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비학 기치旗幟: 문제는 코다


코, 이것은 가장 처음부터, 가장 나중까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코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억눌려 있다가

인간이 파멸 위기로 내몰린 오늘의 상황과 홀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만일 이 순간 코의 코됨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대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는 호흡의 관문이다.

하면 몸-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냄새를 맡는다.

하면 감각-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대뇌의 기원이다.

하면 마음-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나와 남의 면역적합성을 알아차린다.

하면 코는 관계-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를 통해 느끼고

코를 통해 생각하고

코를 통해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학의 깃발을 든다.


지금 여기서부터 코는 일부가 아니다.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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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시내버스에서 가방은 인정을 나누는 방편이었다. 운 좋게 자리에 앉은 사람은 으레 앞에 선 사람의 가방을 받아주었다. 특히 커다랗고 뚱뚱한 고등학생 가방은 꼭(!) 받아주는 ‘국민 보따리’였다. 가난과 고단함을 함께 하는 온욱한 풍경의 총아였다.


어느 때부턴가 시나브로 사람들은 더 이상 가방을 받아주지 않았다. 시내버스에 짐 싣는 시렁이 생기면서부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시렁이 차서 가방을 손에 들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가방도 받아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인심이 변한 거다. 각자도생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가방을 받아주겠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시선이 돌아올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아예 남에게 관심이 없는데 남의 가방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


최근 몇 년 동안 가방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현상의 매개물이 되었다. 이를테면 가방 폭력이다. 가방으로 다른 사람을 밀고 심지어 치고 지나가도 가방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싶은 부류 사람만 무례히 그런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거의 누구나 그런다는 느낌이다. 주로 백 팩이 문제가 되기는 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심이 강퍅해진 거다. 세월호 유족이 단식하는 앞에서 치킨 뜯어먹는 막장인간들이 설치는 세상이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마침내, 남한테 해코지를 해서라도 나 잘 사는 게 갑이라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리라.



엊저녁 식사 자리에서 딸아이가 중년 사내의 백 팩이 얼굴 가격한 이야기를 했다. 단지 그 사내 한 사람 문제가 아니라며 혀를 찼다. 오늘 아침 지하철 안에서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20대 후반 청년인데, 그래 놓고도 표정이 전혀 없다. 순간, 그가 커다란 가방으로 보였다. 대화 불가능이란 판단이 서서 그냥 웃고 말았다. 이런 사회에서 가방 아닌 노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못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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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문제에 유난히 취약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타고났는지 어떤 트라우마 때문인지 알지 못 하지만, 근거로 삼을 만한 일이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서 격리되었습니다. 7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가 그를 길렀습니다. 추정컨대 극단적인 애지중지 아니면, 방치 상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 알아서 해주거나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현실에서 아기가 판단하고 선택할 무엇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하면 따라 하는 습성이 자연스레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을 문제로 느껴 정색하고 고민조차 전혀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일대 파국 위기에 직면했으니 말입니다.


예식만 남았을 뿐, 그는 사실상 혼인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배우자가 그 사실을 알아서 문제 삼을 때까지 그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배우자가 분노와 배신감에 떨며 피폐해져가자 그도 화들짝 놀라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의 실시간으로 자신의 동선을 배우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자신의 결백한 생활을 증명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배우자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미 신뢰가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하는 행동을 뭔가 숨기려는 계략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편집장애로 치닫고 있었던 셈입니다. 저는 묵묵히 그가 보는 앞에서 그림 하나를 그렸습니다. 달을 그리는데 달의 윤곽을 먼저 잡지 않고 주위에 있는 구름을 채색했습니다. 채색되지 않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남아 달의 모양을 갖추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이른바 홍운탁월烘雲托月 기법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변방에 답이 있습니다.”


성性(적 결백)이라는 문제의 중심에 배우자의 부정적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를 건드릴수록 불에 기름을 붓는 역효과만 내기 마련이다, 변방을 울려 중심이 비워지도록 해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배우자가 평소 바라던 그대 모습은 뭡니까?”


지성적인 풍모였다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책 하나를 추천해주었습니다. 독후감을 정성스레 써서 배우자에게 읽어주도록 했습니다. 결과는 ‘엄지 척’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삶의 소미한 길목을 돌며, 차근차근 배우자의 신뢰를 쌓아가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보내는 낭보가 쌓여갔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그는 배우자의 손을 잡고, 표연히 하산했습니다. 제가 뭘 더 말씀드릴 게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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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이 후진 대접을 받아온 까닭은 후미진 틈바구니까지 스며드는 소미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짐승의 것, 아니, 아니 그래서 ‘여자’의 감각으로 치부하여, 앞에서는 아득히 경원하지만, 뒤에서는 드잡이판 벌이는 남성 백색문명의 압제·수탈 대상이 다름 아닌 후각이다.

