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홀로 나와 진료실 문을 열고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아흔을 썩 넘겼을 법한 노인이 버튼 터치로 여는 자동문 앞에서 쩔쩔매고 계셨다. 얼른 달려가 열어드린 뒤, 슬리퍼로 갈아 신고 들어오시도록 안내했다. 노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나이 많으면 등신이 돼요.”

몸 떨림과 관절 경직을 호소하면서 노인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얼른 죽지도 않고 맨 아프기만 해서.”

시침하는 동안 노인은 띄엄띄엄 자신의 고통 핵심을 전하신다. 예순다섯 먹은 아들이 풍 맞아 팔 년째 누워 있어 그 수발을 드신단다. 이제 곧 백세가 되는데 그 삶의 신산함이 오죽하랴. 주머니 속을 뒤지는 노인께 성탄절 선물이라며 그냥 가시라 했다. 노인은 또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다만 얼마라도 받으시지.”

아, 어쩌나, 저 백년 미안을. 내 알량한 선물이 저 노인에게 또 한 짐 미안을 지웠구나. 왜 깨달음은 늘 나중에야 오는 걸까. 느릿느릿 돌아서는 노인 어깨에 아들이 매달려 있는 환영을 보는 찰나 내 눈물은 그대로 범람하고야 말았다. 

2018년 성탄절은 아기 예수가 이렇게 미안에 허리 접힌 노인의 모습으로 내게 오셨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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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에서 염증과 그 치료약이 정신장애 위험을 높인다는 대규모 연구 결과가 나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염증 치료약, 특히 항생제가 정신장애 위험을 한층 높인다는 사실이다. 항생제에 무제약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우리나라 아이들한테 이는 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염증 치료약이 이렇게 위험한 것은 두 가지 능력(?) 때문이다. ①그들 대부분은 혈뇌장벽BBB을 그대로 통과한다. 혈뇌장벽은 뇌를 보호하기 위한 검문소 같은 것이다. 이 검문을 그대로 통과하는 대표적 물질이 니코틴이라는 사실 정도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②염증 치료약은 장내세균의 균형을 깨뜨린다. 장내세균의 균형 여부는 직접적으로 뇌에 영향을 준다. 인간의 정신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뇌는 외부에서 오는 정신의 수신기일 뿐이다. 외부세력(!) 중 소리 없이 강력한 이 작디작은 장내세균에게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 관련성에 민감한 정신 질환은 강박장애, 성격장애, 품행장애, 적대적 반항장애, 자폐스펙트럼장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그리고 ‘조현병’으로 이름이 바뀐 정신분열증이다. 아이들 경우, 우울장애가 그런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므로 세심하게 살필 일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런 메아리를 일으키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자꾸 떠드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고 반응하게 하는 이야기다. 토건 식 질병과 약으로 미증유의 제노사이드를 자행하는 자들이 노리는 바다. 감사하며 죽어주니 꿩 먹고 알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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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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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삼 년째 이 푸른 별에서 살고 있다. 그 구곡양장의 시간은 각별한 질병 경험을 기준 삼을 때 크게 넷으로 나누어진다.


1. la Naïveté première: 일심一心 시대(0~22세)

2. la CritiqueⅠ: 입쟁立諍 시대(22~42세)

3. la CritiqueⅡ: 파쟁破諍 시대(42~62세)

4. la Naïveté seconde: 무애無碍 시대(62~84세)


흠, 그러면 여든넷에 내 생이 끝나나, 그건 모른다. 그 순간은 더 일찌감치 올 수도 있고 더 느지막이 올 수도 있다. 일단, 그때까지 이 ‘알아차린’ 삶의 도식에 넣어둔다.


22세에 찾아든 급성 충수염은 그 자체 통증도 그렇지만 마취 없는 절단 수술이 벼락같은 통증을 몰고 왔다(마이 리뷰『아픈 몸을 살다』<앓기에서 살기로>(2017.12.2.)). 그렇게 통증을 중심에 놓고 따지면, 그 수술이야말로 일생일대 질병이었다. 이 병들을 거치면서 나는 내 삶의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렇게 법학의 시대, 저 일차적 소박성la Naïveté première의 삶은 저물어갔다. 제1채널을 통해 아무 생각 없이 이식했던 통속한 삶의 목표와 수단이 붕괴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내 삶의 목표와 수단을 스스로 성찰하는 반란의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이 감지됐다. 그렇게 신학의 시대, 저 비판적 삶 제1부la CritiqueⅠ가 동터왔다. 나는 내 삶의 주체가 누군지, 더 큰 존재와 의미가 있는지 질문했다. 신의 길을 물으며 내가 도달한 곳은 인간의 길이었다. 이 반전은 서구신학이 지니는 일극집중구조 탓에 일어났다. 진리의 물질적 본질을 거세한 신학을 거절하고 몸의 진실을 찾아 나설 무렵 내게는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질병의 정점에서 나는 내 인생의 길을 다시 바꾸었다.


