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기 없이 뽀얗게 웃으면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이 도리어 짠했습니다. 분명히 우울증으로 예약한 사람인 걸 아는데 말입니다. 더욱 제 마음을 적신 것은 전체적인 그의 풍모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귀티가 흐르는 얼굴, 이름깨나 있는 부티크 옷, 명품 가방, 풍요로 다듬어진 스마트한 몸 매무새·······울컥했습니다. 아, ‘가진 게 많아서’ 아프구나!


그는 유서 깊은 부자가 모여 산다는 바로 그 뜨르르한 동네 주민이었습니다. 적어도 그의 40여 년 기억 속에는 티끌만큼의 가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가 경제력이 약했다는 것 말고는 그에게서 풍요 감각을 덜어낼 그 어떤 요인도 없었습니다.


‘모태’ 풍요 속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삶은 부모의 부가 제시하는 삶의 궤도를 따라갔습니다. 과외 하라면 과외 하고, 악기 하라면 악기 하고, 어디 학교 가라면 어디 학교 가고, 무슨 과 전공하라면 무슨 과 전공하고, 누구하고 결혼하라면 누구하고 결혼하고, 어디다 투자하라면 어디다 투자하면서 승승장구 살았습니다.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허무가 밀려듭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뭐냐 싶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모든 사랑이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Nothing이 되었습니다. 그가 스러지자 모두 달려왔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대체 네가 모자란 게 뭐 있어서 우울증이냐?”


그렇습니다. 돈 많습니다. 집 좋습니다. 조물주 위의 건물주입니다. 외제차 탑니다. 배우자도 손에 꼽는 억대 연봉 전문직입니다. 뭐가 모자랄까요. 제가 도끼눈을 뜨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돈 말고 가진 게 대체 뭡니까?”


그렇습니다. 집이든 건물이든 차든 억대 연봉 배우자든 그것들이 돈이지 뭐 다른 가치겠습니까. 돈 말고 모든 것을 잃었으니, 어찌 허망하지 않겠습니까. 돈 끝내 허깨비니 어찌 ‘꽝’Nothing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울음다운 울음을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컷 울더니 비로소 돈독에서 풀려난 맑은 웃음을 웃습니다. 저는 그를 데리고 나와 허름한 백반 집으로 갔습니다. 막걸리 한 잔씩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막걸리 한 잔에 제 영혼이 춤을 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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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학은 근본적으로 이종異種의학이다. 이종의학에게 증상은 병이다. 병은 적이다. 적은 죽여야 한다. 통증도 염증도 열도 미생물도 모두 적이니 불문곡직 때려잡으면 갑이다.


이종의학의 이런 적대 자세는 형식논리의 동일률에 터한다. A=A.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의 ‘진리’에서 주체와 맞서는 것은 우수마발이 다 nonA다. 곡절을 묻지 않는다. 이치를 따지지 않는다. 힘을 가하는 것이 치료라고 생각한다.


동종同種의학은 원리상 증상을 병이라 여기지 않는다. 생명이 스스로 병을 치유하는 감응response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감응은 때려잡을 대상이 아니다. 동종의학은 예컨대 열이 나면 열을 내는 천연 약물을 극소량 쓴다. 열을 내는 약물을 극소량 쓰면 어찌 될까? 이치상 처음에는 열이 조금 더 난다. 생명의 감응 작용을 북돋워주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스스로 알아서 열이 내린다. 생명의 자연치유력이 증강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동종약물은 힘이 아니라 정보다. 생명의 자연치유력을 깨우는 죽비소리다. 이게 의학다운 의학이다. 녹색의학이다.


백색의학은 감응인 증상을 보고 놀라 적대 반응reaction을 일으키는 방어기전이다. 인도유럽어족이 ‘타락(스티브 테일러)’한 이후 만들어낸 거대이론 가운데 하나다. 자신과 불화하는 거대자아가 생명현상과 자연에 nonA를 뒤집어씌운 결과가 백색의학이다. 이 병든 백색의학부터 치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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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벗어나기 어려운 부정적 평가를 가리킵니다. 질병과 관련해서는 주로 정신질환이 가혹한 낙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히는 정신질환이 아니지만 그와 같은 사회적 편견의 뉘앙스를 머금은 낙인이 바로 ‘간질병’입니다. 공식용어는 뇌전증epilepsy이지만 여전히 시중에서는 간질병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가 저를 찾아온 이유는 간질병 때문이었습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자신이 간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왔습니다. 유수의 대학병원에서 간질병 판정을 받고 그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서구의학으로는 간질병 약을 복용하는 것이 유일한 치료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른 길이 없을까, 알아보다가 지인 소개로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 앞에 앉자마자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간질병 아니지요? 그렇죠?”


