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으로 보아도 그는 마음 아픈 사람입니다. 선명하고 빛나는 얼굴 윤곽을 지녔는데, 금방이라도 그 선이 무너질 듯합니다. 웃고 있어도 곧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 한걸음 다가가면, 놀라서 두 발자국 물러설 태세입니다. 간결한 검사를 거치니, 예상대로 결과가 나옵니다. 불안지수가 대단히 높은데다, 우울정서가 두텁게 결합된 상황입니다.


내력이 깊습니다. 기어 다닐 무렵 다락에서 굴러 떨어져 격심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공포는 시간을 다라 흐르면 편만한 불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유형의 공포와 불안이 일상의 모퉁이마다 포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생후 1년 동안 방안에서 흡연하는 조부와 함께 살았습니다. 폐렴에 걸려 입원했습니다. 더 커서는 편도비대가 심해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이후 인두咽頭 이물감에 시달렸습니다. 수시로 들이닥치는 구토 증세 때문에 외출하기가 겁날 지경이었습니다. 불안·우울과 신체증상은 이미 인과의 사슬 속에서 뒤엉켜 난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서양의학은 예의 그 분열적 태도로 그를 난도질했습니다. 외과의사는 수술하고, 내과의사는 발병 부위대로 약 먹이고, 정신과의사는 항불안제·항우울제를 처방했습니다. 하나가 좋아진다 싶으면 다른 하나가 안 좋아지는 일이 반복될 뿐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직장생활도 불가능해져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 쉬어도 상황은 별로 전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기야 그의 불안은 어머니에게서 수직 감염된 측면도 있고, 아버지의 일관성 없는 생활 태도가 증폭시킨 측면도 있으니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는 점점 더 예민해졌습니다. 냄새, 소리, 색깔 모두가 날카로운 자극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가령 영화 보다가 놀라 뛰쳐나온 영화관 의자 색깔과 KTX 의자 색깔이 같아 구토를 일으켰을 정도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피폐해져가는 그 앞에 큰 산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습니다. 장애를 지닌 사람과 해야 할 혼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혼인과 그 상대방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습니다. 당장 어머니 허락부터 시작해서 깨뜨려야 할 은산철벽만 생각하면 그저 아뜩할 따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혼인 상대방과 함께 왔습니다. 선하고 맑은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사고로 말미암은 장애는 제 눈에 그다지 문제꺼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불편함으로 감안한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정작 문제는 사고 뒤 어머니가 입힌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덮기 위해, 어머니는 자식의 장애를 한사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식의 장애를 대가로 받은 돈이 종자가 되어 누리는 풍요에 어머니는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돈을 무기 삼아, 어렸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성인이 된 뒤에도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종하려 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싸우는 근본 이치, 그리고 세부적인 기술을 두 사람에게 자분자분 전수해주었습니다.


그와 그의 연인이 제법 긴 시간 동안 저와 함께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몸의 건강을 찾아가면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혼인예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주례를 요청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행복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다른 혼인예식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순서와 주례사를 준비했습니다.


예식에서 저는 주례가 주도하는 혼인서약과 성혼선언문 낭독 순서를 뺐습니다. ‘두 사람이 평등하게 서로에게 가 닿으며 살라.’는 의미를 담은 어질 인仁자의 그림 모양 붓글씨를 제가 부채에 써넣고, 신부신랑이 직접 거기에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하객들이 재미있어 했습니다. 주례가 주례사를 하는 동안 신부신랑은 의자에 앉아 듣도록 배려했습니다. 하객들은 술렁거렸습니다. 저는 술렁거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꽤나 긴 내용인데,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원문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복이 아주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법적으로만 여섯 번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셨고, 법적이지 않는 경우를 합쳐 두 손의 손가락을 꽉 채운 열 분의 어머니, 그러니까 계모를 제 앞으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이런 어머니 복에 하도 멀미가 나서 독신 선언을 하고 버티다가, 사십 다 돼서 독한(!) 여자 하나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결혼식 때는, 아버지도 안 계셨고, 그 많던 어머니도 안 계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는 설날, 아내와 함께 처가로 내려갔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처남·처제랑 부엌방에 둘러앉아 맥주 한 잔 하면서 놀고 있는데, 일을 마치신 장모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으로 서랍장을 여셨습니다.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내들고 앉으시더니, 제 아내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고 첫 생일이 지나갔는데 선물을 못 챙겼다. 늦었지만 아나, 열어봐라.” 아내의 손에는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팔찌가 들려 있습니다. 순간 모두는 손뼉을 치며 축하했습니다. 아내는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 제 등줄기에는 서늘한 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습니다. 아내의 생일 앞에는 제 생일도 있었습니다. 제게 이런 생일선물을 챙겨줄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익히 아시는 장모님께서, 바로 그 사위 면전에서 당신의 딸만을 챙기셨던 것입니다. 장모님을 원망하려고 이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만일 반대 경우였다면, 제 어머니도 제 아내한테 똑같이 하셨을 것입니다.


