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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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7쪽)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 나심을 천사가 최초로 알려준 대상은 양치는 목동이었다. 이때 목동이 남의 양을 치는 고용목동임은 물론이다. 이 고용목동은 세리, 창녀, 이발사들과 함께 거의 최하층 신분에 속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이들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는 것만큼 하느님나라의 본질을 웅변으로 증명해주는 사건은 다시없다. 하느님나라 소식, 그러니까 복음은 변방부터 전해진다. 변방인, 그러니까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나라 인식의 특권이 부여된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무엇인가.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하는 일대변화다. 그 변화는 “삶을 조망”해야 가능하다. 삶의 조망은 “경계에서”만 가능하다. 경계에서만이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볼 수 있다. 삶의 끄트머리에 서게 하는 위태로운 삶에서 인간 인식은 깨어난다. 그 위태함이 질병인가, 사회정치적 수탈인가, 하는 차이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생물학적 약자와 사회정치적 약자의 교집합은 원인과 결과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같은 내러티브 속으로 흘러든다.


심각한 질병”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른 사람은 질병을 계기로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삶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거의 불가피하게 보건의료시스템의 거대한 벽과 맞닥뜨린다. 거기서 생물학적 질병이, 그 질병을 앓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정치적 수탈 대상으로 되어 가는지 통렬히 경험할 것이다. 이 통렬함이 생물학적 질병의 고통과 어떻게 다르고, 그러나 또 어떻게 같은지 깨닫고야 말 것이다.


심각한 수탈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린 사람은 수탈을 계기로 단순히 자신의 사회정치적 삶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거의 불가피하게 생물사회적 소외의 정교한 그물과 맞닥뜨린다. 거기서 사회정치적 수탈이, 그 수탈을 겪는 사람이 어떻게 생물학적 병자로 만들어져 가는지 통렬히 경험할 것이다. 이 통렬함이 사회정치적 수탈의 고통과 어떻게 다르고, 그러나 또 어떻게 같은지 깨닫고야 말 것이다.


사회 변화를 포기한 개인의 각성은 영적 폭식이다. 개인의 각성을 거세한 사회 변화는 공적 폭력이다.


분리 이데올로기 지배집단의 이간질은 본디 이 둘커녕 개인의 각성도 사회 변화도 모두 불가능하게 죄다 갈가리 찢어 놓았다. 아서 프랭크는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꿰매기를 시작했다. 심각하게 아파서 경계에 설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대단히 축하받을 일이다. 그 이전 허다한 사람들이 그 경계에 섰으나 인식의 특권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가 바느질한 땅에 어떤 꽃이 피는지 설렘으로 둘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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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때로 결백을 위로이게 한다




눈은 때로 갈엽을 백화이게 한다




눈은 때로 나무 전체를 꽃송이이게 한다




눈은 때로 가을나무를 햇빛의 호위무사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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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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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부터 12월까지 나는 『몸의 증언』의 주해 리뷰 60편을 썼다. 같은 저자다. 그 책이 3년 나중 저술됐으나 번역이 먼저 됐다. 두 책의 느낌은 사뭇 판이하다. 내용이나 번역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글쓰기 감수성 자체에서 다른 풍경이 빚어졌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목는 『AT THE WILL OF THE BODY: Reflections on Illness』다. 『몸의 지향: 질병을 숙고함』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말글살이 분위기와 저자의 의중-disease와 illness 차이를 섬세히 또는 엄격히 구분하는-을 고려해서 『아픈 몸을 살다』로 번역한 듯하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삶의 한가운데서 통찰한 글이라 다양한 촉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학문적으로 훈련된 기반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탁월한 감각을 따라 펼쳐지는 감성과 이성의 교직이 때로는 웅숭깊고 때로는 눈부시다. 사유의 깊이와 표현의 기술을 고루 갖춘 드문 지성이다.


이 책을 몇 사람에게 소개·추천했다. 심장마비와 암을 겪은 이야기지만 우울장애를 위시한 마음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이 있어서다. 어떤 이에게는 필사를 권유했을 정도다. 약간의 이의와 보충을 포함해서 아픈 삶의 길 동행기를 적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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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학 이야기>를 꾸준히 읽는다는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파동 공동체가 무엇입니까?” 아, 나 또한 이간문명의 흔적을 지닌 채 글을 쓰고 있구나. 자그마하게 배어드는 마음 小少沁心으로 이야기를 해야 마무리가 되겠구나.