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간질병, 아닙니다!”


말의 규정이 얼마나 고약한 차꼬인 줄 알기 때문에 무조건 풀어주었습니다. 그는 나지막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발개진 얼굴을 쓰다듬었습니다.


그가 유달리 공포에 취약하게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공포·불안 요인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다는 것입니다. 4살 무렵엔 동생 출산으로, 9살 무렵엔 연이은 조부모 초상으로 홀로 큰 집에 남겨져 공포를 심하게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8살, 11살 무렵 뚜렷한 승강기 공포증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청소년기 따돌림을 당하면서부터는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게 될 때도 공포가 밀려들었습니다. 세상은 너무 큰데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는 이상감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공포는 이내 신체 증상을 동반했습니다. 목이나 팔다리에 나타나는 뒤틀림, 돌아감, 꼬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팔이 떨어져 나간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근거해 간질병 판정이 내려진 듯합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서구의학과는 달리 심신의 상호작용 이치로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팔이 뒤틀리고 목이 돌아가고 다리가 꼬일 때 어떻게 반응하나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힘 빡 주죠. 막아야 하잖아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계속 막으면 심장이 뒤틀리고 몸통이 돌아가고 뇌 회로가 꼬일 겁니다.”


그는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병이 오면, 생명은 반드시 신호를 보냅니다. 신호란 본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작디작은 에너지 활동입니다. 공포·불안이 병적 수준에 이를 때, 생명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목이나 팔다리 정도의 근육 이상을 일으킵니다. 더 크고 중요한 부위의 심각한 이상을 방지하려 함입니다. 서구의학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합니다. 무조건 증상을 억제합니다. 그렇게 상품화된 오류를 의료 대중이 답습하고 있습니다. 저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팔이 뒤틀리고 목이 돌아가고 다리가 꼬일 때, 아, 내 안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구나, 하고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점점 그는 제 말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갔습니다. 그럴수록 그런 증상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쯤해서 그만 둘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닙니다.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간질병, 무서워요? 싫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간질병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대수인가요. 그래요. 고개 둘을 넘었습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연스럽게, 욕구를 따라 다음 맥락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연애 이야기였습니다.


늘 그렇듯 이런 상황에 처한 청춘에게는 두 가지 심리가 공존합니다. 연애에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이성, 그리고 연애에 두 귀를 쫑긋 세우는 감성. 하나는 공포, 하나는 그리움. 둘 사이,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어린 시절의 결핍 때문에, 뭐랄까 아주 사소한 인프라조차 깔려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가령 홀로 사는 방에 이성 친구가 들어온다, 몸에 손을 댄다, 이런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음의 경직은 몸의 경직이고, 몸의 경직은 삶의 경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할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어느 날 작심하고 그에게 담담히 말해주었습니다.


“간질병, 맞습니다.”


간질병은 뇌전증이 아닙니다. 인생 병입니다. 경직과 경련이 삶의 문제 한가운데서 유연하게 풀려 나아가는 것이 치유의 종착점이자 본령입니다.