 

후각의 복원은 그 어떤 혁명보다 래디컬하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대체, 얼마나 반-문명이며, 비-교양이며, 몰-품위며, 탈-인류인가 말이다. 큼큼대다니. 그러나 그래서 큼큼대라. 큼큼대야 생명의 근원에는 냄새가 있다는 진리를 깨친다. 그 냄새가, 바로, 녹색 냄새다.

 

녹색 냄새는 비리꼬리하다.

 

녹색 냄새를 맡아 ‘들이는’ 비리꼬리 후각 감각은, 그러면 어디서 날까? 스스로 냄새의 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맡아도 들이지 못한다. 녹색 후각은 공현이며 공감이다. 자신이 근원적으로 비리꼬리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녹색 후각을 지닌 인간은 녹색 체취를 풍긴다. 녹색 체취 풍기는 인간은 자신을 소미심심의 생태계로 유지한다. 소미심심의 생태계로 유지되는 인간에서만 후각은 진정한 해방을 맞는다.

 

후각 해방을 위해 코를 우뚝 깃발로 세운다. 코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인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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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의학을 자연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료인도 환자도 자연과학의 객관적 타당성·정확성을 전제하고 진단과 치료에 임합니다. 현대의학은 이런 자부심과 체계적 사기술이 결합된 키메라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 질병으로 인정하는가? 이 문제는 자연과학인 의학적 연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인문적 조건, 정치경제학적 역관계가 얼마든지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아니 거꾸로 사회인문적 조건, 정치경제학적 역관계가 자연과학의 연구를 지휘하고 통제합니다. 실제로 미국 정신의학 협회(APA)가 펴내는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DSM-5)의 주요내용을 초국적 제약회사의 로비가 좌우합니다. 자연과학으로서 의학은 자본의 푸들로 소비되는 수준을 넘어서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DSM-5가 신경발달장애로 분류하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경우 진단과 치료에서 남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이미 광범위하게 남용되고 있습니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로 진단받고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10대 초반 아이가 왔습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들의 걱정이 컸습니다. 본인은 오죽하겠습니까.


서구의학에 따른 진단 소견에는 ‘반응과 정보처리 속도가 느리고 반응의 일관성이 부족하므로 주의집중력 문제가 시사됨.’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흔히 보는 지극히 타성적인 진단 의견입니다. 약을 먹으며 학습효율은 다소 높아졌지만, 아이의 식욕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그러자 늘 그러하듯, 식욕을 높이는 약이 추가 처방되었습니다. 아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해’ 놓고 담당 정신과의사는 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귀신이 보여요. 웃음소리도 들리고요.”


조현병까지는 아니니까, 그냥 귀신이 어디 있냐 하고 정신과의사는 물론 부모도 일소에 부쳤겠지요. 저는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하자, 귀신의 얼굴색은 시퍼렇고, 흰 옷을 입었으며, 가라고 쫓아도 피식 웃고 만다 했습니다. 모두 여자 아이이며, 서서 노려본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계단 구석에 처박혀 목이 꺾인 채 있는 귀신도 봤다고 했습니다,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7세 이후 줄곧 겪어온 일인데, 꿈일 때도 있고 생시일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말을 먼저 걸더냐고 물으니 그런 적은 거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단호하되 따스하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거 귀신 맞아.”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한 찰나에 안도의 웃음과 호기심 어린 갸웃거림이 함께 지나가는 것을 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지체 없이 문제를 해소시켜주었습니다. 저는 다시 따스하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 귀신, 너야!”


예상대로 아이는 단박에 제 선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놀란 것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문답의 과정을 지켜보며 몇 차례 당혹스런 순간을 겪었을 테지만, 마지막 순간이 아마 가장 놀라웠을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으나, 어머니에게는 보충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지요.


더 이상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얼마 뒤, 기회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아이에게 그 나라는 다시없는 해방공간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라고 낙인찍지 않았습니다. 학교 교사들은 아이의 행태를 개성으로 수용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아이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포함한 주위사람들은 여전히 잘 적응이 되지 않겠지만, 그는 언제까지 그로서 씩씩하게 잘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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