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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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말은 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가락은 3음보를 띱니다. 한 호흡에 세 번 나누어 읽는 것이 3음보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의 전통적인 운율이 되었습니다. 3음보의 특징은 단연 유희성입니다. 즉 놀이로 세상과 삶을 인식하는 삶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삶을 지나치게 엄숙한 무엇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인생관과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의 옛이야기를 보면 산 넘으면 저 세상이고, 심지어 살아서 오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에서 해방하면 오히려 인생이 즐거워지며 짐스럽지 않게 되는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인생관은 삶과 죽음을 절대 경계로 나누어 경직되게 의미를 부여하는 서구적 생사관, 즉 삶이 격절로 끝나고 나면 비가역의 시공인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서구인들처럼 생각하면 현생에 덜 집착할 것 같지만 문명을 보면 그들의 문명은 현생이 극대화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웅대하고 화려한 대리석 건축물, 2000년이 지나도 물이 흐르는 석조 수로, 1만 개 이상의 인공 섬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 그들이 현재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의식했는지 실로 감탄하게 합니다. 그들의 문명이 침략과 정복으로 점철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서구문명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난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이치라 하겠습니다.

  의학과 상담의 세계도 그러합니다. 병은 나쁜 것이고, 그래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공격과 정복의 목적의지를 숨기지 않는 것이 서구 의학과 상담이론입니다. 그 엄숙주의가 외과 수술로, 분석과 평가와 교정의 상담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치료는 노동이 되고 과업이 되며 거룩한 전투가 됩니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3음보는 끝없는 넘실거림에 몸을 내맡기는 놀이로서 상담과 치유를 인식하도록 이끕니다. 공격하지 않고 달랩니다. 정복하지 않고 보듬습니다. 완결하지 않고 여백을 남깁니다. 왜냐하면 삶도, 슬픔도, 치료도 모두 한바탕 놀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198-199쪽)


우리의 통념은 일(노동) 뒤에 놀이(휴식)가 있다고 여깁니다. 마치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본디 놀이와 놀이 사이에 일이 있습니다. 밤과 밤사이에 낮이 있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산다면 우리 삶은 진지할지라도 엄숙 떨지 않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산다면 우리 삶은 덧없을지라도 허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탐욕과 불안, 그리고 어리석음의 포로가 됩니다. 이런 이치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일과 놀이는 각각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일은 전투적 강박으로 미끄러집니다. 놀이는 향락적 중독으로 미끄러집니다.


시방 인간이 봉착한 생멸의 문제는 일과 놀이의 순서를 뒤집어야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놀이 혁명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자본의 극한 토건, 공화제의 침몰, 지구 생태의 파괴, 이들 모두는 과잉된 일, 과잉된 일이 부른 과잉된 놀이가 원인입니다. 삶 전체를 놀이판으로 깔고 그 사이 사이에 일을 놓으면 일은 필경 놀이로 배어들 것입니다. 일이 놀이로 배어들면 인간은 마침내 존재론적 상처를 서로 달래고 보듬을 것입니다. 존재론적 상처를 서로 달래고 보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여백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말 조증 상태를 걱정하며 찾아왔던 제자는 결국 강제로 병원에 격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마음의 병을 지니고 치료 받으며 살아온 삶 전체 흐름을 살펴보면 주위 사람, 특히 가족이 병의 원인을 제공하고 악화시킨 다음, 급기야 강제격리라는 폭력적 치료(?)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직접 개입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의 배우자는 저를 찾아와 가족의 이름으로, 보호자의 권리로 내린 결정을 통보하고 혼란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병의 본질과 치료의 정도를 의학적으로 곡진히 피력했으나 그는 자신의 인문학을 근거로 대며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자리를 떴습니다. 몇 시간 뒤 그의 결정은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서구정신의학과 어설픈 인문적 지식, 그리고 가부장적 남성문화가 합작 기획해낸 아프고 슬픈 의료서사입니다. 그들은 엄숙하고 단호했습니다. 병의 증상은 적이므로 없애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은 처리 대상이므로 과정에 대한 질문은 필요 없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가족으로서 보호자로서 책임감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써 저들의 이성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이 서사의 심연에는 그들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지난 주말 늦은 밤부터 별안간 시작된 드라마 같은 실제 사건이 가파른 허망함으로 종결된 지금, 홀로 한의원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삶의 이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운 풍경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무디면서도 가벼운 삶으로 혁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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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1장 본문입니다.


