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우리 생명공동체에게 카이로스 통증을 일으켰던, 아직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크로노스 통증이 되어버린, 그 기억의 지표에서부터 나는 죽기 살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4년 동안, 3백 쪽짜리 책 50권 분량을 썼다. 책으로 출간될 상품성 갖춘 것이 아니었으므로 철저하고도 처절한 익명의 글쓰기였다. 어깨가 ‘나갔다’.


처음에는 미세한 국소적 근육의 존재감으로 시작했다.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겨 그대로 놔두었다. 시나브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삼각근 전체로 통증이 일어나 번져갔다. 통증의 결과 겹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견갑대 전체에서 승모근으로, 팔과 손으로 스무 가지가량 통증이 찰나마다 갈마들며 날뛰기 시작했다. 문제 삼아야만 할 시점에 도달했다.


무엇보다 먼저 통증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통증이 어떻게 일어나 변하고 잠잠해지는지 관찰했다. 몸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통증이므로 함부로 서둘러 진통치료를 하지 않고 기다렸다. 물론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졌다. 잠자다가 깨는 일이 차츰 잦아졌다.


몸의 자기치유력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통증 사건 전체를 경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때부터 나는 조금씩 몸을 돕기 시작했다. 손으로 두드리고 문지르고 주물렀다. 자다가 아파서 깨면 일어나 스스로 침을 놓았다. 그러면서 통증의 곡절과 전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왼쪽에서 시작되었나? 어깨는 몸에서, 삶에서 무엇인가? 몸은 마음과 어떤 관계인가?


숱한 상념들이 일어나고 스러졌다. 단계마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질적 차이를 지닌 시간이 흘러갔다. 마음 문제에 치우쳐 있는 내 삶의 경사, 개인의 삶에서 짊어져온 십자가의 과중을 거쳐, 이윽고 공적 참여를 위한 익명적 희생에 이르자 통증 사건이 전모를 드러냈다. 이 깨달음은 통증을 제거하는 묘약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이정표였다.


40년 전 신체 일부를 생으로 잘라내는 카이로스 통증과 급격히 조우하면서 내 인생은 격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통증은 제거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될 생명의 징조였다. 그 징조에 감응함으로써 나는 40년 동안의 인생 제2기 la Critique 부정否定과 파괴의 시대를 견뎌냈다. 이제 나는 100일 동안 크로노스 통증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징조를 읽어낸다.


제거할 수 있는, 해야 할 통증과 직면하면서 마침내 인생 제3기 la Naïveté seconde 부정不定, 그러니까 무애자재의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를 예감하고 있다. 생명과 그 감각을 갉아먹으며 부단히 엔트로피를 끌어올리는 통증을 분별하여 선선한 손길로 털어버리는 노년의 운수雲水야말로 대大자유의 삶일 것이다. 어찌 하면 선선한 손길을 지닐 수 있을까?


이 100일의 끄트머리 닷새 동안 나는 낯선 나라에 머물렀다. 도착한 날 한밤중에 나는 홀연히 잠에서 깨어났다. 아내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욕실을 거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빛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공간이었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응시한다고 해서 물러날 어둠이 아니다!


어둠은 어떻게 물러나는가. 내 몸에서 나오는 빛을 받고서야 물러난다. 인간의 몸에는 세포마다 광자photon가 있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이치를 따라 기다리면 몸이 내는 빛으로 말미암아 주위 어둠이 이치만큼 물러난다. 기계적인 즉각 반응이 아님은 물론이다. 응시의 힘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 동안 응시에 마법적 힘을 부여해왔다. 잘못이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통증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기작과 의미를 깨닫는다고 해서 통증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몸 전체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일깨우고 북돋워 반생명적 통증에 맞서야 물러난다. 물러날 때까지 손을 써야 한다. 이것이 선선한 손길이다. 선선한 손길이 삶에서 엉긴 열을 내려 가벼이 흐르게 한다.


백일통오百日痛悟는 결국 손으로 귀결되었다. 손은 마음이 몸의 마음이라는 진실을 확인해주는 상징이다. 인간인 한 이 손을 떠날 수 없다. 손에 깃드는 진실을 터득하기까지 통증에 예의를 갖추려고 지난 100일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글 읽기와 쓰기를 멈추었다. 기존 삶을 멈추고 새로이 감지한 내 삶의 어떤 경이로움에 가만 손대어 본다. 덤덤하게 설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앞태 연분홍

뒤태 진분홍

진달래로 온다

봄은 




all that spring




the one that sprin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읽지 않는다

쓰지 않는다

듣고 맡아서

살기로 하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의 두 사람이 있다. 둘 다 마음병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그러지고 덜거덕거린다. 일상생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치유 상담도 잘 흘러가지 않는다. 한 사람은 자신의 병을 도무지 병으로 인식하지 않는 무감한 통념에 붙잡혀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병을 특별한 병으로 인식하는 무거운 신파에 휘감겨 있다. 전혀 다른 모습의 정신 네오테니neoteny에 빠진 상태다. 모른 채 집착하는 전자는 지둔함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알면서 집착하는 후자는 잔망스러움의 냄새를 풍긴다. 치유가 어렵다는 면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둘 다 치유가 잘 안 되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성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찰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자신이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자신은 자신의 상태를 최대한 객관적 시선으로 본다. 객관적 시선은 집착의 덜미를 낚아채는 맑은 관점에 설 때 잡힌다. 맑은 관점에 서는 일은 결가부좌 참선이나 명상 따위로는 어림없다. 고통 받는 다른 생명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실상에 유념해야만 가능하다. 유념은 공감과 참여를 낳는다. 공감하고 참여함으로써 고통은 네트워킹이 된다. 네트워킹이 바로 무한히 번져가는 신의 파동이다. 신의 파동에 주파수를 맞추면 병은 알맞게 해소되고 삶은 알맞게 해방된다.


