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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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제는 기이하고 일탈적이다. 그 한계에 이르러 이제 새로운 경제에 밀려나는 필연적인 단계를 밟는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연계에서, 앞뒤 가리지 않는 성장과 필사적인 경쟁은 복잡한 상호의존, 공생, 협력, 자원의 순환을 이루기 전에 나타나는 미숙한 생태계의 특징이다. 따라서 다음 단계의 경제는 우리 모두의 선물을 이끌어내는 경제가 될 것이다. 경쟁보다 협력을 강조하고, 쌓아두기보다 나누기를 장려하고,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경제가 될 것이다. 돈이 곧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좀 더 선물에 가까운 속성을 띤 채 지금보다 축소된 역할을 할 것이다. 경제는 축소되지만 우리 삶은 더 확대될 것이다.(36-37쪽)


예일대 정치경제학 교수 존 로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미국 상위 0.001%의 가구소득은 1984년 평균소득보다 634배 많았지만 2014년에는 1937배까지 늘어났다. 반면 하위 50%의 실질소득은 그동안 1%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연간 1%가 아니다. 1980년부터 2014년까지 34년에 걸쳐 단 1% 올랐다. _경향신문


어찌 미국뿐이겠나. 대한민국 경제도 충분히 “기이하고 일탈적”이다. 저 기이하고 일탈적인 경제를 나는 경제 포르노라 부른다. 경제 포르노는 돈 포르노다. 돈 포르노는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괴물이 되어 날뛰는 대박 난 극소수 부자들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며 나아가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있다.


감옥에 갇힌 두 전직 대통령, 한진 모녀, 삼성 부자, 안철수를 보라. 돈이 저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경제는 축소”되어야 한다. “우리 삶은 더 확대”되어야 한다. 경제가 스스로 축소되겠나. 애써서 선물을 순환시켜야 한다. 우리 삶이 저절로 확대되겠나. 애써서 신성을 회복해야 한다. 손이 손을 씻어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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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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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의 거래는 참여자들 간의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만들어내는 열린 거래다.(27쪽)


전체성wholeness 혹은 상호의존성·······. 선물은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게 만든다.(29쪽)


무슨 말인지 안다. 신성의 한 축이 관계성이고 관계성의 기저에 통일성이 있다는 말을 여기서 조금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고 있다. “전체성wholeness”이 통일성과 같은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상호의존성”과 “혹은”으로 연결했으므로 같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임에도 통일성과 구별하는 일은 더 어렵다. 이런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12세기 특별한 서구 사상가 유그를 인용한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다. 전 세계를 타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완전한 자다. 미숙한 영혼을 지닌 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한 장소에 고착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게 하려 한다. 완전한 자는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한다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말은 유그의 말 가운데 강인한 사람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강인함은 사실 서구문명이 시종일관 추구해온 덕목이다.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리는 완전한 인간을 서구사회가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물론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이 차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한다는 말을 아무리 정복의 의미에서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티브 테일러의 자아폭발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명쾌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자아의 범위를 확대한다는 말이 상호의존성에 닿아 있으므로 자아폭발과 다르다는 사실은 수긍해야 하지만 자타 분리를 끊임없이 넘어선다는 표현 정도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보라. 자신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게 하려 한다는 말과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는 말은 얼마나 다른가.


서구 지성사에서 유그는 무엇인가? 영향력에 관한 한,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큰 부자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아들들을 불러 막대를 하나씩 주면서 말했다. “지금 출발해 해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막대로 그은 금 안의 땅을 모두 주겠다.” 아들들은 기뻐 날뛰며 서둘러 출발했다. 해 지고 밤 되어도 그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떠나지 않고 홀로 앉아 있던 막내는 해 지기 직전 조용히 일어나 제 발 주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톨스토이 우화다. 막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덧셈의 발상에서 뺄셈의 발상으로 전복하는 지혜를 가르친다. 통속한 생각에 가한 뼈아픈 일격이지만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술 차이 정도에서 머무르면 이 전복은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다. 만일 톨스토이가 막내로 하여금 점을 찍게 했다면 우화는 완벽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점을 찍는 행위는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리는 행위기 때문이다.


신성을 구현하는 선물은 자아의 범위를 확대해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아의 범위를 축소해 공동체 전체 속으로/에서 걸림 없이 배어들게/나게 만드는 것이다. 바리데기 사상이다. 소성거사 원효 사상이다. 소소심심小少沁心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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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에는 주는 사람이 깃들어 있으며, 선물을 줄 때 우리는 자신의 무언가를 담아서 준다.(27쪽)


선물은 주는 사람이 관여한 정도만큼 특별하다.(29쪽)



앞으로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우울장애는 인류사회를 뿌리째 뒤흔들 것이다. 나는 우울장애를 숙의와 한약으로 치유해왔다. 그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로 볼 때, 우울장애는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 침전된 존재론적 어둠이다. 이 도저한 어둠의 편만은 파멸의 증좌임과 동시에 개벽의 징조다. 우울장애를 좀 더 근원적 내러티브로 재구성해야 할 때가 왔다.