그렇게 한의학의 시대, 저 비판적 삶 제2부la CritiqueⅡ가 동터왔다. 반란의 시대 마무리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치유했다(마이 페이퍼『아픈 몸을 살다』15-10<녹색비학>(10)①(2017.9.14.)). 이 경험과 맞물리면서 한의학으로 마음병을 치유하는 패러다임을 만들고 책을 쓰고 강의를 했다. 내 사유와 삶은 비대칭의 대칭구조 그 전체성을 향해 묵직하게 나아갔다. 생의 마지막 장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을 때, 홀연히 찾아든 질병이 바로 유착성점액낭염이었다.


유착성점액낭염은 그윽한 깨달음의 과정으로 나를 이끌었다(마이 페이퍼 <백일통오>(2018.4.10.)). 통증이 꼬박 십삼 개월 째 계속되고 있다. 마침내 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단계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이차적 소박성la Naïveté seconde의 시대로 이미 들어선 것이다. 모든 학문과 사상의 네트워킹으로 삶의 총체적 네트워킹을 이룰 때가 왔다. 변화는 진행되고 있다. 언제 어떻게 여울지고 휘돌며 번져갈지 나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나아간다. 낙관과 비관을 가로지르는 특이점에 뜬 신뢰의 별 하나 보고.


그러니까 여기가 모든 것의 가장자리다. 마지막 벼랑 끝이다.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걸고, 맡기고 뛴다. ‘에라’ 아니고 ‘그냥’


그리고 말들의 소리 사이에서

나는 당신의 고요하고도 낭랑한 영혼의 울림을 듣는다

거기에 그분께서 고독 속에 거하시며

말들이 오갈 때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준다 _파커 파머


초가을 내게 늦가을로 다가온 파커 J. 파머 어르신께 크낙한 감사를 표한다. 아울러 캐리 뉴커머, 딱 내 스타일 음악에도. _()_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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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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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인생의 늦가을을 견디면서 나는 자연이 믿을 만한 안내자임을 깨닫는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라지는 모든 것을 응시하기란 쉬운 일이다. 관계의 해체, 잘한 일들의 소멸, 목적의식과 의미의 쇠퇴·······하지만 가을이 대지에 그렇게 하듯, 삶이 우리에게 ‘거름을 주며’ ‘씨를 뿌리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가장 힘든 시기에도 우리 안에 가능성이 심어지는지 알게 되었다.(227쪽)


  인생과 결별하는 일이 즐겁기야 하겠는가. 내 성장을 도와주는 도전,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 또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 작별을 고하는 일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작은 몫이라도 보탤 수만 있다면 나는 기뻐하리라. 그런 전망으로 말미암아 삶은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이 된다.(247쪽)


죽음을 말해야 하는 자리에 오자 나는 오랫동안 서성이며 실마리를 잡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엄밀히 따지면 죽음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숨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시점, 삶이 더 이상 번져가지 않는 경계선이 있을 뿐이다. 점도 선도 관념이다. 죽음을 말할 수 있는 산 자는 없다.


산 자는 죽음이 남기는 결과를 말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것은 “전망”만 할 수 있다. 죽음이 남기는 결과를 말하는 것은 삶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산 자가 남기는 최후의 이야기다.


최후의 이야기는 더 이상 목숨을 이어가지 않아도, 더 이상 삶이 번져가지 않아도 ‘거름을 주며’ ‘씨를 뿌리는’ 보탬으로 남을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는지, 살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다. 이 성찰이 뒷날 후렴refrain-Carrie Newcommer의 <Leaves don't drop they just let go> 노랫말에서 취함-으로 소생할 때 비로소 그것을 죽음이라 부를 만하지 않겠나.


내 인생도 가을로 접어들었다. 내 삶이 다른 삶의 거름이 되겠는지 묻는다. 내 삶이 다른 삶의 씨가 되겠는지 묻는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잎을 돌아본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꽃 진 자리를 돌아본다. ‘추락’을 예감하면서 남은 날을 약속으로 가득 채울 수 있으려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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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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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피스트회 수도사 토머스 머튼은 내 개인적인 성자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교회의 기준으로 보면 극적인 ‘실패’ 때문에 그가 속한 교회에 의해 성자의 반열에 오르지는 않을 듯하지만 말이다. 그는 기독교 바깥의 도교와 불교에서 지혜와 위로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입원했던 병원의 간호사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번민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머튼은 수도원을 떠나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야 할지를 놓고 씨름했다. 결국 그는 수도사의 서약을 지키겠노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고통이 가라앉았을 때 머튼은·······놀라운 말을 했다고 한다. “내게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세계적인 수준의 신비주의자가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라고 말하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머튼은 작가 미들턴 머리가 했던 말, “선한 사람이 선함보다 온전함이 낫다는 사실을 깨닫는 다는 건, 꽉 막힌 다른 생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청렴은 이에 비하면 꽃처럼 분방한 방종이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이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걸어야 할 이 길은, 끊임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다. 또한 인간,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다. 머튼이 켄터키주 루이빌 시내에서 통찰에 대해 쓴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루이빌의 어느 쇼핑센터에서, 나는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에 갑자기 압도당했다. 그들은 내 사람이고 나는 그들의 사람이다.·······그 행복감은 이런 말로 표현될 수 있을 듯하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똑같다니요. 저도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니요.”(205-206쪽)