子曰 索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君子遵道而行 半途而廢 吾弗能已矣.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자왈 색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 군자준도이행 반서이폐 오불능이의. 군자의호중용 둔세불현지이불회 유성자능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일은 후세에 칭술함이 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군자가 길을 따라서 가다가 길을 반쯤 가서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 없다.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므로 숨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하여도 후회하지 아니하니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다.”


2.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일은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 ‘특별히’ 하는 행동입니다. 나아가 그런 행동들로 점철된 삶의 흐름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 권력과 부와 명예가 결합하겠지요. 이런 풍조를 일컬어 ‘뜬 사람 문화celebrity culture’라 합니다.


무슨 수를 쓰든 일단 ‘뜨면’ 만사형통인 세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처음엔 연예계에서나 일어나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든 ‘떠야’ 행세하는 판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너나없이 자신을 띄우는 이미지 전시에 골몰합니다.


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제 내용의 괴리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심지어 그래야 마땅한, 그래서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뜬’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소한 것도 업적으로 부풀려지고 큰 허물조차 서둘러 덮여집니다.


이 시대정신은 막강한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무슨 짓으로든 일단 ‘뜨면’ 단박에 인간적인 품위까지 격상되는 기적(!)을 맛볼 수 있으니 거기에 어찌 사회적 힘이 붙지 않겠습니까? 어떤 젊은 연예인이, 자신이 귀족이라는 의미를 전제하고, 비연예인인 사람들을 ‘평민’이라 했다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게 “드러나 세상에 알려진” ‘특별한’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은벽하고 괴이한” 생각입니다. ‘특별한’ 전시성을 지닌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뜰’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뜬’ 사람이 ‘뜨지’ 못한 사람보다 격이 높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재주가 덕을 제압하는 세상은 그 자체로 형벌입니다.


3. 군자의 한결같은 중용 실천은 맥락의 변화를 유연하게 살피면서 다함없이 이어집니다. 중용의 길을 따라가다가 반쯤에서 그만두는 것은 군자가 행할 바 아닙니다. 아무리 해봐도 ‘뜨지’ 않자 중용 실천을 그만두는 자는 사이비 군자입니다.


어차피 중용의 도는 ‘특별한’ 프로세스를 구사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습니다. 아니 당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소통을 통한 평범함의 추구가 중용의 도라면 정작 세상에 알려지는 주체는 대동으로 바뀌는 사회 자신일 것입니다. 군자는 자신을 숨겨 대동 세상 자체를 드러내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앞 다투어 ‘세상에 알려지는 특별함’을 향해 내달리는 시대를 살면서 아무리 달려도 그 ‘특별함’에 이르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사람이 참 주인인 세상을 꿈꾸며 군자는 표표히 무대 뒤로 몸을 숨깁니다. 그 결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인입니다.


4. 광대무변한 우주 한 모퉁이 티끌 같은 존재라면 하찮지만 그것이 생명인 한 위대합니다. 위대한 생명은 그 자체로 이미 ‘뜬’ 기적입니다. 여기에 기획 전시를 더해 ‘띄우는’ 것은 탐욕이며 수탈입니다. 탐욕과 수탈을 정체성으로 삼은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이른바 스타무의식을 지니지 않고 살기란 여간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적으로 태어나 꼭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인데 기왕이면 ‘떠서’ 권력·부·명예를 누리면 좋겠다, 싶지 않은 사람 그 누구이겠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 꿈들은 사는 동안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가 그저 그렇게 스러집니다. 문제는 이미 ‘대박 난’ 사람들과 그 기득권의 보전·강화입니다. 체계와 규모의 이익을 누리면서 끝없이 덩치를 키워가는 것이 세습자본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은 권력과 종교를 거느리고 탐욕과 수탈을 부추겨 난공불락의 성채를 쌓고 있습니다.


