의 마음은 부서져 조각난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린 것입니다.(77쪽)


몸과 마음을 모두 치료하는, “희귀해서는 안 되는데 희귀한” 임상의라 나는 고통 문제에 남다른 감지와 공현 능력을 지녀야 한다. 올바른 인식과 해석, 그리고 치료 능력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내 삶의 조건과 인연에 맞는 정도까지는 도달해 있다고 믿는다. 최근 들어 홀연히 찾아온, 모르긴 해도 마지막 단계라 여겨지는, 문제의식이 바로 고통, 정확히는 痛(이하 아픔이라 한다.)의 존재론이다.


스스로 보편의학이라 자부하지만 제국의학일 뿐인 주류 서구의학은 아픔을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고 본다. 부가된 나쁜 무엇으로 여겨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 무통문명의 총아인 진통의학의 결론이다. 나는 아픔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인 한 아프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아프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연히 아픔은 제거 대상이 아니다. 당연히 아픔을 제거하는 의학 또한 의학이 아니다.


아픔은 무상無常의 진리가 생물학적 인간 생명을 흐를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영원불변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생명은 간단없이 변화한다. 변화의 중요한 한 양태가 질병과 치료다. 병이 들어왔을 때, 그 사실과 스스로의 대응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에서 생명이 발하는 신호가 바로 아픔이다. 신호는 문제의 현실과 당위를 모두 담고 있는 정보로서 생명의 본질적 요소다.


아픔은 무아無我의 진리가 사회학적 인간 생명에 펼쳐질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고립된 자기완결체가 아닌 생명은 간단없는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의 중요한 한 양태가 상실과 애도다. 상실했을 때, 그 사실과 스스로의 대응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에서 생명이 발하는 신호가 바로 아픔이다. 신호는 문제의 현실과 당위를 모두 담고 있는 정보로서 생명의 본질적 요소다.


아픔으로 인간 생명은 치료와 애도를 요체로 지니게 된다. 아픔으로 인간 생명은 “부서져 열린” 존재가 된다. 아픔은 마음에 가장 가까운 몸 느낌이자, 몸에 가장 가까운 마음 작용이다. 아픔은 파동 생명과 입자 생명의 마주 가장자리에서 격동하는 경계 생명이다. 불편하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한 빈소嚬笑 생명이다. 이 빈소 생명이 비대칭의 대칭, 저 세계 진실을 가능하게 하는 불멸의 존재다.


나는 가히 아픔의 사람이다. 마취 없이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겪었다. 입김만 닿아도 아픈 대상포진을 겪었다. 일 년 동안 스무 가지가량의 아픔이 갈마드는 frozen shoulder를 겪었다. 생애 초기에 생으로 엄마를 잃었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견고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법적·경제적·직업적 인간으로 살해에 준하는 일을 당했다. 이런 경험들은 나를 한동안 오연한 ‘아라한’으로 살게 만들었다. 후유증이 있다. 결정적 순간 남의 아픔 앞에서 싸늘해질 때, 즉각 돌이키라고 아픔의 존재론이 찾아온 듯하다. 넙죽 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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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원대한 일을 찾으세요. 사랑, 평화, 그리고 정의를 확산시키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고결한 가치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기에 존경받는 인물을 생각해보세요.·······영웅들은 불가능한 일들을 떠맡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그 일에 계속 매달렸습니다. 효율성을 뛰어넘는 기준에 맞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의 이름은 ‘충실함’입니다.(75쪽)


‘충실함’이라고 번역한 것은 faithfulness다. 이 번역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문맥을 고려하면 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faith란 단순한 믿음·신뢰가 아니라, 신/하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자세를 함축한다. “가치 있는 원대한”, “사랑, 평화, 그리고 정의를 확산시키는”, “고결한 가치에 헌신하는”이라고 표현한 파커 J. 파머의 뜻을 살려 번역하자면 ‘숭고함’ 정도가 더 어울려 보인다. 숭고하다는 것은 장엄한 대상을 우러르며 그 속성을 본받아 따르고자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숭고함에 효율과 성과가 왜 없으랴만 효율과 성과로써 숭고함을 말하면 안 된다. 본디 숭고함은 “불가능한 일들을 떠맡”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그 일에 계속 매달”리는 그 자체가 숭고함이기 때문이다. 숭고함은 인간에게 깃든 지극한 소소함과 지극한 다대함을 일깨워가는 과정이자 그 과정에서 들려오는 노래다. 이 노래를 숭고미라 한다.


숭고미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에게 자연Sein으로 갖추어져 있다. 인간만은 당위Sollen로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 분리 역사가 낳은 과잉 사회화 때문이다. 사회악으로 발현되는 공포(불안)와 탐욕, 그리고 어리석음이 숭고함의 감각을 부숴버렸다. 숭고함을 되찾으려면 숭고함을 문제 삼아야 한다. 문제 삼으려면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치우침이 드러난다. 치우침을 드러내면 비대칭의 대칭인 진실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진실 전체가 다름 아닌 장엄이다. 장엄을 목도하고서도 숭고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더는 인간이 아니다.


더는 인간이 아닌 자들의 과두체제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트럼프, 푸틴, 시진핑, 아베 따위의 야차들이 인류 전체를 음모와 수탈의 무저갱으로 끌고 내려가는 중이다. 변방과 아亞중심 사이를 요동하는 대한민국 상황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촛불정부라고 하지만 매판의 철벽을 뚫기에 턱없이 부족한 힘 때문에 협공 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숭고함은 물색없는 순수거나 자기 파괴적 희생이기 십상이다. 어찌할까.


길은 하나다. 숭고함으로 나아가는 적고 작은 사람들이 나지막이 합창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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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안에 있는 생경한 모든 것을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바깥세계에 있는 생경한 이들도 모두 똑같이 맞아들이세요.(74쪽)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말이 있다. 오늘의 우리에겐 “생경한” 어휘다. 일제가 노예처럼 굴지 않는 조선 사람을 이리 불렀다.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이란 뜻이다.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식민치하의 모든 조선 사람이 잠재적 불령선인이었다. 난민難民이었다.


국권 상실기가 끝나고도 난민 상태는 계속된다. 미군정을 거쳐 친일파가 다시 국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명목만 빼놓고 대한민국은 시종일관 친일파의 손아귀에 있는 신식민지이므로 대한민국 국민은 여전히 난민이다. 난민이 난민을 난민亂民으로 몰아 학대하는 국가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 자각하지 못하니 난감할 따름이다.


<시사인>583호에 걸출한 항일투사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이야기가 실렸다. 신식민지 치하에서 매판 권력의 눈길을 피해 성을 신 씨로 바꾸고 살아왔다 한다. 참으로 참담한 자발적 ‘창씨개명’이 아닐 수 없다. 매판 권력에 붙은 소수가 있지만 많은 항일투사의 후손이 사실상 차영조처럼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다. 일제와 그 부역집단이 이 땅에 뿌린 죄상의 낭자함은 미상불 천년을 넘어서도 치워지지 않으리라. 어찌할까.



난민으로서 자신의 내부를 정직하게 정색하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과 세월호 가족, 아니 ‘개돼지’ 취급 받는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본질은 같다. 언제까지 불령선인인 자신을 “생경한” 눈길로 볼 텐가. 언제까지 “바깥세계에 있는 생경한 이들”을 자신과 다르다고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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