파커 J. 파머가 “얼마나 놀라운가.”라며 놀라워하지만 나는 놀랍지 않고 안타깝다 못해 아프다. 토머스 머튼도 토머스 머튼이려니와 그 간호사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이 사랑한 간호사는 토머스 머튼에게 과연 무엇인가? 그는 그 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런 내 감수성은 구도자 앞서 치유자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버림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평범한 한 여성으로서 상대방에서 비롯해 사랑이 꺾였을 때 그가 받은 고통은 전혀 다른 무엇이었을진대 이 문제에서 토머스 머튼은 어떤 위치였을까 생각하면 심사가 불가항력적으로 날카로워진다.


날카로움을 달래면서 차분히 처음부터 다시 톺아보자. 토머스 머튼은 자신이 사랑한 간호사를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라고 표현했다. 파커 J. 파머와 또 달리 내게는 그가 한 말 전체가 놀라운 게 아니라 이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라는 표현이 충격이다. 레토릭이 아닌 한, 자신 바깥에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는 하느님 개념은 근원적으로 가소롭다. 큰 하느님이란 게 고작 ‘덩치 큰’ 하느님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양量으로 입자로 하는 사고가 천형처럼 부과된 서구전통에서 사람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하는 것 바깥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저들의 개념적 신앙과 달리, 그렇다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란 신약성서 표현이 레토릭 수준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면서 머튼은 ‘기묘한’ 전복의 메시지를 던졌다.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


하느님 신앙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고백임에 틀림없다. 토머스 머튼의 이 놀라운 고백은 그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나?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인간되는 길을 가다가 그만둔 그러니까 ‘실패한’ 경험의 소산이므로 그의 선택은, 이제부터 쉽고 거룩한 삶이다? 여기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다. “쉬운” 길은 “거룩한” “꽉 막힌”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지 않은 채, 토머스 머튼에게 “축하받을 일”이 생겨버린다. “온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에 갑자기 압도당했다. 그들은 내 사람이고 나는 그들의 사람이다.


여인 하나 사랑하는 “꽃처럼 분방한 방종”, 그 “극적인 ‘실패’”를 딛고 일어나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을 걸은 결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나아가 “인간이 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게송을 들어보라.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똑같다니요. 저도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니요.”


한 사람 사랑하는 것을 버려서 모든 사람 사랑하는 전체성을 얻었다는 역설의 설파가 자못 통쾌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 통쾌는 유사품이다.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관념의 복제품이다. 이는 마치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네 몸과 같이”를 쏙 빼고 자기 기만하는 것과 같다.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는 전복이 기묘한 것이 아니라 영묘한 것이 되려면 토머스 머튼은 여인 하나를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어려운” 길을 택했어야만 한다. 이 선택만이 토머스 머튼이 하느님과 사람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는 끝내 하느님과 사람의 분리 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인간이 참 인간인 사건,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건이다. 서구기독교 전통이 참으로 구원의 전통이 되려면 인간과 분리된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내러티브를 넘어서야 한다. 몸 아닌 하느님을 몸인 인간이 구원해낸 역사가 성서의 장엄 전언임을 간파해야 한다. 몸 본질을 간과한 진리는 ‘구라’다. 저 ‘구라’ 은산을 깨뜨리지 못하고서 예수를 입에 담는 것은 전주 사람이라면서 모주 한 잔 권하자 운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파커 J. 파머와 토머스 머튼을 키운 서구전통에서 눈길을 돌려 우리 전통 원효를 본다. 주지하다시피 원효의 선택은 토머스 머튼과 정반대였다. 원효는 요석을 사랑해 스스로 파계하고 소성거사로 살아 부처와 중생을 일통했다. 요석은 운향이 되었다. 두 연인은 서로를 상승시키는 도반으로서 몸과 마음을 모두 구원했다. 나는 언젠가 운향 요석의 시선으로 원효를 들여다보는 글을 쓸 것이다. 그 글을 토머스 머튼의 연인이었던 간호사에게 헌정하련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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