세습자본의 이런 토건 가운데 그 추악함과 잔혹함에서 단연 빼어난 것이 대한민국 지배세력의 매판토건입니다. 나라를 팔고 백성을 파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백성을 대량학살하기까지 합니다. 절묘한 기획과 연출로 산 사람들의 혼을 빼, 죽은 사람들에 대한 도리조차 다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조문을 ‘띄우고’ 눈물을 ‘띄워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거듭 거듭 바다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백성을 ‘빠뜨려’ 정권을 ‘띄우는’ 이 무도한 국가에서 중용은 과연 무엇이고, 군자는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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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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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내를 감추는 어법이라면 가히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이 언어적 표현의 극대화를 통해 이런 목표를 달성한다면 우리는 표현을 극소화하고 함축성을 극대화 하거나 중의重義적으로 함으로써 이런 목표를 달성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괜찮다’, ‘됐다’입니다. 액면 그대로의 의미와는 달리 문맥에 따라 이 말들은 매우 미묘한 속내를 표현하는 데 두루 쓰입니다. ‘괜찮다’며 용인하지만 묵직한 불만이 깔리는가 하면 ‘됐다’고 사양하지만 강한 소망이 깃들어 있기도 합니다. 행간이나 여백을 순식간에 읽지 못하면 정반대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의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그 의미만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명쾌하고 단도직입적인 거래보다는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본의를 곡진하게 드러내는 은근한 흥정에 익숙한 삶이 반영된 것입니다. 달 그림을 그릴 때 주위에 구름을 그림으로써 간접적으로 달이 드러나게 하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기법과 같은 것이지요.

  이런 소통 방식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유연한 완충제 구실을 해줍니다. 단절성과 연속성의 절묘한 갈림길에서 순간이나마 ‘발효’의 시공간을 둠으로써 서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직접 상대방의 마음에 입을 대지 않고 자신의 마음부터 입을 대 단절 가운데서 연속을 찾는 은유의 치료가 일어나게 합니다.(197-198쪽)


입계의완入界宜緩. 남의 경계로 들어갈 때는 부드럽게 천천히 하라는 바둑 격언입니다. 바둑은 놀이의 성격을 지니지만 분명히 승패가 갈리는 싸움입니다. 싸움에서조차 부드럽게 천천히 하라고 충고하는데 하물며 마음치료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병이 들어 치료 받으러 온 사람은 도나 지식을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치료자의 위치에 서는 사람은 그러므로 지도자나 스승이 아닙니다. 치료에 진리나 진실의 자리가 있어 도나 지식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치료는 깨우침이나 가르침과 다릅니다. 병에서 오는 아픔은 진리를 추구하거나 진실을 규명하려는 고뇌와 다릅니다. 포개지는 영역을 딛고 거칠게 신속히 쪼개지는 영역으로 발 들여놓는 종교 장사꾼과 인문 장사꾼의 대박 때문에 우리사회의 마음병 치료는 일대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저들은 의학적 진단과 그에 따른 치료에 무지한 채, 그것을 무시하고 이를테면 아마추어적 종교‘치료’, 인문‘치료’를 자행합니다. 의학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의학의 경계로 함부로 넘어오지 말든지, 적어도 넘어오려면 부드럽게 천천히 하든지 하는 예의만이라도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 아픈 사람의 험한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가 단도직입이나 돈교頓敎의 어법을 쓰는 경우는 딱 두 상황뿐입니다. 이성에 기댄 그 어떤 설명으로도 아픈 사람의 굳은 관성이 깨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가 그 하나입니다. 아픈 사람이 공격적 자세를 풀지 않고 끊임없이 덤벼서 임계점을 넘어설 때가 다른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가급적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 단박에 한 생각 돌이키게 할 수 있는 통찰을 벼렸다가 '쓰윽' 하고 씁니다. 정색하고 언성을 높여 야단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뭅니다.


성동격서 도남의재북聲東擊西 圖南意在北. 동에서 소리를 내고 공격은 서에서 한다, 남을 도모하면서 뜻은 북에 둔다는 바둑 격언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의 굳은 땅으로 들어갈 때 제가 잘 쓰는 방법은 은유가 가능한 예화를 드는 것입니다. 예화의 많은 부분은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서구정신의학의 걱정과 달리 의자가 스스로 경계를 허물면 아픈 사람의 경계는 말랑해집니다. 1인칭 어법은 아픈 사람의 마음 문제에 직접 입대지 않고 그 빗장을 푸는 수승한 방편입니다. 단순한 전략이 아닙니다. 연대의 진정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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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0장 본문입니다.