여기 하객 여러분 가운데 며느리 생일 챙기시는 시어머니, 사위 생일 챙기시는 장모가 몇 분이나 될까요? 그러면 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결혼식장 가면 백이면 백 모든 주례가 하는 미사여구에 속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신랑 부모님은 며느리 하나 보았다 여기지 말고, 예쁜 딸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신부 부모님은 사위 하나 보았다 여기지 말고, 든든한 아들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거기다 도장을 콱 찍도록, 이렇게 시키기까지 합니다. “자, 신랑 아버지는 딸을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부 어머니는 아들을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어떠십니까? 실제로 딸이고 아들입니까? 며느리한테 재산 물려주는 시아버지 있나요? 사위한테 재산 물려주는 장모 있나요? 재산은커녕 생일선물 한 번 안 챙겨주면서 딸은 무슨 딸, 아들은 무슨 아들?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뭐가 정답입니까, 그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며느리, 귀하디귀한 남의 자식입니다. 사위, 귀하디귀한 남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 받아서 내 자식하고 함께 살게 인연 맺어주는 결혼입니다. 입양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도리어 며느리와 사위를 정중하게 대우하고 깊이 있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담장 안으로 며느리와 사위가 들어온 게 아닙니다. 내 담장 밖으로 며느리와 사위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내보낸 것입니다. 둘만의 담을 새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다른 일가가 창립된 사건이 바로 오늘의 사건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시다보면 어느 날, 며느리는 딸이 되어 있고, 사위는 아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부와 가정이 불행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순서를 정확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겪을 일 하나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부가 장차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키울 것입니다. 그 때 시어머니께서는 이러실 것입니다. “아이고, 우리 집 귀한 자손 아직 뽀얀 젖살이 덜 올랐구나! 잘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몸 축가서는 안 된다. 자, 여기 보약 한 제 지어왔다.” 친정어머니께서는 이러실 것입니다. “아이고, 우리 딸 몸이 많이 축갔구나! 남의 집 귀한 손 잘 키우려면 너부터 건강해야지. 자, 여기 보약 한 제 지어왔다.” 두 분 다 아기·아기 엄마 모두 챙겼고, 보약도 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잘 하셨지요? 그런데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을 친정어머니가 들으셨다면, 반대로 친정어머니 하시는 말씀 시어머니가 들으셨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왜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 말씀을, 친정어머니가 시어머니 말씀을 하셔야 하는 겁니다.


