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이 새로 펴낸 청소년시집 <댄스, 푸른푸른>을 보내왔다. 세월호사건이 우리사회에 일으킨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이 시집이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필 왜 청소년 250명을 잔혹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그 질문과 대답 속에 우리사회의 성격과 수준이 담겨 있다. 청소년의 정서적 몸, 그 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더 이상 부끄럽지 말아야 할 이 땅 어른들의 필수 과제다.


마음 치유하는 의자로 살면서 내가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마음병에 처한 모든 어른들이 정서적 병리를 지닌 청소년기 (또는 그 이전) 상태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치유자는 가장 먼저 그들에게 알맞은 정서적 몸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 생각, 어른 언어를 장착한 채 하는 훈계로는 치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선우 시인은 시인으로서 예술의 맥락에서 이런 진실에 다가선 경험을 녹여냈다. 그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과 근원에서 하나임을 새삼 정색하고 알아차린다. 부디 이 시들을 많은 사람이 읽고 공유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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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是山 水是水


청원 유신 선사의 선화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다. 겉보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익숙한 통속 논리에서 볼 때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므로 함의 또한 같다고 할 법하다. 청원 유신이 어찌 통속 논리 따위를 구사했겠나.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이다. 부정不定은 모순 너머 역설 품은 무애자재다. 신이다.


인류의 고대적 삶은 녹색이었다山是山 水是水. 타락(스티브 테일러) 또는 분리(찰스 아이젠스타인) 이후 인류의 삶은 백색이다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백색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고 이제 인류가 꽃피워야 할 삶은 고대적 녹색의 복원이 아니다. 문명이 일깨운 지혜를 폐기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지혜를 거룩하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거룩한 삶은 녹색 품은 자색(보라빛)이다. 자색은 장엄이다山是山 水是水.


신의 장엄은 거대한 군림이 아니다. 소소한 존재로서 소소하게 배는 만휘군상의 무한한 신-사건이다. 신-사건은 자유 저항, 공유 평등, 치유 박애의 네트워킹이다. 이 네트워킹은 애당초 우리가 제시한바 녹색의학의 지평이다. 녹색의학은 자색 장엄의 속살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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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끝으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바로 이 것이다.


예술가는 그냥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창조물이 물질적이든 인간적이든 사회적이든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447쪽)


살면서 입버릇처럼 내가 했던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예술 할 꺼다.’다. 예술이란 문학, 음악, 미술, 연극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뜻뿐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른 일을 해서 ‘대박’나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자각에서 연유한다. 아픈 사람 치료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예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치료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딱 여기까지가 내 수준이었다.


전적全的은 아니더라도 내가 주체적인 어떤 작위로 예술인 치료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과정에서도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에 다다르기 전에 예술가인 양 했다. 신의 길을 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아, 참람함이여.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은 마치 나사렛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십자가를 진 것과 같다.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한 것과 같다. 치료, 그것이 내게 왔을It came to me 때, 나는 의자로서 받아들이고 도구가 되면 그만이다. 나는 죽어 마지막 거점조차 지우는 일로 경외를 표하면 그만이다. 의자는 치료 속으로 배어들고, 아픈 사람의 변화된 삶에서 배어나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것이 치료의 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면 녹색의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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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0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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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다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것이다.


사랑은 익명으로 할 수 없다.”(446쪽)


이 말은 내 폐부 깊숙한 곳을 뒤흔든다. 그 동안, 차마 가 닿을 수 없었던 진실이다. 60년 남짓한 생애 기조가 익명성이었기 때문이다. 내 익명의 삶은 시원적 방치에서 시작되어 사회적 강권을 거쳐 마침내 자발적 중독으로까지 나아갔다.


있으나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의 누적은 나를 익명성 밑바닥에 납작하니 개켜 넣었다. 부피를 상실한 내 이름은 어디에 있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내 이름은 거의 질문되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크게 외칠 때는 듣는 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는 이름 부를 목소리가 사라졌다. 익명성은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흐름에 맡기면 언제나 익명이 보장되는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어쩌다 중심으로 흘러들면 익명은 돌연 요구가 된다. 그 요구에 속절없어진 나는 이름을 가리고 선사膳賜에 배어든다. 선사에 배어든 나는 무색투명해진다. 무색투명한 자가 건넨 선물이 연대의 고리가 될 리 없다. 연대 바깥에 선 자는 공동체 일원이 아니다. 나는 초월자연하는 국외자였다. 거대신의 헛된 그림자를 여전히 밟고 있었다. 나는 오만을 흉내 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인색에 빠져 있었다. 인색은 자기 착취다. 자기 착취는 이내 그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너머 남에게도 내게도 이름 자체가 선물이며 사랑이라는 진실을 느지막이 깨닫는다. 그렇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름을 건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2018년 1월 5일에 쓴<익명의 시대를 건너다>를 조금 고쳐 가져왔음.)


작고 적은 존재의 이름을 묻지 않는 것도, 이름을 짐짓 가린 채 초월자적으로 시혜하는 것도 모두 백색문명의 분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폐해며 허상이다. 나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부역자였다. 이제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작은 이름을 당당히 넉넉히 걸고 분리의 벽을 넘어가는 것이다. 선물로서 이름膳名을 번져가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이 백색문명을 치유한다. 백색문명을 치유하는 것이 녹색의학이다. 녹색의학은 사랑의학이다. 사랑의학은 이 시대 천명天命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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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용 음식이라 일컬은 인사동 소람의 안동국시와 깻잎ㆍ배추ㆍ부추김치들이다. 맛도 자태도 놓이는 순서도 변함이 없다. 같은 음식을 같은 자리에서 수백 번째 먹는데 늘 새롭다. 그 까닭은 우선 내가 이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적어도 내게 이 음식은 제의의 형식이자 내용이다. 깨침 또는 구원은 매순간의 창조다. 또 다른 연유가 하나 있다. 이 집 식구들과 내가 나누는 인연의 화학이다. 그들은 내가 오면 느낌으로 안다고 한다. 내색하지 않아도 반가움은 촉촉하렷다. 어쩌다 내가 오지 않으면 모두가 궁금해하며 이야기한다고 한다. 어찌 이 집 음식이 음식 이상이 아니랴. 소고기 고명 대신 대파가 담뿍 올려진 국시를 먹는 내내 내 영혼은 은은한 향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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