 

子路問强.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자로문강. 자왈 남방지강여 북방지강여 억이강여. 관유이교 불보무도 남방지강야 군자거지.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故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임금혁 사이불염 북방지강야 이강자거지. 고군자 화이불류 강재교. 중립이불의 강재교. 

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유도 불변색언 강재교. 국무도 지사불변 강재교.


자로가 강한 것에 대해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답하셨다. “남방의 강함인가? 북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으로써 가르치고 무도한 자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는 이를 택한다. 창검과 갑옷을 깔고 누워 죽어도 싫어하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함이니 너의 강함은 이를 택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되지만 흐르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가운데에 서서 기대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2. 남방과 북방을 대비한 본문은 아무래도 후대 냄새가 납니다. 물론 고증과 무관한 감각입니다. 남북에서 남은 중원 또는 남송을 가리키는 한족漢族, 곧 화하華夏족의 가치와 연결되고 북은 이른바 오랑캐의 가치와 연결되는 암시가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우리는 본문을 꿰뚫고 내용을 간취하면 됩니다. 요컨대 군자는 유연하고 관대한 내면의 덕으로 강함을 삼지 힘으로 밀어 붙이는 외적인 제압으로 강함을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맥락이 서로 닿아서 문득 생각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선친께서 들려주셨던 김굉필 부자의 일화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널 속이려 한다. 어떻게 그것을 막겠느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첫째,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지요. 둘째, 능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식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셋째, 차마 속이지 못 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든 지식으로든 다 가능하지만 인격적 승복 때문에 속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최후의 것이 으뜸입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로가 추구하는 강함은 춘추전국의 제후적인 강함이었습니다. 공자는 그것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눈에는 과연 누가 자로일까요? 약탈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정체성으로 가진 지배집단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너그러움도 부드러움도 없습니다. 무도한 자가 아니어도 자신과 다르기만 하면 보복을 감행하면서 개혁이라 우깁니다.  

 

하필 왜 강함의 화두가 여기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 관점에서 보면 지당한 흐름입니다. 중용은 강자, 승자의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강자, 승자의 경직성에서는 결코 소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소통 없이 ‘평범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평범함에 깃들 때 평등의 원리, 즉 대동大同이 실현됩니다.

 

필요악(!)으로서 사회계층구조가 인격의 계층구조가 아님을 깨닫는 통치 세력이 아닌 한, 그들은 죄다 자로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로의 무리들이 제아무리 누구를 종북이다, 좌경이다, 급진이다 몰아쳐도 자신들이 턱없이 중용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3. 이제 본격적인 중용의 도가 나옵니다. “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또는 “어울리되 새나가지 않는다.”로 읽을 수 있는 화이불류和而不流는 아마도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근본적으로 같은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 느낌으로는 화이불류가 훨씬 역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제후적인 가치, 그러니까 약탈자본주의의와 신자유주의의 시대정신과 함께 뒤섞여 흘러가지 않는다는 함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불의不倚] (우뚝) 서서 벗어나지 않는[중립中立] 꼿꼿함[교矯]이야말로 군자의 강함이라고 『중용』은 갈파합니다. 제 생각으로, 중립은 가운데 선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기대지 않고 (우뚝) 선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중中에 대한 명사적 독법에 반대한다는 우리의 뜻과 상응한 해석입니다.

 

4.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궁색함[색塞]을 얼마든지 벗어나도 될 테지만 찰나마다 중용의 실천에 깨어 있으려고 늘[불변不變]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간직하는 것이 군자의 기품입니다. 이 불변은 자기의무로서 결단입니다. 반대로 나라가 어지러울 경우 제후적인 가치가 군자를 유혹, 나아가 핍박할 것입니다. 이 때는 결연히[지사至死] 맞서서 본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이 불변은 공적 의무로서 저항입니다. 꼿꼿함도 이처럼 시중時中하는 것입니다. 『역경』의 저 유명한 말 군자표변君子豹變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매우 빠르고 뚜렷함이 떠오르는데,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으로 여깁니다.


5. 요컨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 어울리되 함께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 사유와 실천을 지켜내는 꿋꿋함을 시대 상황에 맞게 발휘한다면 진정 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는至死不變 강한 꿋꿋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도가 없기國無道 때문입니다.