우울장애는 단독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질병이 아니다. 우울장애는 일련의 증후군으로서 매우 유동적 사태다. 유동적이라는 말 속에는 질병 인식에 정치경제학적 역관계의 기울기가 작용한다는 뜻이 포함된다. 동일한 증후들이 나타나더라도 질병이라 규정하느냐 마느냐는 사회와 역사의 구체적 조건이 결정한다는 말이다.


분리문명 이전 삶에서 우울장애라는 질병은 성립할 수 없다. 우울장애는 연속성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삶에서 인간은 자신이 “깃들어 있”는 “무언가를 담아서” 선물을 주는 존재다.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서로 주고받는 공동체에서 누군가 좀 더 그 관여도를 높일 수 있다. 그때는 “관여한 정도만큼 특별하다”고 느끼지 질병이라 하지 않는다.


분리문명이 심화·확대될수록 관여 정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질병으로 인식한다. 가치와 중요성에서 분리된 상품만을 사고파는 시대정신이 의미를 부여하고 부여된 의미에 자신의 생명을 싣는 사람을 병자로 몰아버리는 것이다. 간단하다. 선물의 사람에게 선물이 돌아가는 길을 막으면 된다. 선물로 받고 상품으로 되판다. 수탈적으로 거래한다.


수탈에 길들여지면 수탈당하는 사람은 수탈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 내면화를 흔쾌히 정당화하는 인지된 우울장애는 그나마 상태가 나은 편이다. 빙의p​ossession 상태에 든 우울장애는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분리문명에 기소당하고 스스로 선고한 우울장애를 앓으며 인류가 멸절의 길로 질주하는 동안,


다른 길을 내고 있는 ‘새로운 환자’ 소식을 듣는다. 그들은 시대정신의 어둠 한가운데로 정색하고 들어간다. 나는 이 행보를 진욕進辱이라 부른다. 진욕의 사람도 아프다. 아파야 개벽의 길을 걸을 수 있으니 선사하는 삶을 산다. 고유성을 되찾는다. 신성을 회복한다. 작을수록 크고, 적을수록 많은 경이로움을 짓는다. 마침내 선물이 된다. 우울 품은 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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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선물이 있었다(22쪽)


선膳은 본디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릴 때 쓰는 희생 육이다.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제사인 만큼 끝난 뒤 공동체 구성원은 이를 나누어 먹는다. 선은 거룩함과 질탕함을 동시에 지닌다. 선은 공적 참여와 사적 행복을 매개한다.


태초에 인간은 거룩하면서 질탕했다. 태초에 인간은 공적 참여와 사적 행복을 분리하지 않았다. 분리문명을 일으킨 이후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질탕함과 사적 행복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왔다. 포르노와 중독으로 치닫는 것을 ‘대박 났다’고 하는 광기 속에서 영성과 절제는 ‘그래, 너 잘났다’가 될 수밖에 없다. 도처에 수탈적 거래가 있을 뿐이다. 결핍을 따라 순환하던 선물은 사라지고 대박을 노리는 뇌물이 위를 향해 흐를 뿐이다. 수탈적 거래와 뇌물이 준동하는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 아닌 군집에 속한 인간 또한 인간이 아니다. 어찌 할까?


『오직 하나뿐Our Only World』에서 웬델 베리가 소개한 숲 관리인이자 벌목꾼인 트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쁜 벌목꾼은 숲에서 자기가 가져올 것만 생각하고 숲으로 갑니다. 좋은 벌목꾼은 남겨두고 와야 할 것을 생각하며 숲으로 가지만요.”


이보다 명쾌한 전복은 없다. 남겨두고 오는 것은 다음에 가져오려고 보류하는 것이 아니다. 숲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고 오는 것이다. 혹 다음에 가져올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둘은 전혀 다른 행위다. 전자는 숲과 내가 분리된 상태에서 하는 행위다. 후자는 숲과 내가 연속인 상태에서 하는 행위다.


선膳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히 함께 먹는 행위를 넘어선다. 선은 공동체 전원의 생명을 대신하여 바쳐진 희생이다. 나누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각자의 생명이다. 너와 나가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선물이다.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 태초에 우리는 선물이었다.


태초는 아득한 옛날이 아니다. 태초는 찰나마다 들이닥치는 이제다. 이제 바로 남겨두고 와야 할 것을 생각하며 숲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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