파동공동체는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입자 정체성을 염두에 둔 대안 용어로 내가 고안해낸 말이다.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는 공동체를 양(가시적 조직)으로, 영역으로만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종교(성을 띤) 공동체, 명망가 중심으로 특정한 삶의 목적·방식을 가지고 꾸린 공동체가 바로 그런 예다. 어떤 정체성 안에서만 연속될 뿐이어서 이간문명의 속성 또는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다.


파동공동체는 질(상호교류)로, 네트워킹으로 생각하는 공동체 개념이다. 이런 예는 어떨까. 가령 통일 문제를 말할 때, 보통 반사적으로 남북의 영토적 통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남북한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들을 네트워킹으로 연결한 유연한 공동체 형성을 통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 중앙아시아, 미주, 일본 등에 결코 적지 않은 수의 한인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데, 이들을 영토적으로 묶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북한의 영토적 단일성 문제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 벌어진 북한 병사 귀순 사건에서도 보듯 휴전선은 그 어느 국경선보다 살벌하고 견고한 분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상과 삶을 공유한다면 카자흐스탄 고려인 마을에 사는 사람과 LA 한인 마을에 사는 사람을 공동체 구성원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한 줌 무리 이끌고 어느 섬으로 들어가 울타리 두른 다음, 녹색의료·녹색출산·녹색장례·녹색농업 일구어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율도국’ 공동체를 만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율도국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구축해 지구를 율도국 분점으로 덮는 꿈은 더욱 꾸지 않는다. 비밀리에 기적의 율도전사를 양성해 전 세계를 율도제국 통치 아래 두는 꿈은 더더욱 꾸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각 그 인연에 따라 고유한 율도국을 만들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깨달아 고유한 율도국을 이루도록 소통하는 계기 공동체를 꿈꾼다. 계기 이상(의 권력)이 되면 스스로 거점을 지워 나아가는 공동체를 꿈꾼다. 이게 바로 파동공동체다.


파동은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구조를 세우지 않는다. 파동은 자그마하게 소식news을 주고받는다. 자그마하게 주고받은 소식은 각자의 복음the Good News이 되어 인연에 맞는 에너지와 구조를 스스로 일구도록 조절 한다. n개의 녹색공동체는 n가지 스펙트럼의 녹색 빛을 낸다. 이간문명의 극복은 이토록 다양하고 풍요롭게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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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醫는 앓는 소리를 뜻하는 예殹에다 술 단지를 뜻하는 유酉를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고대에는 술로 병이나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서양 과학적 지식으로 추정한다면, 에탄올의 작용을 핵심으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술은 증류주든 발효주든 순수 에탄올 이상의 약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 고대의학에서 주로 사용한 탕약은 대부분 물로 달이지만 술을 넣어 달이도록 한 처방도 있다. 이것은 에탄올 추출이 더 나은 경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술과 함께 복용하도록 한 처방도 있다.


자연스럽게 醫는, 우리가 아는 의사나 치료라는 기본 뜻 말고, 술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하지만 술의 최초 위상은 신성한 것이었다. 종교지도자가 신을 만나는 방편이었으니 말이다. 술의 치료 기능은 아마도 그 신성의 확장,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지도자는 의사이기도 했으므로 醫에 무당의 뜻이 담기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지도자가 종교지도자이자 의사였다. 醫에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까지 담긴 것은 이 사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醫의 이런 다중 의미를 오늘날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간문명이 가르고 또 갈라놓아 모든 것이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요법포르노 기술자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디 의사는 영성의 사람이었다. 세상을 보살피고 돌보는 공공의 사람이었다. 녹색의술을 시행하는 치유의 사람이었다. 본디 위상을 복원해야 한다. 승려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영성과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법 포르노를 떠나서 전인치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자연과 자연 사이를 흐르는 파동 공동체의 매개변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당이자 술인 사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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