헌법이 있어도 가장 중요한 조문을 사문死文으로 만드니 도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선거법이 있어도 국정원과 군대가 개입하여 부정선거를 자행하니 도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국가원수가 있어도 어린 국민 250명이 침몰하는 배에서 죽어 가는 그 7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도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 무도한 나라에서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는 강한 꿋꿋함을 체현하는 군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물론 이른바 사회지도층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물대포와 캡사이신 맞으며 진실을 세우려는 평범한 이름 없는 시민 가운데 이런 군자가 있을 테지요. 죽임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바로 이런 군자일 테지요.


참으로 무도한 국가에서 참으로 수치스러운 국민 노릇밖에 못하며 사는 저와 같은 소시민은 차마 눈길 둘 데가 없습니다. 먹고살아야 하고, 처자식 안위 돌봐야 한다는 맹렬한 불안을 끝내 떨쳐낼 수 없습니다. 하찮은 삶이 토해내는 우울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과 우울을 증폭시키는 무도한 지배집단에 끌려 다니면서 느끼는 이 치 떨리는 모멸감! 참으로 비루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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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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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말은 서양 언어에 비해 시제어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과거, 과거완료, 대과거, 미래, 미래완료 등의 정교한 시간적 분절과 특성들을 우리말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분히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시간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을 정교하게 나누는 것은 사물이나 사태를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하여 정량적定量的으로 사유하는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시간의 각 단위들에 객관적 경계를 설정하여 서로 넘나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지요. 마치 코스요리와 같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정성적定性的 감수성으로 지각합니다. 시간의 주관성에 주의합니다. 마치 한상차림 요리와 같습니다. 시간은 서로 다른 색채의 것들이 함께 어울려 흐르기도 하고, 가역적일 수도 있고, 격절이 생기기도 하고, 질적 특이성으로 고밀도가 되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파동을 구획 안에 따로 가두는 것은 우리와 아주 낯선 방식입니다. 정성적 시간 감각은 장場적 감각입니다. 장적 감각은 전체성 안에서 한꺼번에 사태를 파악하는 관통 능력을 키워줍니다. 이런 감각과 능력은 구획, 격자에 길들여진 체계로는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차별성의 지점에서 우리는 ‘통짜상담’으로 열리는 ‘단박치료’의 길을 보는 것입니다.(196-197쪽)


아침나절 한의원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던 울음소리가 여적 남아 있다 배어나오는 듯합니다. 40대 초반 여성이 봉인되었던 시생대 기억을 더듬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성적인 학대를 핵심으로 하여 존재의 경계선을 지워나간 학대의 삽화들이 끝도 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몸 외적인 형체는 40대 초반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밀한 몸, 그 감각은 성 학대를 당한 그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마음 외적인 형체는 40대 초반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밀한 마음, 그 감각은 성 학대를 당한 그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하여 그의 생명 시간은 기억의 연어가 되어 역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구획대로 흐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마음, 다시 무엇보다 상처 입은 마음 생명 시간은 웅크리고, 곤두박질하고, 주름지고, 튕겨나가고, 무찔러갑니다. 또박또박 흘러가면서 상처를 지워내는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잊자 한다고 잊히는 과거 따위는 없습니다. 즐기면 마냥 행복한 현재 따위는 없습니다. 간절히 소망하면 오는 장밋빛 미래 따위는 없습니다. 포개지고 쪼개지며 부서지고 들러붙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뒤엉켜 흘러가는 것이 삶의 시간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바로 이런 장場, 그것도 난장을 경험하는 순간들로 범벅이 됩니다. 40년 전이 오늘 아침으로 솟아오르고 오늘 아침이 40년 전으로 꺼져버립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마음 치유란 이런 혼돈 속에 함께 앉아 있는 일입니다. 마음 치유란 이런 무질서 속에서 손잡는 일입니다. 함께 앉아 손잡는 일은 아픔의 시간을 구획 지어 양적 질서를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앉아 손잡는 일은 아픔의 시간마다 다른 색조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질적 결을 벼리는 일입니다.


치유의 시간은 아무리 잘라내도 통짜입니다. 치유의 시간은 아무리 늘여도 단박입니다. 이런 시간 감수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를 낯설게 여기신다면 그대는 너무 많이 타인입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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