일요일에 영화 <1987>을 보았다.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그때 대학생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아내는 아내대로, 아내 또래를 제자로 둔 나는 나대로 역사 앞에 소환되었다. 내게는 영화의 어떤 핵심 이미지와 소리들이 거듭해서 세월호사건과 포개져 다가와 눈물의 온도를 바싹 끌어올려주었다. 세월호사건 직후 한의원이 갑자기 한산해졌던 기억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려고 누우니 몇 주간 지속되어왔던 몸의 통증이 한결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이 밤은 통증 때문에 중간에 깨는 일 없이 잘 수 있겠구나, 생명의 감수성에 신뢰를 보내며 눈을 감았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느껴지는 몸의 통증은 전에 없이 격심했다. 마음의 홀가분함은 전에 없이 깔끔했다.


앞의 20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 영화를 본다면 어찌 반응할까? 추정건대 무감한 통념의 사람은 재미없어 중간에 졸 가능성이 높다. 제 또래 두 학생의 죽음에 서린 문제를 문제로 독해하지 못할 것이다. 무거운 신파의 사람은 제 고통의 덫에 걸려 저 고통의 순간들을 외면할 것이다. 제 또래 두 학생의 죽음에 서린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공통된 것으로 독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이 “우리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채우듯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음”(246쪽)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양육은 불가능하다. 양육은 인생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기획 치유다. 치유 기획은 직립보행이 야기한 그늘의 보정으로 병을 고안해낸 동시적 네트워킹의 핵심 갈래다. 병을 통해 무한신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은 실로 지상의 축복이다. 아파서 아름다운 이여, 그대는 이미 너무도 아름답다. <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1-22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3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내가 질병을 겪으며 배운 교훈 중 반절이 있다.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


이 시는 내가 배운 것의 반절일 뿐이다. 햇빛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혼자만의 것이다. 삶이 주는 기쁨의 나머지 반절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반쪽들이 합쳐져 온전한 하나가 된다.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나만의 것은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내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도덕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세계를 네 자신처럼 여겨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믿음을 가져라

세계를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수 있으리라


·······기쁨은 집착하지 않는 데 있다.(222-224쪽)


기어이 정점에 이르고야 말았다. 병이 삶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라는 사실, 병들었을 때 아름다운 세상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나아가야 참 기쁨에 이른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으니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로 몰아세우는 위험한 질병이 들이닥쳤을 때 그것을 충만히 살아냄으로써 아서 프랭크는 마침내 지극한 영성 또는 오도悟道의 시공으로 들어섰다.


책의 거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가 『도덕경』을 인용한 것은 사뭇 인상 깊다. 그가 인용한 『도덕경』제13장 결부다. 즉, 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다른 판본에는 제57장 故貴爲身於爲天下 若可以託天下矣 愛以身爲天下 女何以寄天下)를 해석한 것이다. 만일 그가 한문을 알았더라면 인용한 것처럼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인용한 번역은 거의 오역에 가깝다. 번역자의 어법과 분위기를 존중해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세계를 네 자신처럼 높여라

그러면 세계에 네 삶을 부칠 수 있으리라

세계를 네 자신처럼 아껴라

그러면 세계에 네 삶을 맡길 수 있으리라


해석에 어려움이 있는 원문이라 논란이 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대구조차 무시한 인용 번역은 중역重譯의 의심마저 든다. 이런 번역으로는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그러니까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전경을 제대로 그려내기 어렵다. 세계를 높이고 아끼는 것은 세계에 내 삶을 온전히 기탁寄託할 때 드러난다. 기탁, 그러니까 자발적 공공 참여 없는 기쁨은 아라한의 집착이다. “집착하지 않는 데”서 부처 난다.


물론 부실한 『도덕경』번역이 아서 프랭크의 깨달음 자체에 누가 되지는 않는다. 아서 프랭크의 표현이 보여주는 명료함과 그로 말미암은 한계를 동시에 읽는 일은 바리데기 후예의 인식론적 특권이자 과제다.


아서 프랭크의 필생기必生技는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다. 이점에서 동아시아 전통은 느슨하다. 아니 무턱대고, 나아가 작정하고 자기 거점을 지운다. 내가 있고서야 나를 지운다는 말이 성립한다는 진리를 허투루 대한다. 아서 프랭크는 이 지점에서 단호하다. 그렇다.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나만의 이야기를 똑 부러지게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네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영적 허영 아니면 위선이다. 이 섬뜩한 진리에 곧 바로 싸대기를 날리는 한 마디.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단도직입으로 바리데기 통찰을 말한다. 세계는 나의 연장이 아니다. 나는 뻗어 나가지 않는다. 내 자아가 세계로 확대되지 않는다. 나는 배어든다. 나는 초미세 물방울로 효소도 없이, 에너지도 없이 생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밖으로 번져간다. 알뜰하게 번지면 배어난다. 배어날 때 비로소 새로운 이름이 된다. 새 이름은 나와 세계를 묶어서 푼다. 그 이름을 들라. 스르르 사라진다. 그 이름을 내려놓으라. 옴팡 새겨진다. 여기서 나는 그냥 일렁거린다. 고요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