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코의 교육학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은 세 명 중 한 명 이상이 각종 비염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는 아마도 절반가량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비염은 단순히 비염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많은 경우 틱 장애, 아토피 피부염, 천식, 과민성장증후군, 그리고 우울장애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무엇보다 흔히 전형적인 알레르기비염으로 오해받고 있는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 문제인데, 이것은 우울장애와 직결되어 있다. 우울장애 또한 비염과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린이·청소년을 괴롭히고 있는 질병이다. 이런 역학疫學· 사회의학적 진실의 연장선에 어린이·청소년 자살률 1위 국가라는 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의 비염 문제는 교육 문제, 아니 양육 전반에 걸친 부조리 문제다. 물론 환경오염이나 인스턴트식품 등의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정신적 요인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직 돈 잘 버는 기계-인간으로 ‘콧대’를 세우기 위해 어려서부터 학원·경시대회·연수·봉사를 돌며 점수와 스펙의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인격-인간의 ‘콧대’는 무자비하게 꺾이고 만다. 이렇게 ‘콧대’ 꺾인 ‘코’가 온전할 리 없다. 아마도 염증은 저 심층의 자긍심에서부터 생겼을 것이다. 거기서 솟아올라 급기야 염증은 표층의 코에까지 번졌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 어른 된다. 지금 무참히 꺾인 콧대를 지닌 채,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우리사회는 대체 어찌 될까? 이른바 대박 난 극소수 아이들과 당연히 그럴 수 없는 절대다수의 아이들이 주종관계에 놓이는 신노예제사회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사회는 그런 단계로 진입하였다. 미래에는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확실해지는 만큼 참혹한 지옥이 될 것이다. 이 흐름을 누가 얼마나 어떻게 거부하느냐에 따라 희망과 절망이 갈릴 텐데,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아이들의 교육, 아니 양육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개판민국으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을 건강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키우려면, 그 무엇보다도 한 인격으로 절대 존중해주어야 한다. 인간의 콧대를 세워주어야만 한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인격이 어른의 반만큼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콧대가 꺾일 때, 멀뚱멀뚱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도 온전한 인격체다. 아이들도 콧대가 꺾일 때, 인간성 파괴를 통렬하게 느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덩치 작은 어른이 아니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자라 성숙한 생물학적·사회적 인간이 될 때까지 어른들은 자상하게 보살피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에는 시간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삶이 다채로운 갈래로 펼쳐질 수 있도록 입체적인 가치, 풍요로운 장場을 열어놓아야 한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의로움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숭고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돈이 신이고, 권력이 종교인 자신의 삶을 그대로 물려주기 위해 혈안인 우리사회 어른들한테 이 말이 얼마나 물색없는 소리인지 결코 모르지 않는다. 알기 때문에 곡진히 말하는 것이다. 지금 괴물인 어른들이 아이들마저 그렇게 키운다면, 아이들은 악귀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러므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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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나 자동차 내부 비밀을 지키기 위해 흔히 선팅을 한다. 선팅은 노출증사회의 반증이다. 가릴수록 관음증은 격화된다.


나는 밤과 새벽에 묵상할 때, 창문을 연다. 창밖은 온갖 나무, 풀, 새, 벌레, 흙, 그리고 드물지만 행인, 때로 눈, 비, 안개, 바람이 살아 움직이는 자그만 산이다. 신들의 영지다. 방에 불을 밝힌다. 나는 신들에게 오롯이 보인다. 신들은 내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을 뿐이다. 묵상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거나 하루를 시작할 때, 불은 끄되 창문은 꼭 닫지 않고 쪼끔 열어둔다. 잠자는 동안에도 신들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다. 내가 집을 떠나 있을 때는, 내 묵상의 공간이 그 소리와 냄새를 간직해둔다.



나는 신들의 비밀을 보려 욕망하지 않는다. 신들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기 위해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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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 폄훼의 철학적 흐름 선두에, 정상에 섰던 사람이 바로 칸트다.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은 객관적 능동적 감각이고, 후각(따라서 미각)은 주관적 피동적 감각이라고 구분 지었다. 전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강요되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혐오 대상이다. 주체로서 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에게 이 구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오류무아지경, 무지삼매경 맞다. 그러나 칸트는 절대군주였다. The King can do no wrong! 칸트의 이런 강박적 이성독재는 헤겔의 중립화와 포이어바흐의 복권을 거쳐, 니체의 돋을새김이 있기까지 전 유럽을 지배했다. 니체는 후각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의 전령이며 공감, 직관적 통찰, 자비심, 윤리의식, 자기성찰의 기원이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아직도 니체의 칸트 해체는 비주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것은 서양 철학사에서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아폴론적 전통과 디오니소스적 전통 사이의 대칭성, 그 대칭성의 파괴를 둘러싼 오래된 에피소드의 근대 버전이다. 이성독재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코는 그야말로 숨 쉬는 도구로, 그러니까 당연히 있는, 배경 같은 존재로, 더군다나 텅 빈 구멍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후각, 그러니까 감성을 ‘쌍것’ 취급하는 전통의 결과다.