아프든 건강하든 누구나 자기 삶의 문제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시험이든 면접이든 그가 칼 날 위에서 요동칠 때마다 제가 함께 했습니다. 그는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헛된 실패란 결코 없습니다. 비록 성에 차지는 않지만 세월이 흐를 만큼 흐른 뒤, 그는 지금 나름 유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혹 또 다른 삶을 꿈꾼다면, 또 그렇게 경직을 직면하고 나아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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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는 무시간적 진리 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다. 논리는 문명현상, 무엇보다 정치현상이다. 사하라시아 타락-자아폭발(스티브 테일러)의 결과로 종양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그리스의 거대성공증후군이 만들어낸 논리가 바로 형식논리다. 타락이 거대왕국을 낳고, 거대왕국이 거대(유일)신을 낳고, 거대(유일)신이 거대이론을 낳고, 거대이론이 자기 정당성의 영속화를 위해 종자논리dialecticum semen를 만든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그리스가 만든 종자논리인 형식논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른바 동위원리에 포함된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다. 모순율, 배중률은 동일률에서 파생한 것이므로 결국은 동일률이다. 동일률은 A=A다. A=A는 동어반복tautology이다. 동어반복은 항상 옳다. 항상 옳아서 하나마나 한 말이다. 하나마나 한 말이므로 내용이 실재하지 않는다. 이런 진술을, 타락한 인류는 불변하는 진리의 기틀로 삼았지만 참된 진리에 터해 보면 이 말은 병적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병적 방어기제를 넘어 범죄에까지 이른다. 간결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자기성찰 불능: 내 거점만 남기고我 남의 거점을 지운다無我.

(2) 자기변화 불능: 내 안정常을 붙박고 남을 불안無常으로 흔든다.

(3) 자기절제 불능: 내 즐거움樂을 더하려 남을 괴로움苦에 빠뜨린다.

(4) 흠 없(다고 망상하)는 체계narrative를 공고히 구축한다.


최근 밝혀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winner 또는 CEO의 대뇌는 안와전두엽에 손상(에 가까운 변성)을 겪는다고 한다. 대뇌 안와전두엽에 손상을 입으면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자기성찰을 할 수 없게 된다. 타인의 비판을 귀담아 듣지 못 한다. 독선으로 치닫는다. “나는 나다, 나만 나다, 나만 옳다, 나의 옳음은 영원하다, 내 앞에 너는 무릎 꿇어야 한다, 이게 진리다, 끝.” 개인 차원의 거대성공증후군을 사회·문명 차원으로 확대하면 안와전두엽이 손상된 지배층 엘리트 집단의 머리에서 나온 형식논리가 인류 역사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즉각 알 수 있다. 전쟁, 계급질서, 여성차별, 아동학대, 몸의 분리, 거대유일신교, 시간 지배, 자연 착취. 이 모든 악의 근원에 질병 본질을 지닌 형식논리가 똬리 틀고 앉았다.


이 엄혹하고 육중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단도직입하면 종자논리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종자논리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형식논리를 깨뜨리고 모순과 모호함을 품어 안는 다치多値논리(, 원효 식으로는 화쟁 논리, 내 식으로는 비대칭의 대칭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논리를 바꾸면 사유가 바뀐다. 사유를 바꾸면 삶이 바뀐다. 삶을 바꾸려면 대박의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안와 전두엽의 손상을 막아야 한다. 인욕을 넘어 진욕進辱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욕은 소미심심의 연대를 낳는다. 소미심심의 연대가 인류를 파멸에서 구할 것이다. 이 화두를 거대유일신교를 극복한 예수 내러티브로 풀어본다.


나는 지난 8월 18일 마이페이퍼 <누가 참된 장엄신인가?>를 통해 창조신에서 욥을 거쳐 예수에 이르러, 어떻게 거대신이 해체되고 소미심심 신이 되는지를 일별했다. 여기서는 특별히 2천년 동안 미궁 또는 오류에 빠져 있었던 예수 부활 사건 해석을 새로운 종자논리로 바꿈으로써 기독교와 인류 전체의 활로를 모색해보겠다.


전통적인 예수 부활 이해에 따르면, 그것은 당연히 죽음을 이긴 승리다. 그 승리가 없으면, 예수 구원의 역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구원이 미완성이면, 기독교인의 신앙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 당연하고도 위대한 반전은, 그러나 틀렸다. 거대유일신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부활은 거대유일신의 형식논리 안에서 부리는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온 목적과 그에 걸맞은 과정의 실재는 오직 거대유일신을 벗어던지는 길로 향한다. 거대유일신은 타락이 빚어낸 가짜 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참된 신의 거대유일신 벗어던지기는, 거대유일신의 ‘망상이지만 강고한’ 존재 거점을 지우는 일이다. 예수의 태어남과 삶의 전 과정은 그 거점 지우기다. 외양간에서 태어나 세리와 창기를 더불어 살았으니 말이다. 예수의 죽음은 좀 더 확실하고 충격적인 거점 지우기다. 영원하신 거대유일신이 죽다니. 마침내, 부활은 거점 지우기의 ‘완전’ 완성이다. 시신마저 지운다. 무덤마저 지운다. 아, 그리고 이, 이 한 문장!