생각의 순서가, 말의 순서가 천지를 가릅니다. 이 생각과 말의 순서, 물론 신부와 신랑부터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결혼이란 이 세상에 나와 똑 같은 우선순위로 배려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와 똑같은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면 평생 뼛속 깊이 새겨야 할 문장이 있습니다. 상대방은 내가 아니다. 부부는 이심이체다. 이 진실을 지키려면 평생 뼛속 깊이 새겨야 할 순서 하나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서로 싸울 일이 반드시 생깁니다. 그럴 때 “너!” 하고 시작하는 2인칭 어법을 쓰면 안 됩니다. 상대방은 내가 아니므로 상대방이 지닌 진실을 내 진실처럼 알 수 없는데, 대뜸 “너!” 하면 그게 아무리 진리라도 상대방은 즉각 돌아앉습니다. “나!” 하고 1인칭 어법으로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싸움의 90%를 웃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신랑 부모를 향해) 신부는 신랑 집안의 딸이 아닙니다. 신부 집안 귀한 딸로 신랑 집안 아들과 똑같은 우선순위를 지닌 배우자가 되었습니다. 예의를 갖추어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랑 부모를 향해) 신랑은 신부 집안의 아들이 아닙니다. 신랑 집안 귀한 아들로 신부 집안 딸과 똑같은 우선순위를 지닌 배우자가 되었습니다. 예의를 갖추어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랑을 향해) 신부는 신랑이 아닙니다. 신랑과 똑같은 우선순위를 지닌 타인입니다. 예의를 갖추어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신부를 향해) 신랑은 신부가 아닙니다. 신부와 똑같은 우선순위를 지닌 타인입니다. 예의를 갖추어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이 순간 하나의 사랑을 지닌 두 어른이 탄생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예식 초반에 신부신랑이 양가 부모님과 하객들께 인사 올리는 순서는 그대로 두되 종반에 다음 순서를 덧붙였습니다.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된 두 사람이 어른으로서 첫 인사를 부모님께 올리겠습니다. 아이로서 마지막 올린 인사와 정반대 순서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 신랑 부모를 향해 돌아서십시오. 신랑 부모님께서는 일어서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을 어른으로 대우한다는 뜻에서, 신부와 신랑이 절을 하면 부모님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맞절의 예를 갖추어주시기 바랍니다. 신부와 신랑 절! (신부 부모께도 이하 동문. 하객께도 이하 동문.) 인사가 끝나면 그대로 행진으로 이어질 것이니, 모두 앉지 마시고 서서 두 사람의 행진을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식이 끝났습니다. 피로연장으로 들어섰습니다. 하객 가운데 여러분이 제게 와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제 손을 덥석 잡으며 한 말이었습니다. ‘healing이 되는 결혼식은 처음입니다.’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다를 내려다보며 소주잔을 가득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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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아래서는 사회 모든 분야가 산업이 된다. 의학이 예외일 리 없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죽음의 신은 목숨밖에 가져가지 않지만 의자는 돈까지 가져갔으니까. 산업의학은 평범한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산업의학은 사회 전체를 의료화했으니까.


오늘 날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병원의 관리를 받는다. 산업출산은 기본이다. 이후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의료 시스템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죽음과 그 의식까지 병원에서 치른다. 마치 인간의 생사 전체가 질병이기나 한 것처럼 온갖 것에 의료는 촉수를 뻗치고 돈을 빨아들인다. 생사를 볼모로 수탈하는 짓은 얼마나 반의학적인가. 산업의학은 돈에 미친 지배 권력과 엘리트 집단의 야비한 협잡 수단이다.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는 말은 구차하다. 이미 일극집중구조가 굳어진 마당에 ‘조선일보 문화면’ 같은 것이 있다 한들 무슨 정당성을 확보하겠나.


날로 비대해지는 암 병원을 볼라치면 바로 그 암 병원이 암 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죽여가면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향락적 삶을 구가하는 자들에겐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일 테지만, 내게는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 어두운 동굴일 따름이다.


목하 암암리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국가 주도의 정신건강 사업도 마찬가지다. 토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구, 특히 미국이 짜놓은 정신의학 체계는 그야말로 장사판이다. 돈이 되면 넣고 안 되면 빼는 식으로 진열한 병명만도 370개가 넘는다. 370여 개의 돈줄 던져놓고 마음 아픈 사람 낚아 올리는 블루오션에 자본이 문어발 뻗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몸도 맘도 백색의학의 돈벌이 수단이 된 오늘을 나 역시 살아야 한다. 불평등한 경제구조에 편승하고 다시 그 불평등을 촉진하는 백색의학의 거대한 힘 앞에서 변방의 ‘한’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인욕하고 진욕進辱하는 길에서 출발부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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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찾아온 것은 자신의 심리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은 청소년기 그의 기억 전반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선명한 얼룩은, 남편과 시부모에게 학대당하던 그의 어머니가 분노를 그에게 드러내면서 퍼부었던 욕설이었습니다. 이 상처는 그에게 변형된 방어기제로 발현되었습니다. 내부에서 날뛰는 폭력성을 밖으로 내보낼 때는 놀림·깔봄·비아냥거림으로 표현했습니다. 토론에서 이겨 상대방에게 모욕 주는 상상을 되풀이하면서 날카로운 논리적 문장 따위를 암기하곤 했습니다. 그럴수록 내면의 평화는 깨지고 사회생활은 뒤틀렸습니다.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치료 받아야겠다는 결론을 황급히 내렸을 때, 우연히 저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숙의를 진행하는 동안, 필요한 요법으로 기억과 격정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아갔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정리되면서 이야기는 원 가족에서 점차 배우자로 넘어갔습니다. 그의 배우자가 그를 대하는 방식은 그가 드러내는 방어기제와 흡사했습니다. 목소리 등 사소한 인신의 문제를 빌미로 좀 더 야비하게 조롱하는 습관이 있지만 본질이 같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배우자의 그런 측면이 병적 끌림으로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배우자는 출신지역이나 학력 따위 문제에서 드러나는 열등감을, 변형된 공격으로 위장해 사사건건 괴롭혔습니다. 저는 배우자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말했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이 무엇인지 아마 짐작하실 것입니다. 다만, 일방적 이야기이므로 충분한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배우자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함께 오세요.”