이런 관성은 진화론적 뇌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파충류 뇌에서 포유류 뇌로, 그리고 영장류 뇌로 진화하면서 본능-감성-이성·의지의 계층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진화론적 뇌 과학 이론이다.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이해하지 못 할 바 없다. 하지만 나중에 생긴 것이 고등한 것이라는 식의 발상은 동의할 수 없다. 진화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선형적 발전의 인식론이 전제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변화가 다 발전은 아니다. 달라진 삶의 조건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는 것일 따름인 변화를 모두 진화/발전으로 보는 것은 서구의 직선적 또는 종말론적 시간관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이런 프레임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생명에서 가장본질적인 것이 생긴 뒤, 생명현상을 더욱 유연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비본질적, 부차적 기능들이 생겨났다고 말이다. 비본질적, 부차적인 것이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는 생각을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것을 혐오 대상으로 삼는 생각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건강할 때든, 병들었을 때든, 치료할 때든, 감성, 곧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과 감성이 극단적· 순간적으로 맞물릴 때, 감성이 이성을 제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감성은 자연이고, 자연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당위이고, 당위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근대정신이 이성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왕의 정체가 드러났다. 왕의 귀는 당나귀 귀였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인간 생명은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끝난다. 인간의 모든 정신 현상의 중심과 경계에는 감성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감정은 감지感知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이성은 이지理智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의지는 지향志向 감성이다. 새로운 왕의 탄생이다. 아니 참된 왕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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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결의 삶을 살아갑니다. 비범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평범해서 오히려 뇌리에 깊이 박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범함이 비범함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오랜 인습을 버리면, 평범함에 깃든 은은한 숭고를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범함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말투도 웃음도 울음도 직업도 모두 평범함이라는 인감을 찍어놓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우울장애조차도 평범하다 고백하는 듯했습니다. 그와 숙의하는 과정도 똑 그와 같았습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저 또한 그렇게, 평범하게, 나직나직, 우울과 삶을 이야기해 나아갔습니다.


우수 서린 눈, 허스키한 목소리, 느릿느릿한 말투에서 이미 그의 내면 전경이 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애초기부터 똑똑하지 못 해서, 잘생기지 못 해서 공공연히 비교 당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인정해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계신 것 자체만으로 상처를 덧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대부분 아무런 존재감이 없거나 소외된 채로 지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우울증 상담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는 않았습니다. 교사가 되고 나서도 자신의 능력에 늘 불안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아이들과 상대하는 것도 어렵기만 했습니다. 새 학년도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울은 어김없이 깊어졌습니다.


저와 상담을 하면서도 그는 여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민망할 정도로 담담하게 숙의를 계속했습니다. 그 신근한 평범함이 그를 나직나직 높은 곳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어느덧 그는 자신의 행복 설정치가 한 뼘 높아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와 맺은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애하고 혼인하고 아이 낳고 양육하는 긴 과정 내내 그는 가족과 함께 잊지 않고 저를 찾아옵니다. 극적인 감동과 보람을 안겨준 어떤 환우보다 제게 그는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보석의 가치는 스스로 빛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소중히 간직해주는 데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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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오랫동안 기조우울증(서구 정신의학에서는 쓰지 않는 용어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적인 우울장애를 지칭하기 위해 내가 만든 용어다.)으로 고통 받았다. 고통의 다양한 양상이 있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아침지옥이다. 졸저 『안녕, 우울증』68쪽에 소개한바, 잠에서 막 깨어나 일어나기 전까지 시간에 맛보는 정서의 지옥 상태는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온 영혼을 짓이겨버린다. 삶의 무의미감, 혐오감, 곤혹감, 그리고 아뜩함 때문에 하루 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신은 파김치가 된다.


아직까지 드러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자려고 잠자리에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시간대도 본질이 같은 불편함으로 영혼이 무너져 내린다. 아침지옥과는 달리 이 시간에는 물 먹은 솜 같이 주저앉는 고단함, 는적는적 해체되는 느낌, 끝날 것 같지 않은 생의 피로감으로 깊은 신음을 토해내게 된다. 내일 아침 다시 눈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속절없이 젖어든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맞으면 그 날 전체가 송두리째 지워진다. 본디 이 두 시간대는 농밀하고 은밀한 자기신뢰의 본진이다. 틈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다시없이 소중한 ‘자기 허니문’이다. 우울증 앓는 사람은 자기부정의 덫에 걸렸으므로 이 자기 허니문은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이른바 ‘건강한 사람’은 이 자기 허니문의 소중함을 모른 채 덧없이 흘려보내고 만다. 아파봐야 깨닫는 인간숙명을 알아차리고서야 이 자기 허니문의 애용 이치를 증득한다.



아침 허니문은 거대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 가능한 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아침에 일어나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펼쳐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연다. 거대 의식을 앞세우고 걷는다. 밤 허니문은 소미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가 불가능한 무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잠자리에 들면서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정리해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닫는다. 소미 의식에 맡긴 채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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