“나를 만지지 마라.”


이 말은 부활을 통해 신이 다시 ‘영적’ 존재를 회복했다는 개소리가 아니다. 만짐, 붙잡음으로 남을 최후의 거점마저 지우는, 도저한 반성이다. 신이 참 신일 수 있는 마지막 결단이다. 신이 스스로 無를 만들어, 無神을 거쳐, 無限神을 연 궁극의 창조다. 무한신은 스스로 존재 거점을 지운 소미심심의 벌레, 풀, 박테리아, 이끼들의 보이지 않아서 보는, 들리지 않아서 듣는, 맛보아지지 않아서 맛보는, 맡아지지 않아서 맡는, 닿아지지 않아서 닿는 온갖 생명 감각 자체이자 대상이다. 이 감각 자체이자 대상을 단박에 이루는 단 하나의 길은 거대유일신의 마지막 거점을 만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그 닿지 않는 닿음, 비대칭의 대칭에서 거대유일신은 홀연히 사라진다. 거대유일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무신의 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은 서구 지성의 가소로운 한계일 뿐이다. 소미신과 소미신의 네트워크인 무한신의 비대칭적 대칭으로 세계 진리는 재편된다.


무한신은 실체 없는 실재다. 사건이기 때문이다. 소미신은 실재하는 시간실체다. 무시간 실체는 본디 없다. 실체 없는 실재와 시간실체 사이 비대칭의 대칭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은총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예수의 ἐγώ εἰμί(I am) assertion의 장엄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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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8-2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나를 만지지 마라>의 서평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ari_che 2017-08-3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ㅎ

실은 장-뤽 낭시의 그 책을 비판적으로 읽은 결과,
나온 통찰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서구의학의 인류사적 공헌은 외과수술, 링거 둘로 집약할 수 있다. 나머지, 아니 저 두 나머지 이외의 대부분은 치료를 표방하지만 증상만 약하게 만드는 ‘백색’ 화학합성물질이다. 물론 뛰어난 진단 기술이 있지만 진단 아무리 잘해도 치료하지 못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진단기술도 공학기술의 힘이지 그것을 의학 자체로 보기는 어렵다.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인간 생명력을 궁극적으로 사막이 되게 할 것이다. 백색의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뿌려대는 진통제, 소염제, 항생제, 해열제, 기타 백색 화학합성물질 대부분인 차단제의 공통 목표는 통증, 염증, 미생물, 열, 그리고 부정적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증상 자체를 치료해야 할 병으로 보고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약이라고 불린다. 과연 증상은 병인가? 과연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병을 치료하는가?


증상은 전체 원리에서 보면 병이 아니다. 증상은 병을 알려주는 메시지다. 메시지를 없애는 것이 어떻게 치료인가. 메시지를 들어야 진짜 병을 밝혀낼 것 아닌가. 병은 모른 채, 증상만 없애는 것이 치료일 수는 없다. 기계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증상과 병이 일치한다. 백색의학은 인간을 기계로 보는 일극 패러다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기계적환원주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기 때문에, 증상 제거를 질병 치료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이치에서 기계적 축은 유기체적 축과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면서 함께 엮인다. 구태여 본지와 경중을 따진다면 후자가 본이고 중하다. 특히 전자로 치우친 폐해가 심각한 오늘 날 상황에서는 이런 역사적 판단이 불가피하다. 백색의학은 도를 넘어 반생명적인 수탈을 자행한다.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전 지구적으로 과다 처방되고 있다.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시시각각 인간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통증도 염증도 미생물도 열도 생길만한 곡절을 따라 생긴다. 이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망타진하는 것은, 생명이 지니는 불편하지만 생생한 쌍방 소통 운동을 희생하여 편리하지만 파리한 일방 통제 구조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 생명을 돕는다면서 도리어 해코지하는 백색의학의 몽매에 나는 눈감을 수 없다. 녹색으로 배어들고 배어나서 참 평화의 틈을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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