다음 주, 부부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에게 수 주 동안 들은 이야기를 백지로 돌리고 투명한 마음으로 배우자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30분 남짓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그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에너지 결을 배우자에게서 감지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 두면 안 된다.’ 문제였습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그의 배우자에게는 천적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저녁식사를 제안했습니다. 식사 도중, 배우자의 직속상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사적인 일이라 하면서도 배우자는 저와 그를 남겨두고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저는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 더 드려야 할까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간호사가 얼굴을 들이밀면서 ‘예약 잡지 않은 분이 무조건 뵙겠다고 하시는데 어쩌죠?’ 합니다. 제가 직감으로 느끼며 ‘괜찮다’ 하자, 말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활짝 웃으며 들어섰습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법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감사드려요.”


그 뒤, 그는 자신의 어머니·친구·선배를 제게 소개해, 병과 삶의 문제를 숙의하도록 했습니다.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을 만하면 연락해옵니다.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합니다. 물론 더 이상 이혼 이야기 따위를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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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학의 정치적 기치 문제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방향 문제와 의학 내용 문제는 분리 불가능하다. 불의한 권력이 토건으로 병을 일으킬 때에는 의학 이론을 조작하기 마련이다. 진단과 치료에 동원되는 조건 구축 과정 또한 기획한다. 미국을 위시한 이른바 선진국은 이렇게 병과 진단 기술, 그리고 (약이라 주장하는) 화학합성물질 만들어 국제 사회에 유통시킨다. 각기 다른 여러 인종·성별·연령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폭력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의학 토건의 병자로 ‘징발되어’ 수탈당하고 있다. 백색의학은 학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다. 이 악성 이데올로기의 쌍끌이기선저인망이 DSM 정신장애와 암이다. 나는 백색의학의 정치적 정신장애, 정치적 암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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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예약을 한 뒤, 다시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상담 가기 전에, 도움이 될 만한 자신의 이야기를 미리 적어 보내고 싶다는 취지를 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문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배우자는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맥락을 고려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줄 몰랐습니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매사를 판단해 걸핏하면 사표 내고, 막말 하고, 이혼하자 달려들었습니다. 자기 신뢰가 부족해 사소한 데서 자존심을 내걸곤 했습니다. 매사 부정적이어서 불평불만을 일삼았습니다. 자주 격분에 빠져들어 조절 불가능한 상태로 날뛰었습니다. 급기야 만취된 어느 날, 귀신과 대화한다며 기괴한 광경을 연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인내를 가지고 여러 차례 진지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부부상담도 받았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습니다. 매번 나온 결론은 이혼이었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라고 해서 무슨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니니, 뾰족 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를 공감·지지하는 정서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한 번 대화·협상의 기본 원리를 확인하고, 다른 데서는 쉽게 들어보지 못했을 법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스 고전 수사법. 남녀 성차를 고려한 대화법. 전체 맥락을 잡고 제압하는 대화법. 최후 발언과 문맥 차단을 통한 대화 정리법. 정신장애 요소를 지닌 성인에게 하는 아동 상대 대화법.


무엇보다 제가 그에게 재삼 강조했던 것은 맨 마지막 대화법입니다. 모든 정신장애에는 발달장애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는 정신의학적 전제에 입각한 것으로서 한 가지 원칙, 세 가지 규칙만 지키면 됩니다. 한 가지 원칙: 함께 내린 결론은 반드시 관철한다. 3가지 규칙: 2인칭 어법, 금지 어법, 두괄식 어법을 금한다. 그리고 팁: 관계에 기대게 하지 않는다. 팁의 팁: 호칭은 관계 호칭 아닌 고유명을 쓴다.


배운 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법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진심으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함께 해주신 덕분에 드디어 갈라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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